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58

48.선정비를 세운 까닭은?

선정비를 세운 까닭은? 지금도 전국 도처에 남아 있는 각 지방 수령들의 선정비라는 것이 있다. 백성들이 임기를 마치고 떠난 사또의 은덕을 기려 세워준 비석들이다. 내용을 읽어보면 수령이 자비와 성실로 백성들을 다스려 그 공을 잊지 않기 위해서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석들이 상당수가 수령들이 그 고을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세운 비라는 것이 드러났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으나 그런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왜 그런 비를 세운 것일까? 암행어사나 관찰사들이 자신의 공적을 인정케 하기 위한 눈속임 증거물인 것이다. 그러나 정조 때 안의현감 박지원은 퇴직 후 자신의 공덕비를 세운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만일 공덕비를 세울 경우 달려가서 부숴버리겠노라고 알렸다. 탐관오리를 없애기 위해서는 ..

47.부패의 고리, 양반 - 기생 - 아전

부패의 고리, 양반 - 기생 - 아전 관헌들은 어떤 방법으로 돈을 긁어 모았는가. 수령 자신이 직접 돈을 챙길 수는 없는 것이니, 가장 흔한 것은 속칭 '합부인'을 시켜 돈을 받았다. 합부인이란 첩의 높임 말이다. 합은 양반집 대문에 들어서면 양쪽에 있는 문간방을 말한다. 그러므로 대문의 문간방에 둔 첩이 곧 합부인이다. 원래 대궐의 등급은 임금과 왕비가 사용하는 '전', 왕자들의 공간 '당', 대원군과 후궁들의 처소인 '합', 신하들의 업무공간인 '각'으로 나눠지는데 그것이 내려오면서 합부인이 고관들의 첩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관찰사나 수령들에게는 반드시 합부인이 있어 뇌물을 챙기는 일을 주로 맡았다. 한번 암행어사가 오는 날에는 일망타진되어 여러 고을 수령 합부인들이 감옥을 가득 메..

46.앞에서는 우국충정, 돌아서면 탐관오리

앞에서는 우국충정, 돌아서면 탐관오리 조선 최고의 탐관오리 사람은 돈과 권력을 쥐어보면 금방 그 사람의 본성과 됨됨이가 드러난다. 그것이 없을 때는 모두 지엄환 우국투사요 정의의 화신이지만 정작 손에 그러한 것들이 들어오면 금방 변하고 만다. 어제의 인물이 아닌 것이 금방 드러난다. 그래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둘을 떼어 놓고 보면 백발백중 실패한다. 조선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 수령으로 내려가면 금의환향이나 다름없었다. 권럭과 재물이 한꺼번에 생기는 자리였다. 지방 수령은 세금을 거두고 거기서 자기 녹봉도 챙긴다. 서울에서 녹봉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챙기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부패 고리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조선 최고의 탐관오리는 누구일까? 보통 알려진 바로는 동학혁명 ..

45.홍양호의 상소문, 군자들에게 일침

홍양호의 상소문, 군자들에게 일침 1783년 정조 7년에 역시 중국을 다녀온 대사헌 홍양호가 상소를 올렸다. 내용은 박지원의 비판과 비슷하다. "신이 그동안 외람되게도 사명을 띠고 연경과 계주 사이를 왕래해 보았건데 산천과 읍성은 모두 다름이 없지만 의관과 문물은 이미 옛날의 것이 아니었기에 자다가도 한탄스러웠습니다. 신이 일찍이 한 두가지나마 연구한 것이 있기는 해도, 그 땅을 밟아 보니 놀라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삼가 국가의 계책에 도움이 되고 민생의 사용에 절실한 것들을 여섯 가지 조목으로 열거하였으니, 살펴보아주소서. 첯째는 수레 제도입니다. 옛적에 황제씨 시절부터 그 나라의 부를 묻게 되면 수레의 수효를 먼저 답변했다 합니다. 민생의 기구는 수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며 다닐 적에 승차가 있..

44.연암 박지원과 <열하일기>에 대하여......

연암 박지원과 에 대하여...... 연암 박지원의 생애 연암은 1737년(영조 13년) 한양에서 부친 박사유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인 반남 박씨 가(家)는 영조 당시 노론측 일원으로 명문거족이었다. 태어나고 얼마 뒤 집안 사람이 연암의 사주를 중국에 가져가 점쟁이한테 물었는데 그 점쟁이는 " 이 사주는 마강굴에 속하는데 한유와 소식이 바로 이 사주였기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문장을 타고 났지만 까닭 없이 비방을 당한다"고 했다 한다. 짧은 사주풀이지만 엄청난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당송 8대가 중 두 사람인 당나라의 한유와 송나라의 소동파, 그리고 한나라의 위대한 역사가들인 반고와 사마천이 일컬어진다. 사주에서부터 남의 비방을 많이 받는다고 했으니 연암이 나중에..

