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54.우리는 원래 매장이 아닌 화장 국가였다 //매장과 풍수

구름위 2023. 4. 15. 09:36
728x90

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우리는 원래 매장이 아닌 화장 국가였다

 매장과 풍수

우리나라가 아주 옛날부터 예를 숭상하여 사신을 매장해왔던 것으로 알면 오산이다. 조선 전기만 해도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묘지라는 것이 없었다. 모두 화장이었다. 고려 시대도 왕족들은 화장하고 남은 뼈를 작은 관에 넣어 묘를 만들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성리학을 국가 기본 사상으로 삼으면서 화장을 야만의 관습으로 주지시키니 그때부터 온 나라가 묘지강산이 되고 말았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오래된 화장 국가였다.

 1700년대까지 중국도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선조 27년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 중 한 사람이 죽었다. 중국 측에서는 화장으로 하겠노라고 부탁해왔다. 조정에서는 당연히 시신을 관에 넣어 운반할 것으로 알았다가 화장을 하겠노라고 하니 개탄해 마지 않았다.       1546년 명종 1년에 표루하여 유구국에 갔다 온 제주도에 사는 박손의 보고에 의하면 그 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위 아래 방을 만들고 화장을 해서 남은 뼈를 거두는데 온 일가가 한곳에 안치되어 있고 봄 가을로 들어가 제사를 모신다 하였다.    몽골에서는 왕비가 죽어도 화장을 했으니 오랑캐 풍습이라고 얼마나 멸시했을까?

 조정의 강권으로 온 백성들이 매장을 시작했지만 그 절차가 너무 까다롭고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상복을 입는 초상 기간도 양반은 3년이고 상민들은 100일로 하더니 얼마있지 않아 앞으로는 모두 3년으로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중종 때 조광조 등 사림파의 유교 정책 개혁으로 상하 구별 없이 모두 3년상을 치르라는 강제 명령이 내렸다.    그렇게 되면 산소 근처에 초막을 짓고 3년간 거주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굿은일도 하지 않고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음식도 간소하게 막어야 한다, 양반일지라도 과거 응시를 불허했다. 3년간은 모두 일시 휴직상태에 들어가야 하고 그걸 어기면 엄벌에 처했다.

 세조 때 조효례는 이것을 어기고 1년 만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발각되어 규정대로 하면 곤장 80대를 맞아야 하지만 80세 된 공신의 아들이라 하여 관리 임명장의 직첩만 회수되었다. 그 후 왕이 바뀌고 관직에 임명은 되었으나 과거의 그런 경력 때문에 끊임없이 파직 상소에 시달려야 했다.

 성종 때의 유생 유진도 모친상 3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과거에 응시했다가 적발, 영영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매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나타난 것 중의 폐단이 본격적인 풍수사상이다. 한국의 풍수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이것은 땅과 공간의 해석과 활용에 대한 특유의 사상으로 세계에서 이것을 신봉하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뿐이다.

하도 복잡한 세계라 뚜렷한 원칙도 별로 없어서 먼저 주장하는 사람이 임자인 분야지만 근래 들어 최창조 교수가 '자생풍수'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이론을 만들었다. '지금 좋은 명당이란 가기 쉽고 아늑하면 된다'는 솔직하고 간편한 이론이다.

중국이 하는 일은 모조리 상전국의 발달된 문명으로 받아들은 것이 조선인데 이런 풍수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턱이 없다. 당연히 본격적인 풍수가 만개한 것이 조선이었다.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는 별로 풍수라는 사상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왕들이 먼저 솔선하여 풍수를 맹종하고 지관을 우대했다.태조의 역활은 이런 점에서 못할 일을 많이 만든 사람이다. 그의 측근 하륜은 고급 지관으로 서울 천도를 주장한 사람이다. 태조는 그에게서 풍수이론을 많이 익혔다. 그는 본격적으로 '음양 산정도감'이라는 부서를 만들고 지리와 도참에 대한 여러 책을 모아 연구토록 했으니 이곳이 바로 조선 풍수의 시작점으로 본부격이었다.조정 대신들도 풍수에 대해서 기본 지식을 익혀서 모두 반 풍수 전문가가 되어 조정 안에서도 공공연히 풍수 논쟁이 벌어졌다.1457년 세조 3년에 세자 도원군이 죽었다. 묘지를 찿기 위해 조정이 시끄러웠다. 세조는 대신들을 불러 지관이 살펴본 산형도를 가지고 왕세자의 묘지를 의논했다. 이쯤 되면 조정이 아니라 풍수 왕국이 된 셈이다.왕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현장을 답사하게 하니 돌아온 강맹경 등이 보고하기를,'신 등이 살펴 본 여러 산들은 모두 쓸 수 없었으나, 오로지 한강 나루 남쪽에 북북서를 등지고 남동향의 금산이 있는데 쓸 만합니다."정인지가 홀로 반대하면서,

