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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대사]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18화(공산군의 대공세)

구름위 2013. 12. 1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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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3월 5일.

연안에서는 공식적으로 당의 군대를 "중국 인민해방군"임을 선포합니다. 그전의 "홍군"이니 "팔로군"이니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이니 하는 명칭 대신 중국 곳곳에 산재되어 있던 각 해방구 산하의 군대를 "黨軍"으로서 공산당 중앙 소속의 통합된 군대가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더이상 지방정권이 아닌, 국민당 정권과 대등한 입장으로서 "천하"를 다투겠다는 것이죠.

 

예하 부대는 총 5개 야전군으로 구분되어, 서북야전군, 중원야전군, 화동야전군, 동북야전군, 화북야전군으로 편성됩니다. 48년 11월 1일에는 다시 각 야전군의 명칭을 개칭하여 서북야전군을 제1야전군, 중원야전군을 제2야전군, 화동야전군을 제3야전군, 동북야전군을 제4야전군으로, 화북야전군은 인민해방군 총사령부 직할부대로서 화북병단으로 개칭되었습니다.

 

46년 7월부터 47년 6월까지 꼭 1년간 국민당군은 근 10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하였고 이중 다수가 미국식으로 무장한 최정예부대였습니다. 게다가 잘 훈련된 병력의 상당수가 해방군측으로 전향하거나 투항한 것이기에 해방군의 전력은 강력해지고 국민당군은 당연히 상대적으로 약화됩니다. 점차적으로 균형은 해방군쪽으로 기울어지죠. 공산군의 수도인 연안의 함락은 상징성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장개석은 매우 좋아라 했겠지만) 역설적으로 연안의 함락은 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정점을 찍었다는 반증이었습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장개석이 키워낸 인물이자 진성, 탕은백과 함께 장개석에게 가장 신임받은 장군입니다. 전략예비대인 제1사단의 지휘를 맡았고, 항일전쟁 초반에는 제1군을 지휘하여 상해, 무한전역에서 큰 활약을 했으나 이후에는 연안 포위 작전에 투입되어 국공내전기까지 이 일만 전담합니다. 결국 연안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여 그의 인생의 절정을 누리지만 금새 연전연패의 연속이었고 군 전체가 와해되어 50년 3월에 대만으로 도주합니다. 살아남은 병력 일부는 저 머나먼 남쪽의 태국국경까지 내려가 그쪽 동네를 아편촌으로 만들죠.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이기도 합니다.-.-

 

 

부하들의 말로는 어쨌든 그래도 천수를 누리고 총통이 장례식에 친히 조의금 내려고 오셨으니 나름 행복한 양반이었는듯..--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whtjddi/120088194459

 

매우 융통성있는 전략 기동으로 패퇴해도 주력을 온존하게 보전했던 해방군과 달리, 장개석은 지역 고수를 고집하다가 종심이 얇아져 해방군이 손쉽게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포위 섬멸당함으로서 귀중한 병력을 고스란히 상실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들을 구원하고 영토를 재탈환하기 위해 후방의 병력을 계속 빼내지만 밑빠진 독 물붓기였고 되려 후방까지 텅비게 됩니다. 이 것이 동북에서 한번 밀리자 1년만에 그 넓은 대륙에서 방어선 한번 구축하지 못한채 단숨에 아래까지 쭉쭉 밀리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죠.

 

아직은 국민당군이 전체적으로는 우세했지만(국민당군 373만, 해방군 195만) 국민당군은 장개석이 전략적 판단없이 무작정 땅따먹기식으로 점령지를 확대하여 도처에 병력이 분산된데다 병참이 심각하게 악화되었습니다. 정예부대를 상당수 상실함으로서 공격력과 기동성을 갖춘 병력은 전체 300개 사단중 겨우 40개 사단에 불과했습니다. 진격은 점점 둔화되면서 여름과 가을부터 중국 대륙 도처에서 해방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는데, 특히 가장 심각한 상황은 장개석이 최정예부대를 쏟아넣은 동북지역이었습니다.

