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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후 처리와 국공내전

구름위 2023. 4. 1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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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후 처리와 국공내전

 

장개석의 굴욕적 승리

1937년 이래 4년 반에 걸친 중국의 항일전쟁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전개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계기로 세계대전으로 발전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시작한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일원이 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이 패배함으로써 마침내 장개석(蔣介石)의 일본에 대한 승리가 성취되었다.

항일전쟁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전쟁이다.

ⓒ Mys 721tx/wikipedia | Public Domain

전후의 국제질서 특히 일본에서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국제회담이었던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에서 장개석은 아예 초대받지 못했다. 얄타회담에서는 몽골과 만주에서의 소련 측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허용하는 비밀협약이 이루어졌고, 포츠담회담에서는 일본의 전후 처리에 대한 중요 내용마저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일방적인 선언으로 관철되었다. 그 내용을 장개석은 거의 검토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수락해야 했으며, 그것도 회담에 초대받지 못했던 그는 전보(by wire)로 서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무렵 그의 일기에는 '무례', '모욕', '국치'와 같은 말과 함께 동맹국 미국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단어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장개석과 미국 간의 껄끄러운 관계는 이미 1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장개석은 연합군의 중국 전구(戰區)의 지휘권을 위임받고 있었는데, 중국군의 부패가 심해지자 미국은 그의 연합군 지휘권을 박탈하여 조셉 스틸웰 장군에게 넘기려 했다. 스틸웰은 장개석군을 군사적으로 원조하던 이른바 원장(援蔣)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서 운남(雲南) 국경에서 대 일전을 지휘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장개석과는 사이가 안 좋았다. 부패한 중국군의 부정에는 신랄하고 비판적인 폭로를 서슴지 않았던 고지식한 성격의 스틸웰과 자존심만 강했던 장개석과는 오래전부터 충돌이 잦았던 것이다.

장개석은 이 기회에 그를 본국으로 소환하도록 공작을 꾸며 드디어 그를 본국으로 멀리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장개석 간에는 상호불신이 더욱 커졌다. 게다가 항일전이 끝나가고 있던 1945년 6월에 들어서는 장개석을 놀라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미 이전부터 장개석에게는 얄타회담에서 소련과 미국이 중국의 만주지방을 놓고 모종의 비밀거래가 있었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6월 10일에 패트릭 할리 주중 미국대사를 통해 얄타회담에서 소련이 만주와 조선 문제에 관해 구체적인 요구를 해왔다는 정보가 확인되었다. 12일에는 주중 소련대사 페트로프가 중소조약의 기본이 될 내용이 말로 전달되었는데 그 속에는 여순(旅順)항을 군사시설로 조차(租借)하는 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소련은 '중국 4억 5,000만 명의 인심'을 잃게 된다면서 아예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14일 할리로부터 얄타회담의 전모를 알게 된 장개석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23일에는 트루먼이 소련의 요구에 전면적으로 찬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장개석이 모르는 사이에 미국과 소련이 중국의 영토인 만주 문제에 대해 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그를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얄타의 협정에는 스탈린이 중국에 대해 미국과 밀약하고자 하면 미국 대통령은 중국에 그 밀약의 내용을 통보하고 동의를 요구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중국에 그것을 요구하면 미국의 후원으로 전쟁을 지탱하는 중국으로서는 그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었다. 장개석은 소련 단독의 여순 조차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주권이 중국 측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여순항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소련과의 교섭에 임하기로 했다. 대 소련교섭의 책임자는 과거 미국대사로 항일전쟁에 미국을 끌어들이는 데 크게 공헌한 행정원장 송자문(宋子文)이었다. 그러나 소극적 대처로 송자문은 교섭이 지지부진하자 장개석으로부터 무능하다는 낙인까지 찍히고 말았다.

