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20화 "천하를 통일하다. 그러나..."

구름위 2013. 12. 2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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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북벌군이 둘로 갈라져 몇달이나 좌중지란을 겪는 동안 그럼 북방의 패자였던 장작림은 뭘 했던가. 27년 6월 8일, 서주에서 손전방과 장종창 양군을 아작내버린 장개석은 북경의 장작림에게 삼민주의와 국민혁명군에 복속하면 현재의 지위를 인정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이는 말그대로 장작림보고 백기들고 자기앞에 무릎 꿇라는 소리였죠. 산전수전 다 겪으며 중국전토의 절반을 차지했던 장작림이 이제와서 자기보다 14살이나 어린 애송이한테 굴복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주력부대는 여전히 건재한데다 손전방, 장종창, 오패부의 병력까지 합하면 장개석의 군대따위는 한큐에 보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합니다. 

콧방귀 한방으로 장개석의 제안을 단칼에 짤라버린 그는 자신이 있는 북경에서 봉군의 주요 지휘관들을 모두 모아 대책회의를 개최합니다. 그러나 장작림 마적시절부터 함께 했던 장작상, 오준승 등은 장개석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대신 일단 만주로 돌아가서 재정비하자고 제안했고, 반면 원로장학량, 한린춘 등 신진세력들은 장개석과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장작림이 만주로 돌아가면 완전 개털신세가 되는 손전방과 장종창은 당연히 사생결단으로 싸우자고 주장하죠. 직예성(북경-천진 일대)을 장악하고 있던 저옥박 역시 만주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말합니다. 장작림의 봉군 역시 자기 이해관계가 최우선이다보니 단결은 고사하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난리가 납니다.

 

결론이 안 나자 회의는 여러차례 개최되었는데, 결국 장작림은 천하를 노리는 자기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장개석의 북벌군과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합니다. 또한 과거 원세개를 흉내내 6월 18일 장작림은 북경의 관료들과 열강들의 외교사절들을 모아 거창하게 대원수직에 오릅니다. 아마 그의 평생의 마지막 희망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겠지만요. 그러나 그의 신정부를 중국 정통정권으로 승인하는 나라는 단 한나라도 없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재정이 완전히 바닥난 것이었습니다. 장작림이 제1차 직봉전쟁에서 오패부에게 아작났을때는 그야말로 와신상담하는 마음으로 철저하게 준비하고 자기 영토를 개발하여 봉군은 철저한 군기와 훈련을 갖추고 군비도 넉넉했습니다. 덕분에 제2차 직봉전쟁에서 "중국 최강의 남자"이라 불리었던 오패부를 일방적으로 격파하고 북경의 새주인이 될 수 있었죠. 그러나 이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장종창, 양우정, 이경림 등 장작림의 지휘관들은 개인적으로 돈을 마구 낭비하고 온갖 약탈을 일삼습니다. 무기 보충은 고사하고 애들 월급도 몇달씩 체불되니 사기는 최악이 되고 군조직 자체가 와해되어 비적떼와 다름없는 오합지졸로 전락하게 됩니다.(실제로 비적들도 많이 있어 장작림의 북경 신정부의 각료들과 공무원들의 월급도 제대로 못 줄 판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북벌군이 북벌을 중단하고 무한과 남경으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자 장작림은 장개석에게 같이 연합해 "빨갱이들"(좌파가 장악하고 있던 무한정부와 풍옥상의 국민군을 지칭)을 토벌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이미 풍옥상을 자기 세력으로 끌여들인데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중국을 통일하겠다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으니 자기랑 중국을 남북으로 반타작해먹자는 장작림의 제안따위는 안중에도 있을리 없었습니다. 따라서 회담은 결렬되었고 양자간의 전면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죠. 

 

즉, 장작림은 자기 개인 야심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대총통 취임식을 거행한다고 시간과 막대한 자금을 낭비했고 봉군은 한낱 오합지졸로 전락한 상태이다보니 북벌군이 양쪽으로 분열되고 장개석이 하야한 이런 좋은 기회를 전혀 활용하지 못한채 그냥 날려먹었던 것입니다. 출세욕만 있을뿐 아무런 전략적 시야도, 장기적 안목도 없이 단지 벼락출세한 마적출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죠. 

