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21화 "신해혁명, 마지막 황제 부의 퇴위를 선언하다"

구름위 2013. 12. 2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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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10월 10일 저녁 7시. 호북성 무창에 주둔한 호북 신군 제8진(사단)의 병사들이 "반청"을 외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주로 혁명파에 가담한 병사들과 부사관들로, 공병 제8영(대대) 소속의 병사 40명이 무기고를 기습해 독일제 마우저 소총 1만정을 비롯해 수만정의 무기와 대포, 기관총, 탄약을 획득합니다. 이 양은 수개 사단이라도 당장 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였죠. 이들의 봉기에 호응해 여타 부대들도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육군소학당의 학생들까지 가세하여 반란군은 단숨에 3천명으로 불어납니다.

 

당시 무창에 주둔한 병력은 제8진과 제21혼성협(여단) 등 1만 5천정도였는데 사천의 반란을 진압하러 2개표(제31표, 제32표 표=연대)가 동원되어 남은 병력은 1만정도였습니다. 실제로 반란에 가담한 병력은 전체의 1/3도 안된 셈이죠. 더욱이 전날 혁명파 장교명단이 발각되는 바람에 만주족 출신 호광총독 서징이 이들을 대거 색출하고 즉결처형하자 살아남은 이들도 대부분 도주해버립니다. 따라서 실제 봉기에 반란군에 가담한 장교들은 극소수였으며 계급도 기껏해야 배장(소대장)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또 동맹회 회원으로 반란을 총지휘했던 장이우는 군인이 아닌 문인이었습니다. 따라서 3천명에 달하는 반란군을 제대로 지휘할 지휘관조차 없었죠. 반란군의 총독부 공격을 지휘한 오조린도 대관(중대장)에 불과한데다 원래 혁명파도, 사전에 반란에 가담했던 이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정부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임에도, 무능한 호광총독 서징은 자신의 관저에서 대포소리를 듣자 감히 대문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부하들에게 담장에 개구멍을 뚫게한후 자신의 처첩과 가족들, 하인들을 모조리 데리고 도망갑니다. 그리고는 양자강 위에서 경계근무중이던 7척의 군함중 한척인 초예함으로 도주하죠. 아직 반란군이 총독부로 쳐들어 온 것도 아니고 총독부에는 많은 병사들이 수비중이었음에도 대포소리 한방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간 것입니다. 덕분에 반란군은 거의 총한발 쏘지 않고 총독부를 간단히 점령합니다. 이것이 청나라 말기 유약한 만주귀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제8진의 진통(사단장) 장표도 도주했고 제21혼성협의 협통인 여원홍은 직접 칼을 들고 반란군에 가담한 병사를 베어 죽였으나 그 역시 겁많고 유약한 인물이다보니 상황을 진정시키지 못하자 도주하여 자신의 참모인 류문지의 집에 숨습니다.

 

이렇게 무창혁명은 몇시간만에 어이없을 정도로 손쉽게 끝났고 다음날에는 한양을, 그 다음날에는 한구도 점령하여 중국의 한가운데이자 전략요충지인 "무한3진"을 점령합니다. 이런 성공은 손문조차도 예상외였다고 후에 회고할 정도였습니다.

 

무창봉기가 성공하자 호북 군정부가 조직되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합니다. 여원홍은 군정부의 도독으로, 호북성 의회 의장인 탕화룡이 정사부장에, 공진회 회장인 손무가 군정부장에 임명됩니다. 혁명파는 고사하고 오히려 반란 진압에 나섰던 여원홍이 반란군 총사령관이 된 것은 예전에 여원홍의 제자였던 오조린이 그를 찾아가 억지로 끌어낸후 강제로 도독에 추대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동안은 총사령관은 고사하고 감금당해 포로신세였으나 반란이 예상외로 확대되고 청조정의 대응이 형편없다고 판단되자 스스로 변발을 자르고 총사령관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원래는 혁명파의 지도자인 손문이나 황흥이 그 자리에 앉아야 함에도 정작 손문 본인은 이때 미국에서 반청운동을 위한 혁명자금을 모금하고 있었죠. 덕분에 여원홍이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도독이 된 것입니다.

