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19화 "분열과 하야, 그리고 결혼"

구름위 2013. 12. 2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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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손문의 혁명전쟁과 마찬가지로, 장개석의 북벌군 역시 잡다한 군벌들의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다보니 국민당과 혁명이라는 구심점은 있어도 실상은 군벌들간의 세력 다툼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국민당내에서도 수많은 계파가 있었고 이들 역시 권력을 노리고 군벌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정점으로 통일되고 중앙집권화된 신중국을 만들겠다는 장개석과의 대립은 피할 수가 없었죠.  


여기다 반공노선을 명확히 함으로서 국민당내 주류를 이루고 소련의 지원을 받는 좌파들과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고 장개석은 사면이 적이 됩니다. 이것은 손문의 혁명과정에서 장개석이 제 이익만 우선시하는 군벌들의 성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동맹일뿐 어차피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것,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자신의 독선적이고 의심병많은 편집증이 어쨌든 서로간의 갈등을 유발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장개석은 리더쉽과 추진력, 카리스마는 갖추고 있지만 포용력은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인간인데다 "중국은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아직 미개하므로 적절한 시기에 될때까지는 앞으로의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한다"라는 철저한 철학을 가진 양반이었습니다. 왠지 똑같은 논리로 소위 "한국식 민주주의"를 외치고 독선과 아집을 보였던 박통과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유사한 점이 많은듯.(장점에서건 단점에서건)

 

장개석은 향후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 될 가능성이 있다 싶은 놈들에게 대해서는 철저하게 견제하였고, 가장 중요한 군비의 대부분을 직속 군사력 강화에 사용하고 비직계 부대들에게는 조금씩만 나눠주자 다른 군벌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예를 들어 27년 3월 군비배분당시 혁명군 총사령부 경리처에서는 총수입 729만8천원에 대해 제1군을 비롯해 장개석 직계부대 및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대들에게는 일정금액씩 배분되고 있으나 이종인의 제7군과 당생지의 제8군, 투항하여 새로 유입된 부대들에 대해서는 단 한푼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또 소련이 지속적으로 원조해주는 군수품 역시 장개석이 독식합니다.(26년 7월에만도 소련은 13,694정의 소총과 65정의 기관총, 산포 12문, 야포 9문, 항공기 9대를 혁명군에게 제공하였습니다.) 

  

북벌 개시 몇개월도 안되어 오패부와 손전방 이 두 거대 군벌세력들을 아작내고 이들을 지원하러 온 장작림의 봉군마저 격파하면서 북벌은 매우 순 조롭게 진행됩니다. 이것은 국민혁명군이 "반제국", "반군벌" 기치를 내건 것에 대해 많은 민중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현지의 농민들은 직간접적으로 북벌군의 군사작전을 돕거나 북벌군에 자원하여 입대합니다. 이것이 이전의 소수 지식인들만의 혁명과는 명확히 다른 점이었습니다. 

 

이런 순조로운 진행은 장개석을 비롯한 북벌군 수뇌부들도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는데, 중국 최남단의 광주에 수도를 두고 있어서는 북벌전쟁의 추진과 해방지역에 대한 통치가 어렵다는 판단에 보다 윗쪽으로 수도를 천도하자는 의견이 제시됩니다.  바로 이 수도 천도문제에서 그동안 내제되어 왔던 불만과 갈등이 주도권 싸움으로 터져나오게 됩니다. 

 

여기다, 원래 호남성에서 조항척과의 패권다툼을 하다 패하여 장개석의 지원을 요청했던 당생지는 북벌에서 서로군을 지휘하여 단숨에 호남성은 물론 호북성까지 두개성을 자기 휘하에 장악합니다. 그의 군사력은 북벌에 처음 참여했던 26년 6월에는 겨우 12개 단(연대) 1만여명에 불과했으나 장사를 점령한후 6개사단 2만명으로, 9월말에는 11개여단, 31개 연대 5만명, 27년 3월에는 3개군(8군, 35군, 36군) 10만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것은 장개석 다음의 세력이었죠. 이렇게 하루아침에 대군벌이 되자 작년까지의 소군벌시절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아주 간이 배밖으로 나와 "나라고 천하인이 되지말라는 법이 있을 쏘냐"라는 주제넘는 야심을 품게 되죠. 더욱이 군비배분 문제, 장개석의 호남, 호북성에 대한 세력 확대와 당생지에 대한 견제 등으로 양자간의 대립은 점차 심화됩니다. 이런 점이 적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확실한 구심점이 없다보니 "국가"나 "당", "사상"보다는 군벌 개인의 이익이 최우선인 북벌군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죠.(또한 이점이 국공내전당시 공산군과의 결정적 차이이죠.) 

