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22화 "풍운의 만주, 2대세습에 성공한 장학량"

 

이번에는 그가 어떻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권을 쥐게 되었고 또 이른바 "동북역치"(여기서 역치란 바꿀 易에 깃발 幟 즉 깃발을 바꾼다라는 의미입니다. 중국에서는 한 진영에서 다른 진영으로 옮겨타는 것을 깃발을 바꾼다하여 "역치"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거나 또는 누구에게 복속한다는 것이죠.), 즉 장개석의 국민정부에게 무혈 복종을 선언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관동군은 왜 장작림이 없는 만주를 즉시 장악하지 못했으며 또한 장작림 폭사후 그가 동북역치를 선언하기까지 6개월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볼까 합니다.  

 

  

장학량(1901~2001) : 격동의 시대에 이 양반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한때는 아버지 장작림조차 뛰어넘어 장개석 다음의 강력한 세력을 보유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만주사변으로 점차 몰락의 길을 걸게 되었고 그가 주도한 서안사변은 패망직전의 공산군에게는 "할렐루야"가 되었으나 자신은 모든 것을 잃고 개털이 되어 수십년간 감금당하죠. 한번 찍은 놈은 평생 기억해두는 성격이었던 장개석은 그를 죽는날까지 용서하지 않았고 대만이 민주화되고 나서야 감금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황제 부의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비운의 사나이라는..

 

장개석의 북벌이 막바지에 이른 1928년 6월 4일 새벽 5시, 봉천 심양으로 돌아가던 장작림은 일본 관동군의 폭탄테러로 자신의 전용열차와 함께 황천길로 갑니다. 평생 온갖 산전수전 다 겪었던 장작림조차 자신이 갑자기 그런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장학량은 어디에 있었나. 여기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쉬처의 "만주군벌 장작림"에서는 그 날이 바로 장학량의 생일이라 북경에서 조촐하게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다고 하고,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에서는 장개석의 북벌군에게 아작난 봉군 패잔병의 후미를 맡아 북경 서남쪽의 요충지인 보정에서 후퇴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 송한용 교수의 "장학량정권"에서는 그가 산해관이북의 열하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장학량은 아버지 장작림과는 따로 떨어져 최일선에서 산해관이북으로 철수중인 봉군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앞날은 물론이고 누가 장작림의 새로운 후계자가 되어 동북3성의 새로운 지배자가 될 것인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장작림정권은 봉천군벌의 수장이기는 했으나 김일성, 김정일처럼 권력기반이 신성불가침마냥 확고한 것도 아니었으며 자신의 유고를 대비해 특별히 장남 장학량을 공개적으로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을만큼 만주의 정치적 상황이 녹녹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일본이라는 외세의 간섭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었죠.  

 

장작림 생전에 장학량은 물론 장작림의 장남으로서 출세가도를 달리기는 했으나 단지 이른바 "3.4방면군"을 지휘하는 고위지휘관중 한명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장작림 휘하의 봉군에는 크게 3개의 파벌이 있었습니다. 장작림이 마적시절부터 형님 동생하며 함께 했던 패거리들, 이른바 장작상이 이끄는 구파가 있었고 양우정을 중심으로 한 일본 유학파(이른바 "사관파"), 그리고 장학량을 중심으로 한 "육대파"가 있었습니다. 이 육대파라는 것은 장학량의 의형제이자 개인적 멘토였던 곽송령이 북경육군대학출신이었기에 장학량, 곽송령이 직접 훈련시키고 육성한 3.4방면군의 소장파 장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3대 세력중 가장 불리한 입장에 놓인 것은 장학량이었습니다. 장작상, 양우정은 장작림의 오랜 최측근이었고 장작림 정권내에서도 단지 일개 군단장에 불과한 장학량에 비해 서열상 한참 위였으며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장학량은 봉군 최강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지만 아버지 아들이라는 것빼고는 아무런 정치적 배경도 기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나이도 젊었죠. 또 육대파는 곽송령이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는 바람에 세력이 많이 위축된 상태였습니다. 