 

임표는 9월부터 11월까지 50만의 병력으로 이른바 "추계 공세"를 시작하여 길림, 장춘, 사평 등 대도시에 주둔한 국민당군을 도처에서 맹공을 퍼붓습니다. 대도시와 철도를 중심으로 분산배치된 국민당군은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보다 수동적으로 적의 공격에 질질 끌려다님으로서 방어선은 도처에서 빈틈이 생깁니다. 임표는 이 빈틈을 과감하게 공격해 동북에서의 국민당군의 방어 전략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상황이 악화되자 10월 8일 장개석이 직접 심양까지 비행기 타고 날라가 시찰하고 화북에서 5개 사단을 빼내 원군을 보내었으나 장춘과 길림, 사평, 철령, 요서 지구 등 전전선에서 기습 공격을 가해 북상하는 국민당 증원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약 50일간의 전투에서 국민당군 6만 9천명(공산측 주장)이 소멸되었고 15개의 중소 도시가 공산측으로 넘어갑니다. 뒤이어 12월부터 시작된 동계 공세로 48년 2월 26일에는 영구가 함락되고 3월 8일에는 그동안 4번이나 일진일퇴를 했던 사평이 결국 함락되었으며 다음날에는 길림까지 함락됩니다. 또 철도 대부분도 장악하였고 국민당군은 장춘, 심양, 금주 이 3개 지역에 고립되어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독일 제6군마냥 얼마안되는 항공수송으로 근근히 버팁니다. 결국 지치고 배고픈 국민당군은 48월 11월 요심전역에서 완전히 전멸되거나 투항하여 동북에서의 전투는 공산군의 승리가 됩니다.

 

 

하얼빈에서의 임표와 참모들. ※ 사진출처 : http://blog.chosun.com/chikookp/4786696 

 

한편, 관내에서도 해방군의 공세로 국민당군은 도처에서 밀리고 있었습니다. 6월 30일, 황화를 일제히 건너 노(산동성)서남지구를 장악한 등소평, 유백승의 중원야전군(구 진기노예야전군, 작전범위 : 산서, 하북, 산동, 하남성) 4개 종대(軍) 12만명이 회하를 건너 남하하여 대별산지구를 공격해 국민당군 3만명을 격파하고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국민당의 심장부인 남경과 무한을 위협합니다.

 

 

 

 

현재의 대별산이랍니다.   ※ 출처 : http://cafe.naver.com/mountainchina/99

 

이에 국민당군 국방부장 백숭희가 33개 사단을 직접 지휘하여 대별산지구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했지만 패퇴하여 1만명의 사상자를 냄으로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때문에 국민당군의 후방이 매우 취약해지고 남북을 관통하는 농해철도와 평한철도가 분단되어 병참선이 위협받게 됩니다.

 

한편, 섬서남부에서는 중원야전군소속 태악병단이 8월 22일 황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안을 위협했으며, 진의, 속유가 이끄는 화동야전군은 산동성 남부 맹량고전투에서 국민당 "5대주력"의 하나인 장영보중장의 제74사단를 문자 그대로 전멸시킨 후 9월에는 안휘성, 하남성, 강소성 일대에서 거대한 "해방구"를 구축합니다.

 

 

이 넙죽한 영감님이 인민해방군 10대 원수중 하나인 진의. 환남사변에서 붕괴되었던 신4군을 다시 재건했고 국공내전에서는 환남사변의 주모자였던 "오호상장" 고축동에게 결국 복수전을 해낸 명장입니다.