 

 이런 와중에 국민당내 중국공산당과 소련 정치고문인 보로딘은 그들 대로 장개석을 견제하기 위해 당생지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1926년 11월 26일 진우진, 보로딘, 손과, 송자문 등을 중심으로 수도를 광주에서 무한으로 옮긴다고 선언합니다. 당시 장개석은 옆동네 강서성 남창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기에 그는 완전히 배제된 격이었죠. 따라서 장개석은 여기에 반발하고 국민당 주석으로서 자신이 있는 남창을 임시수도로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무한정부는 그들대로 그들끼리 개최한 3중 회의에서 장개석의 권한을 제한하는 결의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킵니다. 따라서 서로 "우리가 정통"이라며 극도로 대립하게 됩니다.

 

27년 1월 무한에서 개최된 국민당 3중전당대회 당시 무한국민정부 멤버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무한정부는 당생지를 서로군 총사령관에서 제1집단군 제4방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무한정부의 최고 군사실력자이자 막강한 무력배경이 됩니다. 또한 군비를 미끼로 북벌군에서 장개석에게 불만을 가진 부대들은 물론 친장개석파까지도 경쟁적으로 끌여들이는데, 주배덕의 제3군, 이제침의 제4군을 비롯해 제6군, 제7군, 제9군, 제10군도 무한측에 가담합니다.(한마디로 돈주는 놈한테 붙는다는) 또 원래 장개석파인 진명추의 제11군에 대해서는 진명추를 몰아내고 반장측인 장발규가 장악합니다. 이시기에는 사실상 장개석 직계군인 하응흠의 제1군 빼고는 죄다 반장측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장개석은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웃기는 것은 반장개석 기치를 내걸고 뭉친 무한정부내에서도 또 당생지계와 장발규계간에 주도권 대립이 벌어집니다. 무한정부측 역시 당생지에게 몰아주었다가 장개석꼴이 날까봐 이런 식으로 의도적으로 견제시킵니다. 이런 추태의 연속이 당시 북벌과정에서의 국민당의 현실이었죠. 

 

머리회전과 책략에서는 누구에게도 절대 뒤지지 않는 장개석도 곧장 반격합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상해로 돌아온 왕정위를 다시 끌여들이고(그러나 이 왕정위는 나중에 장개석과 손을 끊고 무한측에 붙어버립니다. 이 양반은 야심은 큰데 항상 뒷북만 치다가 결과적으로 매번 장개석에게 이용만 당하는 듯한 느낌.) 광서와 광동파 군벌의 거두인 이종인, 이제침과도 비밀리에 다시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는 백숭희의 주도하에 상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른바 "4.12반공쿠테타"를 일으켜 상해를 장악하고 있던 공산당과 좌파들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가합니다. 여기다 이제침은 광주에서 소련 고문단 주택을 비롯해 좌파측 기관들을 모조리 장악하고 공산당원을 살해하거나 체포합니다. 이것은 보로딘을 비롯한 좌파측이 장악하고 있던 무한정권에게는 기습이자 치명타였죠.  

 

이런 식으로 혁명군의 돈줄인 상해와 광주를 장개석파가 장악하자 잠시 우세했던 무한측은 단숨에 열세에 몰립니다. 또한 장개석은 호한민, 진과부, 설독필, 고응분 등 국민당내 거물급들과 손을 잡고 1927년 4월 18일 남경에서 남경국민정부를 수립합니다. 무한정부에 대해서는 불법임을 선포하고 보로딘, 진독수 등 무한측 좌파인사들 190명에 대해 체포령을 선언하죠. 

   

 

 

 

남경정부 수립 기념사진인데, 확실히 위의 상당한 단촐한 분위기의 무한정부 수립 기념사진보다 쪽수가 훨씬 더 많군요. 알바생이라도 썼나...  ※ 사진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p.278

 

이렇게 되자 양측은 당연히 사생결단의 전면전까지 치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무한측은 장개석에게 반격하기보다는 일단 남경정부와는 별도로 당생지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북벌을 계속 진행하여 6월에 하남성까지 진출해 오패부, 장작림 연합군을 격파하고 정주, 개봉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대해 나갑니다. 이는 북쪽에서 오패부, 장작림, 염석산 연합군과 싸우고 있던 풍옥상의 국민군과 연계하여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풍옥상은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다 군벌치고는 독특하게 독실한 기독교도에 좌파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여기에 염석산도 사태를 직시하고 오패부, 장작림을 배신하고 무한측에 달라붙습니다. 오패부는 완전히 개박살나서 장작림이 있는 북경까지 도주합니다. 그리고 당생지군과 풍옥상군은 6월 1일 정주에서 서로 만나죠.  

 

여기에서 무한측은 하남을 노리고 있던 당생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남성을 풍옥상에게 넘겨주고 하남에서 투항한 부대들도 모두 풍옥상휘하에 편입시킵니다. 그렇게라도 풍옥상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한 당생지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같은 무한측 군벌들인 정잠, 담연개 역시 당생지의 세력확대를 극도로 경계합니다.  