 

 

 

 

여원홍(1864~1928) : 호북성 출신으로 천진 북양수사학당(이홍장이 세운 해군사관학교)을 졸업한 해군장교출신으로 청일전쟁에도 참전합니다. 혁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이렇다할 야심도 능력도 없이 그냥 자기 맡은 직책에나 충실한 평범한 위인이었으나 우연히 자신이 부임해 있던 동네에서 신해혁명이 시작되어 자기도 모르는새 혁명파의 중요인물이 되어버립니다. 게다가 계속 출세가도를 달려 대총통 자리에 두번이나 올랐고 말년에도 큰 돈을 벌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수를 다합니다. 사실 무창봉기당시 반란군이 일치감치 진압되었을 수도 있고, 반란군에게 죽을 수도 있었고, 도주했다가 조정으로부터 중벌을 받았을 수도 있었고, 또 당초 계획대로 다른 사람이 도독의 자리에 앉았다면 이 양반은 역사의 기록에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면에서 여원홍은 누가 봐도 행운의 사나이입니다. 역사에는 가끔 이런 로또같은 사람들이 있죠..

 

한양은 중국 최대의 군수공장이 있었고 무창의 금고에는 4천만냥이 넘는 은화와 동화 등 막대한 자금까지 있었습니다. 막대한 무기와 자금까지 얻게 되자 이들의 세력은 순식간에 엄청나게 늘어나 2만명에 달하자 옆동네 호남성과 강서성에서는 겁을 먹고 반란군 진압을 위한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수비만 합니다. 여기다 하남성에서 출동한 3개영(대대)은 총한발 쏘지 않고 반란군에게 투항해 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이미 빈사상태였던 청조에게 최후의 결정타를 먹인 "신해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19세기는 청조에게는 그야말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아편전쟁에서 참패를 당한후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은 중국의 절반을 초토화시켰고 이후 이홍장 주도의 양무운동이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는가 싶었으나 청일전쟁에서 완전히 박살이 납니다. 강유위의 변법자강운동 역시 서태후를 비롯한 만주출신 수구세력들의 반격으로 3개월도 안되어 실패로 돌아갔고 1899~1900년 의화단의 난은 열강들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청조는 거의 빈사상태가 되죠. 8개국 열강들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북경의정서는 배상금만도 982백만냥(이자포함)에 달했습니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에게 갚아야 할 빚도 엄청난데 이건 파멸적인 것이었죠. 이 거액의 배상금은 장개석정권이 어느정도 안정을 찾는 1930년대 중반에 와서야 거의 갚게 됩니다.(문제는 바로 중일전쟁이 터져버린다는) 여기다 중국 도처에 토비들이 창궐하고 열강군대의 침입을 받은 지역은 황폐화되었습니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죠. 또한 1905년에는 자신들의 땅인 만주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대규모 전쟁을 벌이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습니다.

 

권력에만 눈이 멀었던 서태후 한사람이 청조를 망친 결정적인 장본인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녀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만주귀족들 역시 다를바 없었습니다. 만주족의 전통적인 무력기반인 팔기군은 신식소총과 대포로 무장했으나 이들은 향락과 사치에만 빠져 있었고 군대로서의 전투력은 전무하였습니다. 또한, 팔기군과 함께 청군의 주력이었던 녹영과 상군, 회군은 정규군대라기보다 단지 주둔지의 치안이나 맡을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심지어 반란군과 대치했을때 반란군보다 화력에서 월등히 우세했음에도 팔기군 병사들은 도리어 자신들이 불을 붙인 대포 화약냄새에 겁을 먹고 싸우지도 않고 도주합니다.

 

 

 

19세기말 팔기군의 모습... 서태후는 팔기군을 신군으로 만들려고도 시도해 봤지만 이들이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월급이 꽤 짭짤하게 나오는지라 지급받은 소총은 다락에 고이 모셔둔채 훈련따위는 하인들에게 시키고 그 시간에 새 모이나 주고 귀뚜라미 씨름을 구경하고 있었죠. 따라서 팔기군과는 완전 별도로 신군을 창설했음에도 이들의 반발이 두려워 이들이 가진 기득권을 회수하지 못한채 막대한 재정만 낭비하였습니다.

