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 집권 그리고 풍수
조선에서 이런 풍수와 지관을 규탄하고 있는 것은 광해군 때의 명 문장가 이정귀가 대표적인 듯하다. 광해군은 지관 이의신을 매우 신뢰했는데 그는 서울을 떠나서 한강 하류의 교하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여 광해군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도성의 왕기가 이미 쇠하였으므로 도성을 교하현으로 옮겨야 한다는 이런 주장에 예조판서 이정귀가 상소하기를,
"삼가 이의신의 상소를 보건데,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이 사람을 현혹시킬 뿐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풍수의 설은 경전에 나타나지 않는 말로 괴상하고 아득하여 본디 믿을 수 없습니다. 애초에 성상께서 나라를 세우려고 여러 곳을 살펴보고 여러 해를 경영한 끝에 끝내 이곳에 정하였으니, 깊고 먼 계략을 어찌 미미한 일개 술관과 비교하여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의신은 임진년 변란과 역변이 계속하여 일어나는 것과 조정의 관리들이 파당하는 것과 사방의 산들이 벌거벗은 것이 모두 서울의 위치 탓이라고 합니다. 왜적의 무도한 침략이 서울의 위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무지한 백성들이 국법을 존중하여 도끼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산의 나무는 저절로 무성할 것입니다. 편협되고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왕도를 바로 세우면 조정의 의논도 저절로 통일될 것입니다. 이는 모두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 모두가 힘써야 할 바입니다. 고금 천하에 이찌 그런 것을 이유로 국도를 옮기는 일이 있었습니까.
듣건데, 그 사람은 상당히 구변이 있고 문자도 제법 알기 때문에 방서에 의거하여 큰 소리 치고 있으나 실상은 그들의 동료들도 비웃는 자가 많다 하며 사대부의 가문에 묘 자리와 집터를 지정해준 것도 대부분 효험이 없다 합니다.
그가 이른바 교하 땅은 복지이고 한양은 흉하다 하고 있으나 당당한 국가가 어찌 일게 필부의 허망한 말을 선뜻 믿어 2백 년의 굳건한 터전과 살고 있는 수많은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일거에 떠돌이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터전을 장대하게 하고 영원한 명을 비는 참다운 도리는 다만 올바른 정치와 취사를 살피는 것, 백성들을 사랑하고 풍속을 도탑게 하는 것, 내정을 잘 닦고 외적으로 물리치는 일뿐입니다. 참으로 이 도리를 반대로 하면 비록 해마다 도읍을 옮긴다 하더라도 위란만 불러들일 것입니다." (광해군일기 4년 11월 15일)
이미 중종 때에도 천도에 관한 주장이 일어나자 중종은 이와 비슷한 조처를 취했다. 술수에 관한 그림이나 서적을 엄금토록 명한 것이다. 그런 책을 좀 읽고 와서 종일 떠들어대니 서운관에 명하여 술수. 지리에 관한 서적을 모두 없애 버리게 했다.
근래 1980년대의 일이다.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풍수 한 사람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박정희 대통령 묘지 아래 상당한 물이 흐르고 있어 천하의 흉당이다. 물이 없다면 내가 지관 노릇을 그만두겠다.' 그런 호언장담을 해서 실제로 시추를 해 보기로 일정이 잡혔다. 방송사에서도 촬영준비를 하고 기다렸지만 정작 그 시간이 되자 지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풍수는 조작된 허황된 학문에 속한다. 조선 시대 당시 최고의 지관들이 고르고 고른 땅이 대부분 왕릉이 들어선 곳이다. 그러나 조선은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강남구 도심 한복판에 선릉이 있다. 여기 기막힌 사연이 있는데, 그 능은 9대 왕 성종과 그 왕비인 정현왕후가 묻힌 곳이다. 그런데 처음 그곳에는 원래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이 묻혀 있던 곳이다.
