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17화 "장개석의 북벌과 그 의의"

구름위 2013. 12. 2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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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있는 광동성 광주에서 열린 국민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에서 장개석은 군사위원회 주석의 이름으로 전국 통일을 위한 "북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1928년 12월 29일 장작림 폭사후 만주의 실권자가 된 장학량이 복종을 선언함으로서 신해혁명이래 각지에 할거하던 수많은 군벌들로 분열되었던 중국은 하나의 기치 아래 통일됩니다.  

 

처음 장개석이 북벌을 시작했을때 그의 군사력은 남방의 잡다한 군벌들을 연합한 8개군 10만명에 불과했고 여기에 맞서는 장작림, 오패부, 손전방 등 북방군벌들의 세력은 거의 100만에 달하였습니다. 전투는 국지적으로 치열하였고 때로는 군벌측의 반격으로 북벌군(국민혁명군)이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대체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북벌전쟁은 중국 전토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사상자도 양측 모두 수만에 달하는 등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전쟁임에는 틀림없으나, 사실 순수하게 군사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전의 군벌시대에 벌어졌던 여타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주목할만한 전투는 없었습니다. 양측 수뇌부의 전략지도나 지휘관들의 전술 수준은 매우 초보적이었고 유치하였으며 따라서 기동과 협격을 통한 포위섬멸전같은 근대화된 고도의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양쪽 모두 장비와 화력이 매우 빈약했고 훈련도 매우 형편없는 오합지졸이었기에 공격은 매우 단조로왔고, 대부분의 경우 전투는 일어나기도 전에 한쪽 병사들이 멋대로 도주하거나 통째로 투항함으로서 싱겁게 끝나버렸습니다.

 

 

  

군벌들에게는 그 어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도 없었고 단지 개인의 이해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봉건적인 개념의 "의리"라는 것이 있었을 뿐이죠. 따라서 전쟁에서 "진영"은 있어도 "이념"은 없다보니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간단하게 깃발을 바꾸어 달 수 있었습니다. 장작림, 오패부 등 대군벌의 군대는 숫자는 많지만 단지 잡다한 소군벌들의 연합군에 불과했고 이들을 지휘하는 대군벌들은 비젼도 리더쉽도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중국 내전은 "왜 싸우는가"에 대한 해답이 명확했던 미국의 남북전쟁이나 스페인내전, 한국전쟁과는 명백히 달랐으며 오히려 전근대적인 봉건전쟁이었습니다.  

장개석 개인은 손문의 "삼민주의"에 대해 얼마나 공감했는지 의문이지만, 적어도 그는 명확한 목표와 명분을 내세웠고 그가 중국 역사에 남을만큼 아주 뛰어난 군사전략가라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동시기의 그 어떤 군벌들보다도 뛰어난 결단력과 리더쉽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물론 인격적으로는 많은 문제를 가졌지만) 무엇보다 그는 군사전략가로서의 능력보다 정치가이자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챙겼으며 풍옥상과 염석산을 끌여들임으로서 "안국군 총사령관"으로서 북방군벌들을 지휘하던 장작림의 전략을 뿌리부터 흔들었고 사기를 저하시켰습니다. 또한 광주와 남경, 상해의 자본가들의 후원을 받음으로서 가장 중요한 군비문제를 해결하고 진격중인 부대에 적절하게 물자를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주요 적 지휘관들과 성장(省長)들을 매수함으로서 싸우지 않고 이들을 포섭하여 휘하의 군세를 늘려나갑니다. 

 

 즉, 북벌의 성공은 북방 군벌들간의 대립과 모순 탓도 있으나 무엇보다 장개석 한 개인의 역량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의 약점을 파고 들었고 대부분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장개석 개인에게 북벌은 수많은 도전과 위기의 연속이기도 하였습니다. 북벌중에 국민당은 권력의 주도권을 놓고 극도로 분열되었고 독재를 강화하는 장개석에 반발한 반장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켜 어제까지의 전우가 적이 되어 서로 싸우게 됩니다. 장개석은 마지못채 모든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나 결국 장개석을 대신할만한 인물이 없다는 사실에 모든 이가 공감함으로서 1년만에 도로 복직이 되었죠.

 

 

여기에 공산당의 도전과 서방 열강들의 개입과 간섭 역시 크나큰 시련이었습니다. 1927년 3월 24일 정잠이 지휘하는 국민혁명군 제2로군이 손전방을 쫓아내고 남경을 수복했을때 미, 영의 군함들은 남경시가지를 포격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냈고 상해에서도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6,000명의 열강 군대와 40척의 군함이 집결하여 국민혁명군의 상해 진입을 위협하였습니다.  

 

 

 

1928년 5월에 일어난 이른바 "제남사건(5.3사건)"은 북벌기간중 일어난 최대의 무력 간섭이었습니다. 국민혁명군이 장종창, 손전방군을 격파하고 산동성 제남으로 진격하자 일본군은 제남의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제6사단(병력은 5천명 정도)을 파병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제남성내에 진입한 국민혁명군 제40사단을 두차례(1차 : 5월 3일, 2차 : 5월 8일~11일)나 공격하여 제남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전투로 일본군 피해는 전사 36명, 부상 98명, 민간인 13명이 사망했으나 중국측은 사망자만 3천명이상(군인, 민간인 포함)에 1천명이상이 포로가 되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일본측은 중국군이 제남의 일본인 거류민의 안전을 위협했기 때문, 이라고 주장했으나 실상 침략행위이자 일방적인 학살이었죠. 

 

이 사건은 일시적으로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장개석의 지도자로서의 외교역량에 대한 첫 시험대이기도 하였습니다. 장개석은 일단 무력 충돌을 회피하면서 일본과의 외교 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져있듯 그의 대일전략은 결코 친일적이거나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는데, 중국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적반하장격으로 나오는 일본에 대해 적절히 밀고 당김으로서 손해배상, 책임자 처벌 등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대부분 배제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최소한의 양보를 하는 선에서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대규모 병력을 비싼 댓가를 치루어가면서 파견했지만 얻은 것은 "양국의 화평을 지향한다"따위의 아무 의미도 없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고 오히려 산동성에서 일본군을 철수시켜야 했습니다. 이것은 일본 외교의 철저한 실패였죠. 일본에 대해 대등한 관계에서 손해배상을 요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굴욕외교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중국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한편으로, 그의 "천하통일"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은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북벌의 상당부분은 여러 군벌들과의 타협덕분이었고 이들 신군벌들은 장개석의 부하가 아닌 대등한 동맹자로서 자신의 왕국을 그대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정점으로 중앙집권을 원하는 장개석과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죠. 장개석 자신도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하였으며 비밀경찰인 "남의사"를 조직해 정적들을 제거하거나 탄압하였습니다. 즉, 장개석의 방식은 실상 유방이나 주원장의 방식과 다를바가 없는 시대착오적인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북벌이 끝났을때 신군벌들의 할거상황. 장개석은 북벌의 승자가 되었지만 그의 진짜 지배지는 상해, 남경 일대에 불과하였습니다.    

북벌이 끝났을때 그의 권위는 여전히 취약했으나 이후 36년 양광사변까지의 수차례의 크고 작은 반장전쟁과 공산군 토벌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여러 라이벌들과 변경의 지방 소군벌들을 지속적으로 제압해 나갑니다. 이것은 명백히 양면성을 가지는데, 장개석의 존재는 분명 중국이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데 크나큰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8년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 역시 틀림없는 것이었습니다. 모택동조차도 인정했지만 항일전쟁에서 장개석의 리더쉽과 역량은 중국의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중국 근대사에서 과도기의 역할을 해주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