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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양자강 돌파와 신중국의 수립)

삼대 전역의 패배는 그야말로 결정타였습니다. 해방군은 기동성과 화력에서 절대 열세였음에도, 장개석의 "절대사수"명령에다 내부의 첩자들로 인해 퇴로가 차단되어 국민당군은 조직적인 철수를 하지 못한채 대부분이 포위섬멸되었고 양자강 이남으로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극소수의 부대들과 패잔병들뿐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사실상 승패는 결정납니다. 국민당군은 200만명을 상실하여 양자강 이북의 모든 영역에서 소멸됩니다. 뿌리부터 와해직전에 놓이죠. 남은 병력은 서안과 사천에 주둔한 호종남의 30만명과 화중과 화남에 주둔한 백숭희군 60만명 등 100만정도에 불과했고 상해에서 신강까지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해방군은 대량의 포로를 고스란히 내편으로 편입시킴으로서 400만명으로 늘어나 숫적으로 완전히 압도합니다. 또한 많은 ..

21화(물건너간 대만침공과 현재까지)

1949년말이 되면 국민당군은 사실상 패망직전까지 몰리게 됩니다. 약 100만의 잔존병력으로 대만, 해남도 등 일부 도서지역만을 간신히 장악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목숨만 부지한 패잔병들로 전차, 야포 등 중화기는 고사하고 소총 한정을 2, 3명이 나눠 써야할 지경이었습니다.(애너미 앳더 게이트도 아니고..--;) 1~2년만에 완전히 쫄딱 망한 것이죠. 해, 공군만은 그런대로 건재했지만 49년 2월 25일에는 7200톤급의 중국해군 최강 중순양함인 중경호가 배신 때리고 북상하다가 격침당해 엄청난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전쟁끝나고 영국정부가 우호차원에서 중국해군에게 선물로 준 중순양함 "중경호"(원이름 : "Aurora") 게다가 국민당 최대의 돈줄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던 미국조차도 중국에게 완전히 등을 돌립..

국공내전기간 북한의 개입과 지원

국공내전에서 만주는 양측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곳이었고 결국 만주에서의 승패가 전쟁 전체의 승부를 갈랐다, 라고 평합니다. 당시 만주에는 30년대이후 일본이 건설한 막대한 공업시설이 있었고 만주의 공업력, 전력, 철도는 중국 전체를 합한 것의 몇배에 달했습니다.(43년 기준으로 전체 석탄생산량의 49.5%, 제철은 87.5%, 강재 93%, 시멘트 66%, 전력 72%, 철도의 50%) 모택동은 45년 6월 11일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동북이 우리의 손아귀에 있다면 우리의 승리는 토대를 확보한 셈이고, 우리의 승리는 결정된 것이다."라고 연설하였고, 장개석 역시 "동북이 없으면 중국도 없다", "우리가 동북을 탈취하지 않으면 중국이 근대 산업화된 국가로 발전하기 힘들다"라고 말합니다. 따라..

3일간의 혈전, 금문도 전투

금문도 전투는 국공내전 말기인 1949년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3일에 걸쳐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국민당군 약 4만이 상륙해온 중공군 1만을 문자그대로 전멸시켰으며 중공군은 상륙부대중 단 한명도 육지로 돌아온 자가 없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이 전투는 국공내전 후반기에서 국민당군이 처음으로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였으며 대만을 국민당의 최후 보루지로서 지킴으로서 현재와 같은 양안 대립 상황이 되는,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전투였습니다. 참전병력 : 국민당군 - 제 12병단, 제 22병단 + 증원군 제 19군단 총 8개 사단 4만명 중공군 - 제 10병단 4개 군단 6개 사단 2만명 1948년중반부터 중공군의 역습에 국민당군이 밀리기 시작하고 이른바 3대 전투인 회하전투, 평진전투, 서주회전에서..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한 이유는?

국공내전을 앞에 두고 양측의 전력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정치 외교적으로나 모든면에서 국민당측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국민당은 1945년 초부터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자와 자금을 지원받기 시작했고(1949년까지 총 40억달러) 그간 쌓아놓은 외화도 풍부했으며(약 9억달러) 그것을 기반으로 군대를 미국식으로 대부분 무장할 수 있었습니다. 정규군 병력에서(민병제외) 양측은 200만대 60만으로 국민당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는데다 국민당군은 풍족한 무기로 2선급 부대까지 무장시킬 수 있었죠. 게다가 국민당측은 화북, 화중, 화남을 비롯해 버마, 인도차이나등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며 획득한 무기도 엄청났습니다. 또 남경으로부터 미군사고문단의 지도도 있었죠. 국민당군은 세계 5대 강국으로서 UN 상임이..

