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44.연암 박지원과 <열하일기>에 대하여......

구름위 2023. 4. 15. 08:58
728x90

연암 박지원과 <열하일기>에 대하여......

 

연암 박지원의 생애

연암은 1737년(영조 13년) 한양에서 부친 박사유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인 반남 박씨 가(家)는 영조 당시 노론측 일원으로 명문거족이었다. 태어나고 얼마 뒤 집안 사람이 연암의 사주를 중국에 가져가 점쟁이한테 물었는데 그 점쟁이는 " 이 사주는 마강굴에 속하는데 한유와 소식이 바로 이 사주였기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문장을 타고 났지만 까닭 없이 비방을 당한다"고 했다 한다. 짧은 사주풀이지만 엄청난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당송 8대가 중 두 사람인 당나라의 한유와 송나라의 소동파, 그리고 한나라의 위대한 역사가들인 반고와 사마천이 일컬어진다. 사주에서부터 남의 비방을 많이 받는다고 했으니 연암이 나중에 <열하일기>의 저자로서 겪어야 했던 '거국적' 비판은 타고났다고 볼 수 있다.

 

연암은 성장한 뒤 자신의 문장에 대한 꿈을 꾸는데, 꿈에 서까래만한 크기의 붓을 다섯 자루를 얻었는데 붓대에는 '붓으로 오악을 누르리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오악이란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지리산, 삼각산 등 우리나라 명산을 말하는 것이니, 결국 나라의 필명을 떨치게 된다는 꿈이다. 이렇게 사주도, 자신의 꿈도 모두 그의 비범한 글재주를 예언하고 있다.

 

연암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산 부친보다 영조 즉위 후 고위직 벼슬을 역임한 조부 박필균의 영향을 받고 자라났다. 열여섯 살에 전주 이씨인 부인과 결혼하는데, 장인 이보천과 그 아우인 처숙 이양천은 연암의 학문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이보천은 사마천의 글을 통해 문장 짖는 법을 가르쳤다. 또한 손아래 처남 이재생은 평생의 지기이자 글벗이 되었다. 결혼을 해서 아내뿐 아니라 스승들과 친구를 얻었으니, 연암은 장가 하나는 잘 든 셈이었다.

 

20세를 전후하여 연암은 절친한 친구들과 절간을 찿아다니면서 과거시험 준비에 전념한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며칠씩이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등 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데, 이는 당시 비정하고 혼탁한 정치 현실과 양반사회의 타락상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면서 자신의 장래 거취 문제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기 때문인 듯하다. 자신이 과거시험을 통해 진입하려고 하는 세계가 너무 부정적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당시 과거시험제도의 형편없는 모습도 그로 하여금 시험장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조선 후기가 되면 과거 응시자가 수만 명에 이르게 되는데 그렇다보니 시험관리가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연암의 친구가 과거에 급제하자 축하는 커녕 이제는 그런 난장판에 끼지 않아도 된 것만을 축하한다는 식으로 편지를 보낸적도 있다. 연암은 과거시험의 혼탁한 모습에 냉소적으로 보았다. 당시의 과거시험은 요즘 사극 티비에서 보는 것처럼 영화당 뜰에서 질서정연하게 본 것이 아니라 연암이 묘사한 대로 난장판이었다.

 

연암은 33세 되던 1770년 생원, 진사를 뽑는 시험인 감시에서 1등으로 뽑힌다. 방이 붙던 날 저녁 영조는 침전으로 연암을 불렀고, 도승지로 하여금 연암의 답안지를 읽게 하고는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어가며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 해 본 시험인 문과를 포기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자신의 정통성에 항상 열등감을 갖고 있던 영조는 말년에는 노론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갖혀 죽게 하는 등 혼탁한 파당정국이 그런 결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각 정치세력들은 명문가 출신인데다 왕의 총애까지 받고 있는 연암을 어떻게 해서라도 과거에 합격시켜 자신들의 당파로 끌여들이려 한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연암은 번번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시험장에 나갔을 때는 답안지를 제출하지도 않고 퇴장하기도 했다. 한번은 답안지에 소나무와 괴석을 그리고 나와 세상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렇게 연암은 철저하게 벼슬길을 외면하려 하였다.

 

이후 연암은 한양 전의감동의 한 셋집에 혼자 살면서 많은 인사들과의 사귐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심화해 나갔다. 특히 당시 중국을 다녀온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등 실학자들과 교제하며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개탄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발전상을 연구하면서 중국 여행의 꿈을 키워갔다.

