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문제
독도 문제의 기원
독도 문제는 현재 한.일간에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여차하면 국제사법재판소에 넘겨서 검증을 받고자 나서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우리 것이 분명한데 왜 재판정에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재판은 증거 자료를 위주로 하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이 일본에 비하여 특별히 더 유리하지는 않다. 일본은 기록의 왕국답게 몇 백 년 전 독도 관련 문서라든지 정보원들의 조선 정탐보고서까지 다채롭게 보관하고 있어서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우리나라가 <조선왕조실록> 등을 거론하며 기록이 잘 돼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의 기록은 우리를 능가한다. 또 국제사법재판소의 구성 인원들 세력 분포가 일본 측에 더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점도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대한제국 최초의 지리학 교과서인 <대한지지>에 수록된 우리 영토에서 독도를 제외시켰다. 울릉도까지만 우리 영토라고 명시한 것이다. 한일합방 이전 대한제국 자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보물 제850호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독도가 들어 있지 않다.
1948년 광복 후 자료들도 우리나라 영토가 독도까지라는 것을 누락하고 말았다. 미국 국무부가 한국전쟁 이후 만든 기밀문서에도 이 동해의 작은 바위섬은 조선의 열부로 취급된 것이 없으며 일본 시네마 현 오키 지청 관할의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제3자인 증인이 있는 반면 우리는 우리 자체의 주장뿐이다. 그들이 독도가 자기들 영토라고 공표한 공문서가 있는 반면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뒤처진다. 러시아 등의 국제 지도, 일본의 지도에서도 어느 것은 독도를 한국령이라고 했지만 또 다른 지도에는 일본령으로 해놓았다. 혼란의 연속이다. 그래서 재판을 벌이면 결과는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부도 국민들에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논리적 주장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감성적인 구호만 외치고 있어서 어지간한 사람에게 질문을 해도 왜 독도가 우리 땅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들이 독도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며 역사적 사료와 증빙 서류를 이제야 찿고 난리를 치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조선 사대부들처럼 '우리 것이니까 우리 것이다.'라는 논리로 주장할 뿐이다. 그래서 독도의 역사를 자세히 실펴보고 그 사실을 증거하고자 한다.
민족의 섬, 독도 전경
정말 독도가 우리 땅이란 말인가?
결론적으로 그 답은 분명 명확하게 우리 땅이 맞다. 여러 가지 일본측 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료뿐 아니라 일본의 자료까지 더 보태도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독도는 우리 영토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이렇게 일본측에 수세에 몰려 있는 것은 전적으로 조선의 왕들과 조정 관헌들 때문이다.
조선은 계속 이 독도를 나 몰라라 했다. 심지어 울릉도까지 나 몰라라 한 것이 조선 조정이었다. 지금 울릉도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무 말 않는 것도 사실 천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조선은 북벌이니 뭐니 허무맹랑한 소리를 할 게 아니라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여 수비를 든든히 하고 모든 국력을 해양 쪽으로 돌려야 했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해양으로 진출하기에 이처럼 좋은 반도가 없다. 서로는 대륙 중국과 동남아시아, 중앙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유럽으로 연결이 되고 북으로는 만주와 러시아, 북해, 알류산 열도 등으로 연결이 가능하며, 동으로는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남북아메리카로 연결이 가능한 해양 국가여야 했다. 그래서 신라의 장보고처럼 중계무역을 통해서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만 처다보면서 농사만 지었고 백성들에게 고혈을 빨았으며 좁은 땅 안에서 서로 쥐꼬리 만한 권력 다툼으로 500년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다. 그래서 바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태종이 거리상으로 일본보다 조선에 가깝고 왜구들이 준동하던 무수한 섬과 바위로 형성된 대마도를 적정에 대한 사전 지식과 정보도 없이 침공하고도 별로 성과가 없고 피해만 발생하고 주둔에 부담을 느낀 결과 그만 조선 군대를 철수한 것이 안타깝고 억울하기만 하다. 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보다 우리 영토에 근접한 도서이므로 당연히 우리가 관할 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신라 시대의 이사부 장군, 해상왕 장보고, 조선 시대의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제외하고는 바다를 통해 영토를 수호하고 중계무역을 통해 엄청난 국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왜 이렇게 조선은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했을까?
