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13화 "군대생활에 대해"

구름위 2013. 12. 2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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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으로 청 황조가 무너진뒤 근세중국은 혼란과 내전의 연속이었습니다. 내전은 1950년초 장개석정권이 패망하여 대만으로 도주하고 모택동의 新공산정권이 대륙 전역을 장악하면서 일단락되었죠. 근 40년간 지역에 할거한 군벌들은 자기 지역을 지키면서 힘을 길러 중앙정권을 엿보았습니다. 1916년 원세개의 뒤를 이은 단기서정권을 시작으로 장개석이 북벌을 하는 1927년까지 북경정부의 총통은 8번 바뀌었고 국무총리는 32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오로지 무력만이 군벌의 세력기반을 지탱해주는 수단이었고 그 무력을 뒷받침하는 재정능력을 갖춘 이가 바로 승자였습니다.

전쟁의 규모와 파괴력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폭발적으로 확대되었고 그로 인한 피해와 재정적 부담은 고스란히 힘없는 민중들에게 돌아왔습니다. 

 

군벌시대 중국군의 총숫자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나고 전쟁이 확대되면서 그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추계로는 신해혁명직후 약 50만명에서 직환전쟁 직전인 1919년에 100만이 넘었고, 장작림-오패부간의 제2차 직환전쟁(1924년) 150만, 이후 북벌전쟁(1927~29년)때는 200~300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출처 : 군신정권 근대중국 군벌의 실상, 고려원) 

 

게다가 정부와 군벌산하의 정규군외에도 농촌마을의 농민들과 도시의 상인들이 자위를 위해 자체적으로 돈을 내어 조직한 민단, 상단같은 民軍이 있었습니다. 이들도 적어도 100만에서 어쩌면 수백만이 넘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산적, 마적같은 토비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중국 전역에 분포했는데 주로 상대적으로 치안이 부재한 省간의 경계, 성의 변경, 군벌들간의 경계지역에 소굴을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특히 마적출신의 장작림, 장종창이 지배하는 영역에 토비들이 바퀴벌레마냥 우굴대고 있었죠. 이들 숫자 역시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북벌직전인 1926년도에 대표적으로 길림성에만 22만, 내몽골에 10만, 섬서성에 21만, 사천에 6만, 광동에 7만 등 수십만에서 100만명이 넘었을지도 모릅니다. 군대와 민군, 그리고 토비는 서로 구분되는 별개의 조직이 아니라 그 자체이기도 했습니다. 법으로는 군이 토비와 민군을 모집해 군대로 편성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지만(그 폐해때문에) 실제로는 토비가 군대가 되었고 군대가 패하거나 해산하면 다시 토비가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장작림의 봉천군, 장종창의 산동군(魯軍), 조척의 하남군 등이었고 바로 이것이 당시 중국의 모습이었죠.

 

당시 중국군은 제대로 된 행정조직이 없다보니 징집제가 아닌 철저히 생계형 용병제였습니다. 이는 중일전쟁은 물론 국공내전때까지도 마찬가지였죠. 군인의 80~90%는 빈농이거나 유민, 백수건달출신이었습니다. 또한 거의 대부분이 문맹이었고 나이는 15세~29세였습니다. 젊은 병사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복종심도 높은 대신 싸울 의지는 부족하여 불리하다 싶으면 쉽게 도망갔고 무기도 쉽게 버리거나 팔아버렸습니다. 평상시든 전투중이든 도망가도 젊은 만큼 다치지만 않는다면야 어차피 토비가 되던지 다른 부대로 다시 입대하면 되니까요. 이들중에 결혼한 이는 30%이내였으나 고향에 양친과 가족이 있어 봉급을 모아 집으로 돈을 부쳐야 했습니다. 

 

이들이 혼란기에 군인으로 자원한 이유는 오로지 "먹고 살기위해서"였습니다. 당연하지만 혁명사상이나 여타 이유로 입대한 이는 매우 극소수였습니다.(장개석의 국민혁명군과 모택동의 홍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너무나 무지했고 혁명이니 그딴거에 관심 있을리도 없었고 단지 부대 분위기나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입니다.