"그 산은 산이 물을 따라 달리니, 왼쪽으로 안고 돌지 않아서 결단코 쓸 수 없습니다. 다시 좋은 곳을 골라야 하겠습니다."노목은 여러 사람의 의논과 같았고, 안효래, 조수종 등은 정인지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전지하기를,

"나는 항상 여러 사람의 의견에 따랐다. 내일 날이 개면 마땅히 친히 가서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니, 경 들은 나를 따르도록 하라." (세조실록 3년 9월 10일)

다음 날 임금이 한강을 건너 사평원 동쪽 언덕에서 그 땅을 살펴보았다."주맥이 어지럽게 흩어져 기운이 귀일하지 않으니,  결코 쓸 수가 없다."이쯤 되면 왕과 신하 모두 풍수 전문가였다. 매번 왕실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이 하나둘 아닐 터인데 그때마다 조정은 풍수 논의장이 되었을 것은 뻔하다.

능을 정하는 것도 빨라봐야 한 달이다. 영조가 승하하자 능을 정하는 데 걸린 날짜가 36일로 이는 매우 빠른 편에 속한다. 물론 조선 후기에 들어가면 이미 도처에 왕릉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옆에 안치하느라 빨리 끝나기도 했다.당대 최고의 풍수들이 이 일을 주도적으로 맡았으니 그들의 말도 사람마다 다르고 앞뒤도 서로 맞지 않았다.영조 승하 후 정조가 왕 위를 물려받고 선왕의 산릉을 정하고, 능 이름을 원릉으로 정했다. 위치도 처음에는 홍릉 쪽으로 정했다가 다시 근처를 두루 살펴보았는데 의논이 제각각이었다. 의견이 일치되지 않으므로, 여러 차례 대신들과 예조 당상을 보내 다시 여러 곳을 찿아보게 하였다. 옛 영릉 자리가 완전한 길지라고 말하는 의견이어서 영의정 김양택, 좌의정 정존겸, 판중추부사 김치인 등 여러 관계 대신들의 의견을 물으니, 김양택과 이은이 말하기를,

 "이미 중험해 본 땅이 마치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정존겸은 반대했다.    "더 없이 중요해야 할 자리에 틈이 있습니다."

송시열도,    "석회가 굳데 엉키어 있어 크고 작은 도끼가 서로 부딪치므로 신의 마음이 애통스러우며 마치 도끼가 가슴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김기량이 말하기를,            "옛 영릉 자리의 형세는 건원릉과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국세가 비록 건원릉의 주가 되기를 하지만 정간의 정신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유동형이 말하기를,     "불암산의 정간의 면목이 모두 이곳으로 향하고 있으니, 진실로 완전한 대지입니다."

김상현이 말하기를,     "온 국(局) 간의 원기가 모두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산을 보아 온 지 50년이지만 이런 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정조실록 즉위년 4월 11일)

결국 이런 논란 끝에 그대로 능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결코 만장일치는 아니었다.

 효종 때 인조의 능을 결정할 때도 대사헌 조익이 차자를 올렸는데,"당초 장릉으로 결정한 것은 지관 이간의 주장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관 김백련은 그곳이 좋지 않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또 듣건데 그 뒤에도 좋지 않다고 말하는 술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길흉도 분간되지 않고 의혹도 풀리지 않았는데 그대로 그 자리에 능을 모신다면 무궁한 후회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술사들을 모아 다시 살펴보고 각각 소견을 진술하게 하면 그 길흉을 판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예조로 하여금 논의하게 하니, 아뢰기를,"장릉을 처음 정할 때는 모두 길지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말들이 서로 다른니 새로 논의해야 되겠습니다."