조선에서 울릉도는 어떤 땅이었나? 명칭도 무릉도, 우산도, 유산도, 삼봉도, 죽도, 송도, 요도 등 그때그때 부르는 것이 임자였고 명칭이어서 명칭 자체도 헷갈린다. 세종 때 이르러 북쪽 경계선에 4군과 6진을 설치하고 비로소 북쪽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그 반면 동해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한마디로 바다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멀리 바다 한 가운데 괴상한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섬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 가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태종의 지시로 대마도 정벌을 갔지만 지형과 적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무턱대고 상륙하였다가 조선군이 많은 피해를 입고 수천 개 섬에 흩어져 있는 왜구를 소탕하기는 역부족이라 눈에 보이는 사람과 마을만 일부 불태우고 포로로 잡혀 있던 중국인들을 데리고 철수하여 버렸다. 우리 역사에는 대단한 정벌로 기록하고 있지만 물길과 수로, 적정도 모르고 갔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되돌아오고 말았던 실패한 정벌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평생 글만 읽으며 권력을 잡고 지배층으로 군림하면서 오로지 백성들을 쥐어짜고 수탈하며 대궐같은 기와집에 처첩을 거느리고 허세를 부리며 호의호식하며 명분과 공리공론에다 제사, 장례 치르기 등 허례허식에 바빠서 바다 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이것이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에 대한 조선 중기까지의 인식이었다. 울릉도가 이정도 였으니 더더욱 독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조선 내내 울릉도는 내리 오백 년 동안 빈 섬이었다. 조선은 모든 섬에 대해서 섬을 비워두는 '공도정책'이라는 것을 유지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라 도망친 노비, 세금이나 군역을 피하려는 범죄자들이 숨어든다는 이유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굶어 죽는 사람이 해마다 줄을 잇고 한 치의 경작지도 아까웠던 때에 함경도 등지로 들어가 개척하라고 강제 이주를 시켰으면서도 울릉도 등 섬 지역에는 그런 식으로 대처하면서 방치했다. 한마디로 바다와 섬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안목도 없었다. 그런데 그사이 일본은 우수한 항해술로 울릉도를 자기집 뒷마당 드나들듯이 들락거렸다.
조선 시대부들은 배를 타는 것은 비천한 어부들이나 천한 것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 불과 바다, 그리고 배를 타는 자체를 거부했다. 그런 상태에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 했다는 전승 기록이 전혀 믿기지가 않는다. 아마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았다면 전승 기록도 무시했을지 모른다.
조선에서 을릉도까지는 400리, 일본에서는 1,500리의 먼 거리지만 일본 어부들은 우리보다 더 많이 들락거리면서 마음껏 고기를 잡고 나무를 베어갔다.
조선 조정은 몇십 년에 한 번씩 생각이 나면 관헌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들어가 거주하는 몇 명의 백성들을 토벌해오는 것이 전부였다.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조선의 '공도 정책'
동해안 바다 멀리 떨어진 울릉도는 전복도 많고 대나무와 목재가 무성한 섬이었다. 고려 이전 시대부터 그런 소문에 대한 보고가 심심찮게 이어지면서 역대 왕들은 그 실체를 정확히 알고자 하였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당시 양곡을 실어 나르는 공물선이나 군선을 제외하고는 일반 선박은 크기가 왜소하여 험한 파도를 넘어 수색선을 보내는 것도 용이치 않았다.
울릉도 요도
1407년 태종 7년 대마도에서 다이라라는 사신이 찿아왔다.
그가 온 목적은 동해에 죽도라는 섬에 가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는 것이었다. 비어 있는 섬이며 자기네 어부들이 오가면서 살펴보니 고기가 제법 많으므로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 고기잡이에 나서겠다는 것인데 앞뒤로 미루어 그들도 그 섬이 조선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 섬은 앞서 말한 거리상으로 볼 때 누가 보더라도 조선의 영토인 것이다.
대마도 사신의 제안은 논란 끝에 거부되고 말았다. 대마도인들은 거짓이 많고 흉측한 터인데 섬에 자리를 잡게 되면 그다음은 틀림없이 강원도 해안에 와서 노략질을 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태종은 비로소 이 섬에 대하여 호기심이 생겼다. 그 섬이 대체 어떤 곳인가? 이미 신라 시대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를 점령했던 기록 등 여러 가지 기록이 있지만 믿을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로부터 5년 후 강원도 관찰사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고성의 어라진 포구에 배 한 척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유산국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그곳의 주민은 11호에 60명이고 섬은 동서와 남북의 길이가 2식(1식은 약 12킬로미터)이며 둘레는 8식이다. 콩 한 말을 심으면 30석이 나고 보리 1석을 심으면 50석이 나며, 대나무 굵기가 큰 서까래만 하다는 것이었다. 들어가는 길은 오직 한 사람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고 온통 바위투성이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나 있다고 했다.
태종은 그런 보고를 받고 아무래도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안무사 만호 김인우를 보냈다. 김인우는 병선 두 척에 항해사와 사공 약간 명, 화약과 화통 및 식량과 왕이 하사한 선물을 가지고 갔다. 그때는 토벌이 아니라 주민들을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백성들을 만나 앞으로 국법을 준수해야 하며 더 이상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은 안 된다는 점을 당부를 하고 온 것 같다. 이 시기가 우리 조정으로서는 최초의 공식적인 울릉도 방문이지만 오히려 일본보다도 더늦은 것이었다.
민족의 섬, 독도 전경
이때 날씨가 맑아 멀리 바위섬 독도가 보이므로 김인우는 직접 그곳까지 가서 둘러보고 왔다고 보고를 하고 있지만 그냥 혼자만의 보고일 뿐이다.
머지않아 다시 남녀 28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몰래 무릉도로 도망쳤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조정 안에서 이 문제가 불거졌는데 가장 강경파는 황희 정승이었다.
