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15화 "이홍장과 원세개의 망령, 북양패밀리의 탄생"

구름위 2013. 12. 2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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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노 옹의 일본 애니 "건담"을 보면 군벌화된 자비가의 지온공국에 의해 벌어진 1년전쟁을 시작으로 인류 사회는 근 20년간 내전의 혼란에 빠져 끝도 없는 전쟁과 전쟁의 반복이죠.(근근히 한 전쟁 정리되면 다음 전쟁이 시작되는 식의) 20세기 초반 중국이 딱 이런 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혼란의 단초가 바로 원세개와 그의 악의 사병군단인 북양군이었습니다.

 

원래 청조의 군제의 핵심은 여진족시절부터 내려온 황제 직속의 팔기(중앙군)와 각 성에 주둔한 녹영(지방군)이죠. 그러나 청말에 와서 이들은 명색이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청의 정규군이면서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에서 체면을 완전히 구겼고 청 조정은 이들 구식군대를 근간으로 신식군대로 재편하기보다는 새로운 군대를 만드는 쪽을 택합니다. 구한말 고종도 똑같은 정책을 취했는데 이때문에 기존 군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서 심각한 군사력의 공백과 구식군대와 신식군대(또한 신식군대끼리)간의 갈등을 초래하죠.

 

 

19세기말 청국군의 모습.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어쨌든 태평천국의 난에서 활약했던 것이 주로 지방 자원자들로 구성된 증국번의 상군과 이홍장의 회군이었습니다. 특히 이홍장의 회군은 그의 고향인 안휘성 출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상군보다 숫적으로는 열세했으나 서구식 무기로 무장하고 외국인들에 의해 훈련되어  당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보유합니다.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후 강력한 군사력과 영향력으로 이홍장은 중앙 권력에 진출할 수 있었고 1870년 북양대신이자 직예총독이 된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군의 개혁에 앞장 섭니다. 그의 회군은 정식 관군이 아니었음에도 이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신식군대이자 청군의 주축이 되지만 비슷한 시기에 메이지유신을 시작하여 군을 근대화한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완전히 아작남으로서 이홍장의 개혁과 이들의 한계를 보여주었죠.

 

청일전쟁이 끝난 다음해 청조는 밥만 축내고 아무짝에 쓸모없는 팔기와 녹영을 대신하는 신식군제를 추진합니다. 청일전쟁 당시 북경-천진 방위를 위해 자원병을 모집해 만든 것이 정무군이라는 부대였는데 독일식으로 훈련되었고 병력은 보병 3천, 포병 1천, 기병 250, 공병 500명 총 4,750명이었습니다. 이들의 훈련을 책임진 것이 바로 원세개였습니다.

 

 

20세기초반 북양신군의 훈련모습(사진출처 : 위키백과)

 

원세개는 안휘출신인 이홍장과 달리 하남성 출신이지만(우리도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혈연, 지연, 학연을 굉장히 중시합니다. 단지 같은 고향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이홍장에게 중용되어 출세한 인물이 바로 원세개 사후 북경정부를 장악했던 단기서였죠) 집안이 명문세도가에다 삼촌의 빽으로 이홍장의 측근인 오장경의 부하로 들어갑니다. 이후 뛰어난 정치 수완과 책략능력을 보여줌으로서 이홍장의 신임을 얻죠.

 

원세개는 정무군을 신건육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주로 독일, 일본의 제도를 모방해 군을 확장해 나갑니다. 이 신건육군은 동복상의 감군과 섭사성의 무의군과 함께 "북양삼군"이라 불리며 당시 실세였던 영록의 지휘하에 들어갑니다. 1898년 12월 영록은 이들 신군을 무위군으로 개칭하고 전군,좌군,우군,후군,중군 5개 부대로 나눕니다. 원세개의 신건육군은 무위우군이 되죠. 그런데 1900년 의화단의 난에서 8개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청국군은 완전히 개박살이 납니다.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고 남은 것이 원세개의 이 무위우군이었습니다. 여기다 1901년 이홍장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름으로서 원세개의 권력은 청 조정에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에 가깝게 되죠.