 

장학량은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 부고를 알리는 비밀전보를 받았음에도 바로 봉천성으로 가지 못하고 14일이나 지난 6월 18일에야 극비밀리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일반 사병옷을 입고 철수하는 병사들 사이에 끼여 열차를 타고 심양으로 복귀합니다. 그로서는 관동군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데다 장작림이 없는 만주의 권력구도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그가 돌아오기 직전 6월 16일 봉천성 당국은 장학량을 봉천독판(성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공표합니다. 그러나 구파를 대표하는 장작상은 길림독판이었고 양우정은 동북3성의 총참모장이자 장학량과 함께 3.4방면군의 군단장 대리겸(원래는 장학량과 한린춘이 같이 군단장을 맡고 있다가 한린춘을 대신해 양우정이 그 자리에 앉습니다. 장작림으로서는 장학량이 아직 어리고 미덥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경험이 풍부한 노장을 붙여준 것이죠.) 봉천병기창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양우정은 장작림의 오른팔로서 자칭 "작은 제갈량"이라고 했는데 뛰어난 책략을 가진 유능한 인물로 봉군을 근대화하여 제2차 직봉전쟁의 승리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성격이 굉장히 오만하고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제2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후 강소성 독판으로 임명되어 남벌을 지휘했는데 그의 거만한 성격에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손전방에게 대패를 당하고 남벌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갑니다. 덕분에 중원에서는 장작림, 오패부, 손전방 이렇게 근대판 천하 삼분이 잠시나마 열리게 되죠.   

 

봉군내부에서는 보스의 신임만 믿고 마음대로 전횡하는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비유하자면 박정희시절의 차지철같은 인물) 장작림 최대의 위기였던 곽송령의 반란에서도 "양우정이 미워서 거병했다"라고 말합니다. 장학량이 3.4방면군을 지휘하면서 양우정과 함께 있었는데 그한테 괜히 찍히지 않으려고 눈치를 많이 봤죠. 양우정은 장학량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면서 원로 행세를 하면서 장학량을 거의 무시하듯 행동합니다.  

 

장학량이 일단 봉천독판이 되기는 했으나 정작 동북3성의 군정을 통솔하여 사실상 "동북왕"의 자리라 할 수 있는 동삼성보안총사령의 자리에는 누가 앉을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당초 동삼성 의회연합회에서는 봉군의 최고 원로이자 인망이 두터웠던 장작상을 동삼성보안총사령으로 추대합니다. 장학량 역시 장작상이 아버지의 후계자에 걸맞다면서 스스로 아버지의 결재도장, 즉 옥새를 장작상에게 보냅니다. 그러나 장작상은 자신은 그럴 그릇이 아니며 당연히 장학량이 장작림의 뒤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장작상의 지지덕분에 7월 3일 장학량은 동삼성 의회연합회와 여러 군장들의 추대를 받아 부자세습에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장학량이 장작상을 추대한 것은 일종의 짜여진 각본이며 양우정도 여기에 대해 양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양우정은 대단한 야심가였고 봉군내에서도 그의 "사관파"가 가장 세력이 강력했습니다. 만약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장작림이 죽은후 장학량이 어영부영하고 있는 사이 잽싸게 먼저 봉천으로 돌아가 대권을 장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에 적이 많았던 그는 자신이 장학량과 장작상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가는 당장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장학량이 봉천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장작상 역시 마찬가지였죠. 장작상은 마적질하던 시절부터 장작림과 의형제를 맺고 수십년을 같이 해 왔고 장학량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나중에 서안사변이후 장학량이 장개석한테 체포되자 직접 나서서 그의 구원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장작상은 야심과 능력은 없었으나 봉군의 원로로서 평생 장학량의 멘토이자 스폰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만약 장작상이 남들이 추대한다고 잽싸게 그 자리에 앉았다가는 사이가 매우 나쁜 양우정과 대립하고 최악의 경우 봉군끼리 내전이 발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약관인 장학량이 원로들을 무시하고 바로 봉군 총사령관 자리에 앉는 것은 내부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킬 수 있었기에 일단 장작상을 내세웠다가 장작상이 겸양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작상이든, 양우정이든 서로 꼴도 보기 싫으면서 또한 만만치 않은 인간이 자기 상관으로 앉는 것보다는 아직 20대의 애송이인 장학량을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뒤에서 일종의 섭정역할을 함으로서 실권을 쥐는 쪽을 택한 셈이죠. 여기다 관동군은 관동군대로 장작상이나 양우정이 반일분자라며 매우 싫어했고 자신들이 조종하기에 장학량이 손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복잡한 이해관계덕분에 장학량은 어쨌든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 동북왕"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착각이 장학량이라는 인간을 아주 과소평가한 것이라는 사실을 금새 깨닫게 됩니다. 

