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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대사]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13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종전)

구름위 2013. 12. 1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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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2월 4일.

이 날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의 해안도시 얄타의 리바디야궁전에서는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세 양반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목적은 뻔한 것이었죠. 바로 전후의 논공행상을 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 3대 강국은 동유럽에 대해 어떻게 사이좋게 나눠먹을 것인가를 협상합니다. 독일은 물론 폴란드, 체코, 유고 등 독일과 소련 사이에 끼여 짓밟힌 많은 약소국들의 운명이 당사자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단지 이 3사람의 말 한마디에 의해 결정되죠. 이것이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었죠. 극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은 독일이 정리되는대로 소련도 대일전선에 참전할 것을 요청합니다.

 

사실 대일전쟁에 참전하겠다고 공약한 것은 43년 11월 테헤란회담에서의 스탈린이었습니다. 서방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여 제2전선을 만들어준다면 그 댓가로 유럽전쟁이 끝나는대로 소련은 일본과 싸우겠다 라는 것이었죠. 이때는 스탈린이 절박했기에 무슨 약속이든 했지만 "화장실 가기전과 나온후 다르다"라는 속담 그대로 뻔뻔하게 한 입으로 두말, 세말하는 것이 바로 이 스탈린이라는 양반이었죠. 아쉬울 것이 없어진 스탈린은 느긋한 입장에서 "내가 참전하면 뭐 줄건데?"라는 태도로 나옵니다. 

 

※ 2차대전의 유머(출처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111105511)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미국 근로자의 평균 임금이 얼마냐고 물었다. "아마 한 달에 300달러쯤 될 겁니다. " "그럼 생활비는 얼마나 필요합니까?" "대충 200달러쯤 들겠지요. " "그럼 100달러가 남는데 어디 사용합니까?" "그건 그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루스벨트가 물었다. "러시아 근로자들의 평균 임금은 얼마입니까?" "한 달에 한 800루블이 될 겁니다. " "그럼 생활비로 나가는 돈은 얼마가 됩니까?" "1000루블입니다. " "그럼 한 달에 200루블이 더 있어야 살아가겠군요. 그 돈은 어떻게 마련합니까?" "그건 그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

 

스탈린은 미국에게 참전 댓가로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빼앗겼던 영토(사할린, 쿠릴열도 등)의 반환은 그렇다쳐도 원래 청의 영토였던 외몽고의 중국에 대한 분리와 독립, 만주에서 러시아가 가졌던 모든 이권과 대련(여순)항의 조차까지 요구합니다. 거의 다 끝나가는 전쟁에 한발짝만 담구는 댓가로 지분의 40%이상을 가지겠다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죠. 이것은 중국의 주권에 해당하는 것임에도 루즈벨트는 중국의 어떤 사전 협의도 없이 "OK!"라고 합니다. 얄타회담이 끝나고 나서 한참후인 6월 15일에 와서야 일방적으로 중국에게 내용을 전달하고 사후 승인할 것을 강요합니다.

 

장개석으로서는 완전 "엿먹은" 꼴이었고 어차피 중국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법적 구속력도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 영, 미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중국으로서는 "생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일본이 점령중인 만주에 소련군이 들어와도 현실적으로 그것을 제지할 방법이 중국에게는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처남이자 외교부장인 송자문을 모스크바로 보내 스탈린과 협상하고 일본 항복 전날인 8월 14일에 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합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상호의 주권과 영토의 존중, 내정 불간섭, 한쪽의 사전동의없는 제3국과의 밀약 금지, 두 나라중 어느 한나라가 제3국의 침략을 받을 경우 모든 군사 및 원조를 할 것, 외몽골은 중국에서 완전히 분리독립한다 등. 덧붙여 소련군은 만주군과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되 일본 항복후 3주내에 철수를 시작하며 3개월안에 철수를 종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련항은 조차가 아닌, 중-소 양국의 공동운영이었습니다. 사실상 스탈린은 그가 요구했던 것의 대부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스탈린도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지는 몰랐을듯) 소련이 정말로 조약을 성실하게 준수할 지는 의문이지만 장개석으로서는 이런 협정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만주에 들어온 소련군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죠. 다만 스탈린의 선처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토록 큰 희생을 치루었던 대일전쟁의 끝판에 와서 가만히 있어도 끝날 싸움에 굳이 소련을 끼워넣은 것인가. 왜 루즈벨트는 이렇게 소련에게 "통크게" 전리품을 턱턱 얹어준 것인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미친 짓이죠. 어떻게 본다면 루즈벨트의 주변에 소련 간첩이 있었거나 아니면 루즈벨트 자신이 소련 간첩이었다, 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후대의 서구 학자들 중에는 루즈벨트가 병으로 정신이 혼미해져서, 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미국은 일본군에 대한 전력을 완전히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식물인간이 되었지만 육군은 건재했습니다. 특히 만주와 중국전선에는 100만이 넘는 병력이 전개해 있었고 설령 일본본토를 장악해도 천황과 일본 정부가 한반도와 중국 본토에서 계속 항전한다면 전쟁을 앞으로 얼마나 더 끌어야 할지 의문이었습니다. 과달카날부터 이오지마,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이 보여준 강력한 저항력은 미군으로서는 여전히 무서운 상대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죠. 일본 본토에만도 여전히 370만명(육군 240만, 해군 130만)이 있었습니다. 해외까지 합해 총병력은 90개사단 720만이었죠. "올림픽작전"을 강행할 경우 적어도 100만이상의 사상자가 낼 것이라고 예상되었고 이는 미국이 막판에 와서까지 굳이 감당해야할 이유가 없는 숫자였죠.