 

의화단의 난이 참담한 결과로 끝나고 자신의 권위역시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진 서태후조차도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1901년 1월 이른바 "자희신정"을 실시합니다. 주된 내용은 정부조직의 개혁부터 북양36진의 창설, 과거제도의 폐지, 신식교육 실시, 산업 진흥 등 정치, 사회, 군사 전반적인 개혁이었습니다. 또한 원세개를 비롯한 한족관료들이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만주귀족들도 여기에 찬성합니다. 따라서 1906년 일본의 "메이지헌법"을 모델로 하여 9년후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이런 자희신정은 예상보다 빨리 중국의 혼란을 수습하게 됩니다. 국가 세수도 폭증하여 1911년에 역대 최대인 2억 4천만냥에 달하죠. 그러나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죽고 다음날 서태후도 죽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제12대 황제가 된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마지막 황제" 부의였죠.

 

 

 

청조 마지막 황제 선통제 애신각라 부의. 1906년생으로 만으로 3살도 채 안된 베이비시절 멋도 모르고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다가 4년후인 6살때 멋도 모르고 퇴위당합니다. 5년후(1917년) 11살때 강유위와 장훈의 이른바 "복벽"으로 멋도 모르고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10일만에 해프닝으로 끝나죠. 7년후(1924년) 18살때는 풍옥상의 반란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자금성에서도 쫓겨납니다. 천진의 일본 조계에서 백수로 살다가 10년후(1934년) 28살때 괴뢰만주국의 괴뢰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1년후인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모든 것을 잃고 제대로 해본 것도 없이 전범신세가 되어 소련으로 끌려갔다 다시 중국으로 호송되어 1959년 모택동에 의해 사면될때까지 10년간 수용소에서 지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단지 시대와 조상을 잘 못 만나 평생 남에게 끌려다니며 고생만 했던 위인이죠. 

 

부의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아카데미 9개상을 휩쓴 위대한 영화 "마지막 황제". 제가 어릴적 TV에서 주말마다 토요명화나 명화극장에서 수도 없이 나와서리 아마 우리 세대라면 못 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고작 3살도 안된 베이비가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실권은 그의 아버지인 순친왕 재풍이 쥡니다. 고작 20살이 조금 넘은 애송이였던 그는 황실과 만주귀족 측근(이른바 "친귀")들을 기용해 그동안의 신정을 무시하고 도로 복고풍으로 되돌립니다. 10여년전 서태후가 했던 실수를 이 멋모르는 얼간이가 반복하는 것이었죠. 입헌군주제의 약속도 묵살되고 전제군주제를 더욱 강화합니다. 조정과 각 성의 주요관직의 7할이상을 만주족 출신들이 장악하죠. 또 1909년 1월에는 원세개를 해임시켜 고향땅으로 쫓아낸후 철저하게 감시합니다. 이러니 한족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각 성의 자의국(지방의회) 대표들이 모여서 "나라의 상황이 위급하니 빨리 국회를 구성하여 관민이 일치단결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고 청원합니다. 그러나 청 조정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것"따위의 구태의연하고 성의없는 답변만 반복하죠.

 

또한 국내 경기 불황과 금융공황, 세금 부담의 증대와 수탈로 민심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도처에서 농민반란에다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자 청 황실을 보존하자는 입헌파들도 청조가 더이상 희망이 없다며 등을 돌리고 혁명파와 손을 잡게 됩니다.

 

한편, 청조와 타협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자는 입헌파와 달리, 청조는 이미 희망이 없으므로 혁명을 일으켜 이들을 무너뜨리고 미국이나 프랑스같은 공화제를 실시하자고 주장하는 급진파들이 있었습니다. 이 혁명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손문이었습니다.

 

광동성출신인 손문은 원래 가난한 농민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하와이로 건너가 사업을 하고 있었던 형덕분에 자신도 하와이로 어학연수를 다녀옵니다. 당초 그는 의사가 되려고 했으나 1885년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아작나는걸 본 그는 청조를 무너뜨려야만 중국이 산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1894년 하와이에서 화교들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조직인 "흥중회"를 결성하여 자금과 인원을 모집합니다. 이것이 근세중국에서 황제폐지와 서구식 공화제를 추구하는 최초의 혁명단체였습니다. 이런 점이 이전의 태평천국의 난이나 백련교도의 난같은 반청운동과는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천지회, 삼합회 등과 연계해 광주에서 최초의 반청혁명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추진단계에서 지도부간의 의견대립과 계획의 미숙함으로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고 그는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이후 일본 대만총독의 지원을 받아 광동성에서 다시 혜주봉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그 이후에도 일본에서 여러 단체들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광서, 광동성에서 여러번의 봉기를 주도했으나 매번 실패합니다.