 

한편, 1928년 1월 8일, 장개석은 하야한지 6개월만에 총사령관에 다시 복직합니다. 작년말 10살 연하의 아리따운 새색시와 결혼한 그는 한달간의 밀월여행을 끝내고(송미령은 초혼이었지만, 장개석은 이미 4번째였다는... 나쁜 시키) 그동안 무한과 남경으로 분열되고 여러 계파간의 극심한 대립상태였던 국민정부를 재통합함과 함께 당권, 군권, 정권 모두를 장악함으로서 국민당내에서 주도권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2월 2일 국민당 제2기 4중전당대회에서 제2차 북벌을 선언합니다. 최종목표는 북경을 장악하고 있는 장작림의 봉군을 격파하고 중국 전토를 국민정부의 기치 아래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2월 16일 장개석은 직접 하남성 개봉에서 풍옥상, 염석산을 만나 서로 협력키로 하죠. 장작림, 오패부와 대립하고 있던 이 두 거대군벌이 남경국민정부와 북벌군에 정식으로 복속하자 장작림은 삼면이 봉쇄되어 전략적으로 매우 불리해 집니다.  

 

제2차 북벌군은 총 4개 집단군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규모도 1차 북벌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응흠의 제1군을 핵심으로 광동, 복건 등의 남방계열의 군벌군을 모아 제1집단군으로 편성했으며 병력은 18개군 29만명에 달했습니다. 제1집단군은 북벌군의 주력으로서 서주에서 북진하여 산동으로 진격합니다. 풍옥상의 국민군은 제2집단군으로 개칭되었으며 병력은 25개군 31만명이었습니다. 제2집단군은 섬서성에서 하남성으로 진격하였고 동시에 수원성에서 북경을 위협합니다. 염석산의 산서군은 제3집단군으로 개칭되어 11개군 15만명이었습니다. 제3집단군은 풍옥상의 제2집단군과 연합해 북경으로 진격합니다. 한편, 남경정부에서 장개석 다음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이종인의 광서군(계군)은 패망한 당생지의 잔여부대를 복속하여 제4집단군을 구성합니다. 병력은 20만정도였습니다. 제4집단군은 호북성에서 하남성을 거쳐 직예성으로 북진합니다. 총사령관은 장개석, 총참모장은 하응흠이었습니다. 

 

 

제2차 북벌(28년 2월 ~ 28년 6월)에서 북벌군의 진격로 

 

27년 10월 염석산휘하의 명장인 부작의의 제4사단이 봉군을 격파하고 북경남쪽의 탁주를 점령합니다. 북경 수비에 치명적인 위협이라 여긴 장작림은 제8군을 지휘하는 만복린에게 4개 여단, 포병 1개 연대, 전차 1개 대대를 지휘케 하여 맹공을 퍼부어 결국 28년 1월 6일 함락시키고 부작의는 포로가 됩니다.  

 

부작의를 격파함으로서 일단 측면의 위협을 제거한 장작림은 28년 1월 25일 주요지휘관들을 모아 이른바 "안국군 최고 군사회의"를 개최하여 북벌군에 대항하기 위한 방침을 수립합니다. 

 

1. 장학량이 지휘하는 봉군 최정예부대인 제3,4방면군 50만명이 한단이남으로 가서 하남성으로 진격해 풍옥상군을 공격하고 염석산을 견제한다. 상황이 유리해지면 산서선으로 진격해 염석산을 완전히 아작낸다.

2. 장종창의 제1방면군과 손전방 부대는 산동 남쪽을 철저하게 방어하여 장개석군의 북진을 저지한다. 

3. 저옥박의 제7방면군은 대명에서 장학량군을 지원한다. 

4. 장작상의 제5방면군은 평형관을 거쳐 대동으로 진격해 장학량군과 연계해 염석산군을 공격한다. 