   

사실 병사의 봉급은 결코 나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부대마다, 시기마다 천차만별이지만 예를 들어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의 경우 갓입대한 병사의 평균 월급은 10원~11원 정도였습니다. 이 정도는 100무(1畝=100평)을 가진 5인 가족의 자작농이나 상해의 숙련공 노동자와 비슷하였습니다. 물론 식비를 빼고나면 별로 남는 것은 없지만 보통은 봉급의 일부를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더욱이 전쟁이 발발하여 전투에 투입되면 몇달의 봉급을 격려금으로서 미리 받기도 했고 또 점령지에서 약탈품이나 전리품 등으로 한밑천 얻기도 했습니다. 군대의 규모가 커지고 전쟁이 일어날수록 승진의 기회도 당연히 높아졌습니다. 1911년부터 1928년까지 단장(연대장)이상을 역임한 장교 1,300명중에 70%가 초등학교 졸업조차 하지 못한 문맹이었고 87%이상이 졸병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먹고 살기 힘든 이들이 택하기 가장 쉬운 직업이 바로 군인이었던 것이죠.

 

물론 전란의 시대에 군인이 된다는 것은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을 위험 역시 있는 것이죠. 그러나 군벌시대의 전투에서 죽거나 다칠 확률은 상당히 낮았습니다. 예를 들어 22년에 있었던 제1차 봉직전쟁(패권을 놓고 장작림-오패부간 일어난 전쟁)에서 쌍방은 총 20만명이상을 동원했지만 사상자는 4~5천에 불과하여 사상률은 2.5%미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군대의 훈련수준이 매우 낮고 대포나 기관총같은 중화기가 거의 없는데다 소총탄조차 매우 부족했기에 동원병력은 수십만에 달해도 대부분 지원부대이거나 대치만 할뿐, 실제 전투에 참가하는 부대는 극히 일부인데다 화력의 빈약함과 한쪽이 쉽게 붕괴됨으로서 전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시기 서구인들은 "중국인들의 전투는 마치 연습하는 것같다"라고 평가합니다.

 

전투에 의한 부상보다 오히려 전염병과 성병이 더 문제였습니다. 물론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북벌전쟁과 중원대전, 이후의 중일전쟁에서는 훨씬 죽거나 다칠 위험이 커지죠. 30년에 있었던 중원대전은 내전기간동안 최대의 격전이었고 쌍방 100만이 동원되었는데 장개석측이 3만, 반장측이 8만의 사상자를 내어 거의 10%의 사상률을 냅니다. 중일전쟁에서는 적어도 병사의 1/4이상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때는 군인이 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죠.  

 

군대의 모집은 군정부(군벌이 우두머리인)의 명령에 따라 지방정부(성정부 또는 현정부)의 관리들이 "모병브로커"를 이용해 모병하였습니다. 의뢰를 받은 모병브로커들은 도시나 마을을 돌며 가난한 농민, 실업자들에게 술과 돈을 뿌리고 모집을 합니다. 일정인원이 모집되면 이들에게 무기와 제복을 주고 한차례 간단한 제식훈련과 사격훈련을 실시하면 그것으로 군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병된 이들은 그 지역 사람들일수도 있지만 상당수는 유랑민들이었습니다. 군벌시대에 군인은 상당히 인기가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봉급에 쌀밥도 먹을 수 있을뿐더러 운이 좋다면 출세의 길을 잡을 수도 있었죠. 더욱이 지방군보다는 장개석의 중앙군이 가장 대우가 좋고 급료와 급식에서도 월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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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인이라는 직업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됩니다. 막강한 화력을 갖춘 일본군을 상대로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을 가능성이 너무나 높아지자 군대는 완전히 기피대상이 됩니다. 정부의 징병관들은 마을 유지들을 이용해 강제로 모병을 할당했고 이들은 장남은 제외하고 차남이하의 장정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해서 징집하였습니다. 물론 있는 집 자식들은 돈으로 빠져나갔죠. 한번 징집되면 고향에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의료체계는 청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중상을 입을 경우 후송되는 것이 아니라 매정하게도 전선에 버려져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질병 역시 마찬가지였죠. 단지 소수의 민간단체(적십자나 교회같은)에서 약간의 지원을 했을 뿐입니다.

