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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대사] ,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17화 (전세 역전되다)

구름위 2013. 12. 12.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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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국공내전에서 어떻게 해서 공산당은 인심을 얻고, 국민당은 인심을 잃었던 것일까요. 공산당이 옳고 국민당은 틀렸기 때문인가, 정말로 공산당이 국민들 앞에서 국민당보다 더 나은 뭔가를 보여 주었기 때문인가.

이는 간단하게 이분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47년 공산군이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여 국민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단숨에 황화를 건너 대륙 전역으로 진격했듯, 정확히 20년전인 1927년에 장개석의 북벌 명령에 따라 10만의 "국민혁명군" 역시 국민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양자강을 건너 북상하여 손전방, 오패부, 장작림같은 군벌들과 100만이 넘는 군벌군대를 일방적으로 격파하고 2년만에 대륙 전역을 석권합니다.

 

1929년에는 장개석이, 1949년에는 모택동이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국민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 당시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어느 한쪽을 택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1929년에는 기존 군벌들의 부패와 무능함때문에 장개석의 "삼민주의"를 택했던 것이고 1949년 역시 마찬가지였죠. 북벌과정에서 "개혁"을 내세웠던 장개석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듯 모택동 역시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그 어떤 보증도 없었습니다.(언제나 정치가의 공약은 空約인 법이죠.) 국공내전에서 승리한후 공산당도 과거 국민당처럼 철저하게 보수 반동화되었으며, 지주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농토는 처음에는 농민들에게 재분배되었지만, 막상 전쟁이 끝나자 당이 몰수하여 집단농장으로 만들어 농민을 농노화 했을 뿐이죠.(소위 인민공사운동) 과연 이것을 "개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중국 내전은 결코 미국의 남북전쟁이 아니었습니다.(물론 그렇다고 한국전쟁이나 월남전처럼 강대국들의 대리전쟁 또한 아니었지만) 남북전쟁에서 미국민들은 자신의 사상과 신념에 의해 어느 쪽을 지지할 것인가의 선택의 여지가 명확히 있었습니다. 반면, 중국 내전에서 중국인들은 군벌들이 벌이는 전쟁을 억지로 강요받았을 뿐이며, 단지 소모품이었을뿐 그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었죠. 국민당과 마찬가지로 공산당 역시 "개혁"은 교육받은 소수의 엘리트가 할 일이지, 무지하고 무식한 대다수 민중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민중은 단지 그들의 지도를 받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민중이 정치에 참가한다면 자신들의 지위 자체가 위협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대륙은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대중을 지배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여전히 요원할 뿐이죠.

 

"3개월, 길어도 6개월이면 공산비적을 전부 소탕할 것이다!"

 

1946년 6월 26일. 장개석은 2차 정전을 깨고 정규군의 80%에 달하는 약 200만명을 투입하여 만주전역을 비롯해 관내의 화북과 화중, 화남 등 대륙 곳곳에 퍼져 있던 모든 "해방구"에 대해 일제 총공세에 나섭니다. 정부군(이하 국민당군)의 전략은 "관내를 먼저 안정시키고 관외는 나중에 생각한다"라는 것으로, 우선 연안을 비롯해 관내에 있는 공산군을 격멸한 다음 만주로 진격하여 임표의 동북민주연군을 격파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도처에 지나치게 병력을 전개하고 병참이 길어진 상태인 것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죠. 더욱이 공산군의 역량과 피아간의 전력 차이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고 공산군에게 슬슬 밀리기 시작하는 47년 7월 4일에 와서야 국가총력전으로서 총동원령을 선포합니다.

