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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대사]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19화(국공 최대의 결전! 승패 결정나다)

구름위 2013. 12. 1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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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남전역에서의 패배는 국민당군으로서는 그야말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전략적으로도 화북, 화동을 통째로 상실하고 만주와 북경이 고립되었으며 남경으로 가는 길목인 서주까지 위협받게 되었지만, 그보다도 심리적인 영향이 더 컸습니다. 제96군 오화문의 배신은 한마디로 아군도 못 믿는다, 라는 의미였습니다. 눈앞의 적군과 싸우다가 언제 아군에게 뒷통수를 맞을지 모르게 되었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수세에 몰린 국민당군은 장개석의 "거점방어"전략에 따라 더이상 공격에 나서지 않고 요새화된 대도시와 주둔지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이로 인해 대도시 방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의미도 되었습니다.

 

역사상 군사 지도자들중에 모택동만큼 첩보와 선전에 도통한 사람도 없을 것인데, 공산군이 국민당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하고 반란과 배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때문입니다. 50년 12월 맥아더가 호되게 당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죠.

 

장개석 직계의 "십삼태보"중의 하나이자 특무기관을 지휘했던 등문의장군은 후에 "총사령관 사무실부터 각 사령부까지 적들이 없는 곳이 없으며 우리의 비밀을 캐고 역정보를 뿌려 적은 우리의 형편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나 우리는 스스로의 상황도, 적의 상황도 알지 못하였다. 아군이 포위되고 적에게 잡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라고 회고합니다.

 

제남전역에서 제96군과 오화문의 배신을 이끌어낸 그의 참모장이 바로 공산군 첩자였고, 제2수정구의 참모는 국민당군의 모든 작전계획을 적에게 넘겨주어 제2수정구의 파멸과 제남전역 패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공산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고립되어 전의를 상실한 국민당군을 상대로 철저한 선전전을 하여 병사들의 탈영을 유도하고 학연, 지연을 총동원해 지휘관들이 싸우지도 않고 배신토록 하였습니다. 특히 장개석이 총알받이로 쓰기 위해 억지로 저 멀리 남쪽에서 끌려나온 군벌군대들은 병참이나 보급도 형편없었기에 장개석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고 금새 배신때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반면 국민당군의 정보활동은 그야말로 형식적이고 관료적이며 무능하기 짝이 없어 적의 정보를 캐기는 고사하고 되려 역정보에 속아 적의 함정에 스스로 걸어가 파멸하기 일쑤였습니다.  

 

1948년에 오면 장개석이 신뢰할 수 있는 부대는 중앙군과 광서군, 광동군 등 남방계열의 직계군뿐이고 동북군, 서북군, 사천군, 운남군 등 군벌군대는 언제 배신을 때릴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죠. 장개석은 병력이 부족하자 충성심 약한 군벌군대를 중앙군 사이사이에 끼어넣고 중앙군이 이들을 감시 감독토록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엄청난 착각이었습니다. 전투중에 이들이 배신을 때리자 잘 싸우던 중앙군들까지도 고립되어 포위 섬멸당하죠.

 

1947년 7월부터 1948년 6월까지 국민당군은 전전선에 걸쳐 연전연패를 당하였습니다. 더욱이 국민당군은 미국식으로 무장된 최정예부대들을 대거 상실하여, 전차와 화포, 차량 등 해방군은 고스란히 이들의 무기와 장비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또 투항한 병력의 대부분이 해방군밑에서 총부리를 돌림으로서 양자의 격차는 순식간에 줄어들었습니다. 놀랍게도 똑같은 부대가 장개석 휘하에서는 서로 질시하고 파벌대결을 벌이다가 모택동 휘하에서는 이런 일이 없이 매우 적극적으로 싸웠다는 것입니다. 뭐, 대부분 나중에 한국전쟁에 투입되어 토사구팽당하지만..