 

이렇게 청의 군권을 장악한 원세개는 자신의 무위우군을 근간으로 북양신군(이른바 북양6진)을 조직, 확대해 나갑니다. 1906년 4월 청조는 10년동안 북양6진을 확대해서 전국에 36진을 만들어 중앙군으로서 각 성에 주둔토록 지시합니다. 이리하여 1911년 신해혁명때까지 전국에 14진이 만들어졌고, 당시 전국 24만 1천명의 신군중에 원세개가 좌우하는 이들 북양계가 전체의 60%인 14만 5천에 달합니다.

 

북양신군의 편제는 주로 독일과 일본을 모방했으며, 군(군단) → 진(사단) → 협(여단) → 표(연대) → 영(대대) → 대(중대) → 배(소대) → 붕(분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직책은 군통(군단장), 진통(사단장), 협통(여단장), 표통(연대장), 관대(대대장), 대관(중대장), 배장(소대장), 봉두(분대장)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단에 해당되는 1개 진은 2개 보병협(여단), 1개 기마표(연대), 1개 포병표, 1개 공병영(대대)로 구성되어 12개 보병대대, 3개 기병대대, 3개 포병대대(야포 36문, 산포 18문), 1개 공병대대, 1개 수송대대, 1개 군악소대 등 장교 748명, 병사 10,436명외 비전투요원까지 합해 12,512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렇게 적고보니 어째 중일전쟁당시 중국군 중앙군보다도 편제와 무장이 더 충실한 느낌이....--;

 한편, 원세개의 북양계 외에도 남방에서는 양광총독 장지동이 남경에서 이른바 "자강군"이라는 신식군대를 만들었는데 이는 독일장교에 의해 훈련되고 독일식 군제를 따릅니다. 이 이외에도 각 성의 총독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지방군제로서 녹영을 대신하는 신식군대를 창설해 나갑니다. 그러나 편제와 무기, 훈련 등에서 통일되지 않고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당시 청조의 혼란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죠. 더욱이 이런 우후죽순식 신식군대의 형성은 신해혁명후 지방에 할거한 군사령관들의 군벌화와 내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홍장, 증국번, 좌종당과 함께 청말 4대 명신중 하나라는 장지동(1837~1909). 보수파의 거두로서 "중체서용"을 제창하고 변법자강운동을 급진적이라며 반대하였으나 경한철도를 건설하고 근대적 공장을 설립하는 등 청 부흥과 근대화를 위해 나름 많은 노력을 하였죠.(※ 사진출처 : 위키백과)

 

아무튼 한족주제에 너무나 거대한 권력을 한손에 쥔 원세개는 영록 등 만주족 출신 관료들과 황실의 견제를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마지막 황제 부의의 아빠 순친왕 재풍에 의해 1909년 1월 고향땅으로 쫓겨나 감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재풍을 비롯한 조정의 무능함과 외세와 결탁해 온갖 이권을 팔아먹는 등의 매국행위로 청조는 도처에서 반란에 직면합니다. 바로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를 시작으로 신해혁명이 터집니다. 전국 17개성이 비복종을 선포하고 청조는 단지 북경-천진 일대 등 직예성, 하남성, 산동성 등만 간신히 통제하죠. 이렇다보니 청조는 원세개에게 다시 손을 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해혁명 당시 중국의 상황(청색이 청조 장악지역, 녹색이 반란지역)

※ 사진출처 : http://afnaidel87.blog.me/50118555048

 

고향인 하남에서 낚시나 하며 암살당할까 전전긍긍하던 원세개는 특유의 통빡 회전력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잽싸게 파악 분석한후 자신의 심복인 단기서, 예사충 등 안휘파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휘하 군대를 보내 우선 안휘성과 하남성의 반청 민중 반란을 잽싸게 제압하고 이 지역을 자기 세력으로 장악합니다. 흠차대신으로 다시 기용된 원세개는 호북의 혁명군을 제압하기 위해 풍국장의 제1군을 한구로, 단기서의 제2군을 무창으로 급파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탐욕과 야심이 철철 넘치는 원세개는 다 망한 청조에 새삼 충성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고 남방에 대한 공격을 일부러 미적거리죠. 신해혁명 발발로 미국에서 급히 귀국한 손문은 남경에서 제1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었으나 원세개가 청조를 알아서 무너뜨려준다면 자기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청조에게는 최후의 결정타를 먹이는 것과 같은 것이었죠.