43.박지원의 <열하일기>, 허공의 메아리

박지원의 , 허공의 메아리 "참으로 좋은 울음 터로다. 한바탕 크게 울만 하구나." 이 말은 정조 때의 실학자였던 박지원이 중국에서 남긴 말이다. 그는 당시 관직도 없는 백년서생이었지만 집안 형님이었던 박명원이 중국 사절단장으로 가게 되자 43세의 나이로 수행을 했다. 그때가 1780년 정조 4년이다. 일행이 국경을 넘어 열흘이 지나 요동벌판에 이르게 되자 산해관까지 천 2백 리 길 사방이 오직 망당한 지평선뿐이니 그걸 보면서 박지원은 그렇게 탄식했다. 울음이란 칠정 중에서 오직 슬퍼서만 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북받쳐도 울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사랑이 그리워도, 욕심이 지나쳐도, 불평하거나 억울할 때도 우는 법인데 생전처음 그렇게 광막한 곳을 바라보고 잇으니 감동이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다. 그는 조선의..

42.황희의 치정 사건에 관한 진실

황희의 치정 사건에 관한 진실 우리나라 사대부 중 가장 존경받는 한 사람이 바로 황희 정승이다. 그는 21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31세에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를 세우려는 사람들과 일체의 연락을 끊었지만 결국 강권에 의해 다시 관직에 나갔다. 그는 1418년 충녕대군(세종)이 장자를 제치고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갔다. 남원에서 5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으니 상당히 오래 고생을 한 셈이다. 그러나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뜻밖에도 그를 불러 올려 중책을 맡겼다. 이후 18년 동안 그는 명제상으로 이름을 날렸고, 오늘날 조선의 청백리로서 맹사성, 퇴계 이황과 더불어 한국의 위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조에서 재상까지 역임하고도 청백리로 거론되는 인물은 18명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단연 첯 번째로..

41.절대로 1등은 하지 마라

애국이란 단어는 없었다 절대로 1등은 하지 마라 조선의 관헌은 전과자? '한국에서 절대 1등은 하면 안 된다. 2등도 위험하고 3등 정도가 그나마 낫다." 석학 한 분의 충고다. "일본에서는 없는 1등도 만들어 내서 국민들이 그를 존중하고 지랑으로 삼는데 한국에서는 누가 좀 올라가면 잡고 흔들어 버린다. 국민들의 체질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와 국가의 중심에는 한상 언제나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도 인물이 해답이다. 미국의 1996년 국방연례보고서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신형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데는 9년이나 걸렸다. 신형 전투기를 개발하는 데는 10년이 걸렸다. 그러나 중대 선임하사관을 양성하는 데는 17년, 대대장은 18년, 대대 주임상사..

40.아무도 믿지 못했던 조선 왕

아무도 믿지 못했던 조선 왕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이것은 일본 무사도의 정신이다. 주군을 기꺼이 배신한다. 이것은 조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정치적인 해석을 떠나서 초기 외국 선교사의 이런 혹평은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기업이건 어떤 조직이건 들어맞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이런 표현이 나왔던 것은 고종의 말년에 왕이 보여주었던 조선인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 때문이다. "조선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 없소." 고종이 남긴 말이다. 가히 한 나라의 국왕의 표현치고는 비참함의 극치라 할 만하다. 역사가들은 조선을 통틀어 가장 허약하고 무능한 왕으로 고종을 꼽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험난한 시대에 가장 고통이 많았던 불행한 왕이 고종이다. 당시 고종은 대원군과 달리 청나라와 일본..

39.애국이란 단어는 없었다

애국이란 단어는 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일본은 수많은 조선 포로를 끌고 갔다. 그 숫자가 일본 측 연구자에 의하면 약 7만 명에 달한다. 남녀는 물론이고 전문 기술자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도공, 의원, 화공, 악공, 목공 등 각 부문별로 골라서 데려갔다. 그중에는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간 사람도 상당수 많았는데, 전쟁 중 일본군이 포로로 잡은 조선군이나 일반 백성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참여한 조선인을 포함하여 전쟁 후반기 남해안 일대에 주둔하면서 왜성을 여러 개 쌓았는데 이때 축성작업에 동원되었던 조선인들이 약 10만에 가까웠다. 그들이 전쟁이 끝나면 처벌을 받아 죽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자 왜군을 따라가는 그런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일본으로 끌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