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58

58.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안용복 사건(1693년 숙종 19년)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안용복 사건(1693년 숙종 19년) 숙종 19년 1693년 봄, 홀어머니 아래에서 궁핍하게 자란 안용복은 바닷가에서 떠돌아다니는 솔깃한 말 하나를 듣게 된다. 동해 멀리 섬이 하나 있는데 산삼이 많은 노다지 섬이라는 풍문이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그 섬에 다녀오는 배가 많다는 것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 거기 가는 뱃사람을 모집한다는 은밀한 소식을 듣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지원을 했다. 공식적으로 그 섬은 일반인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왕실에 진상하는 전복은 물론이고 산삼까지도 있다는 소문에 동래 부사와 좌수영에서 오히려 배를 제공하고 몰래 밀항선을 보내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34명이고 총책은 동래 감영의 한비장이엇다. 이런 기록은 조선의 자료에서 나온..

57.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문제 //독도 문제의 기원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문제 독도 문제의 기원 독도 문제는 현재 한.일간에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여차하면 국제사법재판소에 넘겨서 검증을 받고자 나서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우리 것이 분명한데 왜 재판정에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재판은 증거 자료를 위주로 하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이 일본에 비하여 특별히 더 유리하지는 않다. 일본은 기록의 왕국답게 몇 백 년 전 독도 관련 문서라든지 정보원들의 조선 정탐보고서까지 다채롭게 보관하고 있어서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우리나라가 등을 거론하며 기록이 잘 돼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의 기록은 우리를 능가한다. 또 국제사법재판소의 구성 인원들 세력 분포가 일본 ..

56.기둥뿌리 썩어가도 고담준론으로 수백 년

기둥뿌리 썩어가도 고담준론으로 수백 년 16년 예송논쟁 헌종과 숙종 시대에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두 차례의 대논쟁이야 말로 조선을 표현할 때 가장 적절한 사건일 것이다. '예송논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왕실의 복상과 같은 예법의 문제이지만 서인과 님인 사이의 해묵은 이념논쟁이고, 정권을 주도하기 위한 권력다툼이었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죽은 뒤 그의 계모인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요즘 '궁중잔혹사' 드라마를 보면 조대비와 봉림대군이 나오는데 조대비는 소현세자빈 강씨에게 자신을 이용하여 허세를 부려온 강씨를 미워하면서 소현세자가 독살되어 죽자 봉림대군을 은근히 옹립하려 한다.소현세자의 아들 원손이 나이가 어린 관계로 인..

55.천도, 집권 그리고 풍수

천도, 집권 그리고 풍수 조선에서 이런 풍수와 지관을 규탄하고 있는 것은 광해군 때의 명 문장가 이정귀가 대표적인 듯하다. 광해군은 지관 이의신을 매우 신뢰했는데 그는 서울을 떠나서 한강 하류의 교하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여 광해군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도성의 왕기가 이미 쇠하였으므로 도성을 교하현으로 옮겨야 한다는 이런 주장에 예조판서 이정귀가 상소하기를, "삼가 이의신의 상소를 보건데,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이 사람을 현혹시킬 뿐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풍수의 설은 경전에 나타나지 않는 말로 괴상하고 아득하여 본디 믿을 수 없습니다. 애초에 성상께서 나라를 세우려고 여러 곳을 살펴보고 여러 해를 경영한 끝에 끝내 이곳에 정하였으니, 깊고 먼 계략을 어찌 미미한 일개 술관과 비교하여 논의할 ..

54.우리는 원래 매장이 아닌 화장 국가였다 //매장과 풍수

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우리는 원래 매장이 아닌 화장 국가였다 매장과 풍수 우리나라가 아주 옛날부터 예를 숭상하여 사신을 매장해왔던 것으로 알면 오산이다. 조선 전기만 해도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묘지라는 것이 없었다. 모두 화장이었다. 고려 시대도 왕족들은 화장하고 남은 뼈를 작은 관에 넣어 묘를 만들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성리학을 국가 기본 사상으로 삼으면서 화장을 야만의 관습으로 주지시키니 그때부터 온 나라가 묘지강산이 되고 말았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오래된 화장 국가였다. 1700년대까지 중국도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선조 27년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 중 한 사람이 죽었다. 중국 측에서는 화장으로 하겠노라고 부탁해왔다. 조정에서는 당연히 시신을 관에 넣어 운반할 것으로 알았다가 화장을 하겠노..