 

그러나 오키나와에서의 일본군은 사실 그들이 쥐어짜낼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갑종사단들은 이미 동남아와 버마에서 모두 소멸되었고 남은 부대는 보충역으로 머리수만 채워졌을 뿐이었죠. 사기와 전투력은 최악이었고 군기 이반과 탈영은 심각했습니다. 소련군이 만주로 진공했을때 순식간에 붕괴된 것도 이때문이었습니다. 단지 미국은 일본군중 제일 센 놈 몇놈만 보고 모든 일본군은 다 이럴 것, 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미국의 해외정보수집능력이 매우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주만에서 일본의 기습을 허용한 것과, 국공내전이나 한국전쟁에서 트루먼과 맥아더가 오판하는 중대한 이유중 하나가 됩니다. 사실 지금도 그때에 비해 미국의 정보력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는 의문이지만요. 철저한 정보수집과 분석을 통해 정책결정자들이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정반대로 처음부터 자기만의 편견으로 결론을 내려놓고 그것에 정보를 끼워맞추기식으로 하니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라는 책을 보면 이상주의에 빠져있던 루즈벨트의 생각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차대전 직후의 윌슨이 그러했던 것처럼 루즈벨트 역시 "국제연맹"을 대신한 "국제연합"을 구상중이었습니다. 세계는 어느 한나라가 아닌 미, 영, 소, 중 이 4개국이 리더이자 경찰의 역할을 맡아 "LOVE & PEACE"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구상에 걸리적거리는 상대는 스탈린이 아니라 아직도 "세계제국"의 꿈을 꾸는 처칠이었고 미국이 "약간" 손해보는 셈 친다면 소련도 미국편이라고 생각했죠. 물론 이는 루즈벨트와 그 측근들만의 착각이었지만요.

 

이런 착각은 서로의 성장과정과 권력 획득과정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칠과 루즈벨트는 날때부터 좋은 집안에서 말그대로 "금숫가락"물고 태어난 도련님으로 정치가로서도 평탄하게 그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스탈린은 개망나니 아버지밑에서 커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라온 독재자였습니다. 스탈린은 승리를 위해 루즈벨트와 처칠을 철저하게 연구했지만 루즈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그냥 자기 기준에서만 생각했습니다. 이러니 싸움이 될리가 없는 것이죠. 루즈벨트는 세계를 혼자서 지배할 생각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었고 따라서 레이건이나 부시시절같으면 어림도 없을 "통큰" 양보를 한 것입니다.

 

또한 스탈린은 독재자이고 국민들 여론따위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지만, 루즈벨트는 그렇지가 않죠.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 국민들이 좋아하고 선거에도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아는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왜 그런 또라이짓을 했지? 뭔가 속셈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하지만요.

 

어쨌든 동유럽에서 새로 얻은 "영토"에도 정신없던 스탈린이었지만, 만주와 관동군의 실상에 대해 루즈벨트보다는 더 정확하게 알고 있던 그는 이런 "떡"을 얻자 입이 귀까지 찢어집니다. 만주 공격은 베를린 점령 직후인 6월부터 부랴부랴 추진됩니다. "압도적인 물량으로 관동군을 밀어붙였을 것"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졸속으로 조급하게 진행되죠. 전쟁으로 지친 약 90개 사단이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만주로 보내집니다. 이들 상당수는 노약자와 어린애들이었고 훈련도 미숙했습니다. 이들을 총지휘하기 위해 극동전략방면군이 창설되었고 바실레프스키원수가 사령관이 됩니다.

