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사,,국공 내전..

[중국근대사]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15화 (2차 내전 발발하다)

구름위 2013. 12. 12. 12:34
728x90

 

45년 10월 10일, 중경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이 서로 손을 잡고 이른바 "쌍십협정"을 체결함으로서 중국에도 드디어 평화가 오는 것같았습니다.

 

※ 출처 : 영화 "건국대업"의 한장면. 서로 미소를 잔뜩 머금고 있지만 손에는 면도칼을 숨기고 있었을지도. 

 

그러나 결혼식장 신혼부부마냥 남들앞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내려오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소리장도", 즉 미소속에 칼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화해하기에는 양쪽 모두 서로 불신이 너무 컸고 야심도 큰데다 독선적이었기에 화해도 타협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성격은 전혀 상반되는 이 둘도 그런 점에서는 완벽한 공통점이 있었죠.

 

둘다 순진하게 방심하다가 등뒤에서 칼을 맞을 생각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중국과 민족의 앞날따위보다 신시대의 진시황이 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이런데 무슨 화해가 되겠습니까?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부하가 되지 않겠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죠. 단지 국내외의 여론과 미국의 압박에 못이겨 마지못해 임시방편의 쇼를 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쌍십협정은 도처에서 벌어지는 국공간의 충돌에 아무 제지도 되지 못하죠.

 

이런 상황에서 항상 우유부단하고 오지랍만 넓은 미국은 전 참모총장 조지 마셜원수를 중재자로 파견합니다.

마셜은 양측의 적대 행위 중지와 공산군은 "국군"으로 편입, 국민당과 공산당, 기타당간의 전국회의 개최 및 연합정부 수립을 제의합니다. 덧붙여 장개석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면 5억 달러를 주고 거부하면 국물도 없다고 당근과 채찍을 내놓죠.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던 장개석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46월 1월 10일 국공 양측간 정전명령이 내려집니다. 그리고 중경에서 국민당 정부측 대표 장치중과 연안측 대표 주은래, 그리고 마셜 이 세 양반이 모여서 "3인 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축과 국공양군의 통합 및 부대 배치에 대해 협의합니다. 그리고 2월 25일에 협정이 체결되죠.

 

1. 병력비율 : 국 : 공 = 5:1로 한다.

2. 병력감축 : 1년안에 국민당군을 353개 사단에서 90개사단으로, 공산군은 40개사단에서 18개사단으로 감축후 다시 6개월후 국민당 50개사단, 공산군 10개사단으로 감축한다(총 20개 군단 60개사단)

3. 병력배치

  - 동북 : 국민당 14개사단, 공산군 1개사단

  - 서북 : 국민당 9개사단

  - 화북 : 국민당 11개사단, 공산군 7개사단

  - 화중 : 국민당 10개사단, 공산군 2개사단

  - 화남 : 국민당 6개사단

 

이 협정에 따라 3주안에 구체적인 계획과 리스트를 제출키로 했으나, 국민당측은 제출했지만 공산측은 그냥 생까기로 합니다. 모택동은 스스로를 무장해제시켜 장개석 좋은 일 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고 그럼에도 회담에 참가한 것은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함일뿐이었습니다. 이 점은 장개석도 마찬가지로, 정말로 진심으로 평화를 바래서가 아니라 5억 달러의 사탕이 탐이 났을뿐이었죠. 이런 이들에게 마셜의 중재따위는 "개 풀뜯는 소리"에 불과했죠.

 

그럼에도 마셜은 순진하게 "내가 중국의 평화를 달성했다"라며 자화자찬하며 3월 11일에 워싱턴으로 돌아갑니다.(이런 착각은 마치 베트남전 말기 헨리 키신저를 보는 것같죠.)

물론 협정의 잉크도 마르기도 전에 마셜이 돌아가자말자 쌍방은 바로 전면전으로 돌입합니다. 4월 18일 동북에서 장춘과 심양 중간에 위치한 사평가에서 국민당 정부군 산하 최강을 자랑하는 손입인의 신1군과 요요상의 신6군은 임표의 공산군에 대해 전면적인 총공격에 나섭니다.

 

내전 발발 당시 양측의 전력은 당연한 얘기지만, 국민당측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국민당군은 명실공히 중국 국군이었으며 일본의 봉쇄가 풀리는 45년 1월부터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었죠. 반면, 공산군은 한낱 연안을 중심으로 한 지방 민병대에 불과했습니다. 또 동북에서 국공 쌍방은 관동군이나 만주군, 몽강군같은 항복한 괴뢰군과 친일관료들을 상대로 서로 경쟁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는데 이 경쟁에서 아무래도 유리한 쪽은 정부군쪽이었습니다. 심지어 공산군에게 투항한 일본군, 괴뢰군들이 정부군이 가까이 오면 배신을 때리고 투항하기 일쑤였습니다.