 

1778년 연암은 돌연 한양 생활을 청산하고 황해도 금천의 연암동에 은둔한다. 자신의 호로도 사용하게 되는 이 연암동으로 간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정조 즉위 직후 사도세자 처벌에 찬성하고 정조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던 인물들인 노론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정조의 즉위에 공이 큰 홍국영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해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는데, 연암은 홍국영 일파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았으므로 위기를 감지한 친구들이 그를 피신시킨 것이다. 연암동은 송도(개경)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외진 골짜기였다. 동구 좌측의 절벽에 제비들이 둥지를 틀고 있어 이를 '제비바위'라는 뜻의 '연암(燕巖)'이라 불렀다.

 

이 일대는 일찍이 고려 말에 목은 이색, 익제 이재현 등의 선비들이 살던 곳으로, 부근에는 익제의 묘와 서원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러나 연암이 이곳을 찿았을 당시에는 황폐해져 이웃집이라고 해야 가난한 숯쟁이 집 서넛이 있을 뿐이고, 호랑이와 사슴이 출몰하는 대단히 외진 곳이었다. 연암은 여기에다 초가삼간을 짓고 돌밭을 일구어 뽕나무도 심고 송도를 오가며 청년 문사들을 지도하는 한편 사색하고 집필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인 불안으로 인한 은둔은 오래가지 않았다. 1780년 권력 10년 여만에 당대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던 홍국영이 마침내 실각하자 연암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로 돌아오자 행운이 연암을 기다리고 있었다. 팔촌 형이자 영조의 사위인 금성위 박명원이 청나라 견륭제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하여 특별사행의 정사로 임명된 것이다. 연암은 박명원의 권유에 따라 정사의 개인 수행원인 자제군관 자격으로 숙원이던 중국 여행을 하기로 한다. 당시에는 사신이 아들이나 동생을 개인 수행원으로 삼아 중국으로 데려가 견문을 넓히고 문물을 익히게 하였다. 이들은 편의상 군인 신분의 수행원으로 분류하여 자제군관이라 불렀다.

 

사절단 일행은 6월 하순에 압록강을 건너 8월 초 북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절단에게 당시 건륭제가 여름별장인 '열하(북경 서북방 약 200킬로미터 만리장성 이북 황제 여름 피서지)'에 머물고 있어 축하행사가 그곳에서 진행되니 참석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연암은 이렇게 해서 조선 사신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열하를 여행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는 열하에서 천하의 형국을 파악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청나라 학자들을 만나 역사, 정치, 음악, 천문, 풍속 등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필답을 나누면서 안목을 키웠다.

 

열하에서의 행사에 참석한 조선 사절단은 북경을 거쳐 그해 10월 말에 한양에  도착했다. 귀국 즉시 연암은 중국 여행중에 써 두었던 방대한 원고를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해 약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열하일기>라는 제목의 연행록을 집필한다. 그러나 이 <열하일기>는 필자 자신이 완성본을 발표하기도 전에 일부 필사본이 유출되어 널리 유포되면서 당시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그의 명성을 높혀주었다. 반면 그의 자유로운 문체를 문제 삼는 인사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나중에는 임금인 정조도 그에게 반성문을 요구했던 '문체반정' 사건이 발생되기도 하였다.

 

1786년 쉰 살이 된 연암은 음보(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는 것)로 선공감 감역(토목.건축직 종9품)에 임명되어 벼슬을 시작한다. 벼슬에 뜻이 있어서라기보다 그 또한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연암은 경남 안의 현감, 충청도 면천 군수, 강원도 양양 부사 등의 지방 수령을 역임했는데 재임 중에 선정을 베풀고 자신의 실학적 소양을 두루 시험해 보기도 했다.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서울 북촌 재동에 '계산초당'이라는 집을 짓고 살다가 1805년 향년 69세로 서거했다. 장손인 박규수가 후일 고종 때 출세한 덕분에 후일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받았다.

 

 

 --------------------------------------------------------------------------------------------------------------------

 

 

 

* <열하일기> 내용 요약 : 발췌록

 

연암은 압록강변의 의주 통군정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임진왜란시 의주까지 피난온 선조를 생각하며 시름에 잠긴다. 비가 내려 홍수진 압록강물을 바라보며 통한의 세월을 탄식하기도 하였다. 겨우 강을 건너 야영을 하루 하고서 사흘만에 국경선인 책문에 도착하여 또 하루밤을 보내게 된다. 이동 중 대열에서 같이 말을 타고 가는 정진사를 연암은 좋은 대상으로 삼아 모든 질문에 답변을 조선의 양반에 비유하여 앞뒤가 막힌 사대부를 조롱하고 있다.

 

흙벽돌로 반듯하고 깨끗한 중국 건축물을 보면서 흙벽돌로 지은 중국 건축과 조선의 건축을 비교하고 축성술도 비교한다. 그들의 흙벽돌은 무게도 가볍고 생산하기도 쉽다. 재료를 구하기도 쉽고 제작도 쉬우며 돌보다 가볍고 운반도 편리하여 많은 공력을 들이지 않고도 집과 축성이 가능한 그들의 흙벽돌의 찬사를 서로 토론하기도 하지만 정진사는 관심도 없다. 연암은 그를 눈뜬 장님에 비유하고 있다.