 

동북과 화북, 화중방면에서 국민당군은 총 5개의 지구에서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동북에는 위립황의 지휘하에 총 48만명이 장춘, 심양, 금주 이 3개 동네를 사수하면서 산해관을 통해 근근히 관내와의 통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화북에는 염석산계열인 서북군벌 부작의가 60만명으로 북평, 천진, 당산, 귀수, 장가구 등을 확보하고 있었고 산동을 완전히 상실한 화동에는 유치의 60만명이 농해철도와 진포철도가 통과하는 서주를 지키며 양자강 하류를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중원에는 백숭희의 75만명이 한구를 중심으로 평한철도를 수비하고 있었습니다. 

서북에는 연안을 도로 빼앗긴채 쫓겨내려온 호종남의 30만명이 서안을 중심으로 섬서성과 사천성을 수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서왕 염석산은 산서성 대부분을 빼앗긴채 성도인 태원만 간신히 지키고 있었죠. 

정작 양자강 이남을 수비하는 후방부대는 겨우 23만명에 불과하여 서로 고립된채 상호 연계작전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한 지구만 돌파되어도 어떤 상황에 처할지는 불보듯 뻔하였습니다.

 

1948년 8월 3일부터 7일까지 남경 국방부 강당에서 장개석 주재로 총사령부 비밀회의가 개최됩니다. 장개석은 "동북에서는 안정을 구하고 화북은 수비를 공고히 하며 서북에서는 공비의 확산을 막고 화동과 중원에서는 소탕작전을 강화하여 적의 남진을 막으면서 때를 보아 적의 주력을 격파한다"라는 뻔한 소리만 늘어놓습니다. 참모중에서는 과감하게 동북을 포기하고 전선을 축소하여 화중을 확보하자고 건의하지만 장개석은 일언지하게 거절합니다.

 

모택동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위립황이 동북을 버리고 화북이나 화중으로 철수하여 전력을 한곳으로 집중하는 것이었는데 장개석이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자 드디어 전략적 결전을 할 때가 왔다고 판단합니다. 각 야전군에 전면적이고 대규모적인 섬멸전을 명령합니다. 그 첫번째가 요심전역(요서-심양)이었습니다.

 

동북지구에는 위립황 이급상장의 지휘하에 장춘(1개 병단, 6개사단 10만명), 심양(2개 병단, 24개사단 30만명), 금주(1개 병단 14개사단 15만명)이 각 지구에 고립된채 성벽으로 둘러쌓인 도시안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임표가 지휘하는 동북야전군 54개 사단 70만명(그외 후방부대 33만명 별도)이 공격에 나서 숫적으로 완전히 압도합니다.

 

 

요심전역당시 참모들과 전략을 논의하는 위립황(가운데 양반 

장개석 비장의 "오호상장"중 하나이며 매우 유능한 명장. 중일전쟁당시 제1전구를 지휘했으며 스틸웰휘하에서 버마원정군 Y군을 지휘합니다. 44년말에는 일본군을 격파하여 버마북부를 탈환함으로서 버마공도와 운남이 연결되도록 하죠. 국공내전에서 패하자 홍콩으로 도주했다가 대륙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래부터 공산군의 첩자였다"라는 주장도...

 

※ 사진 및 관련 자료 : http://blog.naver.com/whtjddi/120088194459

 

임표는 위립황의 사령부가 있는 심양을 고립하기 전에 우선 금주와 장춘을 공격합니다. 9월 12일 전차 1개 대대를 앞세운 6개군으로 금주를 포위하고 별도로 2개군을 금주 서남방의 탑산지구에 배치하여 화북에서 올라올 국민당 증원군에 대비합니다. 10개 사단으로 장춘을 포위하고 흑산, 대호산에도 10개 사단을 배치하여 심양에서 올 국민당 증원군에 대비합니다. 9월 29일 동북야전군 제4군이 흥성을 점령하고 10월 1일 제2군과 제3군이 의현을 점령하여 금서와 금주를 제외한 요서 전역을 장악하고 금주를 겹겹히 포위합니다.

