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사,,국공 내전..

21화(물건너간 대만침공과 현재까지)

구름위 2023. 4. 1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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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말이 되면 국민당군은 사실상 패망직전까지 몰리게 됩니다. 약 100만의 잔존병력으로 대만, 해남도 등 일부 도서지역만을 간신히 장악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목숨만 부지한 패잔병들로 전차, 야포 등 중화기는 고사하고 소총 한정을 2, 3명이 나눠 써야할 지경이었습니다.(애너미 앳더 게이트도 아니고..--;) 1~2년만에 완전히 쫄딱 망한 것이죠. 해, 공군만은 그런대로 건재했지만 49년 2월 25일에는 7200톤급의 중국해군 최강 순양함인 중경호가 배신 때리고 북상하다가 격침당해 엄청난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전쟁끝나고 영국정부가 우호차원에서 중국해군에게 선물로 준 중순양함 "중경호"(원이름 : "Aurora")

게다가 국민당 최대의 돈줄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던 미국조차도 중국에게 완전히 등을 돌립니다. 우리에게 "애치슨라인"으로 유명한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49년 8월 5일 이른바 "중국백서"를 발표합니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내용은 장개석과 국민당정권의 타락, 부패, 무능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내전의 가장 큰 책임은 장개석에게 있다며 국민당정권과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괜히 얘네들을 도와줬다"라고 자신들의 실수를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결정타였죠. 아마 장개석으로서는 몇가닥 안남은 머리가 그나마 이날 죄다 다 빠졌을듯.

 

내전기간 미국의 정책은 그야말로 딜레마의 연속이었습니다. 장개석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지지하지 않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만 약 23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원조를 장개석 정권의 유지와 파괴된 중국의 재건, 중국군의 재무장, 내전 수행에 지원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중공정권은 "미국이 중국 내전을 부추겼다"라는 상투적인 음모론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내전은 외세가 아닌 중국인들 스스로 택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극동에서의 최대 우방국이자 소련에 대한 견제를 위해 장개석 정권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되면서도 공산군과의 내전은 정치적 이유로 반대하였고 여러차례 양측의 화해를 추진했습니다.

 

또 원조를 무기로 장개석을 콘트롤하려고 했지만 장개석은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죠. 원조는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기를 반복했습니다. 48년 12월 28일 중국 공산당 중앙은 미국이 장개석 정권에 대한 원조를 중단한다면 중국내 권익을 보장하고 양자간의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49년 4월에 대중국원조법 연장을 결정했다가 8월에는 중국백서를 발표함으로서 장개석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죠. 미국의 이런 원칙없고 근시안적인 정책은 결과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었고 양측에게 되려 욕만 먹고 불신만 삽니다. 패망직전에 몰린 장개석은 미국이 직접 개입해줄 것을 원했지만 미국은 끝까지 거부합니다. 45년 10월 10일부터 산동의 청도항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7함대와 해병대는 서주 제남이 함락되고 상해가 포위된 상태에서 청도 외곽까지 해방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49월 5월 27일 싸우지 않고 철수합니다. 물론 해방군도 이들을 굳이 공격하여 미국에게 개입할 명분을 주지 않았죠.

 

장개석이 대만을 마지막 보루로 삼고 철수하려고 하자 미국은 "아직 대만은 중국땅이 아니다"라며 대만 철수를 반대합니다. 미국은 패망이 시간문제가 된 장개석이 대만으로 철수해도 무너져 대만마저 중공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장개석의 대만 입성을 막고 대만을 대륙으로부터 반독립된 상태에서 미국의 세력권에 자연 편입되기를 원했죠. 이를 위해 당시 대만성주석 위도명과 비밀 교섭을 벌이지만 장개석이 자기 오른팔인 진성으로 교체하고 대만을 장악하는 한편 미국에게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어쨌든 이것만 보더라도 미국과 장개석정권간의 불신과 대립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만하죠. 맥성에 고립된 관우마냥 사면팔방이 막힌채 더이상 물러설 곳조차 없어진 것이 당시 장개석과 국민당의 처지였습니다.