 

연암은 청국을 되눔이라고 무시하고 멸시하는 조선의 사대부를 은근히 비난하고 있다. 이동 중 주변의 풍광에 대한 소감을 읊으며 조선의 산세와 비교한다.  봉황산성이 안시성이라는 데 연암은 산성의 넓이가 고구려 양만춘 장군이 당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치기에는 내부가 좁아  안시성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수일이 걸려 마운령과 청석령을 넘어 요동벌에 들어선 연암은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요동벌을 보면서 "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이 한번 울만 하구나!" 라면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연암은 정진사의 멍청한 우문우답에 울음에 대한 이론을 편다.

 

" 희노애락은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지정 즉, 지극한 상태에 이르면 웃고 우는 것의 구분조차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라고 하면서 요동벌판의 광대한 지경을 접하고 마음속 지극한 감정을 울음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 태중에 있는 아기" 이는 연암 자신을 가리키며 답답하고 부조리하고 낙후된 조선사회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말이다.  그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터져 나오듯이, 오늘 이 넓은 요동에 와보니 마음과 몸이 지극한 해방감을 느끼며 눈물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요동 백탑기>를 쓴 연암은 " 요동은 왼편에 창해를 끼고 앞으로는 벌판이 열려서 아무런 거칠 것 없이 천리가 아득히 틔었는데, 이제 백탑이 그 벌판의 3분지 1을 차지하였다. 탑 꼭대기에는 구리로 만든 북세개가 놓여 있고 층마다 처마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는데, 그 크기는 물통만하고 바람이 일 때마다 풍경이 울려서 그 소리가 멀리 요동벌을 진동한다." 고 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이나기 직전인 1636년 봄. 조선은 심양에 사신을 파견한다.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후금을 이어받은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면서 즉위식 자리였다. 즉 이가 바로 청태종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는 그를 홍태시 즉 '붉고 큰 돼지'라고 부르며 경멸했는데 오랑캐였기 때문이다. 이 행사에 축하사절로 참석한 조선의 사신은 나덕현과 이곽이란 사람이었다. 행사 순서에 따라 인근 각국에서 온 사신들이 황제에게 배례를 하게 되었는데 조선 사신들만 몸을 숙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군졸들이 달려들어 강제로 허리와 목을 구부리게 하였으나 이들은 끝까지 거부하자 군사들이 무자비하게 구타를 해서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들은 청나라  황제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불사이군의 유교 윤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청태종은 "이는 조선 국왕이 우리 청나라를 원수로 삼고자 나로 하여금 이 사신들을 죽이게 하여 그 구실을 만드려는 수작이다. 거기에 내가 넘어갈 내가 아니다"라며 그들을 석방하여 보내면서 조선왕을 꾸짖고 왕세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었고 이를 조선이 거부하자 청태종은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이야기다.

 

 

계속 내리는 비는 강물이 불어 가는 길을 더디게 하고 있으며 수일간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날짜를 맞추지 못할까봐서 구수회의도 하고 저녁에는 민가에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연암은 여행도중 중국인들의 생활을 두루 살피면서 저녁이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아무곳이나 들러 그들의 실상을 살폈다. 이동중에는 마상에서 졸기도 하고 옆 정진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말을 끄는 종과도 우스게 소리도 잘 하였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상에 잠기기도 하고 심양에서 소현세자의 추억도 생각하며 울분을 삼키기도 하였다. 비가 내리는 요동벌판을 수도 없는 강을 건너고 산해관을 거쳐 중국땅에 들어가면서 거대한 중국의 성벽과 문물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조선의 선비들이 동쪽의 반도에서 허례허식만 추구하고 대륙의 선진문물에 배타적인 양반들을 은유적으로 비꼬집는 글을 쓰고 있다.

 

"비록 지금은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하고 있지만 중국의 성곽과 건물, 인민들이 예와 같이 남아 있고, 정덕, 이용, 후생의 도구도 파괴된 것이 없으며, 역대 중국의 저명한 문벌과 성리학도 사라지지 않았고, 한, 당, 송, 명의 아름다운 법률제도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 청나라가 비록 오랑캐지만 역대 중국의 제도가 자기들에게 이로움을 알고 이를 빼앗아 마치 본시부터 자기들이 지녔던 것 같이 하고 있다.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인민들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서 본받아야 되는데, 하물며 한, 당, 송, 명 여러 나라의 고유한 것임에랴" 고 하면서 조선사회의 주류인 상사(上士), 중사(中士)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지금의 청나라를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청나라가 오랑캐니,북벌을 해야 한다느니 따위의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백성을 위해 청나라를 철저히 벤치마킹하자는 이야기였다.

