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14화 "원세개의 뒤를 이어 천하를 지배했던 단기서"

구름위 2013. 12. 2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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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다른 듣보잡에 비해 꽤 늦게 다루게 되었습니다만, 단기서 이 양반은 원세개가 키운 북양군벌의 3대 거두(단기서, 풍국장, 왕사진)이자 환계(안휘파 또는 안복계라고도 부름)의 보스로서 근세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입니다.(또한 매국노이자 친일파. ) 원세개가 죽은후 그 뒤를 이어 북경을 차지하고 중앙정부의 실권을 좌지우지합니다.

 

  

단기서(1865~1936) 이홍장, 원세개의 오른팔로서, 이 양반 한창 잘 나갈때만 해도 장개석은 물론 후에 대군벌이 되는 장작림, 오패부도 한낱 애송이,피래미에 불과했죠.(사진출처 : 위키백과)

 

그의 고향은 안휘성 합비출신으로 매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17살때 숙부가 태평천국의 난때 이홍장의 회군에 가담하여 큰 공을 세워 산동성 위해위에서 군관으로 있었는데, 단기서의 아버지가 직접 그를 데리고가 맡깁니다. 그래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죠. 20살이 되는 해 천진으로 가 중국 최초의 신식무관학교인 북양무비학당 포병과에 입학합니다. 이때 풍국장, 조곤 등 나중에 천하를 놓고 다투게 되는 이들도 만나게 되죠.

어느날 우연히 무비학당을 시찰나온 이홍장의 눈에 들게 됩니다. 한낱 일개 생도였지만 이홍장은 자신과 같은 안휘성출신이면서 매우 비상한 인물이라고 보았고 그를 정부에서 국비로 보내는 5명의 유학생에 포함시켜 1889년 독일로 유학 보냅니다.(인생에서 완전 땡잡은 셈이죠)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소위 "꽌시()"라고 학연, 지연, 혈연을 엄청나게 중시하며 타향에서 고향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혈육처럼 생각한다죠. 청일전쟁때 청해군을 말아먹은 정여창이라던가 아산, 평양전투에서 참패했던 섭지초같은 이들도 매우 무능했음에도 단지 이홍장과 동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중용되었습니다. 능력은 묻지도 따지지 않고 수족으로 부리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자들이 고향친구들을 중용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새삼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니죠.

 

2년후 귀국하여 원세개의 막하로 들어가 교관으로서 신식군대들의 훈련을 맡았고 청일전쟁에도 참전합니다. 그러나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대참패로 끝났고 청 조정에서는 원세개에게 군대의 재건 임무를 맡깁니다. 원세개는 천진에서 북양신군(이후의 신건육군)을 창설합니다. 단기서를 매우 총애했던 원세개는 북양무비학당의 교관임무를 그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1905년에 북양신군 제4진의 통제(사단장)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제3진과 제6진의 통제, 보정육군속성학교(이후 보정군관학교)의 교장을 맡는등 원세개의 오른팔로서 군사 요직을 두루 거치죠. 소시적의 장개석도 이 시절 1년정도 보정육군속성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가죠.

 

  