 

당시 미 행정부와 국방부, 백악관에서는 국공내전을 놓고 매파와 비둘기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애치슨은 대표적인 비둘기파에 속했으며(반대로 대표적 매파가 맥아더) 이는 단순히 애치슨 개인의 판단이 아닌 트루먼정권의 노선 자체가 장개석을 청산하고 모택동의 신중국과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50년 1월 12일 애치슨이 발표한 "아시아의 위기"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얄류샨-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정하며 남한, 대만, 인도차이나는 UN의 보호에 맡긴다"라고 선언한 것은 소련과 신중국을 자극하지 않고 특히 모택동정권에 대한 유화제스쳐였습니다. 앞뒤 상황은 쏙 빼고 한 대목만 가져와 "애치슨라인"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식으로 황당한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반대로 남한과 대만을 포함한다고 선언했다면 미국이 이들 지역이 자신의 세력권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고 소련과 중국에게 맹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미국이 한발 양보했음에도 이를 되려 악용한 쪽이 나쁜 것이지 이를 음모론적으로 끼워맞추는 것은 괘변에 불과합니다.(오판과 무능함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딘 애치슨(1893~1971) : 우리에게는 애치슨라인으로 잘 알려져 있죠. 대표적인 대소유화론자로 알려져 있지만(이때문에 매카시한테 "빨갱이"라며 맹공을 받았죠) 오히려 "트루먼독트린"에 의거 나토를 조직하고 중동에서도 터키를 원조해 친미화시키는등 소련의 세력확장에 적극 대항합니다. 한국전쟁 발발이후에는 대중강경파로 전향하여 장개석 정권 원조와 대만 독립을 주장하죠. 

※ 사진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B%94%98_%EC%95%A0%EC%B9%98%EC%8A%A8

 

한편, 50년 1월 1일. 중국 공산당 관방지인 인민일보에서 "올해의 사명은 대만, 해남도, 티벳의 해방이다"를 선언합니다. 전년에 있었던 금문도전투의 참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진의의 제3야전군에게 "패배의 설복"과 "대만해방"의 임무를 부여합니다. 이를 위해 제3야전군 산하 12개군 50만명을 대만 공격에 투입키로 하고 복건성에 10만명을 집결시키고 5만명을 상륙 훈련을 시키는 등 준비를 착착 진행합니다. 또 50년 5월에는 임표의 제4야전군에 의해 주산열도, 해남도가 사실상 무혈점령되고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잔존부대들도 소탕됩니다. 대만 함락도 이제는 초읽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50년 10월에는 50만명의 병력으로 티벳을 공격해 티벳의 구식군대 2만명을 한방에 격파하고 수도 라사를 장악합

중공은 내전동안 노획하거나 소련이 넘겨준 일제 장비로 49년 하반기에 해방군 산하 해공군을 창설했지만 국민당군에 비해 매우 미비했습니다. 해군은 군함 25척에 총톤수는 2만5천톤에 불과했고 공군은 구식전투기 50대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노후되거나 고장나 가동 가능한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49년 12월과 50년 4월에는 모택동과 주은래가 모스크바에 방문해 전투기 200대, 폭격기 80대, 조종사의 훈련 지원, 군함지원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대만해협에서의 제해, 제공권에서 국민당군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지상군은 숫자는 50만에 달했지만 대부분 목숨만 건진채 철수한 패잔병들인지라 해방군이 민간선박을 징발해 인해전술로 밀고들어와 상륙에 성공할 경우 방어를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마조도와 금문도 함락은 필연적이었죠.(물론 해방군도 큰 희생을 각오해야겠지만) 그럴 경우 대만은 완전히 고립되는 격이었습니다.

중공은 50년 하반기중에 대만 공격을 시작하여 늦어도 51년중에는 끝내겠다는 계획을 수립합니다. 이 계획에 엄청난 차질이 벌어진 것이 아시다시피 한국전쟁의 발발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인천상륙작전으로 김일성이 아작나고 북한이 붕괴직전에 몰리면서 모택동이 전면 개입을 결정함으로서 대만 점령은 완전히 물건너가죠.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모택동은 과연 얼마나 개입하고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것인가.

구소련 붕괴후 공개된 비밀문건에서 스탈린, 김일성간의 전쟁계획에서 모택동은 배제되었으며 김일성은 스탈린의 도움을 받으면 되지 모택동과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출처 : 모택동-스탈린간 모스크바 회담,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또한 스탈린이 주북한대사 슈티코프에게 "남침계획은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해야 하며 중국 동무들에게도 얘기해서는 안된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렇다면 모택동은 김일성의 남침준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야 하는가.