 

연행팀은 요동벌을 지나 우뚝솟은 의무려산의 자태에 감탄하면서 북진묘에 당도하였다. 북진묘는 의무려산의 산신령을 모시는 도교 사원이다. 연암도 이곳에 들러 두루 살피면서 북진묘를 보고 " 높이는 너덧 길이나 되고 그 구조의 정교함이나 조각의 세밀함이 거의 사람의 힘으로 미치지 못할 만큼 잘 되었다. 정전의 앞뒤에는 역대의 큰 비석이 나란히 서서 마치 파이랑 같으며, 거기에 새긴 글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복을 기원한 말들이다."고 했다. 의무려산은 요동벌이 끝나는 곳에 우뚝 솟아 고대 순임금 시절부터 청나라에 이르기 까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전국 열두 명산 가운데 하나이다.

 

북진 시내는 명나라 장수 이성량의 폐루이다. 이성량은 본래 조선사람으로 명나라 말기 20년 동안이나 요동.요서 지역의 군벌로 군림했다. 임진왜란때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온 이여송은 그의 아들이다. 이성량은 명나라 200년 역사상 무공이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만주 전역의 군사권 뿐만 아니라 경제권도 쥐고 있었는데, 모든 교역은 이성량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고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 당시 만주 동편에서는 만주족 누르하치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누르하치의 세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이성량이 누르하치를 토벌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조선에 임진왜란이 터져 명 조정의 지시로 이성량은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조선에 투입하게 되자, 누르하치는 힘의 공백을 틈타 세력을 키워 쇠퇴기에 접어든 명나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결국에는 아들 홍타이지에 의해 청나라를 세우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이래저래 일본은 우리 역사에 항상 가장 나쁜 대상으로 자리메김하고 있다. 역사에 가정은 금물이지만 당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청의 발흥은 어렵지 않았을까? 

 

산해관으로 가는 길목에 대릉하라는 강이 있고 근방에 금주가 있다. 고조선의 발흥지가 바로 이곳 대릉하 부근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연암의 <열하일기>에는 '관제묘기'에 대해서 나오는데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관우는 죽은 뒤 중국인들이 신의 반열에 올려 전국에 걸쳐 사당이 있다. 연암은 이 사당을 보고 "묘당이 우장 화려해 복전과 중각에 금빛.푸른빛이 휘황찬란하다. 그 정전에는 관공의 소상을 모셨고 동쪽에는 장비, 서쪽에는 조자룡을 배향했으며, 또 촉의 장군 엄안의 굴복하지 않은 상을 설치했다. 뜰가운데는 튼 비석이 몇 개 서 있는데 모두 사당의 창건과 증수한 사실의 시말을 적은 것이다. 사당속에는 노는 건달 수천 명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무슨 놀이터 같다." 이러한 관제묘는 마오쩌뚱 시절 문화대혁명기에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민간에는 아직도 남아 있다.

 

영원성.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제압한 청나라는 중원정벌의 야망을 품고 명나라 정벌에 나선다. 명군과 청군의 결전은 산해관 밖 4개 성에서 벌어졌는데, 금주, 행산, 탑산, 송산이다. 지금 심양-북경간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는 지역이다. 명나라 장수 홍승주는 이곳 영원성에서 대패하게 되는데 연암이 이곳을 지날 당시는 이미 전쟁이 끝난 지 140년이 지난 시기이다. 마을이 황량하였던 모양이다. "송산에서 행산, 탑산까지의 100여 리 사이에는 동리나 점포가 있기는 하나 가난하고 쓸쓸해 그들은 조금도 붙박이 생활을 할 의사가 없다. 아, 아, 이곳이 그 옛날 명과 청이 싸워 피 흘리던 마당이다. 이제 이미 10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 채 숨 돌리는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그당시 용과 범들의 싸움이 격렬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고 했으며 마지막에는 건륭제가 지은 글을 소개하고 있다.

 

" 이 싸움에서 명나라 병사 53,700명을 죽이고 말 7,400필, 낙타 60여 필, 갑옷과 투구 9,300벌을 노획했다. 행산의 남쪽으로부터 탑산에 이르기까지 바다로 뛰어들어가 죽은 자도 심히 많아서 시체가 마치 물오리와 따오기처럼 물에 둥둥 떴으나 우리 군사는 잘못해 다친자가 겨우 여덟 뿐, 그 나머지는 코피도 흘리지 않았다."