 


1946년 7월의 상황인데, 맨위의 만주쪽을 보면 하얼빈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국민당군은 정지해 있죠. 이들이 점령한 동네는 대도시 중심으로 그야말로 가는 선처럼 길게 뻗어져 있습니다. 신나게 진격할때는 상관없었지만 한계에 직면했을때 측면에서 역습을 받으면 어떤 참극을 낳을지는 너무나 뻔했죠. 모택동은 바로 이것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모든 전력을 동북과 화북에 집중하기 위해 광동, 절강, 강소, 호남, 하남성 등 화중, 화남일대의 분산된 해방구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고 노약자들을 추려내는 등 병력을 재편성합니다. 그는 "적극방어"전략으로서, 어떤 한 지역을 고수하는데 연연하지 않고 전력을 보존하면서 유리한 곳으로 적을 최대한 유인해 분산되었을때 포위 섬멸하여 피아간 전력 차이를 점점 줄여나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기계화부대와 차량, 제공권까지 확보한 국민당군이 월등히 우세한 기동력과 정찰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면 한낱 잠꼬대같은 소리였겠지만, 국민당군 지휘관들은 자기힘의 절반도 활용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양측 지휘관들간의 역량 차이와 국민당군 부대간의 상호 협조 부족, 국민당군 지휘관들의 무능함과 상대에 대한 경시로 주도권은 서서히 공산군쪽으로 기울어지죠. 무엇보다 국민당군 지휘관, 참모진 내부의 첩자들이 제공하는 중요 정보들이 바로 국민당군의 작전 실패와 공산군 승리에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됩니다. 반면 국민당측은 공산군 내부의 프락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거나 되려 의도적으로 흘리는 역정보에 당하기 일쑤였죠.

 

특히, 46년 5월 4일 이른바 "5․4 지시" 즉 "모든 토지는 농민에게 골고루"라는 토지개혁을 선포하고 공산군이 장악한 모든 해방구에서 토지개혁이 실시됩니다. 이는 장개석이 북벌때부터 약속하고도 끝까지 지키지 않은 것으로, 당시 중국 인민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를 받게되는 중대한 이유가 되죠.

 

그럼에도 여전히 국민당군은 모든 면에서 압도적 우세로 공산군을 밀어붙이며 6개월안에 승리를 거두는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국민당측의 군사력은 청일전쟁이래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고 병력에서 2배이상, 화력에서 10배이상의 우세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골이 난 트루먼과 마셜에 의해 46년 7월부터 47년 5월까지 무기 금수와 차관 제공이 중단되었지만, 무기와 장비는 충분했으며 자금도 그동안 쌓아둔 외화와 금덕분에 풍족했고 모든 면에서 공산군을 압도했습니다. 마셜은 여전히 차관을 무기로 국공 양측을 부지런히 중재하여 새시대의 세계 경찰 노릇을 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장개석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47년 1월 8일에 특사 임무에서 해제되어 미국으로 돌아감으로서 미국의 중재는 완전히 끝남)  

 

6월 26일, 국민당군은 30개 여단 30만명을 동원해 이선념, 정위삼이 지휘하는 중원야전군을 공격하고, 유치가 지휘하는 15개 여단 10만명으로 유백승, 등소평이 지휘하는 진기노예(산서, 하북, 산동, 하남성의 통칭) 야전군을 공격합니다. 또, 58개 여단이  강소, 안휘성 일대의 화동야전군(구 신4군) 5만명을 공격합니다. 동북에서도 10월에는 남만주의 안동, 통화 등을 점령하고 조중국경의 장백산맥까지 밀어붙입니다. 8월 30일에는 북경 동북에 있는 열하성의 성도인 승덕을 점령하고 10월 11일에는 장가구를 점령하는등 해방구의 중심지와 전략적 요충지, 철도 요지를 차근차근 점령해 나갑니다. 화중, 화남과 양자강 하류에서도 공산군을 몰아냅니다.

 

그러나 점령지의 확대는 되려 병력의 분산과 병참의 부담으로 이어졌을뿐, 정작 공산군과의 술래잡기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공산군은 주력과의 결전은 회피하면서도 적절하게 반격하여 공격해 오는 국민당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자신들의 피해는 최소화했습니다. 모택동은 "적 정규군을 공격할때는 반드시 적보다 우세한 병력을 확보해야 한다. 적어도 1:3은 되어야 하며 1:4이상이면 좋다. 한부대를 섬멸하고 그 다음부대를 섬멸하고 다시 세번째 부대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각개격파해야 한다"라고 지시합니다. 이에 따라 남만주에서 공산군의 기습공격으로 195사단이 격파당했고 서주전역에서는 제3사단장이 포로가 되었으며, 제 47사단도 괴멸당하여 서주 초공사령관이자 장개석 비장의 "오호상장"중 하나인 유치 이급상장(대장)이 해임당합니다. 