 

훈련은 매우 단순했고 서구 기준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형편없었습니다. 체계적인 전술훈련따위는 없었으며 사격훈련은 탄약 낭비였습니다. 비교적 훈련이 잘되고 규율이 잡힌 군대는 서북을 지배하던 풍옥상의 국민군이었습니다. 매우 강직하고 엄격한 지휘관인 풍옥상과 소련군사고문단에 의해 잘 훈련되어 국민군(이후 제2집단군)은 한때는 중국 최강의 군대였으나 북벌과정을 거치면서 패잔병들과 토비들을 대거 흡수하자 곧 오합지졸로 전락합니다. 장개석이 수립한 황포군관학교는 상당히 우수하고 혁명사상으로 무장한 장교들은 배출했으나 병사들은 대상밖이었고 단지 소모품에 불과했습니다.

 

군대의 무기는 부대마다 천차만별이었는데 대부분 19세기말~20세기초에 제작된 소총이었고 약간의 수류탄과 구식 중기관총을 보유했습니다. 레이황의 "장개석일기를 읽다"에 보면 10만명의 북벌군을 총 지휘하는 장개석이 겨우 200개의 수류탄의 보급과 사용을 직접 관리하고 지시했다는 내용이 나올만큼 중국군의 무장은 형편없었습니다.

 

야포는 전군을 통틀어도 매우 극소수였고 더욱이 포병용 관측기가 없어 어림짐작으로 쏘았는데다 포탄도 적어서 실전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고대성벽으로 둘러쌓인 도시를 공격할때는 마치 삼국지시절처럼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거나 성벽밑에 폭탄을 설치한후 폭파시켰습니다. 통상 가장 잘 장비된 부대가 1천명당 소총 800여정, 기관총 5정을 보유했습니다.  

 

항상 군벌들에게 군대는 가장 큰 재산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골치거리였습니다. 재정부담에서 군비는 어느 성, 지역이건간에 70~80%이상(최대 90%를 넘는 경우도 있었음)을 차지했고 이조차 부족하여 온갖 잡세에 아편까지 대량 재배해 판매하여 그 수익을 충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부족하여 심지어 사천성 성도는 1979년것까지 미리 당겨서 징수했고 광원현에서는 2011년도 세금까지 징수했으니 그야말로 황구첨정에 백골징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가렴주구가 심하였습니다. 중일전쟁때가 가장 극에 달하여 탕은백이 주둔한 호남성의 경우 징세액이 토지의 총생산액과 거의 맞먹었으니 농민들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이었죠. 이렇게 해도 막대한 전비부담을 제대로 하지 못해 부대의 봉급은 수시로 체불되었습니다. 1923년 당시 군대의 미지급 액수는 1억 8천만원에 달했습니다.(총 세입이 3억이 되지 못했음)

 

※ 1923년 성정부 지출중 군비가 차지하는 비율 : 하남 84%, 사천 88%, 하북 49%, 산동 59%, 산서 80%, 강소 41%, 안휘 41%, 강서 78%, 호북 94%


군인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면 당연히 이들은 싸우려들지 않았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이른바 兵變) 따라서 군벌들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어떤 지역을 차지하면 "3일간의 자유행동"을 보장하여 약탈, 살인, 강간을 허용했습니다.(엄격한 기독교신자였던 풍옥상만 예외... 장개석의 북벌군은 남방에서는 매우 엄격한 규율로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나 패잔병들과 군벌군이 대거 유입되고 양자강 넘어 북방으로 진격하자 급격하게 오합지졸이 됩니다.) 만약 전쟁에 패한다면 이들은 승자측에 흡수되기도 하고 토비가 되기도 했고 또는 해산되기도 했습니다. 해산될때는 돈을 쥐어줘야 했죠. 그렇다고 그 돈 챙기고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돈과 무기를 밑천으로 토비가 되어 철도의 기차를 습격하거나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그러다 토벌당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군대나 관리들과 적당히 타협하여 도로 정규군에 편입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우두머리 역시 지휘관자리를 얻고 자신의 산적집단을 그대로 지휘하였죠. 말그대로 인생은 한방인 시대였습니다. 양측은 돈을 써서 적장과 적부대를 경쟁적으로 매수했고 따라서 군사적 능력보다 돈 많은 쪽이 이겼습니다. 장개석의 북벌 역시 이런 식이었죠.

 

군벌시대의 군대란 어느 시대이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