19세기말 청국군의 모습. 신식군대와 구식군대가 함께 섞여있던 잡탕시절이었죠. 천진에서 최초 창설된 북양신군은 보병 3천, 기병 1천, 포병 1천, 공병 500명 등 총 5~6,000여명정도로 구성되었고 주로 독일과 일본식 편제를 참조합니다. 이후 직예총독이 된 원세개는 이들을 확대해 북양6진(1진=사단에 해당, 병력은 12000명정도, 신해혁명전까지 전국에 총 36진이 만들어집니다.)을 만들었고 이들이 북양군벌을 형성하게 됩니다. 신해혁명으로 원세개가 정권을 잡자 이들은 "국군(중앙군)"으로서 원세개 권력의 뒷받침이 됩니다. 이들외에도 지방의 각성에서는 경쟁적으로 신식군대를 만들었고 원세개 사후 북양계와 비북양계끼리 대립하여 내전이 벌어집니다.(대표적인 것이 호북성 장지동의 자강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북양군이 확대되자 청조의 만주관리들은 이들 한족출신의 군인들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국가보다 오로지 자기들의 권력 유지가 우선이었던 "수구꼴통"들은 개혁 개방으로 자신들의 권력이 한족들에게 빼앗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죠. 서태후시절 권력을 독점했던 이홍장조차도 한족이라는 이유로 만주출신 귀족들에게 많은 견제를 받았고 양무운동이 실패하고 청일전쟁에 패배한 결정적인 이유중 하나도 이때문이었죠. 이것이 당시 청의 딜레마였죠.

 

이들의 압박으로 원세개는 군기대신으로 임명되는 대신 신식군대의 지휘권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원세개로서는 어차피 북양6진의 지휘관들은 자기의 수족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생각했죠. 따라서 서태후 죽고 마지막 황제 부의를 대신해 섭정을 하게 된 순친왕 재풍은 원세개를 아예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단기서는 동료인 풍국장과 모의하여 지방에서 대규모 병변이 일어난 것처럼 마구 설레발 칩니다. 이렇게 되자 순친왕을 비롯해 겁많은 만주귀족들로서는 신군을 주물럭거리는 원세개를 무턱대고 제거할 수가 없었고 목숨을 건진 원세개는 단기서에게 매우 고마워합니다.

 

한편, 1905년에 청조는 낡은 제도인 과거시험과 무관시험을 폐지합니다. 야심있는 젊은이들은 신식군대에 들어가 출세의 길을 찾는 것이 유행이 되었고 많은 엘리트들이 육군소학당이나 군관학교에 들어가거나 아님 일본 등에 군사유학을 다녀오죠. 이들은 이미 빈사상태인 만주족의 청조를 무너뜨리고 한족들이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내에 반청혁명사상이 급속도로 퍼지고 결국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손문의 혁명파가 호북 무창에서 혁명 봉기를 일으키고 중화민국 군정부를 수립합니다. 또한 무창혁명의 영향으로 지방의 각 성의 도독들은 조정에 대한 불복종과 독립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독립을 선포한 17개성의 대표들에 의해 손문이 임시대총통이 됩니다.

 

당시 재정난에 허덕이던 청나라가 철도소유권을 담보로 영,미,일,독,프 5개국에게 대규모 차관을 빌리려고 하자 도처에서 반청시위가 벌어집니다. 무창봉기는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결국 청나라를 무너뜨리죠. 당시 원세개는 순친왕에 의해 파면되어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도로 기용되어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어 반란 진압을 명령받죠. 원세개는 풍국장의 제1군은 한구로, 단기서의 제2군은 무창으로 보내어 혁명군을 진압토록 합니다.

 

그런데 정작 원세개 이 야심많은 양반은 그 자신부터 이 기회를 이용해 청조를 무너뜨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치없고 고지식하기만 한 풍국장은 반란을 일으킨 혁명군을 압도적인 전력으로 격파하고 재빨리 한구와 한양을 장악합니다. 이런건 좀 곤란한 일이었죠. 따라서 원세개는 풍국장을 승진시킨다는 명목으로 소환하고 풍국장보다 훨씬 교활하고 눈치빠른 단기서를 호광총독 겸 토벌군사령관으로 임명해 제1군과 제2군의 총지휘를 맡깁니다.  

 

원세개는 남방의 혁명군에 대해 공격을 미적거리면서 손문과 타협을 추진합니다. 그러면서 음모를 꾸며 청황실의 경호부대인 금위군을 자기수중에 넣음으로서 황실의 힘을 빼앗아 버리고 부하인 단기서를 비롯해 북양군 고급지휘관 46명의 연명으로 부의의 퇴위를 강요합니다. 결국 1912년 1월 31일 어전회의에서 당시 6살이었던 부의는 멋도 모른채 퇴위당하게 되었고 청조는 건국 297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죠.