 

 

 

대략 이런 식인게 장작림의 작전계획이었습니다. 즉, 장개석의 북벌군에 대해서는 장종창, 손전방이 산동에서 방어하면서 장학량을 비롯한 주력부대를 풍옥상, 염석산군에 집중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장개석이 주력부대를 산동에 집중시켜 봉군 최약체인 장종창군을 격파하고 봉군의 남쪽 방어선을 돌파한다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으로, 적의 가장 강한 전투력에 대해 가장 약한 부대로 상대하게 한 것은 장작림의 최대 실책이 됩니다. 한마디로 평생 군복을 입은 군벌이었으면서도 정작 제대로 된 기초 군사교육조차 받아본 적이 없는 아마추어의 한계였죠. 

 

따라서, 장학량의 부대가 한단에서 남하하여 하남성 북부의 안양을 장악하고 있던 풍옥상휘하 명장 손연중에게 맹공을 퍼부어 이를 대파한후 추격합니다. 또한 장작상군도 평형관에서 염석산군을 대파하고 대동을 점령한후 염석산의 사령부가 있는 태원 북쪽까지 진출합니다. 이들의 승리는 풍, 염에게는 치명적이었죠. 

 

그러나 장종창은 수비를 하라는 장작림의 지시를 어기고 멋대로 장개석이 있는 서주를 공격했다가 완전히 박살납니다. 그의 군대는 봉군 최악이었고 비적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었으며 무기도 매우 빈약했습니다. 장종창의 지휘능력도 형편없었죠. 서주로 진격하다가 장개석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었고 따라서 후퇴도중 대참패를 당합니다. 잔존부대를 제남에 집결시켰으나 장개석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5월 1일 제남으로 진격해 함락시킵니다. 

 

이때 일어난 사건이 바로 "5.3사건(제남사건)"입니다. 장작림의 스폰서 역할을 하고 있던 일본은 장작림이 패망직전에 몰리는 것을 보고 이기회에 중국을 침략할 생각으로 "제남의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5천명에 달하는 제6사단을 파견합니다. 그리고 제남성에 진입하는 북벌군 제40사단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힙니다. 

 

일본군 제6사단은 5월 3일~4일 양일에 걸쳐 제남성내 상가주변에서 중국군 제40사단을 공격해 일본군 전사 10명, 부상 41명, 민간인 13명이 사망합니다. 반면 중국측은 군민 포함해 1천명의 사상자와 1,700여명이 포로가 됩니다. 그리고 장개석에게 "제40사단장 처형", "중국군 무장해제", "제남성 및 교제철도(청도~제남을 연결하는 철도) 20리밖으로 철수" 등을 요구합니다. 중국측에서 회답이 없자 5월 8일 중국군을 재차 공격하여 11일 제남성을 완전히 점령합니다. 두번째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 26명, 부상자 57명에 대해 중국측은 군민 사망 3,600명, 부상 1,400명에 달했습니다. 거의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것이었죠. 아무런 경고도 없이 무차별로 성내에다 포격을 가함으로서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던 것입니다.  

 

사태를 보고받은 장개석은 1개 연대만 남기고 일단 제남에서 물러섭니다. 일본의 의도가 뻔한 이상, 일본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그야말로 승산없는 짓인데다 장작림에게만 유리한 것이었죠. 현지의 일본군 제6사단은 이번기회에 아예 산동 전역을 장악해 자기들 식민지로 삼자고 주장했으나 본국에서는 무력충돌 확대를 피하고 외교교섭으로 해결키로 합니다. 양자는 7월 18일 남경에서 회담했는데 중국측 대표인 왕정정 외교부장은 일본측의 야다 총영사에게 매우 강경한 자세로 중국측 사상자가 일본측의 수십배에 달한다며 오히려 일본의 사죄와 일본군 지휘관의 처벌, 일본군의 즉시 철군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양측은 첨예하게 대립하죠.  

 

결국 29년 3월 24일 양측 모두 손해배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과 사죄문제 역시 서로 요구하지 않으며 제남을 점령중인 일본군에 대해서는 5월까지 철수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28일에 정식으로 조인합니다. 일본쪽에서 본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요구조건은 하나도 관철하지 못한채 그냥 아무일도 없었던 것으로 흐지부지 끝난 셈이었죠. 중국으로서는 비록 사건의 피해당사자로서 일본측의 사죄와 피해보상, 추후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내지는 못했으나 어쨌든 일본군의 철수를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전의 청조정이나 친일 북양정권의 무조건적인 양보에 비한다면 큰 진전인 셈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일본정부내에서 강경파와 온건파간의 갈등과 대립이 극심해졌고 일본군부는 내각과 외무성을 무능하다며 불신하게 됩니다. 