 

청나라의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나 명나라는 이곳 4성 전투에세 결정적인 피해를 입고 남으로 물러난다. 이때 심양에 볼모로 잡혀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종군시켜 청군의 막강함과 명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청은 조선군도 대려와서 전투에 참가시켰는데 바로 이시영 장군이 송산전투에 참가했다. 조선군은 수백 년간 상국으로 모시던 명나라군에 총칼을 겨누어야 했으니 입장이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연암의 <열하일기>의 관련 대목을 보자.

 

" 황명 숭정 11년(1638년) 조선 장수 이시영은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청에 들어가니 청인은 시영을 협박해 앞장을 서 명의 도독 조대수와 송산에서 싸우게 했다. 조선군은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서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대에 명하기를 청병의 머리 하나에는 은 50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100냥을 준다고 했다.

 

조선 군사 중에 경상도 성주 사람으로 이사룡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차마 명군에게 총을 쏠 수가 없어 공중으로 공포만 쏘아 명군을 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는 본국 조선의 속마음을 밝히려 함이었다. 이를 발견한 청의 군사가 사룡의 목을 베어 진중에 높이 내 걸었다. 명나라 군사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크게 울었고 조대수는 깃발에 큰 글씨로 "대명충신 조선의사"라 써서 시영의 군사를 선동했다. 지금 충주 옥천에 충렬사가 있으니 곧 사룡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나는 송산을 지나면서 글을 지어 사룡의 혼을 위로했다." 

 

이사룡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청나라 장수에게 욕을 퍼부었고 웃으면서 죽었다고 한다. 청태종도 이사룡을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그의 주검을 운구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조선 왕 인조는 지나는 길에 감사에게 예를 표하게 하고 고향에 안장하게 하였다. 그 뒤 숙종 때는 고향 사람들이 사당을 지었고, 정조 때는 성주목사에 증직되었으며 정려를 지어 충렬사란 현판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산해관'은 '천하제일관'으로 연암은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산해관은 북쪽의 각산 정상에서 장성이 바다쪽으로 흘러내려 가다가 거대한 관문과 관성으로 뭉쳐진 곳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남쪽 바닷가에는 만리장성이 발해만에 발을 담그고 멈춰서는 '노룡두'가 있다.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관문이라 해서 산해관이라 했다. 만리장성은 이곳 발해만에서 시작해서 서쪽 끝인 감숙성의 가욕관까지 만 리가 넘도록 뻗어 있는데, 그 중간에 설치된 여러 관문들 가운데 이 산해관이 가장 웅장하기에 관문은 '천하제일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해관은 관성의 둘레가 10리나 되고 성문이 넷이다. 네 성문 중 천하제일관에 설치된 진동문은 벽돌로 쌓아 올린 12미터 높이의 거대한 성벽 위에 다시 13미터의 2층 성루로 이루어져 있고, 이 성루 몸통에는 3면에 모두 68개 총구가 뚫려 있어 문 자체가 하나의 요새처럼 삼엄해 보였다. 문 좌우의 성벽은 말 다섯 필이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중간 중간의 포대에는 청에 대항해 사용하던 신위대장군이라는 이름의 홍이대포가 아직 남아 있다. 관 바깥에는 해자가 접근을 가로막고 있으니 아무리 청의 기마병이 철기라 한들 이곳에서 말발굽을 멈출수 밖에 없었다.

 

산해관은 만주 등 동북 지역 유목민족의 공격으로 부터 중원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요, 동시에 요동지역으로 뻗어나가는 전진기지의 성격을 지닌다. 처음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전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나라 진시황제였다. 그러나 12,700리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한 것은 명나라이다. 명태조 주원장은 건국 이후 대장군 '서달'을 시켜 북경 북쪽에 몽고족을 막기 위하여 거용관을 세운뒤 1381년 이곳에 산해관을 쌓았다.

 

1644년 명나라 말기, 세상의 어지러운 틈을 타서 '이자성'이 농민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해 이자성은 백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함락시킨다. 명의 마지막 황제 '승정제'는 자금성 뒷산 경산에서 목메 자살한다. 그는 어린 아이들은 변장시켜 도망가게 하고, 황후가 목을 매 자결하는 것을 지켜본뒤, 방년 17세의 공주를 자신이 직접 칼로 찔러 죽인 뒤 자신도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망해가는 명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시 산해관 총병이었던 '오삼계' 뿐이었다. '오삼계'는 황제가 자결하고 '이자성'이 대권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북경으로 진격하고 싶었으나 코 앞까지 와 있는 청나라 대군 때문에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이자성'은 북경에 있던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을 통해 '오삼계'에게 항복을 권유한다.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오삼계는 항복할 결심을 하게 되나 그의 결심을 바꾸는 계기가 된 정보를 듣게 된다. 바로 북경에 두고 온 그의 애첩 '진원원'을 이자성의 부하 장수인 '유종민'이라는 자가 가로챘다는 것이다. 분노가 치민 오삼계는 마음을 바꿔 이자성과 일전을 준비하고, 이에 이자성은 선수를 치기 위하여 오양과 진원원을 앞세우고 산해관으로 북상한다. 그러자 오삼계는 '난신적자' 이자성을 치기 위해서 청나라 군대와 손을 잡고 청군에게 산해관의 성문을 열자 청나라 철기군은 노도같이 달려가 이자성의 주력부대를 격멸하고 북경에 무혈 입성하게 된다. 이자성은 명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때를 잘 못 만나 그 꿈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지고 말았던 불운한 사람이었다.