 

 

손문(1866~1925) : 그 나름의 한계는 있었으나 어쨌든 기존에 우후죽순같이 생겨나 사분오열되어 있던 반청혁명단체들을 단합시키고 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역량임에 틀림없죠. 그의 삼민주의 사상은 국민당은 물론 모택동의 공산당에게까지 영향을 끼침으로서 지금도 중국의 국부로 불리고 있죠.

 

손문의 봉기가 실패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말그대로 그들만의 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혁명은 어디까지나 소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고 자신들에 의해 민중은 해방되어야 할 존재이지 그들이 주도해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가 삼민주의 사상을 제창했지만 그것을 일반 민중에게 전파하여 그들이 자발적으로 일어서도록 만들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습니다. 손문은 민중과 손을 잡기보다는 천지회, 회당같은 기존의 반청 비밀결사단과 손을 잡고 이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봉기과정에서도 실제로 손문의 혁명사상에 동조하는 골수 혁명가들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돈 몇푼 받고 고용된 알바생들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들은 정부군과 죽으라 싸우려는 의지도 없었고 돈만 받고 흩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지도부간의 갈등과 상호 협조결여는 매번 반복되었고 소속 멤버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기 일수였습니다. 게다가 대부분 일자무식의 깡패들이었던 회당과 손을 잡다보니 기밀 유지도 제대로 되지 않아 시작도 하기전에 뽀록나서 일망타진되거나 기껏 시작해도 금새 진압당했죠. 단지 영웅심리에 불과한 것이었죠.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있엇던 1911년 4월 광주 황화강 봉기에서도 온생재라는 멤버가 당초 계획을 무시하고 멋대로 조정 관리를 암살하여 체포되는 바람에 계획이 탄로날 지경에 직면하자 충분한 준비도 없이 서둘러 봉기를 개시합니다. 손문은 이 봉기에 은화 17만냥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으나 정작 광주 총독부를 공격하는데 참여한 인원은 황흥이 지휘하는 100명도 안되는 소수였습니다. 이들은 무모한 공격을 했다가 여지없이 박살났으며 72명이 죽거나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집니다. 이 실패는 손문에게는 큰 타격이었죠.

 

 

사실 신해혁명 과정은 물론이고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하층민들을 비롯한 민중의 광범위한 참여나 이들에 대한 계몽 노력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한계였습니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농촌 농민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여 이들의 참여와 지지를 유도하여 결국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정작 권력을 쥐자 이들 역시 급격하게 보수 우경화되어 지금까지도 실상 소수 엘리트에 의한 폐쇄적인 독재정치를 하고 있죠. 이것은 "백성은 우매하며 다스려야할 존재다"라는 권위적인 유교사상의 뿌리깊은 영향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손문이 주도하는 봉기자체는 실패하였으나, 도시 지식인계층(신사)과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반청 혁명사상에 동조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남방의 비북양계 신군에도 혁명파에 가담하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따라서 신군중에서 종종 반란을 시도하는 자들이 발생하자 그동안 신군을 중점적으로 육성지원해 오던 청 조정에서도 신군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신군을 마치 예비반란분자로 취급하고 차별대우하기 시작하죠. 이때문에 팔기군, 순방영(기존의 회군을 재편한 것)같은 구군과 신군간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이 나타나고 차별에 반발한 신군들이 더 혁명파에 가담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여기다 사천성에서 일어난 이른바 "보로운동", 즉 천한철도(성도~무한을 연결하는 철도)에 대한 청 조정의 일방적인 국유화정책에 반발하여 대규모 반란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하층민들까지 무려 수백만명이 반란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천한철도에는 사천성 주민 대부분이 주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청조정에서는 아무런 보상없이 일방적으로 몰수하려고 했기 때문이죠.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무창을 비롯해 호북성에서 신군 수개 표(연대)가 동원되어 사천성으로 이동합니다. 이때문에 무창의 수비가 약화되었고 무창봉기가 일어난 것이죠. 무창봉기는 손문과 그의 동맹회에서 직접적으로 계획하고 진두지휘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이렇게 무창에서 반란이 일어나 호북성 전체가 독립을 선언하고 군정부를 수립하자 청 조정에서도 당연히 난리가 납니다. 육군대신 음창을 반란군 진압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청군 최강부대인 북양신군 2개사단을 출동시킵니다. 그러나 음창은 전형적인 무능하고 유약한 팔기자제로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간단하게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음에도 지레 겁을 먹고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기차를 세운후 시간만 보냅니다. 그동안 반란군은 세력을 점점 확대하고 있었죠.

