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사,,국공 내전..

[중국근대사]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16화 (장개석의 오판)

구름위 2013. 12. 12. 13:06
728x90

 

46년 6월 7일.

국민당군의 맹추격을 받아 송화강을 건너 북만주의 하얼빈까지 쫓겨간 임표는 하얼빈을 버리고 잔존부대를 거느리고 중소국경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까지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승리를 눈앞에 둔 바로 그때 장개석은 진격중단과 정전을 명령합니다. 마셜의 압박과 5억달러의 원조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고 또 공산군의 역량을 과소평가한 것이죠. 장개석은 어차피 다 이긴 싸움이고 잠시 마셜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협상이 깨지면 그때가서 쭉 밀어버리면 된다라고 태평하게 생각합니다. 엄청난 착각이었죠.

 

이런 결정에 대해 당시 동북 초비사령관이었던 백숭희가 남경으로 급히 날라와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된다. 공산군의 씨를 말려야 한다"라고 강력하게 건의했지만 눈앞의 돈에 눈먼 장개석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광서군벌출신으로, 중국인들에게는 "작은 제갈량"으로 불리었고 스틸웰에게 장개석 참모들중 가장 유능하다는 평을 받았던 백숭희는 이 일을 "평생의 유감이다"라며 한탄합니다. 장개석 자신도 이 결정을 가장 큰 실수라고 인정했는데, 나중에 蘇俄在中國: 中國與俄共30年經歷紀要 라는 자서전에서 "이때의 나는 너무 자신이 넘쳤고 공산비적을 과소평가했다"라고 말합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백숭희. 왠지 중국인이면서 독실한 이슬람교도라고 한다는...-.-

※ 출처 : http://blog.joinsmsn.com/media/index.asp?page=16&uid=lless&folder=75&page_size=5&viewtype=1

 

장개석에게 우호적이었던 레이황조차도 "장제스 일기를 읽다"에서 그의 독선과 아집을 비판하고 "가장 잘나갔던 때(대일 승전일)에 그는 알아서 물러났어야 했다"라고 써도록 만든 우리의 장아저씨는 이때 가장 오만하고 어리석은 실수를 거듭합니다.

 

그 중 하나가 운남군벌 용운의 제거였습니다.

근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는 운남성은 고대 중국에서는 "남만"으로 불리운 곳으로, 제갈량과 맹획의 칠종칠금한 에피소드로 유명한 동네죠. 명나라전까지만 해도 독립국가였던 운남은 이족, 회족, 장족 등 다수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으며 그만큼 배타적이고 고립지향적이죠. 군벌시대에도 반독립된 상태였습니다.

 

 

지금도 대략 이런 분위기인 운남... 좋게 말하면 자연의 혜택을 받은, 좀 솔직하게 말하면 저개발된 전원풍의 동네..     ※ 출처 : http://www.cyworld.com/itsnodoubt/3535467

 

그런데 일본의 침공을 받고 동남 해안가를 상실한 중앙정부가 근거지를 서쪽으로 옮기면서 정부기관과 중앙군이 대거 운남으로 들어오면서 운남성 정부와 충돌하게 되죠. 당시 운남성을 통일하고 성장까지 된 로로족출신의 군벌 용운은 중앙정부에 대립하지 않고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합니다. 약 20만의 운남출신 병사들이 중국 각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버마와 중국을 연결하는 레드공도, 험비루트가 이 운남성의 곤명이 종착지라는 점에서 장개석에게 운남성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 장개석에게 용운은 전적으로 충성하고 협력을 아끼지 않았고 이후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운남군 4개 사단 5만명을 머나먼 만주로 보냅니다.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용운은 장개석의 직계 심복이 아니라 동맹자에 가까운 관계였기에 "나 혼자 모든 것을 독식하고 싶었던" 장개석으로서는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제거해야할 대상에 불과했죠.

 

45년 10월 3일 새벽 4시. 장개석은 두율명의 제5군을 동원해 곤명의 운남군 사령부를 총공격합니다. 4개 사단을 만주로 파견한 용운은 수중에 실질적인 병력이 없는 상태였고 외곽에 있던 증원병력은 곤명 40마일밖에서 부랴부랴 오다가 중앙군의 기습을 받아 괴멸당합니다. 용운은 하루동안의 저항끝에 투항하였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된채 장개석이 있는 중경으로 끌려가 오랜 유폐생활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홍콩으로 탈출한 다음 공산당에게 투항하여 58년까지 전국국방회의 부의장을 지내게 됩니다.

 

용운의 몰락은 장개석의 정적 제거의 시작에 불과했고 민주동맹의 이공박, 문일다가 암살되고 반장개석 운동을 주도하던 교수, 학생들도 탄압받고 제거됩니다. 이런 사건들은 장개석에 대한 국내외의 지지를 떨어뜨리고 정치가들과 군벌들의 극도의 불신을 사게 되며 나중에 전세가 기울어지자 이들과 군벌군대가 줄줄이 투항하는 결정적 원인이 됩니다. 우선 운남군부터 완전히 싸울 의지를 잃고 46년 3월 제184사단이 공산군에게 제일 먼저 투항하고 총부리를 아군에게 돌리죠.