 

연암은 " 진나라 서달 장군이 이 관을 쌓아 되눔을 막고자 하였으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 적을 맞아 들이기에 급급하였으니, 천하가 평온할 때 부질없이 지나는 상인과 나그네의 비웃음을 사고만 있으매 내 이 관에 대해 다시 무어라 족히 말할 것이 있으리오" 라고 했다.

 

연행팀은 만리장성, 강녀묘, 노룡두, 백이숙제 사당터를 둘러보고 북경에 도착한다. 당시 사신들이 묵던 자리는 없어지고 현재는 아파트가 건립중이며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나 천주학과 서양문물을 배우던 남당 천주교회를 방문한다. 연암은 남당 천주교회의 벽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 여자가 무릎에 5, 6세 된 어린애를 앉혀두었는데, 어린애가 병든 얼굴로 흘겨서 보니 그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옆에는 시중꾼 5, 6명이 병난 아이를 굽어보고 있는데, 참흑해서 머리를 돌리고 있는 자도 있다. 좌우 바람벽 위에는 구름이 덩이덩이 쌓여 한여름의 대낮풍경 같기도 하고, 비가 갓 갠 바다 위 같기도 하고, 산골에 날이 새는 듯 구름이 끝없이 뭉개뭉개 피어오르고, 수없는 구름 꽃봉오리가 첯발에 비치어 무지개가 뜨고, 멀리 바라보이는 데는 까마득 하고 깊숙해 끝 간 곳이 없는..."

 

색상이 다채롭고, 사실적이며, 원근감이 구사된 서양 종교화를 처음 보는 연암의 놀란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천장을 바라보다 모두 깜짝 놀라는데, 아기 천사들이 하늘을 나는 그림이었다. 연암 왈,

 

" 천장을 우러러보니 수없는 어린애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살결을 만지면 따뜻할 것 같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살이 포동포동하다.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래지도록 놀라 어쩔바를 모르며 손을 벌리고서 떨어지면 받을 듯이 고개를 젖혔다." 

 

그 후 남당은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불타버린 후 1904년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재건되었으나 연암이 본 그림들은 다 소실되어 없어졌다.

 

북경 천안문 광장 남쪽, 정양문과 선무문 바깥쪽의 다섯 거리를 유리창(琉璃廠)이라고 한다. 동서로 길게 뻗은 이 거리에는 서적, 골동품, 지필묵 등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연암은 이곳을 둘러보며 갖가지 진귀한 물건을 구경했다. 연암은 이미 15년 전에 이곳을 다녀간 담헌 홍대용의 여행기를 보았으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담헌이 이곳에서 만난 청나라 선비들과 교류를 통해 우정을 쌓고 많은 신지식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암은 특히 의학 서적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산속에 홀로 살아가는 동안 민간 처방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연암은 이곳에서 허준이 쓴 <동의보감> 필사본을 발견한다. 그 책이 중국까지 유행해 중국인의 손에 의해 발간된 것이었다. 연암은 그 책이 탐이나서 책값을 물어보았으나 다섯냥이 없어서 아쉽게 그냥 발길을 돌린다.

 

북경에 도착한 지 닷새 째 되는날인 8월 5일이 되자, 갑자기 열하로 떠나게 된다. 예부에 표문을 바치고 기다리던 중, 예부에서 황제에게 문의를 늦게 하는 바람에 황제가 진노하여 조선인 사신을 당장 열하의 피서궁전으로 보내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연행팀은 비상회의가 소집되고 만수절인 8월 13일이지만 9일까지는 열하에 도착해야 한다. 250명 인원을 모두 데리고 갈 수는 없는지라 열하까지 700리 길을 5일만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었다. 인원은 정사,부사, 서장관의 삼사와 역관 셋, 비장 넷, 하인 64명 등 74명으로 말은 55필로 줄였다. 나머지 인원은 그대로 잔류하기로 한다. 