얄타협정으로 소련에 약속된 몽골독립과 대련항의 우선적 이용권과 여순항의 조차권, 동중국철도 및 남만주철도의 중국과 소련 공동경영권에는 장개석의 동의가 필요한 사항이었다. 이미 일본과의 전쟁을 결심하고 있었던 스탈린으로서는 실제로 대일전이 시작되었을 때 군사침공의 목표가 되는 만주의 전후처리를 중국 측과 협의할 필요가 있었다. 곧 개최가 임박한 포츠담회담 때까지는 소련의 요구에 대한 중국의 동의가 필요했었다. 7월에 모스크바에서 중소 교섭이 시작되자 소련은 여순 조차를 비롯한 중국 동북 문제뿐 아니라 중소 국경에 관한 모든 문제를 결부시켜 외교 공세를 펼침으로써 교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다. 그중에서 우선 소련이 들고 나온 것이 몽골 독립에 관한 문제였다.

몽골은 원래 청제국의 판도에 편입되었던 지역으로 1911년 신해혁명을 계기로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을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중국은 다원적 민족국가(五族協和)로서 몽골(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할 경우 내몽골(현재 내몽골자치국)의 독립운동, 더 나아가서는 다른 민족의 독립으로까지 확대되어 자칫하면 중국 자체가 해체될 우려가 있었다. 그 때문에 중국은 몽골 독립을 결코 인정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당시 제정러시아는 몽골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사실상 외몽골은 독립상태였다. 1939년에 발생한 노몬한 사건은 일본의 관동군과 극동 소련군의 전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만주국과 몽골 사이의 국경선을 둘러싼 문제가 발단이 되었으며, 몽골군은 소련측에 가담해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처럼 몽골은 실제로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지만, 중국은 물론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또한 영국, 미국 등 주요 국가들도 그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은 얄타회담을 통해 그것을 승인받고자 했다. 소련은 중국과 동북 문제를 협의할 때 몽골 문제를 제기하고, 나아가서는 신강(新疆, 위구르) 문제를 결부시킨 외교 공세로 외몽골의 독립을 쟁취했다. 결국, 장개석은 외몽골의 독립을 용인하고 일본으로부터 탈환한 동북지방(만주)에서 소련의 권익을 인정한다는 고심에 찬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포츠담에서 미 · 영 · 소 3국의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도 장개석은 초청되지 못하는 외교적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아직 대일전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을 제외하고 미국과 영국이 대일 전후 처리 선언을 작성했는데, 중국은 다만 전보로 승인 서명을 요구받았다. 포츠담선언은 카이로 선언을 계승한 것임에도 카이로선언에 서명한 중국에는 아무런 사전 상의도 없었다. 가장 오랫동안 일본과 싸웠으며, 그래서 국토가 황폐해진 중국에 대한 배려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자신이 이 조약의 수정 요구를 하면 미 · 영 2개국만 선언을 발표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주중 미국대사 할리는 장개석의 마지못한 동의를 얻어내자 포츠담의 트루먼에게 전보를 보냈고, 트루먼은 장개석 대신 사인을 한 후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일본 관동군의 패배

1944년 4월부터 일본 관동군은 중국에서의 최후의 대작전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戰)을 시작했다. 이것은 태평양전선에서의 일본군 패배의 결과였던 해상교통권 상실을 중국대륙전선에서의 육상교통권의 확보를 통해 보충하고자 한 작전이었다. 화북으로부터 화남에 이르는 철도, 운하를 비롯한 수로 등 교통선을 확보하면 만주로부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연결되고, 나아가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인도네시아)와도 연락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戰)

중일 전쟁기간동안 전쟁 막바지인 1944년 4월 17일부터 12월 10일에 걸쳐서 중국 대륙에서 행해진 일본 제국의 최후의 대규모 공격 작전

ⓒ 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wikipedia | Public Domain

이 작전의 목표는 중국 서남부에 설치된 미국 공군기지를 점령하는 데 있었다. 일본은 중국전선의 제공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있었을 뿐 아니고, 중국기지로부터 발진한 B29에 의해 한반도와 서일본까지 공습을 당했기 때문이다. 관동군은 약반년에 걸려 북평(북경)으로부터 광주까지 대륙을 종단한 철도선을 점령하고, 나아가 서남으로는 계림(桂林), 유주(柳州) 등을 점령했다. 그러나 '타통(打通)'은 작전상 성공했으나 그 '타통'의 결과를 실제 작전으로 활용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즉 이는 중국전선에서의 일본의 우세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대전의 정국에 영향을 끼치지도 못했다.