 

※ 쌍방 전쟁 수행 능력 비교(46년 7월 기준)

 

 구분

 면적

 도시

인구 

병력 

 천km^2

 개소

만명 

만명 

대비 

 국민당군

 7,300

76 

 1,545

77 

33,893 

71 

430 

3.6:1

 공산군

 2,300

24

 464

23

13,607

29

120

 

장비면에서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는데 동북에 투입된 신1군같은 정예 중앙군 사단들은 미제 M1소총과 톰슨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사단 직속으로 105mm 곡사포 대대와 M3 스튜어트 전차 1개대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약 600대의 전투기와 폭격기, 정찰기로 구성된 공군이 제공권도 확실하게 쥐고 있었죠.  

 

반면, 공산군은 90%이상이 일본군과 국민당군에게 노획한 잡동사니 무기가 태반이었고 전차는 소련이 관동군에게서 압수해 넘겨준 97식 치하같은 "달리는 관"이 600여대가 있었으나 그나마 대부분 고장으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해공군따위는 없었죠. 병종도 보병이라는 단일병종이었다가 46년에 와서야 독립된 포병연대가 창설됩니다.

 

※ 국공 양측의 사단급 화력 비교(※ 출처 : http://panzerbear.blogspot.com/2008/09/blog-post_6691.html)

 

그러나, 장개석의 우세함도 사실 사상위의 누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국민당의 중심은 여전히 중경을 중심으로 한 사천, 운남, 귀주같은 서남과 서북일대였고 일본에게서 막 넘겨받은 화북과 화중조차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죠. 동북으로 투입된 부대의 병참선은 화중, 화남에서 산해관을 넘어 수천km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우세한 제공권과 화력, 차량을 활용한 전략적 기동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병참선은 쉽게 노출되었으며 많은 병력이 철도 경비에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너무 성급한 작전이었죠. 이런 상황에 대해 장개석의 군사고문인 웨드마이어중장은 45년 11월에 "국부군은 먼저 장성이남을 공고히 해야한다. 만주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서는 안된다"라고 건의했으나 묵살합니다.

 

장개석은 왜 이렇게 성급했던 것인가. 단순히 동북의 공업시설과 자원에 눈이 멀어 평정심을 잃었던 것인가.

장개석은 20년대 북벌당시 적에게 틈을 주지 않고 신속하게 진격함으로서 2년만에 그 넓은 중국 전토를 장악합니다. 또 공산군(홍군)에 대해서도 몇번 패했지만 그때마다 실수를 보완하고 더 많은 병력과 자원을 투입해 적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여 결국 서북의 산악지대로 쫓아버렸죠.(이것을 공산당은 "대장정"이라며 미화하지만)

 

이런 "불도저 정신"이 장개석의 최대 장점이자 중국의 지도자가 된 원동력이었고, 이번 내전에서도 그는 공산군이 동북에 자리잡기전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속전속결로 밀어붙이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략적으로 탁월한 판단이었으나, 그때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외세의 간섭"이라는 요소였습니다.

 

모처럼 중경까지 와서 성공적인 중재를 했다고 생각했던 마셜은 자기가 떠나자말자 개무시된 현 상황에 대해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장개석을 상대로 정전 명령 이행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또 5억 달러의 차관은 절대 못준다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한때의 동맹이었던 중미간에 불신이 생겼고 이 골은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않고 있죠.

 

이때 국민당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근 100만 가까운 병력을 전개한 국민당군은 사평전투를 시작으로 5월 25일 장춘을, 28일에는 길림을 점령하고 북만주 최대의 도시인 하얼빈을 눈앞에 두고 있었죠. 정면대결에서는 국민당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공산군은 인해전술로 맞섰으나 완전히 격파되어 북만주 중소국경 산악지대까지 쫓겨갑니다. 또 서북의 연안도 호종남의 중앙군에게 포위되어 맹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6월 6일 임표는 하일빈의 포기를 중앙에 건의합니다. 전황은 공산군에게 최악의 상황이었

습니다.

 

공산측은 먼저 정전협정을 깬 것은 국민당측이라며 마셜에게 호소했고 나름 중립의 입장에 서려고 했던 마셜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약자들 편에 서기로 하죠. 국민당군이 하얼빈 남방 50km 떨어진 쌍성에 도달한 6월 7일 장개석은 진격 중지와 정전 명령을 내립니다. 나중에 장개석이 "내 일생 최대의 실수"라고 했던 명령이었고 패망직전의 공산군에게는 그야말로 구원을 알리는 천상의 소리였을 겁니다.

 

  

< 국공내전 초반의 상황도. ※ 출처 : 현대중국전략의 기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