 

이제 동생 내원이와 하인 장복이를 북경에 남겨두고 떠나기 때문에 생이별을 해야하는 연암의 마음은 슬픔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연암은 이별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 하면서 가장 슬픈 이별은 물가에서 하는 이별이 가장 슬픈 이별이라고 했다. 연암은 먼저 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누님을 그리며 지은 묘비 내용도 강에서 상여를 실은 배가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통곡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연암은 이렇게 '가장 슬픈 이별'과 '가장 슬픈 이별의 장소'를 논하고 나서는 이별에 대한 사유를 끝없이 확장해 나간다. 그의 기억은 병자호란 후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소현세자와 청나라를 오가던 조선 사신들의 만남과 이별에 다다른다. 연암의 '슬픈 이별'에 대한 글이다.

 

"아아, 슬프다! 그 옛날 소현세자께옵서 심양의 저택에 계실 적에, 당시 신하들이 머물다가 떠날 때나, 사신들이 왔다가 갈 적마다 그 심회 어떠하였을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로서는 죽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에 속하거늘, 누구는 머물고 누구는 떠나며, 누구는 참고 견디며 누구는 버려둔단 말인가? 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통곡해마지 않을 때이다. 아아, 슬프다! 내 비록 이와 벼룩과 같은 미천한 신민이건만 백 년이 지난 오늘에 그저 한번 생각해보아도 오히려 정신이 연기처럼 싸늘하게 사그라지고 뼈가 저리어 부러질것 같거늘, 하물며 그 당시 자리에서 일어서서 절하고 하직할 즈음이리요. 하지만 그 당시는 두려운 제약이 한이 없었으며, 듣고 보는 귀와 눈이 많아 눈물을 참고 소리를 머금으며, 얼굴엔 슬픈 표정을 드러내지 못할 때이리요...."

 

연암은 열하로 가는 도중 많은 강을 건너는 등 강행군을 하면서 극도로 피로한 가운데 이동간 느낌을 <일야구도하기>를 통해서 잘 나타내고 있다. 연암의 문학적 잠재능력을 충분히 발휘한 대목들이다.

 

"강물은 두 산에서 나와 사납게 흘러간다.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결, 구슬피 원망하듯한 여울은 내달리고 부딪치고 뒤엎어지며 울부짖고 으르르렁대고 소리 지르니, 언제나 만리장성마저 꺽어 무너뜨릴 기세가 있다. 만 대의 전차와 만 마리의 말, 만 대의 대포와 만 개의 북으로도 그 무너질 듯 압도하는 소리를 비유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모래 위에는 큰 바위가 우뚝한이 저만치 떨어져 있고, 강가 제방엔 버드나무가 어두컴컴 흐릿해 마치도 물밑에 있던 물귀신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할 것만 같고, 양 옆에서는 교룡과 이무기가 확 붙들어 나꿔채려는 듯하다. 어떤이는 이곳이 옛 싸움터인지라 황하가 이렇듯이 운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듣는 소리가 다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단지 마음속에 생각하는 바를 펼쳐놓고서 귀가 소리를 만들기 때문일 뿐이다. 이제 나는 한밤중에 한 줄기 황하를 아홉번 건넜다." 

 

연암 일행은 동북 방향으로 길을 재촉하여 드디어 '고북구'라 불리는 만리장성 관문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산해관까지는 700리 길이요, 서쪽으로 거용관에 이르는 거리는 280리 길이다. 고북구는 산해관과 거용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곳이다. 예로부터 몽고군이 중원으로 쳐들어 올 때는 이곳 고북구 관문을 통하여 침공하였기에 그 중요성으로 세 겹으로 된 관문이 설치되어 있다. 연암은 관문 입구 성벽 벽돌에 칼로 글씨를 새기고 먹물을 입힌다. "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 라고 새겼다. 연암은 이곳이 역대로 치열한 전장터임을  떠올리며 쓴 글이 바로 <야출고북구기>이다.  이 글은 구한말 1900년<연암집>을 발간했던 창강 김택영씨가 '조선 5천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라고 격찬한바 있다.

 

청의 강희제는 열하지역에 피서산장을 건설했다. 그는 몽고의 침공을 항상 두려워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침공을 사전 예방하고 황제가 친히 북경 근방 요지에 기거함으로써 주변 소수민족의 침공 의도를 사전 분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열하는 티베트의 라마 사원이 즐비하고 라마승들이 대거 기거하고 있으며 하나의 대도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북경의 황궁생활은 규정과 관습이 복잡하여 황제라도 마음대로 무엇이던지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곳 피서산장에서는 그러한 격식과 관습을 벗어나 자유스럽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열하에 도착한 연암은 열하에 가까워 지자 사방에서 조공행열이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연암은 이러한 장관을 <만국진공기>로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열하는 강희제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강희제는 통일된 제국을 물려받았으나 그기에 만족하지 않고 남방의 오삼계 난을 8년만에 평정하고, 북방으로 눈을 돌려 만리장성밖 그들의 조상들이 일어난 땅에 대규모 '목란위장'이라는 목장을 조성하여 매년 가을이면 왕공 대신과 군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대규모 포위사냥에 나셨다. 그것은 군사기동훈련이며 용맹하고 강인한 황제상을 보여주며, 주변 북방 변경의 부족들에게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황제는 열하에 대규모 황궁을 세우게 하였는데, 그후 90년 동안 계속 증축되고 확장되었다. 건륭제 때에는 전체 넓이가 564만 평방미터에, 둘레를 감싼 성벽의 둘레가 10킬로미터에 달하였다. 전체가 궁궐, 호수, 초원, 산간의 네 지역으로 나뉘어 마치 거대한 중국을 수축해 놓은 모습으로 변했다.