1944년부터 화북의 연안(延安)을 중심으로 한 해방구(解放區)에 묶여 있으면서 관동군의 '삼광(三光)' 작전으로 힘을 쓰지 못했던 공산군인 8로군과 신4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그것은 관동군의 '타통 작전'으로 화북지방의 일본군이 화중과 화남으로 작전 범위를 이동시킴으로써 화북에 군사적인 공백이 조성된 결과였다. 그 후 공산군은 계속 해방구를 확대해 1945년 봄에는 북은 내몽골로부터 남은 해남도에 이르기까지 19개의 해방구가 성립되었다. 그 인구는 약 1억 명이었으며, 정규군이 91만 명, 민병은 220만 명에 달했다. 한편 국민당군은 중경을 중심으로 하는 서남부에서 전선을 펴고 관동군에 대항했다. 5월 국민당군은 일본군을 호남 서부의 지강작전(芷江作戰)에서 패퇴시키고 축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해 봄 공산당과 국민당은 각각 전국대회를 열어 전후(戰後)의 구상을 밝혔다. 4월에서 6월에 걸쳐 연안에서 열린 중공7전대회는 전회인 모스크바대회로부터 창당 이래 처음으로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지 않은 중국공산당의 독자 대회였으며, 모택동의 권위가 명실공히 확립된 것을 내외에 과시한 대회였다. 개정된 당 규약에 처음으로 '모택동사상'을 모든 정치공작의 지침을 삼을 것이 결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모택동이 행한 정치보고가 〈연합정부에 관하여〉였는데, 그 내용은 신중국을 창조하기 위한 중국공산당의 방책을 상세하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속에서 모택동은 인민전선에 의거하여 항일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함과 동시에 민주와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대중의 항일운동을 억압하고 있는 국민당의 일당독재와 반공정책을 종식시키고 모든 민주적 계급을 결집시킨 "전국의 압도적 다수 인민을 기초로 한 통일전선의 민주적 동맹의 신민주주의의 국가제도"를 제창했다.

같은 무렵인 5월 중경(重慶)에서는 국민당 6전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가 공산당의 형식이라는 비판에 눌려 결국 11월에 민주적인 국민대회를 열어 '헌정'으로 이행할 것이 결정되었다. 그 국민대회가 어떤 성격을 지니며, 어떻게 구성될 것인가는 확실치 않았으나 적어도 공산당을 배제하고자 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에 모택동은 이를 "광범한 인민과 모든 민주정당을 고려하지 않은 국민당의 반(反)인민집단의 당리당략"으로 비판했다.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군이 참전의 열매를 따 먹기 위해 서둘러 만주로 진격해 왔다. 8월 10일 일본은 마침내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연합군에 항복했다.

전후의 국공내전

국공내전

1927년 이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일어난 두 차례의 내전을 말한다.

전후를 둘러싼 국공(國共)의 주도권의 대결은 일본이 포츠담회담을 수락한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8월 10일 깊은 밤, 연안의 8로군 총사령관 주덕(朱德, 주더)은 모든 공산군 무장부대에 명령하여 관동군을 무장 해제하고, 만약 반항하는 자가 있으면 섬멸하라고 재빨리 선수를 쳤다. 이에 대해 연합군의 중국전구(中國戰區)의 책임자 장개석은 다음날 주덕에게 "모든 해당 집단군 소속부대는 현지에 주둔하여 명령을 기다리고… 함부로 행동하지 말 것"을 엄명함과 동시에 국민당군 직할부대에 긴급 진격을 명령했다. 이에 대해 주덕은 "이 명령은 공정치 않을 뿐 아니라 중화민족의 이익에 반하며 일본 침략자와 조국을 배반한 한간(漢奸)1) 에게 유리할 뿐이다."라고 하며 거부했다.