 

손문은 원세개와 타협하여 수도를 남경으로 할 것과 민주주의와 공화제 실시를 조건으로 임시총통직을 넘깁니다. 원세개는 2대 총통이 되었고 여원홍은 부총통이 됩니다. 그러나 원세개는 즉시 약속을 깨고 혁명파들의 세력이 강한 남경이 아닌, 자기 기반인 북경에서 총통자리에 오릅니다. 단기서도 육군총장이 되었고 풍국장은 직예성 총독이 됩니다. 원세개는 대총통이 되자 자신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손문의 혁명파에게 반격을 하여 강서도독 이열균을 비롯해 혁명파측 도독(군사령관)들을 모조리 해임시켜 혁명파측의 군사적 기반을 빼앗아 버리고 국민당이 다수였던 국회 역시 해산시킵니다. 따라서 양자의 화의는 깨지고 남북간에 "반원전쟁"이 발발하지만 손문의 군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으로 애들 밥도 쌀밥 대신 꿀꿀이 죽을 먹일만큼 상태가 안 좋아져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춘 단기서에 의해 아작나 손문은 상해로 튑니다. 그는 그 공과 원세개의 독재강화에 앞장섬으로서 국무경(국무총리)이 됩니다. 

 

원세개는 "신약법"을 발표해 종신대총통이 되었다가 더 망상에 부풀어 아예 황제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동탁같은 인간의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대해서는 단기서, 풍국장 등 최측근들조차도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열받은 원세개는 이들을 해임시키고 쫓아버리죠. 1915년 12월 12일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황제가 됩니다만, 당장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자신이 키워낸 북양군벌들까지도 들고 일어나 전면적인 내전상태에 직면하죠. 고립무원에 빠진 원세개는 83일만에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죠. 원세개는 단기서를 다시 국무경으로 임명하고 사태를 해결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단기서는 되려 원세개가 은퇴할 것을 주장합니다. 결국 원세개는 울화통으로 1916년 6월 6일 현충일날 숨을 거둡니다. 단기서는 큰 돈 들여 원세개의 장례식을 아주 성대하게 치루고 27일간 연회를 금지시킵니다.(무슨 김정일 죽은 것도 아니고)

보스가 급사하자 서열상 No. 2인 부총통 여원홍이 대리총통이 되었지만 얘는 그냥 바짓사장일뿐 진짜 실권은 국무경이자 육군총장인 단기서가 쥐고 있었습니다. 청조와 원세개의 삽질때문에 중국의 빚은 무려 15억원에 달했고 이는 연간 총세입의 5배가 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과 결탁하여 2억6천만엔에 달하는 막대한 차관을 지원받습니다. 이 돈은 말로는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쓰인다 운운하고서 실제로는 단기서 개인의 정치자금으로 활용됩니다. 이 댓가로 그는 소위 "중일 육해군 공동방위군사협정"을 몰래 체결하여 만주와 내몽고에서 일본의 이권을 보호하고 중앙군(북양군)의 훈련을 일본에게 맡겨 괴뢰군화 시킵니다. 한편, 미국은 미국대로 여원홍과 풍국장측에 자금을 지원하여 일본의 후원을 받는 단기서세력과 영, 미의 지원을 받는 여원홍, 풍국장세력간의 대립이 심화되죠.

 

유럽에서 1차대전이 한창 벌어지자 단기서는 1차대전에 연합군측에 참전한다고 선언하고 이를 빌미로 더 많은 차관을 얻어낸후 그 돈으로 휘하 군대를 만들어 남방의 말 안듣는 애들을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1917년 3월 "대독 절교안"을 국회에 제출하지만 대총통인 여원홍은 이를 반대했고 단기서는 사임합니다. 그러나 북양 유력군벌중 하나였던 장훈이 5천의 병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청 황실을 부활시킵니다. 이때문에 토역전쟁이 발발하죠. 여원홍은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했고 단기서, 풍국장은 서로 손을 잡고 반격해 12일만에 3만의 병력으로 장훈의 구닥다리 변발군대를 아작내 버립니다.