 

<요심전역도. 파란색이 국민당군, 빨간색이 해방군>    

※ 출처 : 중공군의 전략전술변천사. 직접 스캔떴는데 영 시원찮아서리...^^

 

금주는 관내와 동북을 연결하는 북녕철도가 통과하는 요충지이자 병참의 핵심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직접 심양까지 비행기 타고 날라와 금주를 구원하기 위해 제9병단 요요상의 지휘하에 11개 사단, 3개 기병여단으로 "서진병단"을 구성해 금주서쪽으로 진격토록 하고 해방군의 작전선을 차단토록 합니다.

또한, 금서와 호로도에 주둔한 4개사단과 화북에서 5개사단, 화동에서 2개사단 등 총 11개사단을 해상수송하여 "북상군"으로서 해방군이 선점한 탑산지구를 공격합니다. 10월 10일부터 시작된 양측의 결전에서, 맹렬한 국민당군의 공격에 해방군이 일시 밀리기도 합니다만 3~4개 사단을 동원해 제파공격을 퍼붓는 국민당군에 대해 동북야전군 제4군은 끝까지 막아냅니다. 요요상의 부대도 제5, 6, 10군의 방어로 신립둔에서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중에 포위된 금주에 대해 14일 11시 임표는 5개군을 집결시켜 총공격을 감행합니다. 30분만에 성벽을 돌파하였고 31시간의 전투끝에 15일 18시 금주는 함락되고 동북초비부사령관 범한걸을 생포합니다. 이로 인해 국민당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합니다. 17일에는 장춘을 수비하는 제60군 증택생이 반란을 일으켜 해방군에게 투항했고 19일에는 장춘 동북에 주둔한 제7군과 동북초비부사령관 정동국도 항복합니다. 장춘은 무혈함락되죠.

 

이런 상황에서 장개석은 위립황을 해임시키고 두율명을 새로운 동북초비사령관으로 임명한 다음, 그동안 해방군도 많이 지쳤을테니 이시기를 이용해 양쪽에서 총공격해서 금주를 탈환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보는 모조리 모택동에게 빠짐없이 보고됩니다. 되려 금주 서쪽에서 진격해 오는 요요상의 제9병단을 급습하여 분단시킨후 사방 120㎢에 걸쳐 포위해 2일간의 전투끝에 전멸시킵니다. 여기에는 국민당 최강의 신1군과 신6군의 기계화부대가 포함되어 있었죠. 하는 작전마다 되는 일이 없는 장개석은 "가슴이 타고 미칠 것같다"라고 발만 동동 굴립니다. 북상군 역시 돌파에 실패합니다.

 

 

 역습갔던 부하들이 되려 함정에 빠졌다는 보고를 받았을때 장개석이 대략 이런 표정이 아니었을지...--;

 

이것으로 심양은 완전히 고립됩니다. 11월 1일 임표의 총공세에 두율명은 혼자 비행기타고 도주했고 다음날 완전히 함락됩니다. 11월 6일에는 남은 잔여부대가 투항함으로서 동북 전역이 공산측의 손에 떨어집니다.

국민당군은 금서에서만 1만명이 해상으로 탈출했을뿐 47만명의 병력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이것은 국공내전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으로 해방군은 안정된 후방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병력에서도 공산군이 처음으로 역전하였는데, 100만이 넘는 임표의 동북야전군은 해방군 최강의 전력이었고 전략예비대로서 동북에서 화북으로, 다시 화중을 거쳐 단숨에 화남으로 진격함으로서 국민당군을 완전히 압도합니다. 따라서 승패는 완전히 기울어졌고 더이상 국공 양측의 주도권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소탕전이 됩니다.