 총호사 이경석이 이뢰기를,"당초 장릉을 정할 때 지관 김백련이 산세를 논하면서 그 자리가 으뜸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아니라고 하니 그 자는 본디 믿을 만하지 않으므로 무시해 버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논란이 다시 심해지니, 왕이 결정하기를,"그 산릉은 선조께서 직접 정하시고 이미 사후에 묻히시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더구나 자손이 번성하고 조금도 해로운 것이 없다. 다만 술사들에게 묻기로 한 것은 조금이라도 미진한 곳이 잇으면 보강하여 미진한 염려가 없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제와서 자리를 옮길 수는 없다." (효종실록 즉위년 5월 18일)

 결국 논란을 일으켰던 최초의 발언자 조익은 이 때문에 면직되고 말았다.조가 죽고 나서도 시끄러웠다.지나번 지관들을 불러 길흉을 물으니, 최호원이 명당이지만 위치가 비뚤어져서 보토를 해야겠다 말하더니 이제 현지에 가서 물으니 이번에는 자리가 좁아서 쓸 수 없다면서 억지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이는 반드시 남의 촉탁을 들은 것이다. 잡아다가 추국하도록 하라."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3일)

 이처럼 조선은 민생이 토탄에 빠지고 유랑자가 늘어나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이런 풍수와 장례, 제사 등으로 국력를 낭비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풍수에 입각하여 명당 자리를 찿기 위해서 지리한 논란을 거듭하여 겨우 선정하고, 갖은 예를 다하여 정례를 3년 동안 치르고, 때마다 성의를 다해서 제사를 올리고 축원하였건만 선조 때는 임진왜란을 당하고 정묘재란을 당하였으며, 인조 때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였다. 장자가 왕위를 이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 서출들이 왕위를 이었고 조선 팔도 사방에서는 민란이 발생하고 반정과 반란과 빈발하였다. 부자, 형제, 혈륙 간에 치열한 왕위 다툼은 물론 여러 차례의 당쟁으로 수많은 사대부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외척과 척신들이 준동하여 권력을 농단하다가 결국에는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그래도 500년 역사를 유지한 것이 풍수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운좋게 명맥을 겨우 유지하였을 뿐이었다. 잘못된 사상을 도입하여 시작된 조선은 허레와 허식이 가져다 주는 폐악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고 조선이 망한 이후 한반도는 일제치하 36년,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는 두 동강 나 버렸고 이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수많은 목숨이 허망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이 땅은 풀뿌리 하나 제대로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그후 63년, 지금까지도 남북이 서로 대치하면서 치열한 싸움질로 세월을 이어왔다.

 헬기를 타고 한번 이 땅위를 날아보아라, 온 산들이 종기가 나 것처럼 묘지 투성이며 어디를 가던지 군데군데 묘지가 없는 산이 없을 정도이다. 이제는 묘지를 쓸 자리도 없고 장소도 없다. 주인없는 묘지도 허다하고 왕릉처럼 꾸며 놓은 돈많은 후손들의 묘지도 많다. 그래서 납골당이 등장하였지만 그것도 문제인 것이 최소한 수천 만원의 비싼 비용을 들여가며 모신다.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때뿐이다. 한 10년만 지나봐라, 찿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기억에서 가물가물 멀어져 간다. 인생은 어치피 한번 왔다가 바라처럼 사라지는 것인데 이렇게 재력과 국력을 낭비하여 왔으니 나라가 온전할 리가 없었다.

 모두가 허세이며 허식이다. 땅이 좁은 이 나라에서 이제 매장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장례, 제례도 간소화내지 없애고 화장을 하여 수목장이나 자연장을 장려하여야 한다. 장례문화의 번잡성과 낭비는 우리 미래의 적이다. 대부분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재물을 과다하게 낭비하고 번거러운 절차와 형식으로 재력과 예를 논하지만 모두가 허식이다. 그래서 그런 폐악을 우리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유교의 각종 허례허식의 폐습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하는 것이 첯째이며, 둘째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불행이 이러한 폐악에서 비롯된 것이니 만큼 그 좋다는 풍수사상은 이 땅에서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