58.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안용복 사건(1693년 숙종 19년)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안용복 사건(1693년 숙종 19년) 숙종 19년 1693년 봄, 홀어머니 아래에서 궁핍하게 자란 안용복은 바닷가에서 떠돌아다니는 솔깃한 말 하나를 듣게 된다. 동해 멀리 섬이 하나 있는데 산삼이 많은 노다지 섬이라는 풍문이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그 섬에 다녀오는 배가 많다는 것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 거기 가는 뱃사람을 모집한다는 은밀한 소식을 듣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지원을 했다. 공식적으로 그 섬은 일반인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왕실에 진상하는 전복은 물론이고 산삼까지도 있다는 소문에 동래 부사와 좌수영에서 오히려 배를 제공하고 몰래 밀항선을 보내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34명이고 총책은 동래 감영의 한비장이엇다. 이런 기록은 조선의 자료에서 나온..

57.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문제 //독도 문제의 기원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문제 독도 문제의 기원 독도 문제는 현재 한.일간에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여차하면 국제사법재판소에 넘겨서 검증을 받고자 나서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우리 것이 분명한데 왜 재판정에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재판은 증거 자료를 위주로 하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이 일본에 비하여 특별히 더 유리하지는 않다. 일본은 기록의 왕국답게 몇 백 년 전 독도 관련 문서라든지 정보원들의 조선 정탐보고서까지 다채롭게 보관하고 있어서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우리나라가 등을 거론하며 기록이 잘 돼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의 기록은 우리를 능가한다. 또 국제사법재판소의 구성 인원들 세력 분포가 일본 ..

56.기둥뿌리 썩어가도 고담준론으로 수백 년

기둥뿌리 썩어가도 고담준론으로 수백 년 16년 예송논쟁 헌종과 숙종 시대에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두 차례의 대논쟁이야 말로 조선을 표현할 때 가장 적절한 사건일 것이다. '예송논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왕실의 복상과 같은 예법의 문제이지만 서인과 님인 사이의 해묵은 이념논쟁이고, 정권을 주도하기 위한 권력다툼이었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죽은 뒤 그의 계모인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요즘 '궁중잔혹사' 드라마를 보면 조대비와 봉림대군이 나오는데 조대비는 소현세자빈 강씨에게 자신을 이용하여 허세를 부려온 강씨를 미워하면서 소현세자가 독살되어 죽자 봉림대군을 은근히 옹립하려 한다.소현세자의 아들 원손이 나이가 어린 관계로 인..

55.천도, 집권 그리고 풍수

천도, 집권 그리고 풍수 조선에서 이런 풍수와 지관을 규탄하고 있는 것은 광해군 때의 명 문장가 이정귀가 대표적인 듯하다. 광해군은 지관 이의신을 매우 신뢰했는데 그는 서울을 떠나서 한강 하류의 교하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여 광해군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도성의 왕기가 이미 쇠하였으므로 도성을 교하현으로 옮겨야 한다는 이런 주장에 예조판서 이정귀가 상소하기를, "삼가 이의신의 상소를 보건데,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이 사람을 현혹시킬 뿐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풍수의 설은 경전에 나타나지 않는 말로 괴상하고 아득하여 본디 믿을 수 없습니다. 애초에 성상께서 나라를 세우려고 여러 곳을 살펴보고 여러 해를 경영한 끝에 끝내 이곳에 정하였으니, 깊고 먼 계략을 어찌 미미한 일개 술관과 비교하여 논의할 ..

54.우리는 원래 매장이 아닌 화장 국가였다 //매장과 풍수

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우리는 원래 매장이 아닌 화장 국가였다 매장과 풍수 우리나라가 아주 옛날부터 예를 숭상하여 사신을 매장해왔던 것으로 알면 오산이다. 조선 전기만 해도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묘지라는 것이 없었다. 모두 화장이었다. 고려 시대도 왕족들은 화장하고 남은 뼈를 작은 관에 넣어 묘를 만들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성리학을 국가 기본 사상으로 삼으면서 화장을 야만의 관습으로 주지시키니 그때부터 온 나라가 묘지강산이 되고 말았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오래된 화장 국가였다. 1700년대까지 중국도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선조 27년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 중 한 사람이 죽었다. 중국 측에서는 화장으로 하겠노라고 부탁해왔다. 조정에서는 당연히 시신을 관에 넣어 운반할 것으로 알았다가 화장을 하겠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