 

장학량은 일단 구파와 신파의 추대를 받아 권력을 잡았으나 그의 권력 기반은 매우 취약하였습니다.  당시 동북의 세력권이었던 길림성은 장작상이, 열하성은 탕옥린, 찰합이성은 장경혜 등 구파가, 흑룡강성은 양우정파인 상음괴가 장악하고 있었고 동북정부의 주요 각료들도 대부분 구파와 양우정파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장학량의 세력은 자기 친위대인 "3.4방면군"을 제외하고는 매우 미약했죠. 특히 양우정은 사사건건 대놓고 장학량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마치 상왕처럼 행동합니다. 또한 일본정부는 장학량에게 "일본은 동북이 역치를 선언하는 것을 반대하며 분리독립할 것을 권고한다"라며 노골적으로 간섭합니다. 당시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장작림 폭사후 산해관이남을 장악하고 만주 토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연합한 풍옥상, 염석산, 이종인 등 여러 군벌들과의 주도권 싸움이 심화되고 특히 "편견회의(장개석 주도로 각 군벌들의 군축문제를 거론한 회의)"로 거의 내전직전까지 직면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만주에 대해 개입할 상황이 아니었죠.  

 

이런 상황에서 장학량은 자신의 기반강화를 위해 자신의 심복인 만복린을 흑룡강성 독판으로 임명합니다. 또한 구파와 양우정파간의 갈등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그들을 견제합니다. 또한 봉군을 기존의 여단제에서 사단제로 바꾸어 45개 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개편하면서 자기 세력들을 대거 포진시킴으로서 군권을 재빨리 장악합니다. 또한 구파에 대해서도 자기 측근을 붙여 감시함으로서 그들의 동태를 항상 파악하고 견제하죠. 이런 점에서 장학량이 권력과 정치수완에 있어서 결코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29년 1월 10일 밤, 자신의 권력기반의 최대 장애물이었던 양우정과 그의 최측근인 상음괴(동북의 재정을 쥐고 있었음)를 비밀리에 습격하여 체포후 총살해 버립니다.  

 

 

양우정(1886~1929) : 일본 육사 포병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로서 장작림의 군사역할을 맡을만큼 신임을 받았습니다. 자기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굴었고 야심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장학량을 애송이로 취급하여 사사건건 간섭했고 사실상 "나는 새로 떨어뜨리는" 동북의 실권자나 다름없었죠. 그가 총살되기 며칠전에도 자기 아버지 생일파티를 아주 성대하게 열었는데 동북의 모든 고관들과 유지들이 죄다 모일만큼 위세를 떨쳤으나 자신이 깔보았던 장학량의 역습으로 하룻밤새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독재정권에서 실세라는게 아무리 잘 나가도 내일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는 북한만 봐도 알 수 있을듯... 