 

※ 연도별 쌍방 병력 비교

 구분

1946년 7월 

1947년 6월

 1948년 6월

1948년 11월 

 국민당군

430만 

373만

365만 

290만 

 공산군

120만

195만 

280만

300만 

 

 

장개석은 심양에 4번이나 비행기 타고 죽으라 날라다니며 온갖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지휘했지만 야전지휘관들을 신뢰하고 최대한 전권을 보장했던 모택동과 달리 장개석의 이런 "히틀러식 간섭"은 본인도 피곤할뿐더러 정상적인 지휘계통을 무시함으로서 오히려 혼선만 가중되었습니다. 부하들을 못 믿었던 장개석의 성격탓이지만요.

 

 ※ 임표휘하에서 싸웠던 3만명의 일본군에 대한 에피소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싸웠던 일본인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들은 해방전쟁시기에 의사, 간호사, 기술자로 참여했으며 우리와 일본인들간에 우호적인 관계의 믿음을 강화하였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잔혹했지만 우리를 도와주었던 일본인들도 많았습니다." 1956년 6월 27일. 일본대표단과의 접견에서 주은래의 발언.

 

45년 8월 일본 항복후 일본군과 괴뢰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국공 양측은 경쟁적으로 이들을 포섭합니다. 이들에 대한 매수와 포섭에 대한 얘기는 "대동아전쟁비사 만주편"에도 언급되어 있죠. 이중에서도 임표는 일본군 3만명과 만주군 30만명을 자신의 휘하로 편입시켜 동북야전군을 강화합니다. 공산측은 장개석이 일본군 전범들을 군사고문단으로 고용했다고 맹비난을 했지만 동포들의 전쟁에 침략자들을 써먹은 것은 서로 똑같았습니다. 정치가들에게는 민족주의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보다 전쟁에 이기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죠.   

 

다음 차례는 유치가 지휘하는 화동지구였습니다. 여기에는 동북에서 혼자 도주해온 두율명을 비롯해 황백도, 황유, 구청천 등의 지휘하에 5개 병단 22개군 60개 사단 60만명이 서주의 진포철도와 농해철도를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제남전역의 패배로 산동성을 완전히 상실한 현재로서는 서주까지 뚫리면 상해와 남경까지 위협받을 처지였습니다. 이들에 대해 화동야전군 16개군 36만명과 중원야전군 16개군 15만명 등 총 60만명이 11월 6일 공격을 개시합니다.

 

※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 전투서열에 대한 참고 자료 : http://panzerbear.blogspot.com/2008/09/blog-post_6691.html

 

유치는 제남전역에서 패배하자 방어선을 공고히하고 서주를 동서로 관통하는 진포철도 확보에 총력을 기울기 위해 전선을 일단 축소키로 하고 11월 7일 우익을 맡고 있던 황백도의 제7병단을 서주 동쪽에서 서쪽으로 철수시킵니다. 이때 서주 동북지구를 맡고 있던 제3수정구 부사령관 하기풍의 제59군과 장극협의 제77군 2만3천명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모두 제3수정구 사령관이자 서북군벌 풍치안의 휘하였는데 얼마전에 옛 보스였던 풍옥상이 장개석에게 암살되자 사기가 극도로 떨어지고 공산군과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반란을 이용해 화동야전군이 농해철도 양쪽을 장악하는데 성공하고 제7병단의 퇴로가 차단됩니다. 11월 11일 제7병단은 화동야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됩니다. 장개석은 여기서 또 한차례 결전을 감행키로 하고 황백도에게 위치를 고수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나온 구청천의 제2병단과 이미의 제13병단은 중원야전군에 의해 저지됩니다. 그리고 22일 저녁 화동야전군은 제7병단을 전멸시키고 황백도도 전사합니다. 구청천은 황백도와 매우 사이가 나빴는데 황백도부대가 전멸할때까지 의도적으로 천천히 진격하여 사실상 제7병단의 전멸을 방관하죠.