 

※ 사진 출처 및 관련 자료 : http://kr.blog.yahoo.com/gjw002/1139

 

47년 3월에 호종남에게 연안을 빼앗긴채 후퇴했던 하룡의 서북야전군(구 진수해방군)은 호종남군을 유인하여 8월 섬서성 북쪽 사가점이라는 곳에서 국민당군 제136사단을 격파하여 주도권을 되찾습니다. 이 전투에서 해방군 1천8백명의 사상자에 대해 국민당군은 6천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섬북에서 전세는 역전되어 도처에서 해방군의 반격에 밀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섭영진의 화북야전군(구 진찰기해방군)은 10월부터 11월까지 두달간 석가장, 청품점에서 국민당군 제3군을 전멸시키고 군사령관 나역융을 포로로 했으며 48년 5월에는 화북, 열하, 차하얼성과 산서성에서 염석산군과 부작의군에게 치명타를 가해 염석산을 태원에 고립시키죠.

 

이렇듯 도처에서의 패퇴로 47년 7월부터 12월까지 6개월동안 국민당군은 최일선 병력 75만명을 상실합니다.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더이상 전쟁의 양상은 공산군과 해방구에 대한 국민당군의 공격이 아니라, 국민당 핵심지배지역에 대한 해방군의 전면 공세였습니다. 이로 인해 호북, 하남, 안휘, 하남, 강소, 섬서 등 양자강이북의 전 지역에 걸쳐 국민당군 90개사단이 도처에서 고립되고 분단됩니다. 대륙 남북을 가로지르는 농해철도와 평한철도도 화동야전군에 의해 분단당해 북쪽으로 올라가는 병참도 막혀 버리죠. 장개석은 "전략적 공세"에서 "전략적 방어"로, 다시 "지역 방어"로, "거점방어"로 점점 전략을 축소시킵니다. 이는 고립과 각개격파가 장기인 해방군이 가장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동하는 국민당군. 건국대업의 한장면 

 

동북은 물론, 화북과 화중에서 국민당군은 종심방어는 고사하고 북경, 천진, 태원, 수원, 청도, 제남 등 대도시와 주요 거점만을 간신히 확보한채 성벽을 방어물로 삼아 도시안에 틀어박힙니다. 도시에서 나오면 바로 습격을 받았죠. 그러니 주도권은 완전히 빼앗겼고 근근히 버티며 전의와 사기는 땅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죠. 내전 초기에 대륙 여기 저기에 알박기해둔 공산당의 해방구를 무시한채 만리장성 너머 만주에 올인한 댓가를 이제 톡톡히 치루는 것이었지만, 냉철하게 생각한다면 미군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군에게 동북에서의 레이스는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잘못된 전략과 상호 역량 차이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일사불란하게 통솔되는 군대와 각개 플레이를 하는 군대간의 싸움은 화력과 장비의 문제가 아닌 것이죠.

객관적으로 볼때 장비, 훈련도, 전투경험 모든 면에서 당연히 "국군"인 국민당군이 월등히 우세했고 한낱 "반란군"인 해방군은 그냥 오합지졸에 불과했지만 실제로는 제멋대로 작전하는 국민당군이 되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는 많은 것을 얘기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장개석으로서는 늘어날대로 늘어난 전선을 일단 축소하여 병참 부담을 줄이고, 공산당이 우세한 곳은 포기하고 자신들이 우세한 곳에서 공산군을 몰아내어 안정된 후방을 확보한 다음 다시 기회를 노려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버릴 곳은 버리고 살릴 곳은 살리자는 것이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포위된 병력을 물리는 것도 매우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이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습니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꼴이었고 체면의 문제인데다 자기 자리마저 위험해 질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1년후인 49년 중순에야 양자강 이남으로 퇴각을 고려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47년 10월 10일. 전세가 점차 공산측으로 기울면서 중국공산당 중앙은 "중국인민해방군 선언"을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장개석 타도와 전 중국의 해방"을 해방군의 구호로 삼으며 국민당군에 대한 전면적인 총공세로 나서죠. 목표는 중국의 심장부인 중원이었습니다. 48년 4월 5일 낙양이, 6월 22일 개봉이 함락되고, 7월 16일에는 양양이 함락되어 국민당군은 2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제15 수정구 사령관 강택이 포로가 됩니다. 4월 21일 호종남은 어렵게 점령했던 연안을 포기하고 철수합니다. 철도선이 도처에서 끊겨 고립된채 사기가 떨어지는 국민당군은 이제 부대 단위로 투항하는 사례가 속출하기 시작합니다. 그 최초의 예가 48년 9월 14일 화북의 요충인 제남을 방위하는 제 2수정구소속 제96군(군장 오화문)의 배반으로 10만명이 투항합니다. 국민당군 붕괴 도미노의 시작이었죠.