 

장학량의 양우정 전격 숙청과 구파에 대한 견제는 당장 눈에 보기에는 그의 정권이 매우 빠르게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동시에 구파와 양우정파와의 반발과 갈등을 초래했고 그의 정권은 끝까지 태생적 취약성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만주사변에서 많은 구파, 양우정파출신 지휘관들이 일본군에게 제대로 저항하지 않고 일본에게 매수되어 친일 반장학량으로 돌아서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한편, 장작림 폭사사건 자체는 일본정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관동군의 몇몇 꼴통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었는데 당시 다나카 수상은 관동군이 만주를 즉각 장악하고 봉군을 무장해제하자는 건의에 대해 국제여론을 이유로 거부합니다. 그는 국제 여론을 자극할 직접적인 만주 침략보다는 일단은 장작림을 일본의 괴뢰로 삼아 동3성을 일본의 반식민지처럼 운영하다가 추후 시기를 보아서 합병할 계획이었습니다. 과거 조선을 하나씩 껍질을 벗긴후 보호국으로 삼았다가 합병했던 방법을 다시 한번 써먹으려는 생각이었죠. 그러나 관동군의 일개대좌에 불과한 고모토 다이사쿠가 만용을 부려 결과적으로 다나카수상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 됩니다. 

 

  

다나카 기이치(1864~1929) : 일본 26대 총리로서 원래는 육군대장까지 지낸 전형적인 군출신입니다. 따라서 대중 강경파로서 제남사건을 일으키는 등 중국 침략의 선봉에 서고 만주를 괴뢰화하려는 음모를 꾸미죠. 한편으로는 무모한 만용만 부리는 관동군의 독주를 통제하려고도 노력하지만 장작림 폭사사건을 책임지고 사퇴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꿈꾸던 계획은 바로 2년뒤 관동군이 실현해주죠. 

 

장학량은 관동군의 음모로 아버지가 암살당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대놓고 반일로 돌아설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동북정권은 철저하게 일본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일본정부는 장학량에 대해 노골적으로 "장개석과 손을 잡지 말라"고 협박하고 있었으며 얼마전에도 일본군은 제남사건을 일으켜 장개석의 북벌군을 공격하는 등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놓고 일본을 자극할 수 없는 입장이었죠. 그렇다고 만주내에서 반일감정이 극도로 격앙된 상황에서 친일을 고수하겠다고 나선다면 자신의 정권 자체가 위험해 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장학량의 입장은 말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죠. 따라서 그는 "국민혁명군과 싸우지도 타협하지도 않는다"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내놓지만 뒤로는 장개석의 남경정부와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자기의 안전을 보장받고 이익이 되는가를 치밀하고 신중하게 계산하는 것이었죠.  

 

먼저 일본의 봉천총영사를 불러 일-만 합작을 제안하면서 4억엔의 차관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다나카 수상에 의해 거부당합니다. 한편, 정치공작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던 장개석은 발빠르게 움직여 장학량의 주변인물들을 회유시키는 한편 장학량에 대해서도 포섭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가 동삼성보안총사령에 추대된 7월 3일 당일날 장개석도 그의 지위을 승인합니다. 이는 장학량이 만주에서 누리는 기득권을 남경정부가 보장하겠다는 것이었죠. 일본은 자신을 후원할 생각이 없는 반면 남경정부로부터 자신의 지위와 권리를 보장받자 장학량은 금새 마음이 장개석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장학량이 남경정부와 협상하는 모습을 보이자 일본에서는 하야시 총영사를 보내 경고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장학량은 "역치는 어디까지나 형식적, 선언적인 것에 불과하며 단지 청천백일기를 내걸뿐 실제로 남경정부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이해관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우리가 온건하게 대해주니까 장학량이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우리 일본을 우습게 보는 모양이다"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합니다. 게다가 하야시 총영사는 대놓고 장학량에게 "당신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며 협박까지 합니다.  

 

일본이 이렇게 나오자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나는 역치를 할 생각이 있는데 일본이 간섭해서 곤란하다"라고 고충을 털어놓습니다. 또한 장학량은 협상과정에서 동북에 국민혁명군이 진주하고 남경정부 관료들과 국민당 당원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반대하며 자신의 통치권력을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장개석으로서는 여타 군벌들과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장학량과 손을 잡는 것이 절실했기에 그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줍니다. 결국 7월 22일 동북은 남경정부에게 복속하겠다는 "동북역치"에 합의합니다.  