 

장훈(1854~1923) : 골수 보수파로서(일단 복장을 봐도) 청나라시절 총병(사단장에 해당)을 지냈고 이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진 후에도 그는 청에 충성을 맹세하여 휘하 군대가 변발을 자르는 것을 금지합니다. 원세개에 의해 강소독군이 되었고 이후 장강 순열사가 되어 서주에 주둔합니다. 총통 여원홍이 단기서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불러들이지만 되려 쿠테타를 일으켜 청 황실의 부활을 선언했으나 오패부의 공격에 한방에 멸망당하고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튀었다가 천진으로 가서 그곳에서 투자사업을 하다 1923년 9월 12일 사망합니다.

 

눈의 가시같았던 여원홍을 몰아내고 단기서는 국무총리로, 풍국장은 대리총통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기서와 풍국장 이 두 양반이 권력을 놓고 또 팽팽하게 대립하게 되죠. 1차대전 참전과 천하 통일을 놓고 단기서는 참전, 무력통일을 주장했고 풍국장은 참전반대와 평화통일을 주장합니다. 사실 단기서는 1차대전 참전과 남방의 무력통일을 통해 자신의 환계 세력을 확대하고 북경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고 풍국장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모를리가 없었죠. 세력에서 풍국장의 직군에 비해 열세였던 단기서는 동맹자를 찾습니다. 바로 만주를 지배하던 동북왕 장작림이었죠. 그는 심복인 서수쟁을 보내 장작림에게 출병을 요청했고 항상 관내 진출을 노리고 있던 장작림은 얼씨구나하며 봉천군 제27사단 53여단을 파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늑대 한마디를 들이는 것과 같았던 것을 단기서는 몰랐습니다.

 

대리총통 풍국장의 임기가 끝나자 북양군벌의 원로인 서세창이 대총통이 됩니다. 연로해진 풍국장은 은퇴하여 다음해인 1919년 12월 28일 북경에서 병사합니다. 뒤이어 직군의 우두머리는 조곤이 되지만 실제 병권은 오패부가 쥐고 있었습니다. 오패부는 뛰어난 전술과 계략에 능통했고 복벽전쟁에서 선봉에 서 장훈의 군대를 격파하고 호남에서 손문의 혁명군을 대파하는 등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직군의 실세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드디어 1차대전이 끝납니다. 그러나 단기서는 1차대전 참전을 빌미로 일본과 결탁해 소위 "참전군"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단기서 개인의 사병군대나 다름없었죠. 더욱이 이를 위해 일본과 밀실회담을 펼쳐 중국내 독일의 모든 이권과 조차지를 일본에게 넘기기로 약속합니다. 이것이 베르사유조약으로 밝혀지자 중국 도처에서 반정부 시위가 폭발합니다. 바로 5.4운동이었죠. 단기서는 이것을 무차별로 탄압하지만 결국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북경정부는 이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죠. 그러나 단지 형식상 비준하지 않았을뿐 그렇다고 일본의 양보를 받아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반일운동과 일본제 불매운동으로 일본의 대중수출은 절반이나 격감할만큼 타격을 받았지만 그것외에 외세를 몰아내거나 자주권을 찾는 노력따위는 외세없이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군벌정권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었죠. 그것이 5.4운동의 한계였습니다. 더욱이 일본의 세력권인 대만이나 복건성에서 일어난 반일 불매운동을 일본군은 강경하게 진압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북경정부는 한마디도 항의하지 못합니다.