 

유치(1892~1970) : 북벌때부터 장개석의 심복이었으나 국공내전때는 "멍청한 돼지"라고 불리운 아저씨(낯짝부터가) 취미는 재물 모으기. 하도 무능해서 장개석이 대만으로 튈때도 얘는 버리고 가 인도네시아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노후를 마감했다고 합니다..(뭘 가르쳤는지는..) 나름 안습한 사나이. --;;;

※ 출처 : http://zh.wikipedia.org/wiki/%E5%8A%89%E5%B3%99

 

공산군에게 후퇴란 단지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옮기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전적으로 도보에 의존했고 제대로 된 항공전력도 없었으나 지형지물과 첩보력, 철저한 사전정찰로 오히려 차량과 항공기를 가진 국민당군보다 기동성에서 더 우세했습니다. 국민당측의 전략적 포위망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지방행정기관의 통치력도 약했으며 전방의 병력이 부족하자 후방의 병력을 무작정 빼냄으로서 후방은 더욱 약화됩니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채 맹목적으로 추격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것은 이겨도 이긴 것이라 할 수가 없었죠.

 

보스인 장개석조차도 부지런히 승전보고를 하는 부하들을 불신하고 자신을 바보취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가서 실상을 조사하면 전선에는 적이 아예 없거나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교전을 하고 수천 수만을 사살했다고 보고한다." 반면 공산군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칭찬을 합니다. "그들은 주먹구구식이나 애매한 생각은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다. 형식적이거나 대충 끝내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로이드 이스트만의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47년 1월에는 23개 사단 53개 여단을 동원해 산동성의 교통요충지인 임기지구에서 대규모 공세를 개시합니다. 육군 참모총장이자 장개석 심복중 가장 유능한 오호상장인 진성이 직접 와서 독전을 하며 "우리의 승패는 이 노남전역에 달려 있다. 승리만이 허용할뿐 패배는 없다"라고 외칩니다. 이에 화동야전군을 지휘하는 진의는 공격군을 깊숙히 유인한 다음 병력을 집중시켜 섬멸키로 계획합니다. 따라서 최대한 지연전술을 쓰면서 역습을 가해 국민당군 제25, 65사단을 포위 섬멸합니다. 그리고 임기를 포기하고 철수하자 국민당군은 "공산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한다"라고 판단하여 추격합니다. 제2전구 부사령관 이선주가 지휘하는 3개군 9개사단이 공산군의 포위망에 걸렸고 2월 23일 퇴로가 차단된채 사면에서 포위 공격을 받아 말그대로 섬멸당합니다. 이선주를 비롯한 5만 6천명이 살상 또는 포로가 되어 국공내전 최대의 참패중 하나가 되죠. 또 산동, 발해, 효동의 3개 해방구가 하나로 이어지죠.

 

산동남부에서는 화동야전군이 국민당군 제7사단을 비롯해 3개사단을 격파했고, 임표의 동북민주연군은 신개령에서 제25사단을 전멸시키고 47년 4월 3일에는 백두산 서쪽 임강에서 제89사단을 포위 섬멸함으로서 국민당군은 4만명을 상실했고 동북에서의 공세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렇듯 국민당측의 대규모 공세가 46년 말부터 실패의 연속이 되었고 70만명의 최일선 병력을 상실합니다. 많은 부대가 포위 섬멸되었고 전선은 연장될대로 연장됩니다. 반면 공산군은 막대한 장비와 무기를 획득하고 투항한 포로들 상당수가 전향함으로서 병력이 되려 늘어납니다. 결국 장개석은 47년 3월부터 "전면 공세"를 중단시키고 산동, 섬북 등 몇몇 중요지역에 대해서만 집중공격하는 것으로 수정합니다.