 

장학량은 일본과 장개석 사이에서 적절한 줄타기를 통해 열하성을 비롯한 자신의 왕국을 확실하게 보장받았고 형식상 통일중국에 복속될뿐 실질적으로 어떤 간섭도 배재한채 자신은 독자적으로 만주에 대해 마음껏 지배할 수 있게 되었죠. 그럼에도 바로 동북역치를 선언하지 않은 것은 일본의 태도때문이었는데, 의외로 상황이 점차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일본 정계내에서도 야당인 민정당이 다나카 수상의 만몽정책을 비판하고 중국에 대한 내정간섭이 중국내 반일감정을 유발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하야시 총영사도 "현실적으로 장학량의 동북역치는 불가피한 것이며 차라리 실리외교로 가야 한다"고 건의합니다. 게다가 최악의 경우 국민혁명군이 만주로 진격하여 일본이 더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다나카 수상은 만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고 강경자세를 고수하고 장학량에게 재차 경고합니다.  

 

장학량은 여기에 대해 고위 간부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는데 간부들은 일본의 협박에 대해 격분하면서도 일본이 실제로 무력을 사용할 것이 두려워 일단 역치를 연기할 것을 건의합니다.  

 

한편, 장개석은 1928년 10월 10일, 북벌 군정을 종료하고 헌정의 전단계로서 훈정 실시를 선언합니다. 장개석은 국민정부 주석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6명의 국민정부 최고위원을 선출하는데 여기에 장학량도 포함됩니다. 미, 영, 프, 이탈리아 등 서구 열강들도 남경정부를 중국 정통정부로 승인하자 일본으로서는 만주에 대해 노골적으로 간섭하기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북역치를 반대하고 남경정부와 대립하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격이었죠. 더욱 중국내에서 반일감정이 격화되고 일본내에서도 다나카 내각에 대한 대중외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결국 다나카도 한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죠. 11월 10일 히로히토의 즉위식에 장학량이 축하사절을 보내어 다나카의 심중을 떠보자 다나카는 "역치는 중국내부의 문제"라며 얼버무립니다.  

 

일본의 태도 변화를 확인한 장학량은 드디어 결단을 내리고 28년 12월 29일 동북역치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중앙에 복종하지만 동3성을 지키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효도"라면서 동북역치의 실체에 대해 스스로 인정합니다. 즉, 중앙에 복종을 선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며 자기 통치기반과 체제유지가 최우선이었던 것이죠. 실제로 그는 이후에도 장개석의 중앙군의 진입을 막는 것은 물론 동3성내 국민당 당원들에 대해서도 "빨갱이"들이라며 극단적으로 탄압합니다. 중앙으로의 복속을 선언했다고 실제로 달라진 것은 청천백일기를 내걸었다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어떤 간섭도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왕국내에서 반일운동이나 일본의 이권을 위협하고 주권회복이나 자주권을 찾으려는 그 어떤 행동도 엄격히 금합니다. 장학량은 단지 전형적인 군벌 독재자일뿐 일부에서 주장하듯 강경한 반일주의자와는 하등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물론 그렇다고 노골적인 친일분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민간과 학생들의 배일운동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탄압하죠. 그런 그가 나중에 장개석보고 친일운운한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며 단지 동북을 빼앗긴 상황에서 자기가 생존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장학량은 일본을 자극할 것을 매우 우려했고 만의 하나라도 무력개입의 명분을 줄까 상당히 조심했음에도 결국 만주사변이 터진 것은 장학량이 특별히 반일 비협조적인 태도를 고수해서가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일본내 극우세력들과 관동군이 만주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학량이 뭘 어떻게 해도 만주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죠. 특히 20년대말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군대에 대해서도 감봉과 감축을 실시하였고 승진은 심각하게 적체되어 "복숭아와 밤은(소위) 3년이고 감(중위)은 8년, 대위는 13년이더라"라는 우스개소리가 돌정도로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던 군내 소장파 장교들은 방법은 "전쟁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가장 만만한 중국이 자신들의 돌파구라고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장학량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꿈인 중원으로의 세력 확대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한채 중원대전에 개입하여 7만에 달하는 자신의 주력부대를 산해관 이남으로 파병하여 만주에서의 군사적 공백을 초래합니다. 더욱이 29년 중동로 사건으로 북만주에서의 동북군은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 장학량의 동북군과 소련군의 한판 대결 : http://blog.naver.com/atena02/100118153929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화북주둔 병력을 더욱 확대하여 자기 직속의 최정예부대를 중심으로 약 15만명이상을 배치합니다. 이는 30만정도였던 전체 동북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죠. 봉천에 남아있었던 장작상이 "관동군의 태도가 심상치 않으니 신속히 돌아오라"고 경고했으나 장학량은 묵살합니다. 이런 장학량의 욕심과 오판이 스스로 몰락을 자초하게 되었죠.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때 장학량은 속수무책이었고 단지 상황이 확대되지 않도록 신중히 행동하라는 지시만 내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반이 위협받을까 싶어서 장개석의 중앙군 북상 제안을 거부하고 단지 무기와 자금지원만 받겠다고 말하죠. 그래놓고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에서는 "나는 싸우려고 했는데 장개석 그 인간이 싸우지 말라고 해서 못 싸웠다"고 엉뚱한 책임 회피를 합니다. 이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소리임에도 오히려 그동안 정설인양 알려져 있었습니다.  