 

이렇게 되자 실권자인 재풍도 어쩔 수 없이 원세개를 다시 불러들이고 북양군의 군권을 내줍니다. 호광총독으로 임명된 그는 음창 대신 자신의 심복인 풍국장을 사령관으로 내려 보냅니다. 풍국장은 전선에 도착하자말자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3만명의 병력으로 단숨에 반란군을 제압해 버립니다. 반란군은 숫자는 상당했으나 대부분이 오합지졸이었고 장비와 화력에서도 열세였으며 여원홍의 지휘능력 역시 풍국장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급히 전선으로 달려온 황흥이 여원홍을 대신해 지휘를 맡아 양측은 근 한달간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무한3진중 무창을 제외한 한양과 한구를 빼앗기고 말죠. 이대로라면 무창봉기가 진압되는 것도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원세개는 애초에 이들 혁명파를 토벌할 의지 자체가 없었으며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뒤로는 혁명군과 몰래 타협하고 청 황실을 압박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혁명에 대해 강경입장을 취하고 있던 풍국장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리는 한편, 눈치빠른 단기서로 교체해 버렸다

 

 

 

 

 

이 양반이 풍국장. 왕사진, 단기서, 풍국장 이렇게 삼총사를 "북양3걸"이라고 불렸는데 왕사진은 "북양의 龍", 단기서는 "북양의 虎", 풍국장은 "북양의 犬"라고 불리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개에 비유될만큼 앞의 두명보다 무능해서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채 다 망해가는 청황실에 맹목적으로 충성했기 때문입니다.(참고로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에 보면 주인공 알이 항상 입버릇처럼 "국가연금술사는 국가의 개다"라고 말하죠. 그럼 용과 호랑이는 뭔뜻....?) 혁명군을 상대로 눈치없이 지나치게 잘 싸운 이 양반때문에 원세개도 골머리가 아팠고 따라서 강제로 해임당해 북경으로 도로 복귀한후 아무 쓸모도 없는 금위군이나 지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청황실에 대한 충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원세개에 대한 충견이었습니다. 청조에 충성하는 것도 그게 원세개의 본심이라고 착각했던 것이죠. 원세개 사후 직예파의 우두머리로서 안휘계(환계)의 단기서와 대립하지만 고지식할뿐 정치적 역량은 없었기에 실권은 조곤, 오패부같은 야심가들에게 있었죠.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원세개가 무창의 반란군을 재빨리 제압하지 않고 관망만 하자 반청 반란은 각 성으로 연쇄적으로 번져나가 12월까지 총 17개성이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제 청 조정이 통치할 수 있는 지역은 북경, 천진 일대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손문은 급히 영국으로 건너가 청나라에 대한 차관 지급 정지를 요청한후 귀국합니다.(영화 "신해혁명"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오죠. 이 차관은 혁명군 진압에 쓰일 것이기에 절대로 막아야 한다면서..) 그리고 1911년 12월 29일 17성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 대총통 선거를 실시하여 손문이 당선됩니다. 그리고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취임식을 열고 중화민국 건국을 선포하죠.

 

 

 

만주족 대신들의 무능함으로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청 조정에서도 더이상 버틸 방법이 없었습니다. 여기다 조정의 명령으로 남하하던 봉천 신군들까지도 반란을 일으켜 불복종을 선언하고 압박을 가합니다. 따라서 최후의 희망으로 원세개를 내각총리대신을 임명하여 모든 권력을 몰아주고 그를 통해 청나라의 명맥이라도 지탱할 것을 기대합니다. 원세개는 남방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여 혁명군측을 압박하는 한편, 뒤로는 혁명군과 몰래 자신의 지위를 놓고 협상을 합니다.