 

제7병단의 전멸로 18개 사단이 소멸했고 서주를 관통하는 요충지인 숙현도 빼앗겨 유치의 국민당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고립됩니다. 24일 장개석은 남북에서 숙현을 동시 공격해 탈환하고 진포철도를 다시 개통시킨후 회하를 건너 남쪽으로 병력을 철수시켜 상해, 남경의 방어를 강화하기로 합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회해전역에서 진격하는 해방군. 출처 : 영화 "건국대업"의 한장면>

 

이를 위해 23일 중앙군으로 구성된 최정예인 제12병단(지휘관 황유)을 회하를 건너 북상시켰는데 해방군은 의도적으로 후퇴하여 이들을 유인합니다. 다음날에야 황유는 함정에 빠졌다고 판단하고 다시 회하를 건너 남쪽으로 철수하는데 바로 이때를 노린 중원야전군의 전면적인 역습을 받습니다. 쌍퇴집지구라는 곳에서 제12병단은 중원야전군 7개군에게 완전 포위됩니다. 황유는 여러차례 돌파를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장개석은 두율명에게 서주 포기를 명령하고 서주 남쪽에 있는 이연년의 제6병단과 유여명의 제4수정구에게 북상하여 이들을 구원토록 명령합니다. 이 역시 모택동에게 죄다 보고되어 11월 30일 두율명이 서주를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하자 고스란히 해방군의 함정에 빠져 두율명의 30만명이 청룡집, 진관장지구에서 포위됩니다.

 

 

회해전역을 다룬 중국 블록버스터영화 "집결호". "태극기 휘날리며"의 특수효과팀이 참여하여 중국 전쟁영화치고는 상당히 리얼한 전투신을 보여주죠. 

※ 사진출처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3918

 

12월 15일 먼저 제12병단을 전멸시키고 황유를 생포한 다음,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던 손원량의 제17병단도 전멸됩니다. 완전히 포위된 두율명의 부대들은 붕괴되기 시작하여 탈주와 항복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49년 1월 6일 총공세가 시작되었고 국민당군은 포위망 돌파에 실패합니다. 결국 10일 완전히 포위섬멸되어 두율명도 포로가 됩니다.

 

이 전역에서 해방군은 13만4천명의 피해를 입었고 국민당군은 55만 5천명을 상실합니다. 장강 이북 지역에서 국민당군 주력부대가 사실상 소멸되었죠. 남경, 상해도 해방군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됩니다. 이 충격으로 1월 21일 장개석은 총통자리에서 하야하고 이종인이 대리총통이 됩니다.

 

 

<회해전역도. 출처는 위와 마찬가지> 

 

한편 같은 시기. 화북초비사령관 부작의가 지휘하는 화북지구도 위기에 빠집니다. 이 방면을 위협하는 화북야전군에다 요심전역의 패배로 동북야전군까지 가세하여 완전히 열세에 처합니다. 장개석은 북평을 포기할 것인가, 고수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하지만 임표의 동북야전군이 남하하려면 적어도 3개월은 걸릴 것으로 판단하고 상황을 좀 더 지켜본 다음에 결정하기로 합니다. 물론 아무 근거도 없이 막연한 추측과 낙관에서 비롯된 엄청난 오판이었죠.

 

1948년 10월 북평을 방문한 장개석을 안내하는 부작의. 장개석은 몰랐지만 부작의의 주변은 이미 공산측 첩자들로 둘러싸여 모든 정보가 모택동에게 흘러가고 있었죠. 부작의는 투항하여 중공에서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지내죠. 장개석의 고관들은 이렇듯 배신을 때린후 중공에서 높은 감투를 씁니다.

※ 사진출처 : 영화 건국대업의 한장면 

 

부작의의 병력은 북평에 사령부를 두고 6개군 20개사단, 장가구 지구에 제11병단예하 7개사단, 천진 지구에 제17병단 17개사단 총 60만명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요심전역이 종료되자말자 신속하게 동북야전군 제4, 제11군을 산해관을 돌파해 북평으로 진격토록 합니다. 또한 화북 해방군은 산서성의 수도인 태원을 공격합니다. 또한 동북야전군 주력도 산해관을 통해 관내로 들어와 당산, 당고, 천진을 포위하여 국민당군의 퇴로를 차단시킵니다. 동북야전군 80만에 화북야전군 13만명 근 100만에 달하는 병력이었습니다. 