 

잘 알려진 것이지만, 만주에서의 정책에도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한국전쟁때는 제7사단장으로 한만국경까지 갔다 중공군에게 아작났었고, 국공내전때는 주중 미군사고문단장이었던 데이비드 G 바준장은 보고서에서 "국민당은 일본에게 해방된 지역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되려 점령군으로 행세했으며 효율적인 지방 통치 기관도 만들지 못한채 혼란만 가중시켰다"라고 말합니다. 장개석은 동북 3성을 중국이 회복할 땅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경제적, 군사적 필요에 의해 점령했을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동북에서 여전히 영향력이 있던 장학량은 그대로 유폐시켜놓고 동북계열의 군대도 만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죠. 성장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도 타지역 출신들이 독식합니다. 게다가 이런 중앙에서 나온 이들조차도 서로 파벌싸움만 벌이죠.

 

반면, 공산군은 동북군 출신들을 대거 만주로 진입시켜 동북 사람들의 인심을 얻는데 노력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공산군의 세력은 국민당군에 비해 훨씬 미약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특유의 번식력과 생명력으로 점점 세력을 확대해 나가고 강력해집니다. 북만주에서만도 공산군에 입대한 사람이 383,500명에 달했고 후방지원요원은 292,300명이었습니다.(동북 전체에서 160만명) 또한 수류탄, 박격포탄, 군복, 군화 등 막대한 군수 물자를 공산군에게 제공하여 연안을 상실한 공산군에게 강력한 보급 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죠. 반면, 동북의 인심을 잃은 국민당군은 동북에서 병력과 물자 확보에 큰 애로를 겪어야 했습니다. 가령 47년 5월 심양에서 4천명을 징병하려고 했으나 단지 82명만이 응모했고 그중에서 39명만을 입대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다보니 화북, 화중에서 기나긴 병참선을 유지해야 했고 병력의 대부분이 기동성을 상실한채 철도 경비대로 전락하죠.

 

소련은 소련대로 국민당측의 작전을 방해하고 공산군의 무장을 돕습니다. 45년 8월 14일에 체결된 중소우호조약에 의거해 소련은 국민당군의 동북 접수에 적극 협력할 의무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중국의 분열과 만주 지배를 꿈꾸던 스탈린은 교묘하게 악용합니다. 철수하면서 각종 공장 시설과 물자를 싹싹 긁어갔고 관동군으로부터 압수한 방대한 무기 대부분은 임표의 공산군에게 넘깁니다. 무기는 대부분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같은 경화기였지만 그 양은 50만명을 무장시킬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덕분에 임표의 "동북민주연군(나중에 동북야전군으로 개칭)"은 공산군중에서도 최강부대가 됩니다. 또한 의료품, 자동차, 석유 등 물자도 공급하고 북만주의 철도를 복구시켜 공산군의 병력 기동에 큰 도움을 줍니다.

 

흔히 장개석이 패하고 모택동이 이긴 것을 "국민당은 인심을 잃었고, 공산당은 인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하지만 이는 수많은 요인중의 단지 지엽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장개석의 실패는 처음부터 준비없이 무턱대고 대규모 병력을 무리하게 투입했고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기회마저 스스로 날리버렸기 때문입니다. 설령 마셜의 조정이 없었다면, 장개석이 하얼빈 공략 중지를 명령하지 않았다 해서 과연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사실 의문을 줄 만큼 국민당의 우세는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었죠.(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로이드 E. 이스트만)

중국인들의 지지가 국민당에서 공산당으로 기울어진 것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장개석의 실정이 거듭되고 전쟁의 패색이 점점 짙어지면서 국내의 인플레이션이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했기 때문입니다. 미, 소의 개입과 간섭 역시 장개석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즉 어느 한가지 이유때문이 아니라 이런 수많은 내외부의 요인들이 누적되면서 전세는 점차적으로 공산군에게 기울게 됩니다.

 

마셜이 어렵사리 중재했던 제2차 정전은 겨우 20여일이 지난 6월 26일 완전히 깨지고 국민당군은 다시 총공세에 나섭니다. 열받고 진절머리가 난 마셜은 다 때려치우고 미국으로 돌아가 트루먼에게 잉여무기 판매 중지와 차관제공 중지를 건의하였고 트루먼은 8월 18일 정식으로 선포합니다. 이제 동맹자조차 등돌리게 만든 국민당군은 대규모 공세는 이미 우세와 공격능력을 상실해 있었습니다. 전투는 교착상태가 되었고 국민당군은 공산군의 훨씬 강력해진 저항에 막혀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했으며 되려 한계에 다달은 병참선이 노출되어 공산군에게 역습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그러했고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국민당군도 똑같은 수렁에 빠진 것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