 

그러나 풍옥상은 무한정부의 장개석 토벌을 반대하고 북벌과 혁명을 위해서는 삼자가 단결하고 힘을 합쳐야 한다는 "착한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무한측의 뒷통수를 내리치는 것과 같은 것이었죠. 이미 무한과 남경 양자는 군사적으로 대치상태까지 직면하여 무한정부의 주석인 왕정위의 "東征"명령에 따라 호북에서 당생지군이, 호남에서 장발규군이 남경을 공격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풍옥상의 이런 태도는 이미 장개석이 재빨리 풍옥상에 대해 이런저런 손을 써두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런 신속한 추진력과 판단력에서는 장개석을 따라갈 자가 없었습니다. 

 

양측 국민정부의 전쟁은 무한측이 선제공격하여 8월 7일 장발규군이 강서성 북쪽의 요충지인 남창을 공격해 당일날 점령하였고, 8월 12일에는 안휘성 서남쪽의 안경을 점령합니다. 한편, 장개석측도 6월 3일 서주를 공격해 손전방, 장종창 연합군을 완전히 아작내어 북쪽으로 쫓아버린후 무한측의 공격에 대해 이종인, 백숭희군을 앞세워 대치토록 합니다.  

 

남경-무한 양측 정부의 정통성 주장과 군사적 대치는 일촉즉발상황까지 직면했으나 뜻밖의 사건으로 해결됩니다. 8월 13일 장개석의 하야 선언이었죠. 그는 당주석, 혁명군 총사령관직 등 자신이 맡고 있는 모든 직무에 대해 사임한다고 선언하고는 자기 고향인 봉화마을로 돌아갑니다.(이 봉화는 당연하지만 김해 봉화가 아니라 절강성 봉화입니다.) 

 

이때 장개석의 하야는 그의 평생 3번의 하야중 첫번째였습니다.(두번째가 30년대 반장전쟁당시, 세번째가 국공내전말기였죠) 그의 하야는 정말로 정치에서 손 털고 국민의 한사람으로 돌아가겠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내 다시는 정치 안하겠다고 하고 미국갔다가 결국 욕심 못 버리고 대선때 맞추어 돌아온 양반이 우리나라에도 있죠.)

모든 것은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권력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는 국민당내에서 어쨌거나 자기만큼 능력있고 리더쉽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는 고향에 1달정도 빈둥거리다가 9월 28일 일본으로 건너가 35일 장기 관광을 다녀옵니다. 여기서는 그는 국가원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으며 일본 총리대신인 다나카 기이치와도 회담합니다. 무엇보다 중국 최대의 자산가인 송씨집안의 막내딸 송미령에게 청혼하여 12월 1일 결혼식을 올립니다. 물론 장개석은 이미 처첩만 셋이나 있는 유부남인데다 서로 나이차이도 10살이나 났습니다한편으로 장개석이 하야하자, 남경정권을 장악한 이종인의 주도로 양측 정부의 통합이 추진됩니다. 그러나 장개석이 예상했던 대로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자리를 놓고 더럽고 비열한 암투가 격렬하게 벌어집니다.  

9월 13일에는 국민정부의 분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왕정위도 하야하게 됩니다. 여기다 당생지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정잠, 이종인, 주배덕, 이제침, 풍옥상 등 사면으로부터 포위된채 압도적인 공격을 받아 1달만에 전군이 괴멸되고 개털이 된채 일본으로 도주합니다.(물론 한동안 신주큐 뒷거리를 방황하다가 북벌전쟁 끝나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 재기에 성공했다가 중일전쟁때 남경방위실패로 남경대학살이 일어나고 그 책임으로 다시 하야했다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정권잡자 다시 재기하고... 이 양반의 인생은 쓰러져도 쓰러져도 일어나는 오뚜기같은 인생이라는...)  

 

하야했던 왕정위는 광주로 가서 이제침과 장발규의 지원을 받아 자기주도의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지만 다시 장발규와 이제침이 대립하고 공산당은 공산당대로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킵니다. 리더는 없고 권력만 다투는 국민정부는 거의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을 만큼 좌중지란에 개판이 됩니다. 

 

결국 왕정위는 중국국민당 2기 4중전당대회에서 장개석의 복직을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여기에 이종인, 풍옥상, 염석산 등 군벌들과 국민당내 주요 정치가들도 동의합니다. 즉, 장개석이 정말로 싫지만 어쨌든 장개석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은 인정한 것이죠.  

 

결국 한달간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장개석은 1928년 1월 8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복직되었고 전군의 지휘를 맡게 됩니다. 염석산, 풍옥상 역시 장개석에게 복종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중앙상무위원회 주석, 중앙정치회의 주석, 중앙조직부 부장에다 2월 22일에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주석까지 맡음으로서 그야말로 당권, 정권, 군권 모두 장악하여 그의 권력과 지위는 하야전보다도 훨씬 더 막강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