국공내전에서 공산측이 승리를 굳히던 49년 4월말 북한 인민군 정치위원 김일이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과 면담합니다. 여기서 김일이 임표의 제4야전군 산하 한인 3개사단을 북한으로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하자 한창 승리에 들떠있던 모택동은 적극 동의하고 향후 김일성이 남한을 공격했을때 만약 일본군이 한반도에 개입한다면 해방군을 보내어 격퇴하겠다고 말합니다.(출처 : 소련 외교문서,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즉, 모택동은 원칙적으로 북한의 대남공격에 찬성하고 이를 적극 지원했으며 다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50년 6월 25일 새벽 4시"가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 뿐이라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모택동은 스탈린과 김일성과 다를바없이 명백하게 제국주의적 야심과 전범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대륙에서는 흐루시초프 회고록이나 구소련문서들은 죄다 "날조"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전쟁의 발발 전후과정은 어물거리며 넘어가고 자기들 개입만 소위 "항미원조전쟁"운운하며 미화하고 있죠.(하는 짓은 일본 극우들과 다를 바 없죠.)

 

어쨌든 임표산하 제4야전군 소속 조선의용군 출신 3개사단 4만명이 49년말부터 50년 5월까지 입북후 북한군에 편입되어 같은 민족을 침략하는데 최선봉에 서죠. 또한 한국전쟁 발발 직전 임표의 제4야전군에서 만주출신 18만명을 만주로 재배치합니다. 명분으로는 내전 종식에 따른 동원 해제라고 했으나(둔전병으로서) 만주 출신이 아닌 제1야전군 소속 제66군도 만주에 배치되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화남에 있던 제4야전군 전체가 만주로 이동한 다음 전술훈련과 반미 정치교육을 받습니다. 이는 명백히 여차하면 한국전에 뛰어들겠다는 준비를 하는 것이었죠.

 

한편, 한국전쟁의 발발은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던 장개석으로서는 그야말로 "할렐루야"였습니다.(물론 일본도 "할렐루야"였죠. 김일성이 여러사람 살렸다는...-.-)

중국백서에다 애치슨라인까지 선언되자 50년 1월 27일 장개석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절망을 토로합니다.

 

"요즘 국제환경이 험악하고 국가전도가 묘연하며 사방의 길이 막혀버리고 미국, 러시아, 영국 모두 공산당쪽에 쏠리여 중화민국을 소멸시키려 한다."

해남도가 함락되자 장개석은 곧 필리핀이나 한국으로 망명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습니다. 타이뻬이에 주재한 미국영사관에서는 대만주재 미국인 소개령을 선포하는등 대만의 운명은 일촉즉발 상황이었습니다. 마치 25년뒤 "사이공 최후의 날"을 보는 것과 같았죠.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신중국에 대해 유화제스쳐를 보내던 미국은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합니다. 이는 완전히 모택동의 예상을 뒤엎은 것으로, 해방군이 준비하던 대만침공계획은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죠.  6월 30일부터 금문도에 포격과 중대단위의 상륙전을 시도했지만 모조리 실패로 돌아갑니다. 미 군부에서도 가장 강경한 매파인 맥아더는 트루먼정권과 국무부가 장개석을 버린 것에 대해 비판하고 "불침항모"로서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이 대승을 거두고 북진하자 장개석은 이때를 이용해 대륙진공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트루먼은 여전히 장개석정권에 대한 불신을 버리지 않았고 여전히 "대만중립정책"을 고수하다가 50년 11월 중공군이 대규모에 참전하여 UN군이 아작나면서 중공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게 됩니다. 51년부터 대만에 대한 군사원조가 제개되었고 54년 12월 4일 미국-대만간 공동방위조약이 체결되죠.(79년 12월 폐기)

한편,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파멸적인 타격을 받자 스탈린은 10월 1일 모택동에게 참전을 요구합니다.(또한 김일성도 모택동에게 아주 애처로운 편지를 보냅니다.)

모택동로서도 신중국의 생사존망을 건 결정에 심사숙고합니다. 임표를 비롯한 대부분의 간부들은 "인민들이 전쟁에 지쳤다"는 것과 "패할 경우 전화가 동북까지 미칠 수 있다"라며 반대하죠. 그러나 모택동은 "북한과의 동맹"과 "순망치한"을 내세워 참전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동북변방군(구 제4야전군) 산하 4개군 15개 사단(12개 보병사단, 3개 포병사단)  26만명은 소위 "지원군"의 이름으로 10월 19일 저녁 압록강을 건너게 됩니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국 지원군. 참전당시에는 미국과 정면대결이 두려워 정식 참전이 아닌, 어디까지나 "민간 의용군"이라고 상투적인 거짓말을 하죠.(깨지면 "우리정부는 모르는 일"이라고 변명하기 위해) 그러면서 정작 휴전때는 대등한 참전국으로서 팽덕회의 이름을 적어넣죠.