8월 15일 장개석은 관동군 총사령관 오카무라(岡村寧次) 대장에게 국민당군에 투항할 것과 "현 무장 장비를 유지하며, 소재지의 질서유지를 담당하라"고 명했다. 이러한 항복 수리 문제는 전후 국공 대립의 초점이 되었다. 주덕도 같은 날 오카무라 대장 앞으로 일본군은 8로군, 신4군, 화남 항일종대 등 공산당계 군에게만 투항할 것을 명했다. 두 가지 명령을 받은 일본군은 만일 공산군이 항일모일(抗日侮日)의 행동을 취한다면 굳게 응징해야 할 것이라고 각 부대에 통달했다. 공산당이 오카무라를 중국 전선에서의 전쟁범죄자로 내몰고 국민당이 그의 전쟁책임을 면제해 준다면 그의 선택은 분명하게 국민당에 기울기 마련이었다.

남경에서 이루어진 오카무라와 관동군 부참모장의 회담에서는 공산군의 공격에 대하여 점령 지역을 확보하는 일이 논의 되었다. 산서성에서는 국민당군과 관동군이 합동하여 실제로 공산군과 싸웠으며, 국민당군의 도착이 늦어진 산동성 등지에서는 공산군과 일본군의 격전이 계속되었다. 미국이나 소련까지도 각각 그 의중은 다르기는 했으나 중앙 정권이었던 장개석을 지원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국민당의 우위는 명백했다.

국공 양당의 내전은 승리 1년 후 1946년 7월에 시작되었다. 애초 국민당군은 연안마저 수중에 넣는 등 그 승리가 확실해진 듯 보였다. 그러나 1947년 초 인민해방군이라 개칭하고 반공(反攻)을 개시한 공산당군은 1948년 9월부터 요심(遼瀋, 금주와 심양 일대), 유해(惟海, 서주 일대), 평진(平津, 북경 천진)의 3대 전역(戰役)에서 승리했으며 드디어 장강(양자강)을 건너 4월 23일 남경을 점령하게 된다. 패배한 장개석은 '중화민국'을 안고 대만으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북경의 천안문 앞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그러면 전쟁 중 외교적으로도 정통성을 지녀왔으며, 군사력에서도 우세했던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어찌하여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장개석 정권의 몰락 배경

부패한 국민당 정권과 모택동의 정풍운동

1945년 9월부터 국민당 정부의 군대와 관료들이 승리에 도취해서 북평(북경) 천진, 상해, 남경, 무한, 광주 등 도시로 돌아왔다. 민중은 이들 개선장군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실망하게 되었다. 중경에서 부패할대로 부패했던 그들은 마치 굶주린 독수리처럼 지금까지 일본군이나 한간(漢奸)들이 장악하고 있던 공장, 창고, 선박, 차량 등 물자를 닥치는 대로 접수하여 자기들 수중에 집어넣었다. 유망한 기업들을 몰수하여 국영화로 위장하여 장개석 일가를 비롯한 4대 가족의 지배 아래에 두었다.