"섬에 들어간 자들을 즉각 붙잡아 와야 하며 섬에 남아 있던 자들도 즉시 추방해야 한다. 내버려두면 머지않아 크게 인구가 불어날 것이며 인구가 불어나면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고 그러면 그들 역시 강원도 해안지방에 찿아와 노략질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며 의견을 제시했다. 조선의 역사에서 명정승이라는 이름이 나 있던 황희 정승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조선의 폐쇄적이고 해양 진출에 얼마나 소극적이며 오로지 현실에 안주하려는 실상이 여실히 엿보인다.
이 주장은 결국 십수 년 뒤 세종 7년이 되자 성사되었다. 김인우가 다시 토벌대장으로 군선 2척에 병사 100여 명을 거느리고 갔다. 접혀온 사람은 남녀 20명이고 풍랑에 배가 가라앉아 군사 47명을 잃고 말았다. 그중 10명은 일본에 표류하였다가 몇 달 뒤 돌아왔다. 세종은 잡아온 사람들을 법대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물리치고 충청도 깊은 산간 지역에 가서 살도록 해주었다.
사실 세종 때 무릉도의 대책을 두고 여러 차례 논쟁이 있었다. 그대로 섬을 비워두느냐 아니면 공식적으로 백성을 들여보내 살게 할 것이냐, 이때의 기록에도 섬이 두 개이므로 읍을 설치할 만하지만, 하나의 섬에는 사람이 머물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두 개의 섬이란 울릉도와 울릉도 동쪽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죽도라는 바위섬을 가리켰을 것이다.
장계에 의하면 무릉도는 백자목, 감나무, 독수리, 매, 흑비둘기, 전복, 문어, 바다표범, 물개 등 없는 것이 없는 섬이었다.
강원도 감사 유계문이 아뢰기를,
"무릉도의 우산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들도 많으며 동서남북으로 각각 50여 리 연해의 사면에 석벽이 둘러 있고, 또한 선척이 정박할 만한 곳도 있으니, 청컨데 인민을 모집하여 이를 채우고, 인하여 민호와 수령을 두게 되면 실로 장구지책이 될 것입니다." 라고 왕의 윤허를 요청했다. 그러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오늘날 생각하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처사였다.
세종은 또 울릉도 동쪽 멀리 괴이한 바위섬이 있지만 확실히 가본 사람이 없다는 소문에 흥미를 느끼고 이 섬의 실체에 대해서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섬에 대해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는 취지였다. 그 섬은 분명히 독도를 의미했다.
폭풍을 만나 표루하던 어선 한 척이 삼봉도에 도착하여 바람 잦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영안도 관찰사 이극균은 그들이 경성의 김한경 등 2인이라고 보고를 올렸다. 그들의 진술 내용은 아주 험성굿고 괴이한 섬이었다고 했다. 구름 사이로 눈앞에 멀리 우똑 솟아 있는 삼각형의 괴이한 바위섬, 바로 독도의 모습이었다.
조선 중기 성종은 이 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 몇 차례 수색명령을 내렸지만 날씨 관계로 불발에 그치고 성종 3년 첯 수색대를 보낸 이후 별로 성과가 없었다. 그 뒤 1476년 드디어 병조에서 섬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영흥사람 김자주가 그 섬에 4주야를 항해한 끝에 도착하여 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왔다는 보고였다. 이때의 기록은 매우 상세하다.
김한경과 영흥사람 김자주와 송영로 등 12명이 말을 실어 나르는 마상선을 타고 9월 16일 함경도 웅구미포를 떠나 같은 날 부령 땅 청암에 도착, 17일 회령 땅 가린곷에 도착했으며, 18일에는 경원 땅 말응대에 도착했고, 마침내 25일, 그들의 눈앞에 삼봉도가 나타났다.
"섬 서쪽 7,8리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크고 작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복판 섬 서쪽에도 또 작은 섬이 있고 모두 사이로 바닷물이 통한다. 또 섬 사이에는 인형 같은 뽀족한 바위들이 30개 이상 늘어서 있는 것이 괴이하다." (성종실록 7년 10월 27일)
그들은 두려워 섬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 섬 모양을 그려 왔다. 오늘날 그 그림은 남아 있지 않고 글로서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에 힘입어 성종은 본격적인 탐색대를 보내기로 결정한다. 3년 뒤 한번 내왕해 본 경험이 있는 박종원이라는 하급 말직에게 삼봉도 경차관이라는 직위를 주어 탐색 명령을 내렸지만, 그 역시 성과가 없었다.
성종 시절 주요한 업적 중 하나가 성종 12년에 <신증 동국여지승람>이란 책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단순한 지리서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지리 영토 해설서이다. 이 책의 내용 중 울진현을 보면 우산도와 울릉도가 정확하게 나와 있다. 이 두 섬이 조선왕조의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다는 것을 널리 천명한 것이다.
울릉도는 그전의 무릉도이고 우산도는 그전에 이름이 제각각이던 삼봉도를 호칭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쪽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측의 주장은 조선 측이 말하는 삼봉도는 울릉도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바위섬인 즉, 죽도를 말하는 것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울릉도 저동항에서도 뻔히 바라보이는 이 콩만 한 바위섬 죽도를 시종일관 그런 식으로 일본은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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