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56.기둥뿌리 썩어가도 고담준론으로 수백 년

구름위 2023. 4. 1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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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뿌리 썩어가도 고담준론으로 수백 년

 

16년 예송논쟁

 

헌종과 숙종 시대에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두 차례의 대논쟁이야 말로 조선을 표현할 때 가장 적절한 사건일 것이다.

 

'예송논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왕실의 복상과 같은 예법의 문제이지만 서인과 님인 사이의 해묵은 이념논쟁이고, 정권을 주도하기 위한 권력다툼이었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죽은 뒤 그의 계모인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요즘 '궁중잔혹사' 드라마를 보면 조대비와 봉림대군이 나오는데 조대비는 소현세자빈 강씨에게 자신을 이용하여 허세를 부려온 강씨를 미워하면서 소현세자가 독살되어 죽자 봉림대군을 은근히 옹립하려 한다.소현세자의 아들 원손이 나이가 어린 관계로 인조의 뒤를 잇기에는 강씨의 수렴청정이 예상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던 소현세자의 꿈은 모두 강씨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고 인조는 불안해하면서 자신의 우너한을 갚아줄 것같이 북벌을 주장하는 봉림대군을 은근히 후사로 생각하고 있다. 봉림대군은 북벌을 주장하며 인조의 피맺힌 한을 풀어야 한다면서 인조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러한 봉립대군이 인조는 은근히 자신이 대를 잇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편 조귀인은 김자점과 짜고 자신의 아들로 후사를 잇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조정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후일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여 북벌을 준비하려하지만 조정 대신들의 반대와 조선이라는 약소국이 중원의 청나라를 친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그것이 하나의 구호에 그치고 만다. 어쩌면 봉림대군은 자신이 인조의 뒤를 이어 등극하기 위해서 내세운 허울에 불과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난다.

 

그런가운데 효종이 등극 10년 만에 갑자기 승하했다. 젊은 조대비가 종법상 차자인 효종이 죽자 상복을 어떻게 입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에서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었을 경우 그 부모는 자식이 적통 장남인 경우는 3년상을, 차남 이하일 경우에는 1년상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인조는 첯째 아들인 소현세자가 죽은 뒤 소현의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우고 왕통을 승계하게 하였다. 효종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효종이 왕위에 올라 왕통이 이어졌지만 종법상으로 그를 적장자로 볼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다. 효종은 왕통상으로 인조의 적통을 이엇지만 종법상으로는 인조의 둘째아들이므로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는 당연히 종법에 따라 1년상을 입어야 했다.

 

송시열과 서인들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기년상(1년상)을 주장했고 윤휴, 허목 등의 남인은 3년상을 주장하며 대립이 벌어졌다. 그 결과 1차 예송은 결국 서인의 1년설이 채택되어 서인들이 현종 시대에 세력을 잡는 명분이 되었다.

 

2차 예송은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가 죽자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또 벌어졌다. 만약 효종을 장자로 인정한다면 조대비는 1년복을 입어야 하고 효종을 차자로 볼 경우는 9개월인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 이때 1차 때와는 반대로 서인의 대공설과 남인의 기년설이 대립을 하다가 결국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이번에는 송시열이 귀양을 가는 등 서인들이 축출되고 남인 정권이 들어섰다.

 

이 예송논쟁은 조선 후기 선조 이후에 벌어진 붕당정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효종이 승하한 후 관을 준비하다가 왕실은 깜짝 놀랐다. 관이 왕의 체구보다 작은 것이었다. 새로 만들려고 넓은 판재를 긴급히 찿았으나 없었다. 별수 없이 부판을 대어 관을 널리는 수밖에 없었는데 새 왕이 된 현종이 대노했다. 특히 송시열을 지목하여,

 

"예를 잘 안다고 자처하는 놈이 이런 꼴을 만들다니 저런 놈이 30년이나 재상으로 있던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이 때문에 송시열은 이조판서직을 사임했고 예손논쟁에 더 적극적이게 된 듯하다.

 

효종은 5월 9일에 승하하여 10월 29일에 영릉에 안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이 되어 대논쟁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조정의 전 업무의 태반은 이 논쟁이었다.

 

처음 상소한 사람은 장령 허목이다.

"예관이 당연히 국가 전례대로 하겠지 하고 여겨, 지켜보고만 있다가 시골로 내려온 후 비로소 대왕대비께서 기년(1년) 복제를 입으시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너무 황급한 나머지 그러한 실수가 있었던 것인지요?"

 

그는 구구한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적장자에 대한 정의, 해석 등을 논했다.

 

"정처기 낳은 자식은 모두 적자로서 만약 첯째 아들이 죽으면 정처가 낳은 둘째 아들을 세우고 역시 장자로 명명하는 것이며 만약 적자라고 한다면 이는 오직 첯째 아들에게만 해당되지만, 정자라고 한다면 적통을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통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상소문은 거의 논문 수준으로 거듭 읽어봐도 어렵기만 하다.

"왜 굳이 상복을 3년씩 입는 것일까? 아버지가 복을 내려 입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도 감히 내려 입지 않는 것입니다. 적자에서 적자로 이어졌을 때 그를 일러 '정체'라 하여 3년을 입을 수 있고,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을 때는 그를 일러 '체이부정'이라 하고 따라서 3년을 입을 수 없는데, 그는 첩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소현세자가 이미 세상을 일찍 뜨고 효종이 인조의 둘째 장자로서 이미 종묘를 이었으니, 대왕대비께서 효종을 위하여 재최(상사에서 입는 다섯 가지 복장 중 참최 다음가는 무거운 상복) 입어야 할 것은 예제로 보아 의심할 것이 없는 일인데, 지금 그것을 무시하고 기년 복제로 한 것입니다.

