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594

1949년 장개석 대만탈출

1949년 1월 21일 국공내전에서의 패전이 임박하자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蔣介石)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일단 '하야'를 합니다. 공석이 된 총통직을 부총통 이종인(李宗仁)이 '대리'하게 되었지만, 장개석이 계속 국민당 총재직을 유지함으로서 실권은 여전히 장개석이 쥐고 있는 상황이었지요(국민당의 정부체제는 소련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당권우위의 체제였음). 이미 1948년부터 장개석은 패전을 예감하고 대만을 최후보루로 삼으려는 구상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48년 말 수도 남경(南京)의 공장시설들을 대만으로 운반하려 시도한 것 외에 하야 직후엔 장남 장경국(蔣經國)을 상해(上海)로 파견해 공군으로 하여금 신속히 비행장을 수리, 건설토록 독려하였습니다. 이 비행장을 통해 대만으로 공수한 것은 군대는 물..

< 중원 대전(中原大戰) > 군벌시대 최대의 혈전 - 북벌 끝나다

신해혁명 이래 중국은 사실상 무정부상태가 되어 전국에 할거한 군벌들간의 치열한 혈전이 반복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치열했으며 또한 군벌내전의 종지부를 찍은 전쟁이 장개석 진영과 반장개석 진영간에 벌어진 중원대전입니다. 1929년 4월부터 1930년 11월까지 벌어진 ..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23화 "라이즈 오브 코뮤니스트, 중국공산당의 성립"

국공내전 말기 이른바 "3대전역"에서 200만에 달하는 국민당 정부군의 주력을 격멸한 모택동의 인민해방군은 49년 4월 20일 저녁, 양자강을 도하하여 최후의 총공세에 나섭니다. 이미 전투능력을 거의 상실한 국민당군은 국지적으로 치열한 저항을 하기도 했으나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공..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22화 "풍운의 만주, 2대세습에 성공한 장학량"

이번에는 그가 어떻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권을 쥐게 되었고 또 이른바 "동북역치"(여기서 역치란 바꿀 易에 깃발 幟 즉 깃발을 바꾼다라는 의미입니다. 중국에서는 한 진영에서 다른 진영으로 옮겨타는 것을 깃발을 바꾼다하여 "역치"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거나 또..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21화 "신해혁명, 마지막 황제 부의 퇴위를 선언하다"

1911년 10월 10일 저녁 7시. 호북성 무창에 주둔한 호북 신군 제8진(사단)의 병사들이 "반청"을 외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주로 혁명파에 가담한 병사들과 부사관들로, 공병 제8영(대대) 소속의 병사 40명이 무기고를 기습해 독일제 마우저 소총 1만정을 비롯해 수만정의 무기와 대포, ..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20화 "천하를 통일하다. 그러나..."

한편, 북벌군이 둘로 갈라져 몇달이나 좌중지란을 겪는 동안 그럼 북방의 패자였던 장작림은 뭘 했던가. 27년 6월 8일, 서주에서 손전방과 장종창 양군을 아작내버린 장개석은 북경의 장작림에게 삼민주의와 국민혁명군에 복속하면 현재의 지위를 인정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이는 말그..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19화 "분열과 하야, 그리고 결혼"

과거 손문의 혁명전쟁과 마찬가지로, 장개석의 북벌군 역시 잡다한 군벌들의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다보니 국민당과 혁명이라는 구심점은 있어도 실상은 군벌들간의 세력 다툼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국민당내에서도 수많은 계파가 있었고 이들 역시 권력을 노리고 군벌들..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18화 "장개석 북벌을 선언하다"

원세개가 국회를 해산하고 황제에 등극하자, 손문은 광주를 기반으로 원세개와 북양군벌 토벌을 외치며 수차례 북벌에 나서지만 실패로 끝납니다. 북양군벌의 군사력이 남방보다 훨씬 막강했던 것도 있지만, 위대한 혁명가였지만 군인은 아니었던 손문에게는 자기 직속의 병력이 없었..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17화 "장개석의 북벌과 그 의의"

1926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있는 광동성 광주에서 열린 국민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에서 장개석은 군사위원회 주석의 이름으로 전국 통일을 위한 "북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1928년 12월 29일 장작림 폭사후 만주의 실권자가 된 장학량이 복종을 선언함으로서 신해혁명이래 각지에 할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