성종이 죽자 당연히 묘지 논란이 일었고 온갖 풍수논쟁이 벌어졌다. 영의정 윤필상을 비롯하여 당대의 풍수 실력가인 노사신 등 5명이 쓸 만한 묘터를 찿아 헤매더니 드디어 광평대군이 묻혀 있는 선릉 자리를 강력히 추천했다. 조선 왕실의 어떤 자리보다도 명당이며 길함이 있을 뿐 흉이 없는 유일한 곳이라고 하였다. 광평대군의 묘는 이장하면 되었다.
왕은 망설였지만 이런저런 논리에 눌리고 말앗다. 좌청룡, 우청룡이 뭐며 사유를 다 갖다 붙이고 사람의 복이 미약한데 왕의 땅에 묻혔으면 오히려 흉한 것이다며 옛날부터 명당은 옛 무덤을 파내지 않은 곳이 없다며 현란하게 주장하여 광평대군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성종과 왕비가 묻혔다.
그 결과는?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연을 듣고 폭정이 계속되었고 많은 대신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쫓겨나고 말았다. 지금 선릉에는 성종과 왕비의 시신이 없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묘지를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서 모두 불살라버린 것이다. 그 대신 쫓겨서 내려간 광평대군의 후손들은 번창하여 화가 복이 되었다.
대원군은 집권하기 전까지 지관 정인만에게 부탁하여 전국의 명당 터를 수소문했다. 드디어 지관은 최고의 명당 터라면서 덕산의 한 산기슭을 알려 왔다. 대원군이 직접 그곳에 가보니 그곳에는 가야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었다. 그는 가보로 내려오고 있던 귀한 단계 벼루를 팔아서 충청감사에게 뇌물을 주고 절을 헐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연천 남송정에 묻혀 있던 선친 남연군의 시신을 상여에 담아 5백 리 길을 모셔와서 매장했다.
그 결과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고 훗날의 고종이 되었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펴던 대원을 궁지로 몰 요량으로 외국 군대가 상륙하여 남연군의 묘지를 파헤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이 유택을 보고 연구하려는 풍수를 연구하는 지관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과연 그 터가 명당 터일까? 오백 년간 긴 왕조가 망해버리고 왕비 민씨가 일본놈들 손에 죽었고 왕 역시 비운에 죽었는데 그 터가 명당 터란 말인가? 자손은 일본으로 끌려가고 후손도 모두 흩어져 버렸으며 정작 자신도 평화롭게 죽지 못했다. 이처럼 나라를 망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으니 그 터가 명당이 아니라 지독한 흉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전북 모악산 최고의 명당에 긴일성 선조의 묘가 있다. 그 묘 때문에 5백 년 뒤에 민족의 숙적 김일성이 태어났단 말인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프리카 케냐가 고향인데 그곳의 명당에 선조가 묻혀 있단 말인가?
1980년대 국내 최고 재벌이었던 한 사람도 지관을 동원, 명당에 선조들을 모셨지만 얼마 후 회사는 망하고 말았다. 그때 지관의 해석이 가관이다. 명당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사람의 사주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도 풍수관행이 뿌리 깊이 남아 있는 시대지만 잘 된 사람들이 조산의 무덤을 잘 써서 그리된 것은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강하고 풍수지관들의 현란한 말 쏨씨에 넘어가 잘 된 사람들의 묘지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현혹시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지관들은 또 이렇게 과학적인 이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시신이 아무리 썩어도 대퇴부의 큰 뼈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기가 살아 있는 자손들에게 텔레파시를 교환한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살아 있는 사람도 자손을 도와주기 힘든 터에 죽은 시신의 텔레파시가 도와준다는 이론이 허망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묘지를 잘 쓰면 몇백 년 후에는 왕이 나오고 재벌이 나온다? 하긴 태조부터 그런 걸 신봉했으니 후손들이 별 수 있었겠는가?