 

제남사건과 상관없이 장개석은 계속 장작림의 봉군을 공격하여 전군에게 황하를 도하할 것을 명령하고 천진으로 진격합니다. 산동의 방어선이 어이없이 붕괴되고 북경까지 위협받자 장작림은 풍옥상, 염석산을 공격하고 있던 장학량, 양우정, 장작상 등에게 전면 철수 명령을 내립니다. 봉군이 후퇴하자 풍옥상, 염석산도 반격하여 염석산은 석가장을 점령하고 5월말에는 장가구와 보정을 점령합니다. 풍옥상 역시 장학량군을 추격해 북경남쪽의 남원을 점령하죠. 이종인의 제4집단군도 북상해 천진으로 진격합니다. 이로서 장작림의 사령부가 있는 북경은 삼면이 포위되죠.  

 

상황이 절망적이 되자, 장작림은 잔존부대를 산해관으로 철수토록 하는 한편 장개석에게 휴전 제의를 합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거부하고 북경에서 나가서 만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죠. 결국 6월 2일 장작림은 장개석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신의 근거지인 봉천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탑니다. 그리고 6월 4일 새벽 5시, 황고둔역에서 출발한 그의 열차는 봉천역 도착을 얼마 남기지 않고 철도에 설치된 폭탄이 터짐으로서 폭사합니다. 청말부터 민국초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고 한때 천하를 통일할뻔했던 한 풍운아의 어이없는 최후였죠. 한달후인 7월 4일 장학량이 동삼성보안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아버지의 뒤를 승계합니다.

 

6월 8일, 염석산의 제1군이 북경을 무혈점령하고 6월 11일에는 신강성의 성장이자 "신강왕"이라 불리우던 양증신이 국민정부에 복종할 것을 선언합니다. 사천, 운남, 귀주성의 군벌들과 청해, 감숙, 영하를 통치하던 서북 마씨일족들도 대세를 읽고 스스로 알아서 무릎을 꿇습니다.  

 

한편, 일본은 장학량을 자신들의 괴뢰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오히려 장학량은 장작상, 만복린 등 동북의 여러 성장들과 주요 지휘관들과 회의를 열어 국민정부에 복종하기로 결정합니다. 12월 29일 장학량이 통치하는 동3성과 열하성이 국민정부에 복속함으로서 장개석의 북벌전쟁은 종료됩니다. 순수한 군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북벌전쟁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이 없을만큼 양측의 군사작전은 아마추어적이었고 일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00년전의 나폴레옹전쟁이나 미국의 남북전쟁보다도 형편없었죠. 오히려 전투보다는 정치와 책략에 좌우되었습니다. 

 

이로서 신해혁명이래 분열되었던 중국은 20여년만에 장개석에 의해 하나의 정부로 통일이 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구군벌들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한채 단지 형식상 장개석에게 복종을 선언했을뿐 여전히 자신들의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북벌과정에서 이종인은 장개석과 거의 맞먹는 세력으로 커진데다, 풍옥상, 염석산도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장학량 역시 동북에서 건재함을 자랑했죠. 이들에게 삼민주의니, 문민화니 따위는 관심밖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장개석대로 중국은 아직 미개하여 민주화는 아직 먼 훗날의 일이며, 지금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로 구축하기를 원했죠. 오월동주의 관계가 깨지자 새로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다 27년 8월 1일 주덕, 섭정, 하룡 등을 중심으로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장발규 휘하 부대들이 남창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반란은 장발규과 주배덕의 정부군에 의해 3일만에 패퇴했지만 또 12월 11일에는 광주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국공합작이 장개석에 의해 깨지고 국민당내에서 쫓겨난 공산세력들이 반장운동을 벌이며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가죠. 여기다 모택동이 정강산에 둥지를 만들고 추종자들을 모으며 세력을 불리고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북벌에는 쉽게 성공했지만 그의 앞에는 훨씬 더 강한 적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