 

"동북야전군은 피로와 소모에 구애받지 말고 추위와 기아에 굴복하지 말고 오로지 신속한 속도로 전군을 이끌고 입관하여 화북야전군과 협력하여 화북의 국민당군을 포위 섬멸하라. 또한 화북야전군은 결전의 순간까지 결코 포위만 하고 공격해서는 안된다. 성급한 공격을 하여 장개석으로 하여금 평진의 국민당군을 해상 철수하는 것을 결심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모든 부대 배치가 완료되고 적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한 연후에 좌우 양쪽을 때려 각개격파하라. 부작의가 나와 담판하여 시간을 벌려고 한다면 우리 역시 그 계책을 역이용해 상대를 안심시켜서 신속하게 도피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할 것이다."   <12월 11일. 모택동의 "평진전역 작전방침>

 

위의 모택동의 작전지시를 보면 상대의 허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병력 운용에 대한 신속성과 과감한 결단력은 우유부단하고 성급하기만 한 장개석과는 완전히 대조되죠. 첩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활용할 능력이 모택동에게 없었다면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입니다.

 

11월 29일 화북야전군 제3병단은 희안, 시구보를 점령하고 장가구를 포위하여 부작의군의 측면을 위협합니다. 여기에 대응해 부작의는 제35군, 제104군을 급파합니다. 화북야전군 제2병단도 11월 30일 탁록과 하화원으로 진격합니다. 12월 5일에는 동북야전군의 선봉인 제11군이 밀운을 점령합니다. 부작의는 그제서야 화북야전군외에 동북야전군도 이미 관내로 들어왔음을 깨달았죠. 이는 적어도 3개월은 걸릴 것, 라는 판단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동북야전군이 자신이 있는 북평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공포감에 휩쌓인 부작의는 장가구로 향한 제35군을 도로 불러들이고 천진지구의 8개사단을 차출해 북평의 수비를 강화합니다.

 

12월 6일 제35군은 장가구의 포위를 뚫고 동쪽으로 가는중 신보안지구에서 포위당했고 제 104군 역시 포위당해 10일에 전멸당합니다. 동북야전군 주력 10개군(1,2,3,4,5,6,7,8,10,12군)은 주야를 가리지 않고 강행군하여 관내로 진입하여 이중 6개군으로 천진, 당고지구를 포위합니다. 또 나머지 4개군은 제11군과 화북야전군 제7군과 연합해 북평을 포위합니다.

 <평진전역도. 사진 출처는 위와 마찬가지>  

 

22일 신보안에서 결국 부작의 휘하 최정예인 제35군 예하 2개사단이 전멸당했고 장가구에 남은 수비대는 장가구를 버리고 탈출하다가 화북야전군과 동북야전군의 추격을 받아 전멸당합니다. 장가구도 함락되죠. 해를 넘거 1월 14일 22개사단으로 천진을 포위 공격해 29시간의 격전끝에 함락시킵니다. 천진이 함락되자 당고 수비대 5만명이 해상으로 철수하였고 17일 당고도 함락되죠.

 

 

이렇게 되자 부작의는 북평에서 완전히 고립됩니다. 100만에 달하는 동북, 화북야전군에게 겹겹히 포위된 부작의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고 해방군의 투항 공작에 응하여 양자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1월 22일 25만명과 함께 투항합니다. 장개석은 부작의의 배신을 눈치채고 아들 장경국을 보내 중앙군이라도 북평비행장을 통해 청도로 철수시키려고 하나 부작의는 거부합니다. 이로 인해 국만당군은 화북에서도 완전히 소멸되었고 52만명의 병력을 상실합니다. 공산군도 39만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항복한 국민당군으로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양자강 이북지역은 모조리 공산측의 손에 넘어갔고 이제 양자강 이남도 위협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국민당으로서는 공전의 위기에 처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