 

손문의 통큰 빅딜제안에 원세개는 음모를 꾸며 청황실의 경호부대인 금위군을 자기수중에 넣음으로서 황실의 힘을 빼앗아 버리고 부하인 단기서를 비롯해 북양군 고급지휘관 46명의 연명으로 부의의 퇴위를 강요합니다. 결국 1912년 1월 31일 어전회의에서 당시 6살이었던 부의는 멋도 모른채 퇴위당하게 되었고 청조는 건국 297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죠. 손문은 약속대로 대총통 자리를 원세개에게 넘겼고 3월 10일 원세개는 꿈에도 그리던 제2대 대총통이 됩니다.

 

그러나 원세개는 청 황실만이 아니라 손문의 뒷통수도 내려쳤는데,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압승을 거두고 새 총리로 송교인이 취임하자 그를 암살합니다. 여기다 강서도독 이열균을 비롯한 손문측 혁명파 도독들을 해임시키고 자기 사람들로 채우고 국회 역시 해산시키죠. 따라서 손문은 1913년 7월 "토원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군사력과 자금을 갖춘 원세개의 북양군에 의해 손문측 군대는 아작났고 손문은 상해로 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고만장해진 원세개는 한술 더떠 무솔리니마냥 신제국의 황제가 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망상까지 꿈꿉니다. 원세개는 유럽에서 1차대전이 발발한 것을 이용해 산동의 독일 이권을 일본에게 넘기는 대신 자신의 황제 등극을 지원해 줄 것을 밀약하죠. 그리하여 1915년 12월 12일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황제가 됩니다. 나라 이름은 "중화제국", 연호는 "홍헌"으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내린 명령이 "내가 황제에 되는 것에 반대하는 놈들을 싸그리 쓸어버려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술이 황제자리에 오르자말자 다구리를 당하여 멸망했듯, 원세개 역시 칭제와 동시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른바 "호국전쟁"의 발발이었죠. 여기다 자신이 키워낸 북양군벌들까지도 들고 일어나 전면적인 내전상태에 직면하고 일본 역시 여론이 악화되자 원세개한테 등을 돌립니다. 고립무원에 빠진 원세개는 83일만에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죠. 원세개는 단기서를 다시 국무경으로 임명하고 사태를 해결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단기서는 되려 원세개가 은퇴할 것을 주장합니다. 결국 원세개는 울화통으로 1916년 6월 6일 현충일날 숨을 거둡니다. 

 

원세개는 죽었으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가 후계자도 없이 죽자 당장 권력의 공백이 생깁니다. 북경정부는 단기서의 안휘파와 풍국장의 직예파로 갈라져 서로 격렬하게 대립합니다. 여기에 만주에는 장작림이, 산서에는 염석산이 있고 남쪽 광동에는 손문의 혁명군에다 귀주, 광서, 사천, 운남 등에는 비북양계의 군벌들이 할거하죠. 여러 성을 장악한 대군벌부터 고만고만한 소군벌까지 말그대로 군웅 할거의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죠.

 

 

원세개 사후 천하를 놓고 대립하는 북양군벌의 주요 멤버들(원쪽부터 여원홍, 장작림, 염석산, 풍옥상)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smncha/150018325412)

 

군벌들의 항쟁은 장개석의 북벌로 일단락되지만 장개석의 북벌군 역시 사실상 군벌들의 연합체였고 북벌이 끝나자말자 다시 이들 "신군벌"에 의해 중일전쟁 직전까지 내전은 반복됩니다. 장개석은 30년대 초중반 반장전쟁과 홍군 토벌과정에서 대소군벌들을 요령껏 하나씩 정리해 나가며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죠. 그러나 결국 내전의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한 것은 모택동의 공산군이었죠.

 

 

 

 

 

이미 한번 올린 적 있지만, 북양군벌(1912년~1929년)시절의 계급장입니다.

※ 사진출처 : 오스프리 맨앳암즈 중국군(1911~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