53.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제사와 행사로 날이 새고 해가 진다 조선의 국력이 소진된 이유 우리나라 보물 제1430호이기도 한 정조의 그림을 보노라면 실로 장업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참배를 자주 다닐 때 그린 이 병풍 그림은 1795년 정조 19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행차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보고 단지 화려하고 장엄하구나, 그렇게만 느꼈다면 가령 당신은 고위 공직자와 같은 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시장거리의 서민 물가에는 관심이 없고 화려한 한국은행 수출 지수만 꿰고 있는 그런 공직자 말이다. 윤 2월 중순이라면 아직도 날이 차가운 날씨였을 것이다. 이 행차에 동원된 군졸 숫자가 약 5천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온갖 무거..

52.욕설이 범람하는 우리 사회는 조선의 유산인가?

욕설이 범람하는 우리 사회는 조선의 유산인가? " 야 이 쌍놈아!" "뭘 봐? 이 0 쌍놈아! 이 0 쌍놈의 00 같으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가는 욕이 바로 '이 쌍놈'이라는 것이다. 여자한테는 놈 대신 년을 붙인다. 어디 가던지 지천으로 널려 잇는 것이 욕설이다. 쌍놈이란 기본적으로 인간 같지 않다는 뜻이다. 인간 같지 않고 개 같으니까 0 쌍놈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개는 그렇지 않는 동물이다. 절대 충직하고 배신도 없다. 인간보다 더 낳은 면이 수두룩한데 왜 개를 그런 욕설의 기준치로 삼는지 모르겠다. 개보다 더 낳은 인간이 있으면 어디 손들어 보라고 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개와 쌍놈이 합성어가 된 것에는 이유가 잇다. 개라는 동물을 인간의 반려견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때..

51.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

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 조선의 왕들은 적자로서 승계를 받았을 경우는 비교적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서자나 차남 등 적자가 아닌 경우는 거의 힘을 펴지 못하고 살았다. 더구나 너무 이른 나이에 왕이 되었다. 헌종은 8세, 순조는 10세, 단종 11세, 명종 11세, 성종 12세, 고종 12세, 선조 15세, 중종 18세, 에종 18세, 연산군 18세, 철종 18세 등이다. 세종도 21세에 왕위에 올랐다. 테조와 그 직게인 정종, 태종을 제외하면 정상적으로 20대 중반 나이에 오른 사람은 광해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에 불과하다. 광해군은 서자의 신분으로 30세가 넘어 간신히 왕이 되긴 했지만 항상 신하들에게 휘둘리며 살았다. 조선에서는 결국 27대 ..

50.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포도를 많이 먹고 혼난 임금

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포도를 많이 먹고 혼난 임금 영조는 양반들을 멸시한 왕이다. 그의 생모는 슥종 시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제치고 후궁으로 최후의 승자가 된 천민 출신의 숙빈 최씨다. 숙빈 최씨는 7세에 주로 부억 설거지 등을 하는 무수리로 궁에 들어왔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된 여인이다. 훗날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조졸하고 뒤이어 영조가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영조는 그의 생모를 위한 추모각을 세우고자 했으나 대신들이 신분이 되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천민을 위한 추모각이란 당치도 않는 일이라고 했다. 몇 번을 말해도 들어주지 않자 영조는 왕위에서 떠나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대신들이 만류하자 그는 내뱉었다. "조선은 양반들의 나라가 아닌가. 당신들 양반들이 잘 알아서 해보시오..

49.국가는 위기인데 호화별장을 세우는 사대부의 낙원, 조선

국가는 위기인데 호화별장을 세우는 사대부의 낙원, 조선 '어부사시사' 문학의 이면 등 우리 고등학교 교과서에 단골로 나오는 윤선도의 시조문학은 우리 고전문학의 보고이며 그가 꾸며놓은 보길도에는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찿아와 그의 자취를 되새긴다. 사건과 사람은 확실히 양면성을 가진다. 윤선도의 빛나는 문학성 뒤에는 또 다른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면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병자호란 발발 당시 나이가 50세였는데 이미 3년 전 성산현감에서 파직되어 해남에 내려가 있었다. 해남에는 만석꾼인 그의 숙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 댁의 양자로 입양된 처지였다. 이때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 왔으니 전국의 사대부들은 근왕병으로 궐기하라는 격문을 읽고 강화로 가는 배를 띄운 다. 전국의 사대부들에게 왕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