 

1793년 영국의 사절단이 피서산장에 도착했다. 연암이 다녀간 지도 13년의 세월이 흐른뒤, 건륭제 나이 83세 때의 일이다. 황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환영했다. 영국 사절단은 노쇠한 황제에게 여러가지 외교적 제안을 했는데, 영국 사신 북경 상주, 세 무역항 개방, 영국 거주지 제공, 영국화물 감세 혜택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런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건륭제가 죽고 13년이 지난후 청나라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에게 이리저리 물어 뜯기는 형세가 되었다. 노쇠한 황제는 영국 사신들에게 고함치며 오만을 피웠지만, 이미 청나라는 건륭제 이후 이미 몰락의 길을 내딛고 있었던 것이다. 영원한 번영이란 없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연행팀은 황제의 명으로 당시 그곳에 와 있던 티베트의 법왕 '반선'라마를 만나는 '반선알현'소동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인 사절이 불교의 법왕을 만난다는 자체가 문제였으나, 황제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알현하는 사태를 맞게 되고 선물로 받은 불상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이 볼 만하다.

 

연암이 중국을 방문할 무렵은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있었다.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여 봉건체제를 무너뜨리던 시기였다. 연암이 이러한 세계적인 변화를 일지는 못하였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조선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는 있었다. 청년기에 연암은 홍대용, 박제가를 비롯한 실학자들과 교우하면서 북학자로 변모했다. 정조 당시 조선은 문예부흥기였고, 문맹률이나 행정서비스 면에서 선진국이었다는 분석도 있으나, 사회는 닫혀 있었고 지식인은 창백한 유교 이데올로기에 도취되어 있어 국가와 백성은 빈곤하고 후진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이를 간파하 연암은 중국을 배워 나라가 강하고 백성들이 부유해야 된다고 믿었다.

 

정조는 개혁군주였으나 그 개혁이 기존세력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실학자들을 등용하고 그들에게 경세론을 듣기는 했으나 그 이론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노론 총수 집안 출신으로 노론들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영조에게 간하자 혜경궁 홍씨는 친정 집안을 위하여 자신의 남편을 버리는 동시에 자신의 아들 정조를 후일 임금에 등극시키는 밀약(?)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조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그녀의 친정 집안이 역적이 아니라는 항변이 주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도세자 죽음후에 어렵게 노론측의 동의하에 자신의 아들을 임금에 앉힐 수 있었던 시기였다.

 

정조는 즉위 후 측근 홍국영을 등용하여 사도세자 죽음과 관련된 노론인 어머니 친정 집안을 모조리 처단하는 등 관련 세력을 타도하고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대왕대비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불효스런 심경, 노론 잔존세력들의 반대, 정조를 후원할 수 있는 지지세력 기반의 약화 등으로 단호한 개혁을 시행할 수가 없었으며 그런만큼 왕권은 약화되어 있었다. 1800년 정조가 의문시 되는 죽음(독살?) 이후 조선은 다시 반동으로 되돌아가 개혁의 싹은 짓밟혔으며, 숙종대 이후에는 사색당파의 싸움과 외척의 세도정치가 본격화 되면서 망국의 빠른 길을 걷고 있었다. 5년후인 1805년 연암은 세상을 떠났지만 열강 제국들은 식민지 개척에 집중하고 있었고, 일본은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부국강병의 발돋움하던 시기였으나, 조선은 정치.경제.사회적 불안을 겪으면서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연암이 죽은 지 꼭 100년 후, 1905년 조선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면서 결국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

 

           

연암은 <열하일기>전편에 유머와 해학이 가득찬 이야기로 웃음을 자아내고 있는데,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나, 예리한 국제정세 분석이라던가, 심오한 철학적 사유 등이 풍부하였고 현대의 연행팀 구성원들이 자아내는 유머와 해학이 겻들여져 있어 재미도 있었고, 구석구석 말랑말랑한 인생론도  연결되어 있어 이 책은 읽기에도 좋았고 느낌도 심오하였다. 누구나 한번쯤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유익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