 

※ 1948년의 대략적인 내전 상황. 엄밀히 말하면 저렇게 서로의 영토를 칼로 긋듯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지역이 명확한 전선 구분없이 서로 혼재되어 있는 카오스의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1년만에 상황이 얼마나 심각해졌는지는 알 수 있죠.

 

이런 상황에서 장개석은 아주 작정을 한건지 자충수만 두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46년 7월에 대표적인 반장개석 인사인 이공박, 문일다가 특무대에 의해 암살되었고, 12월 30일에는 미군의 여학생 강산사건으로 북경에서 대규모 반미 시위가 일어납니다. 47년 2월 28일에는 대만에서 이른바 "2. 28사건"이 일어나는데 장개석은 대화로 풀기보다 독재자스럽게 총칼로 대답하여 최대 10만명을 학살하는 유례없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여기에 극심한 인플레이션까지 겹쳐 북경, 상해, 남경, 곤명, 항주, 타이뻬이 등 주요 도시 곳곳에서 연일 "내전중지와 물가안정"을 외치는 시위가 일어납니다. 농촌은 농촌대로 반란과 농민 봉기가 일어나 전국에 최대 100만이상이 여기에 참가합니다. 말그대로 통제 불능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죠.

 

보다 심각한 것은 경제의 붕괴였습니다. 물가지수를 중일전쟁 직전인 1937년을 100으로 했을때 1947년 말은 1,030만이었고, 1948년 말에는 2억8,700으로 급등합니다. 빵 하나 사려고 돈을 수레떼기로 실고 다니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죠. 상점과 공장은 문을 닫았고 도처에 실업자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장개석의 장남이자 미래의 총통인 장경국은 중국 금융의 핵심인 상해에서 투기꾼과 악덕업주들을 때려잡고 "정의"를 실현하려고 물가안정을 위한 나름의 노력을 하지만 이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도와 관계없이 그의 정책은 완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고 무엇보다 최대 악덕기업가는 바로 송자문, 공상희같은 장개석의 친인척들이었기 때문이죠.

 

장경국이 권총으로 자기 사촌이자 공상희의 아들을 권총으로 위협하지만 비웃음만 산다는..(건국대업의 한 장면) 

 

게다가 48년 8월 장경국의 주도하에 의욕적으로 실시된 통화개혁(금원권)은 철저하게 실패로 돌아갔고 이는 완전히 결정타나 다름없었습니다. 10월 31일 물가 통제가 해제되자 경제는 말그대로 붕괴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드디어 내전 최대의 전투인 3대 전역(요심전역, 회해전역, 평진전역)이 48년 9월부터 시작됩니다. 그야말로 양대세력이 총력을 기울여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이는 것이죠. 

 

 

48년 4월 20일 중화민국 최초의 총통선거가 전국에서 실시되었고 대총통에는 장개석이(당연하지만), 부총통에는 광서군의 총수인 이종인이 당선됩니다. 그리고 5월 20일 남경 총통부에서 장개석은 중화민국 초대 총통으로서 취임하였습니다. 정식으로 중국 전체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죠.  

※ 사진출처 : http://cafe.naver.com/harumichi/1182

 

 

대총통 취임선언을 하는 장개석. 뒤에 이등병마냥 서있는 사람이 부총통 이종인. 이 두 양반 한때 적이기도 했지만 평생 서로 상대의 뒷태만 봐도 재수가 없고 속이 뒤집어졌다고 합니다. 무슨 이혼한 마누라도 아니고..-.- 

※ 사진출처 : http://cafe.naver.com/harumichi/1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