저는 한국전쟁의 참전은 모택동의 근시안적인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적대적인 친미국가와 국경을 맞딱들이는 것에 대한 부담"운운하는 이도 있으나, 당시 미국은 중공을 적대하지 않았습니다. 적대적으로 만든 것은 중공 자신이었죠. 유엔군이 중공을 상대로 총 한발도 먼저 쏘지 않았음에도 "항미원조"운운하며 선제공격 한 것은 오히려 중공이야말로 제국주의 야욕으로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유엔군이 37도선까지 밀리자 "다 들어줄테니 제발 휴전하자"라고 애걸했음에도 모택동은 이참에 한반도 전체를 통째로 먹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이를 거부했죠.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하여 초전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병참이 한계에 부딪치자 금새 한계를 보이게 됩니다. 중공군이 파멸하지 않은 것은 단지 미, 영이 정치적인 이유로 더이상의 확전을 반대했기 때문일뿐이었습니다. 잘해야 비긴 것에 불과한 것을 "미국을 이겼다"라고 날조하고 있죠.

모택동은 중국에게 북한이 "순망치한"이라고 하지만 어차피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대만과 동남 해안가를 통해 언제라도 모택동정권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도 "그럴 것"라는 것은 논리비약에 한낱 억지주장이죠. 무엇보다 모택동은 위에서 언급했듯 처음부터 김일성의 남침을 지지하고 적극 지원하고 있었고 김일성이 깨지니까 그 책임을 직접 지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한국전쟁 참전으로 모택동이 얻은 것이 있다면 소련으로부터의 막대한 원조로(물론 이자까지 쳐서 다 받아냈습니다. 스탈린은 혁명은 커녕 전쟁 장사를 했을 뿐이죠. 중공은 이때는 아무말 하지 않다고 있다가 나중에 사이 나빠진 다음에야 "소련놈들은 도둑놈들이다"라고 맹비난을 하죠.) 단숨에 세계 3위의 군사대국으로 뛰어오름으로서 대만의 대륙진공을 막았다는 것과, 내전기간 투항한 대량의 "해방병"들을 소모시켜 내부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겠죠. 당시 500만에 달하는 인민해방군의 절반이상이 국민당군에서 전향하거나 포로 출신, 과거 만주군에서 전향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결속의 문제가 있었고 내부에 불씨를 안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모택동이 처음부터 이것을 목적으로 군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3년의 전쟁동안 최전선에서 근 100만 가까운 사상자를 내 출신과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국민당군 출신들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도 전쟁을 빌미로 반혁명분자 3백만명을 숙청합니다.

또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참전을 결정하고 초전에 유엔군에게 거의 포위섬멸에 가까운 승리를 거둠으로서 모택동 자신의 위상을 높인 것도 있죠.

반면, 막대한 전비소요에다 인명 손실, 침략국으로서의 낙인,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경제적 봉쇄를 받아 중국은 청나라시절로 후퇴하게 됩니다. 대만 수복도 물건너가죠. 60년대이후 대만이 고도 성장을 할때 중국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으로 거의 석기시대로 전락합니다. 지금 중국이 두자리수 성장 운운하지만 대만 잘나갈때의 고도성장에 비하면 훨씬 낮다고 합니다. 단지 독재자로서 개인의 업적을 위해 국가와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한 것에 불과하죠.

 

 

대만섬과 금문도. 금문도는 중공의 대만공략기지인 하문항에서 겨우 2km 떨어져 이들의 코앞을 가로막고 있죠. 동서 20km, 남북 5~10km, 거제도의 절반도 안되는 151㎢의 조그만 섬이지만 철저하게 요새화되고 10만의 병력을 주둔시켜 중공은 끝까지 이 섬을 공략하지 못합니다.