이런 풍수이론이 등장한 것이 바로 조선의 매장문화 때문이다. 화장을 하면 이런 풍수가 나올리가 없을 것이고 명당이론이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빨리 우리 사회가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장례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헬기를 타고 한번 우리 나라 땅 상공을 날아보라, 온 산천이 묘지로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온 국토의 산들이 종기난 산처럼 부스럼이 더덕더덕 난 모습이다. 이 모두가 나라를 병들게 만들었고 허송세월을 보내게 했으며 허례와 허식에 빠진 사상인 조선 시대의 유교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기둥뿌리 썩어가도 고담준론으로 수백 년
민생은 없고 권력 싸움만 벌인 조선
여자들의 치마자락을 왼쪽으로 두르느냐 오른쪽으로 두르느냐 그것을 두고 시끌벅적한 회의와 대립이 계속되었던 나라가 바로 조선왕조다. 노론과 소론 사이에 그런 치열한 대립이 있었는데 패션이나 편의성을 가지고 대립한 것이 아니라 음양오행설을 가지고 그렇게 다투었다.
각 왕조의 정월 초하루와 연말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두 가지다. 하나는 통상 연초에는 그해 새로운 계획으로 이런저런 일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계획 자체가 일체 없었다는 점이며 년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올해의 잘한 일 잘못한 일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 같은 것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런 것도 전무하였다.
그 대신 정월에 왕들이 가장 치중한 것이 제사 모시는 것이었다.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망궐례를 비롯하여 춘향대제, 창덕궁으로 들어가 선원전, 휘령전에 전배를 올리고 연복전에 작헌례를 올리고...... 그런 식이다. 그 논의들이 조정에서는 몇 달 전부터 치열하게 벌어진다.
왕들이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왕은 공부와 회의를 많이 한다. 주강이라 하여 당대의 고매한 대신들의 강의도 듣고 경연이라 하여 신하들과 함께 공부와 토론, 그리고 대신들과 함께 상참, 조참 등 여러 모임이 있다. 다음에는 각 대신들과 지방관들이 보내온 상소 등 보고서를 검토하는 것도 주요 업무다.
상당히 바쁘게 일과가 짜여 있다. 그런데 정작 바쁜 내용을 보면 좀 맥이 빠진다. 대부분 인사발령과 권신 집안의 초상 소식, 부의 전달, 들어온 선물, 권신들에게 내리는 선물, 헌릉의 비석 크기에 대한 논의, 지진 보고, 유언비어를 막으라는 지시, 봄 대제 모시는 문제, 초하루 제사를 모시는 논의, 가볍고 작은 배를 만들어 사용하라는 지시, 권신 한 사람이 죄인의 집과 혼사를 맺었으니 처벌하소서, 혼례 예물을 간소하게 하소서, 양녕대군에게 아첨한 무리들을 탄핵하소서, 조강지처를 내친 아무개를 처벌하소서, 금은 채취를 금하소서, 절도 3회는 중죄로 다스리소서, 이것만 보면 태평성대 시절의 한 모습 같다.
그 달 통틀어 회의에서 백성들을 위한 논의는 두 가지뿐이다. 굶주린 군정들이 각 고을을 떠돌고 있으니 구제하소서, 묵은 쌀 2천 석과 콩 1천 석을 풀어 백성들을 구조하라, 이상이 세종 5년 5월의 기록이다.