 

어쨌든 이때문에 단기서정권은 친일 매국정권으로서 민중들로부터 신뢰를 급격히 잃게 됩니다. 더욱이 단기서의 독재와 심복인 서수쟁과 장작림간의 불화로 장작림마저 적으로 돌리게 되었고 장작림은 직군과 손을 잡고 단기서에게 맞서게 됩니다. 이는 단기서로서는 결정적인 치명타였죠.

 

결국 북경-천진일대에서 환군과 직군간의 전쟁인 직환전쟁이 발발합니다. 일본의 원조로 만든 변방군(참전군)을 배경으로 한 단기서는 직군보다 월등히 우세했고 손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환군과 직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도중에 중립을 지킬 것으로 생각했던 장작림이 그의 뒷통수를 쳤고 전투는 4일만에 단기서의 몰락으로 끝납니다. 또한 환계가 장악하고 있던 여타 성에서의 전투에서도 모조리 패하거나 항복합니다. 단기서는 하야를 선언한후 천진의 일본 조계로 튑니다.

 

단 한번의 참패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천하 패권에서 멀어지지만 자신을 몰락시킨 장작림, 오패부간에 새로운 전쟁이 발발하고 오패부의 무력통일에 맞서 손문, 장작림은 단기서를 다시 끌여들입니다. 가진 것은 없지만 북양군의 원로로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만만찮았기 때문이죠. 특히 제2차 봉직전쟁으로 오패부가 몰락한후 양자강 유역의 직계파 군벌들은 단기서가 새로운 구심점이 되어주기를 원했습니다. 장작림, 풍옥상 역시 서로를 견제하는 입장에서 단기서가 지도자가 되어 자신들을 중재하여 오패부의 구세력권을 공평히 분배해주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과거의 해묵은 감정을 버리고 1924년 11월 24일 북경에서 중화민국 임시 집정부 임시 총집정으로 취임합니다. 그의 권력 자체는 매우 막강하여 중국 전토의 모든 행정과 군대를 총지휘하는 직책이었으나 실상은 장작림, 풍옥상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죠.

 

그런데 장작림과 풍옥상간의 사이가 깨지고 장작림의 부하였던 곽송령이 1925년 11월 7만의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켜 장작림을 공격하여 이른바 "국봉전쟁"이 발발합니다. 풍옥상 역시 곽송령을 지원합니다. 장작림은 원수였던 오패부와 도로 손을 잡고 곽-풍연합군을 공격하죠. 곽송령의 반란은 초반에는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그의 부대는 봉군 최강부대였음) 일본 관동군이 개입하자 여지없이 깨져서 두달도 안되어 몰락합니다. 곽송령 역시 붙잡혀 총살당하죠. 

오패부도 하남성에서 풍옥상을 대파하자 풍옥상은 북경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주합니다. 북경은 장작림이 손쉽게 장악하죠. 풍옥상에 기대고 있었던 단기서 역시 실각하여 천진의 일본 조계로 다시 도주합니다.

그는 더이상 정계에 진출하지 못했고 모든 야심을 버린채 만년을 종교활동에 심취합니다. 그런데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은 단기서를 이용해 화북에 괴뢰정권을 세우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당시 중국 전토를 장악한 장개석은 단기서에게 생활비를 넉넉히 대줄테니 천진을 떠나 상해로 올 것을 초청합니다. 그래서 33년 1월 23일 기차타고 내려와 장개석의 성대한 환영을 받고 상해의 프랑스 조계로 이사합니다. 그리고 불교신앙생활과 바둑이나 뚜며 살다가 1936년 11월 1일 위암으로  병사합니다. 그의 나이 71살이었죠. 인생의 끝은 좋지 않았지만 풍운아로서 나름 야심대로 살다 간 셈이죠. 주색에 사족을 못 쓰던 당시 군벌치고는 특이하게도(?) 술과 담배, 도박을 멀리하고 치부를 하지 않았다 하여 육불총리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