미국은 대만을 명확하게 자국 방위라인속에 포함시켜 대만군의 재무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대만의 출입구인 금문도를 놓고 양자는 여러차례 충돌합니다. 대표적인 전투가 58년 8월 23일 오후 6시부터 중공측의 선제포격으로 시작된 "금문도포격"이었죠. 10월 28일까지 두달간 양자는 서로 치열한 포격전을 벌여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중공측은 대만군의 제해, 제공권을 돌파하지 못하고 미국이 개입함으로서 실패로 돌아갑니다. 장개석 역시 동남 연해를 포격하고 운남에 특공대를 파견하는 등 상호 도발과 국지적인 전투가 벌어지지만 79년 1월 1일 미-중 수교가 체결되면서 완전히 중단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죠.

 

 

하문의 포대에서 금문도를 포격중인 해방군. 해방군은 금문도에 40만발이 넘는 포격을 했고 대만도 12만발의 대응 포격을 하여 쌍방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때 떨어진 포탄을 식칼로 만들어 관광상품으로 판다죠. 바다와 하늘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대만측은 숫적으로 열세했지만 질적 우세로 승리를 거둡니다.

※ 사진출처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784014

  90년 냉전이 붕괴되고 등소평의 실용외교와, 대만에서도 장씨일가에 의한 통치가 막을 내리고 문민정권이 들어서면서 양안화해무드가 펼쳐집니다. 종종 부딪치기는 하지만 여전히 "철천지 원쑤"인  남북한과는 비할 바가 아니죠. 한때 최대의 격전장이었던 금문도는 이제는 개방되어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실로 격세지감이죠.

 

 

 

노년의 장개석. 비록 부패하고 반봉건적인 독재자였지만 뛰어난 정치가이자 민족의 리더였고 중국이 새로운 시대를 열도록 과도기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이점은 대륙에서도 인정하는 바이죠. 중국 근대사에서 그의 위치와 공로는 그냥 독재자일뿐인 이승만이나 김일성따위와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항일전쟁때처럼 "공간을 버리고 시간을 번다" 전략을 내전에서도 써먹었다면 현재의 양안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한편으로는, 중국이 급성장한 경제성장으로 90년대 후반부터 군사력을 대폭 확충하면서 대만을 점점 압박해 가고 있습니다. 반면 대만은 정치적, 외교적 고립때문에 돈이 있어도 무기를 사지 못해 군의 현대화가 점점 멀어지고 있죠. 당장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 휘젓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군사적 격차가 크지 않지만(중국-대만의 경제적, 군사적 격차는 인구빼고는 남북한보다 훨씬 작습니다. 북한과 달리 대만은 만만찮은 나라이죠.) 문제는 시간이겠죠. 대만은 자주국방은 고사하고 전적으로 미국의 선처를 바라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 중국이 대만을 강제로 합병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난관이 있고 무엇보다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지도 의문이죠. 남북한과 달리 양안은 단지 정치적으로만 일국이체제일뿐 서로 내왕도 자유로운데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적극적인 협력을 하는등 상당히 가까운 사이입니다. 무력 합병은 지도자의 업적은 되겠지만 치루어야 할 댓가가 아주 크죠. 푸틴레벨의 무대포 리더가 등장한다면 모르지만...

이것으로 연재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 주요 참고서적 >

중화민국사, 요코야마 히로아키 저, 신서원출판사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 현대중국의 전쟁과 혁명 : 1937~1949, 로이드 이스트만 저, 지식산업사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저, 아지랑이출판사

군신정권 - 근대중국 군벌의 실상, 진지려 저, 고려원

중국현대사 1911-1949, 쟝세노 등, 까치출판사

중공군의 전략전술 변천사, 국방군사연구소

중국인민해방군사, 국방군사연구소

장제스일기를 읽다, 레이황 저, 푸른역사

일본군사사, 시사일본어사

도해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중국현대혁명사, 지전성 저, 청사출판사

장개석연구 - 국민혁명시기의 군사적, 정치적 대두과정, 배경한 저, 일조각출판사

라이프 제2차대전사 - 회오리치는 일장기편, 중국-버마-인도편, 매일경제사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저, 돌베개출판사

  기타 >

미디어오늘 : 하나의 불씨, 중국을 태우다/ 공산당 창건 90주년, 마오를 다시 말한다

중앙일보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상해경제(http://www.shanghaibao.com) : 중국문화와 역사

장개석과 조선전쟁 : http://blog.daum.net/kh6599/13423146

중은우시의 중국,북경,장안가에서 : http://blog.daum.net/shanghaicrab

에드워디안의 휴식처 : http://epoque.egloos.com/3337936

길잃은 어린양의 휴식터 : http://panzerbear.blogsp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