 

※ 장학량은 정말 항일애국투사였나 : http://blog.naver.com/atena02/100112949421 

 

한편, 장학량의 동북역치에서 보듯 장개석의 북벌과 중국통일은 이렇듯 한계가 있었는데, 각 군벌들은 말로만 중앙에 복종을 선언할뿐 실제로는 중국을 이리저리 나눠서 할거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대외적으로만 통일정권이 수립되었을뿐 정작 정치, 군사, 조세에서는 독립된 왕국의 연합체나 다름없었죠. 특히 조세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는데 조세를 통일하지 못하고 지방정부들이 멋대로 거두어들인다면 통일의 의미가 없는 것이었죠.

이렇듯 북벌 직후만 해도 남경정부는 말만 통일정부일뿐 그 권위는 형편없었으나 남경정부가 이름뿐인 허수아비가 아닌 실질적인 중국정통정부로서의 역할을 함으로서 대내외에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장개석은 30년대 초반에 청나라 이래 빼앗겼던 불평등조약 개선과 관세자주권 회복에 많은 노력을 합니다. 특히 관세자주권 회복은 중국으로서는 숙원이었는데, 관세는 남경정부 전체 세수의 거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막대했습니다.  

 

또한 중원대전에서 승리한후 30년대 전반에 걸쳐 장개석은 단계적으로 지방과 중앙의 통합을 추진하였고 특히 지방정부의 주요 세원이었던 이금(통행세)를 강제로 폐지하는 대신 통세를 신설합니다. 이 통세는 일종의 부가가치세와 유사한 것으로 생산지에서 한번 물건을 만들었을때 한번만 내면 어느 지역으로 가건 통행세를 낼 필요가 없었죠.  

대신 지방정부에게 중앙에서 교부금을 내려줌으로서 지방 세수를 보존해주어 지방정부와 군벌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중앙의 통제를 점차 강화해 나갑니다.

 

중일전쟁 전까지 관세와 통세, 염세(염전세)가 남경정부 세입의 90%이상를 차지했으며 세수가 갈수록 대폭 증가하여 재정 안정화에 큰 도움이 되었고 또한 역치만 선언하고 사실상 독립상태였던 군벌들을 중앙으로 점진적으로 복속시킴으로서 중국을 정치적으로 통일시켜 나갑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일본의 침략에 남의 도움없이 8년간이나 저항하기는 고사하고 일방적으로 깨져 반년안에 패배로 끝났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