내전이 시작되자 방대해진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민정부가 화폐를 남발하게 됨에 따라 가공할만한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47년 말에는 물가가 내전 개시 전보다 14만 5,000배가 되어 예전 같으면 소 3마리나 살 수 있었던 돈이 성냥 1갑의 가치밖에 되지 않았다. 원료가 부족했고 운영자금도 달렸던 토착 상공업은 미국의 대량 잉여 물자가 들어옴으로써 경쟁에 밀려 차례로 도산했으며, 대규모 실업자들이 거리에 흘러넘쳤다. 생산이 급격히 저하되자 굶어 죽는 사람은 1946년 한 해만 해도 천만 명을 헤아렸다. 당시 상해에서 이 참상을 겪게 된 어느 문학자는 이 상황을 '참승(慘勝)'이라 표현했다. 즉 승리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비참한 승리였으며, 오히려 일제가 지배하던 시대보다 사회적으로 더 무질서해졌던 것이다.

1946년 11월에 미군 병사가 여학생을 강간한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의 반미시위가 일어나 다음 해 5월에는 반(反)기아, 반(反)내전, 반(反)박해의 '520 학생운동'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한편 도시빈민의 쌀 소동은 전국의 38개 도시로 확산되었다. 이에 대해 국민정부는 '사회질서유지법'(1947년 5월)을 제정하여 탄압했다. 전승 후 2년도 지나지 않아 국민당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던 것이다.

한편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은 1950년대 말부터 전후 새로 생겨난 해방구에서 '감조감식(減租減息)'2) 정책을 펴는 한편 국민정부의 탄압행위에 대해 '청산(淸算)투쟁'을 전개했다. 즉 민중들이 궐기하여 전쟁 중에 일본에 협력하여 인민을 죽이거나 억압했던 한간과 악덕 지주들을 규탄하여 그 재산을 몰수하거나, 재판을 통해 처형했다. 이 투쟁을 통해 해방된 민중의 에너지는 곧바로 토지혁명으로 발전했다. 1946년 5월 4일 모택동은 '청산淸算), 감조(減租) 및 토지 문제에 관한 지시'를 발포하여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경작 농민에게 그것을 분배하는 정책을 지시했다. 이 토지혁명의 진행은 농민들의 혁명에 대한 의욕을 불타오르게 했으며, 반(半)봉건 지주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장개석을 비롯한 국민당과의 대립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공산당은 '지시'에 이어 1947년 10월에는 '중국토지법대강'을 발표하여 모든 지주의 토지소유를 폐지시키고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이라고 한 손문(孫文)의 정책을 실행하며 철저한 토지 균분을 추진했다. 마을 단위로 농민대회 및 빈농단(貧農團) 대회가 열려 스스로 위원회를 선출하여 그 위원회가 토지혁명의 집행기관이 되었다. 토지혁명은 농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비록 많은 지구에서 혼란과 과열이 생기기도 했으나 공산당에 대한 농민의 지지는 절대적인 것으로 되었다. 한번 손에 넣은 토지를 잃지 않으려는 농민들은 줄지어 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국공내전(國共內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연합국의 원조로 막강해진 국민당군의 공세에 곤란에 빠진 공산군은 이미 전쟁 전부터 당과의 개조를 시행하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가 부패했던 상황에 대비하여 모택동 정부는 이른바 '정풍운동(整風運動)'을 통해 당을 개조하려 했다. 그것은 당내에 암약하는 스파이를 적발하여 당의 사상을 순화시키는 운동이었으나, 한편 개인의 이기적 행위를 감독하여 부패를 추방하는 데 기여했다. 군의 개혁은 '정병간정(精兵簡政)'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군대 내에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인민해방군을 정예화했다. 미군의 고문관이 해방구를 방문하여 이러한 현상을 보고 국민당군과 비교하여 공산당의 깨끗한 정치문화와 군기에 놀라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항일전쟁 후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당과 군대를 만들었던 모택동의 정풍운동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풍운동 때문에 상의하달(上意下達)의 일방통행이라는 약점이 더욱 강화된 것도 사실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공산당의 일당독재와 그것과 불가분한 전제정치의 피해가 야기된 것도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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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석

195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196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사과 박사학위 취득, 1970년 서울대학교 서양사과 전임, 2002년 서울대학교 정년퇴임, 명예교수 취임, 2000-2002..펼쳐보기

출처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