 

블라디보스톡의 제1극동전선군(메레츠코프원수)와 하바로프스크의 제2극동전선군(푸르카에프상장), 시베리아와 몽골에 전개한 트랜스바이칼전선군(말리노프스키원수)가 병력을 전개하였고 극동함대(유마세프원수)는 쿠릴과 사할린 상륙작전을 맡았습니다. 총병력은 90개사단 150만에 중전차 4천대, 대포 26천문, 항공기 5천대에 달했습니다. 일본군은 한반도의 조선군까지 합해 31개사단(16개사단이 신편성) 105만에 달했으나(만주군이 20만) 정예부대는 이미 남방에서 모두 소모되었고 대부분이 만주에서 7월에 와서 급히 소집된 예비역이었습니다. 식량과 무기, 장비도 현지에서 자급생산된 조잡한 것들이었죠. 숫자만 많을뿐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고 단지 밭이나 가는 둔전병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8월 9일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소련군에게 이 마지막 전쟁은 "꽃놀이 소풍"만은 아니었습니다. 관동군이 강력해서라기보다, 스탈린의 즉각 공격명령에 따라 치밀한 준비없이 졸속으로 진행되었고 만주의 험준한 산맥이 가장 큰 저항물이었죠. 적어도 관동군의 일부부대는 소련군에게 호된 일격을 먹였고 10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12천명이 전사하고 24천명이 부상당합니다. 일본군은 적어도 2만이상이 전사하고 이후 천황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60만명이상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 "8월 폭풍작전"에 대한 글 참고 : http://blog.naver.com/corazon27?Redirect=Log&logNo=50097593390

어쨌든 소련군은 만주와 몽고, 한반도 북부까지 자신들의 세력권에 포함시킬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내친김에 훗카이도까지 장악할 욕심도 있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생각해도 지나친 욕심이라 현명하게도 작전은 취소되었습니다. "밀고 당기기"의 달인인 스탈린은 미국의 양보심에도 한계가 있으며 과욕을 부리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반이었습니다.

 

8월 15일 천황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일본은 백기를 듭니다. 9월 2일 전함 미주리호의 함상에서 일본은 항복조인식을 합니다.

 

맥아더앞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시게미쓰 외무대신

 

그다음에 서명하는 맥아더

※ 출처 : http://cafe.daum.net/hainbangsoo/LFcV/218?docid=1ApH8|LFcV|218|20090307022427&q=%C0%CF%BA%BB%C7%D7%BA%B9%20%B9%CC%C1%D6%B8%AE

 

9월 9일에는 남경에서 지나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과 중국 육군 총사령관 하응흠상장간에 중국, 버마주둔 일본군에 대한 항복조인식이 열립니다. 이것으로 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으로부터, 그 앞으로는 31년 만주사변부터 시작된 양국간의 전쟁이 이것으로 완전히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죠. 크게는 냉전의 시작이었고, 중국에게는 국공결렬과 내전의 시작이었습니다.

 

8년간의 전쟁에서 중공은 엄청나게 강력해져 있었습니다. 환남사변당시 스탈린조차도 "중공군은 일본군과는 싸우지 않고 세력확장에만 급급하다"라고 비판했지만(중화민국과 공산혁명 p.518) 중일전쟁 발발당시 8만에 불과했던 중공군은 43년에는 45만, 45년 8월에는 정규군 130만에 민병은 220만에 달했습니다. 영토에서도 19개 해방구에 전국토의 1/4과 1억이 넘는 인구를 지배하죠.

 


출처 : 중국인민해방군사, 국방군사연구소

 

모택동은 그전의 어느때보다 강력해진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전에도 장개석의 명령따위 종종 무시했던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한낱 지방자치정권이 아닌, 남경정부와 거의 대등한 입장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죠. 장개석은 팔로군, 신사군에게 함부로 이동하지 말 것을 명령하지만 중공은 그 명령을 "생까고"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며 화북, 만주로 진입합니다.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국민당군도 만주로의 레이스에 필사적으로 나서지만 이 경쟁에서 불리한 쪽은 국민당군이었죠. 전쟁기간 화중에 있던 팔로군은 화북과 만주에까지 이미 조금씩 멀티를 쳐두고 있었지만 사천과 운남까지 밀려가 있던 국민당군으로서는 훨씬 먼 장거리였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앞날보다 오로지 이 경쟁에서만 승리하기 위해 양자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온갖 술수와 책략을 발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