 

47년 3월 호종남이 25개 여단 20만명으로 공산군의 심장부인 섬북 연안을 공격하여 19일에 점령하는데 성공함으로서 내전에서 국민당군의 우세는 절정에 달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연안은 공산군에 의해 의도적으로 포기되었고 호종남은 공산군의 주력을 추격하는데는 완전히 실패합니다. 되려 큰 희생만 치루고 병참 사정만 나빠집니다. 공산군에게 연안의 상실은 상징적인 것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대신 물자가 풍족한 이웃동네 산서성을 침공하여 산서왕 염석산만 압박받았습니다. 염석산은 "장개석은 모택동에게 살찐 암소를 내어주고 여윈 말을 차지했다"라고 독설을 하죠.

 

임기지구에서 대참패를 당한 직후인 4월, 육군 총사령관 고축동의 지휘하에 60개 여단 45만명의 병력으로 산동지구에 대한 공세를 재차 시작합니다. 그러나 5월 16일 맹량고전투에서 제74사단이 포위되어 사단장 장영보는 자살했고 3만 2천명이 살상 또는 포로가 되는 대참패를 당합니다. 제74사단은 중앙군중에서도 장개석 직속의 "5대 주력"중 하나로, 신1군, 신6군과 함께 미국식으로 무장한 국민당군 최강부대였습니다. 장영보중장 또한 국민당군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중 하나로 손꼽혔고 43년 상덕탈환과 45년 지강보위전에서 큰 활약을 하여 일본군과의 사단급이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몇 안되는 명장이었습니다. 패배 원인은 타 부대와의 협조 실패와 지나친 적전 돌출로 포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장개석은 포위된 제74사단을 되려 공산군을 역 포위할 수 있는 호기로 생각하고 "철퇴 불가"명령을 내렸으나 증원부대의 공격은 공산군의 강력한 저지로 모조리 실패함으로서 포위망을 뚫지 못한 제74사단은 전멸당하고 맙니다. 이 패배는 장개석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고 제1병단 사령관 탕은백이 직위해제됩니다.

 

※ 항일명장 장영보와 맹량고전투 : http://blog.daum.net/shanghaicrab/12251006

 

경제적으로도 국민당정권은 점점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45년 8월 중국은 9억달러의 외환보유고와 4억달러의 황금, 10억달러의 귀속재산을 보유했으나 46년 말에는 4억 5천만달러로 감소했고 47년 6월에는 3억 달러로 감소합니다. 재정적자는 심각했는데 적자가 세입의 60%를 넘어서죠. 이때문에 통화팽창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그야말로 대공황시절 독일 바이에른 정부에 비견될 정도였습니다. 45년 9월의 물가를 100라고 했을때 47년 1월에는 6.7배, 48년 1월에는 51배가 넘었고 패전이 짙어지는 6월이후에는 매월 수십배에서 수백배씩 뛰어 오릅니다. 밀가루 한포대 사려고 가마떼기로 돈을 실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죠.

 

근본적 이유는 당연히 막대한 군비지출때문이었지만, 이른바 "4대가문"이라 불리우는 장개석, 송자문, 진과부, 공상희 일가가 대부분의 국가 기업과 금융을 장악하였고 이들은 한푼도 세금을 내지 않았습니다. 4대가문은 중국 전체 공업의 70~80%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출의 25%만이 국고세입으로 채워질 수 있었고 나머지는 외화와 귀속재산의 판매로 채워졌습니다. 이런 상황은 국민들의 불만과 불신으로 이어졌고 인플레로 인한 생활고로 도처에서 폭동과 파업, 농민봉기가 일어납니다. 물론 장개석은 가차없이 진압하지만 이런 상황이 국민당이 패배하는 결정적인 원인중 하나가 되죠.

 

국민당군의 공세가 한계에 직면한 47년 6월 30일, 모택동은 "해방전쟁 2년차 전략방침"으로서 그동안의 방어전략을 버리고 전면적인 "전략공세"를 명령합니다. 양측의 군사력은 1년전과 비교했을때, 국민당군은 430만명에서 373만명으로 감소한 반면 공산군은 120만명에서 195만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진기노예 야전군 12만명이 일제히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진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 전선에 걸쳐 파죽지세로 반격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