 

손문은 원세개가 청조를 무너뜨리는 댓가로 자신의 임시 대총통 자리를 넘겨주기로 타협하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은 원세개는 부의의 엄마인 융유태후를 협박하여 황제의 퇴위를 종용합니다. 여기에 반발하는 조정대신은 가차없이 제거해 버립니다. 원세개까지 군대를 동원해 자금성 앞에서 무력 시위를 하며 퇴위를 종용하자 더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죠.

 

결국 1912년 2월 12일 융유태후는 아들 부의의 퇴위를 선포합니다.

 

"지금 온 나라가 공화제 정부로 기울어 있다. 남부와 중부의 여러성이 먼저 이러한 의사를 확실히 표명했고, 이어서 북부 여러성의 군사 지도자들도 향후 똑같은 주의 주장을 지지하기로 약속햇다. 신민이 열망하는 바를 살펴 우리는 하늘의 뜻을 알았다. 그저 우리 황실만의 안녕을 위해 신민의 요구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시대의 조짐을 알았고 민심의 동향을 판단했다. 그리고 지금 황제의 동의를 얻어 주권을 신민에게 부여하고, 공화국의 기초위에 입헌정부의 수립을 선언한다. 이렇게 결정함으로서 우리는 정치적 혼란의 종식을 바라고 있는 신민에게 위안을 주고자 할 뿐 아니라, 정치적 주권이 궁극적으로는 백성에게 있다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도 따르고자 하였다."

 

대신 청조는 명나라나 그 이전 망국의 황실들과 달리 완전히 멸망하지 않은채 기존의 기득권에 대해서는 아래의 8개 조항으로 인정됩니다.(이 우대조약은 나중에 풍옥상에 의해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날때까지는 보장됩니다.) 

 

1. 대청황제는 퇴위후에도 그 존호가 존속되며 페기되지 않는다. 중화민국은 황제를 외국 군주에 준하는 예로서 대우한다

2. 대청황제는 퇴위후 중화민국으로부터 매년 400만냥을 받는다

3. 대청황제는 한시적으로 자금성에 거주하다가 나중에 이화원으로 옮긴다. 여전히 호위병을 거느릴 수 있다.

4. 황실의 종묘와 능묘는 고유의 제례의식과 함께 영구히 존속되며 중화민국은 경비병을 배치할 책임을 가진다.

5. 선황제인 덕종의 숭릉을 계속 건설하며 그 비용은 중화민국이 부담한다

6. 기존에 궁중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들의 고용에 대해서는 보장하되, 이후에 환관을 다시 채우지는 않는다

7. 대청황제의 사유재산은 중화민국이 보장한다.

8. 황제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 소속으로 하며 기존의 병력을 유지하고 급료도 종전대로 지급한다.

 

또한, 만주인과 한족은 동등하게 대우를 받되, 만주귀족들은 칭호 세습과 존호 유지를 보장받았으며 일반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면서 병역은 면제되었습니다.(이런 신의 아들들...)

 

이로서 청나라는 1636년 태조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건국한 이래 12대 297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황제 부의는 영화에서처럼 자금성안에서만 황제였습니다. 그것도 북양군벌들끼리의 전쟁에 휘말려 쫓겨나게 되지만서도요.

 

그러나 신해혁명은 청을 무너뜨리기는 했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기에는 앞으로도 한참 험난한 길이 남아 있었습니다. 손문은 나름대로는 혁명군이 북양군에 비해 열세인데다 같은 중국인끼리의 내전을 피하기 위해 원세개와 손을 잡았으나 결과적으로 하진이 십상시를 몰아내기 위해 동탁을 불러들인 것과 같은 꼴이 되었습니다. 원세개는 손문보다 훨씬 고단수의 교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최초의 공화제를 실시함으로서 "중국의 조지워싱턴"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나 그건 원세개라는 인간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였죠. 정권을 얻지말자 손문과의 약속을 깨고 오히려 혁명파에 대한 토벌에 나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