기록으로 본다면 그때도 기근이 들었다. 군정들이 성을 쌓고 길을 닦으며 농지 개간에도 동원되어 중책을 시행하고 있는 터인데 배가 고파 밥 동냥을 하러 일을 팽개치고 여기저기 떠돈다면 그야말로 국가 중대사인데 그냥 한두 마디로 끝내버린 것이다.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며. 어떤 대책이 나오면 그것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최종적으로 왕이 명령을 내리고, 그런 수순으로 진행되어야 하나 그런 일은 보이지 않는다. 그다음 달에도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백성들에 대한 관심은 적고 사대부에 대한 관심은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 문제로 한 달 내내 바쁘다 한들 백성들의 삶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지금 우리 국회를 봐도 그렇다. 국가적으로 가장 고민해야 할 교육문제, 실업문제, 주택문제, 복지문제, 사회적 범죄문제 등 그런 것으로 여야가 충돌하고 밤을 세우고 두둘겨 부수고 한다면 오죽 좋으련만, 국민들의 삶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문제로 해머를 휘두르고 단상이 점거되고 국화가 파행을 거듭한다면 조선 시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조선은 무수한 당쟁을 치렀다. 그 당쟁의 원인 역시 국가나 국민을 위한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오로지 조정 대신들끼리의 권력을 둔고 싸운 암투일 뿐이다. 요즘 NLL 문제로 국회가 시끄럽다. 여야가 서로 자신들의 명분과 상대를 죽이기 위한 싸움질일 뿐이다. 죽은 박정희, 노무현을 가지고 서로 깍아 내리고 싸우고 잇다. 야당은 박정희의 친일행각과 도덕성을 빌미로 박근혜 정권을 비하하며 깍아내리기에 혈안이고 여당은 죽은 노무현의 발언을 가지고 야당을 싸잡아 매도하려는 야당 죽이기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이 당장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것은 아니다. 또 전두환 비자금 환수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해외 비밀계좌에서 전씨 아들의 계좌가 나오자 검찰이 전씨 환수금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행태는 죽은 권력에 대한 보복으로 보인다.
태안 바닷가에서는 사설 해병대 캠프에서 고등학생들이 5명이나 물에 빠져 죽었다. 헤엄도 못치는 무자격 강사들과 알바생들을 고용하여 주민들도 위험하다는 곳에서 버젓이 영업을 한 것이다. 그런 영세 여행사에게 그런 무자격 영업을 허가한 관계 기관과 지자체, 그 업체가 조달청 온라인 장터에 버젓이 올려져 있어 학교에서 선택하였다고 한다. 이런 업체들이 전국에 여름철이면 수천개가 난립하여 안전사각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담당부서도 서로 핑퐁치면서 최근 5차례나 바뀌었고 그래서 감독기관도 없고 사고도 빈발하고 있으나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름철 반짝 영업을 하는 업체들이 대부분인데도 그런줄도 모르고 고등학생을 그 곳에 반강제적으로 군대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사설 훈련장으로 보낸 학교 당국 등 모두가 안전에 무감각하고 치밀하지도 못했으며 전적으로 우리 사회와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인재이다. 또 비가 내리는 장마철 노량진 지하 급수관 공사장에서 돌관작업을 하던 중 물막이가 터지면서 불어난 한강물이 갑자기 유입되어 인부가 여럿이 죽었다. 또 분당 야탑역에서는 깊이가 꾀 깊은 에스컬레이트가 역주행하여 여러 사람이 다쳤고, 세종대 실험실에서는 황산이 폭발하여 사람이 다쳤다. 안전불감증이 죽어버린 사회다. 우리 사회의 각 시스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이익과 비리, 그리고 부패에 연연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이 나라는 청년실업과 주택문제, 부동산 경기 침체로 건설업체가 줄도산을 하고 장마로 인해 춘천 등 여러 곳에서 주민들이 산사태와 침수로 재난을 당하고 도로가 붕괴되는 등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시아나기 사고 문제, 전작권 전환 문제, 개성공단 문제, 사회적 각종 범죄 문제를 포함하여 초고령,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고 사회적으로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문제를 개혁하려는 정부와 국회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현실이 과거 조선 시대와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었다. 단종을 죽이고 오아이 된 세조를 풍자한 그의 글을 실록에 실은 것이 발견되면서 반대파였던 유자광 등이 왕을 충동질하여 김종직 세력을 모두 죽였다. 이미 죽은 김종직의 시신을 파내 부관참시를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둘러싼 연산군의 개인적인 복수극이지만 한편에서는 왕권 확립 차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연산군은 게속된 폐륜적인 폭정으로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쫓겨나고 말았다.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대한 반대파들의 보복이고, 을사사화는 소윤과 대윤 사이의 권력 싸움에 불과하다.
수백 명이 죽고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이런 사화는 백성이나 국가적으로 볼 때에는 터럭 한 올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건일뿐 모두가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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