 

지금 효종으로 말하면 대왕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며 체계를 밟아 왕위에 오른 존엄한 '정체'인데, 왜 3년복이 아니란 것인지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일인지 신으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현종실록 1년 3월 16일)

 

이 상소가 올라오자 조정은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시끄러워지고 1년복파와 3년복파로 나뉘었다.

 

날마다 상소가 연이었다. 각 지방에서도 상소문이 쏟아졌다. 전국이 소란스러워진 것이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했다.

"이번에 장령 허목이 경전을 인용하여 매우 장황한 논설을 하였습니다. 신이 그의 논설에 대하여 서로 힐난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만약 허목의 말대로라면 가령 사대부의 적처 소생이 10여 명인데, 첯째 아들이 죽어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3년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또 죽으면 그 아비가 또 3년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 다섯째, 여섯째가 차례로 죽을 경우 그 아비가 다 3년을 입어야 하는데, 그것이 법전의 뜻이란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현종실록 1년 3월 21일)

 

이 상소를 본 허목이 다시 상소했다.

"신이 조참찬 송준길이 올린 차자를 봤는데, 상복 절차에 대하여 논한 것이 신이 논한 것과는 크게 거리가 잇습니다. 모두 <예경>에 의거하여 쟁론을 하고 있지만 이 예는 대례입니다. 이 예에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면 앞으로 예의 기준을 어떻게 정하겠습니까? 예가 너무 많고 내용도 분분하여 예로부터 예를 이름하여 '취송의 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상복같은 대례이 있어서는 조리가 엄격하고 분명하여 어리럽혀서는 안 됩니다. 신이 삼가 상복장의, 장자를 위하여 참최 3년 또는 기년을 하는 제도와, 적자.서자의 구별을 조목조목 도표로 작성하여 올립니다." (현종실록 1년 4월 10일)

 

지금은 이런 문제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사활을 결고 싸웠다.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문제였다. 성리학의 예를 논하는 자리에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주장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설 자리가 없게 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결국 1차 논쟁에서 현종이 손을 들어준 쪽은 1년설을 주장한 송시열계의 서인이었다. 조정의 논쟁에서 이기게 되면 반대파 세력은 당연히 기를 펴지 못하게 된다. 세력이 죽어버린 남인들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현종 재위 기간 내내 틈만 있으면 서인에 대항하여 사사건건 반대 논리를 폈다. 그 기간이 장장 15년 세월이었다.

 

현종 7년 경상도에서 유생 1천여 명이 연판장을 올려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 송시열의 처벌을 요구하여 다시 한 번 논쟁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때도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하여 백성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어 나가던 시기였지만 국가는 예송논쟁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현종이 죽자 다시 논쟁이 피어올랐다. 대왕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로 갈등이 재점화되면서 1차 논쟁을 벌이다가 이번에는 서인들이 지고 말았다.

 

어린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동안 숨 죽이고 있던 반대파들이 모두 일어나 송시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죽은 효종을 서자라고 폄하했다는 주장이었다. 처음에는 송시열을 감싸주었던 숙종도 송시열을 증오하고 있던 영의정 허적의 편으로 돌아서 버렸다. 자신의 할아버지 효종을 서자로 폄하했으니 숙종의 기분이 좋았을리 없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넉 달여 만에 70세의 나이로 귀양형을 받고 유배를 가고 나머지 서인 세력 대부분이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송시열이 선왕을 펌하했다는 것도 억울한 것인데 이제 와서 15년 전의 그 주장을 빌미로 귀양을 보내기를 청한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송시열은 나이가 이제 70이고 또 대신인데, 먼 곳에 귀양을 보냈다가 불행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오니 고향애 가서 여생을 보내개 하소서." 하고 신하들이 연달아 주청하였으나 숙종은 단호하였다.

 

"송시열은 효종의 예우를 입었는데도 보답하려 들지 않고 도리어 서자라는 폄칭을 가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광해군 때에 가장 역점 시책은 역모 용의자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임해군을 귀양보내고 여덟 살짜리 영창대군을 귀양 보내기 전까지도 조정은 제 업무를 중단하고 그 논쟁에 몰두했으며 영창대군이 귀양을 떠나자 이번에는 또 죽이라고 온 조정이 매달렸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조정이 마비되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 역적과 한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인이니 당장 법대로 처단하소서를 외치며 조정 대신들은 한겨울에도 3교대로 들락거리면서 하루 종일 왕을 닦달했다. 나중에는 광해군이 지쳐서 대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당시 대북파들은 광해군의 즉위가 불안한 상태였고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살아 있는 한 언제라도 골치거리였다. 선조가 50줄이 넘은 나이에 10대의 어린 새왕비를 들였으니 바로 인목대비이며 그녀가 낳은 아들이 바로 영창대군이다. 선조가 갑자기 죽자 인목대비는 고민에 빠졌다. 어린 영창대군이 왕위를 계승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정은 세자인 광해군의 세력이 가득찬 상태였고 오랜 기간 동안 왜란을 겪으면서 분조를 이끌고 노력해온 광해군이 세자로 엄연히 자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인목대비는 자신도 살고 영창대군도 살기 위해서는 이미 세자인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승인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조의 서자이면서 왕위를 승계한 광해군의 자리는 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잡은 대북파는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역모 혐의를 씌워 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나중에는 '칠서의 난'을 조사하면서 사실을 조작하여 위증하게 만들어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까지 죽이고 말았다. 그것은 결국 '폐모론'을 낳았고 온 나라는 광해군의 폐악에 대해서 전국의 유생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나중에는 숙청된 반대파들이 연합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켜 대북파와 광해군의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