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11화 "중국의 1차대전 참전"

구름위 2013. 12. 2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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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유럽에서 1차대전이 발발하여 서로 피터지고 싸우고 있던 1917년 8월 14일, 뜬금없이 중국도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하고 연합군편에 섭니다. 그런데 중국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의 나라 전쟁과 무슨 관계가 있어서 선전포고를 했던 것인가. 이를 알려면 당시 중국의 복잡한 내부 사정부터 알아야 합니다.

 

1916년 6월 6일 현충일날, 칭제를 꿈꾸다 실패한 원세개는 실망감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요독증으로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죽은후 북경을 장악하고 있던 북양군벌 똘마니들은 둘로 갈라지는데 양대보스가 "북양삼걸"이라 불리던 안휘파의 단기서와 직예파의 풍국장(이후 조곤, 오패부로)입니다.(나머지 한명은 왕사진) 단기서는 총리에, 풍국장은 부총통(대총통은 여원홍인데 실권없는 바지사장) 자리를 차지하고 서로를 견제하고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입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외세의 힘에 의존했는데 단기서는 일본에, 풍국장은 영-미와 결탁합니다.

 

 

북양군대의 훈련모습. 원래 북양군은 태평천국의 난 시절 이홍장의 "회군"에서 시작하였고 청군의 정규군이자 최강부대로서 청일전쟁과 의화단의 난에 참전하여 싸우지만 패전으로 와해됩니다. 이후 청말 조정은 의화단이후 와해된 군의 재편성과 근대화를 위해 원세개에게 명령하여 1905년  "북양 6진(진=사단)"을 건설하였고 이것이 북양군벌의 전신입니다. 이외에도 각 성은 자체적으로 구식군대를 신식군대로 개편하여 양성합니다. 당시 중국군벌들은 북방의 북양군출신과 남방의 비북양군출신으로 나누어집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당시 중국은  신해혁명이후 원세개와 손문의 대립과 각성들의 "독립"선언으로 분열되어 북경정부가 통제하는 지역은 화중, 화남이며 호남, 사천, 양광 등 중앙에 복종치 않는 남쪽동네의 비북양계군벌들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단기서는 천하통일을 위해 중앙의 군사력으로 "남벌"을 하여 이들을 제압할 것을 주장했고 풍국장은 내전 반대와 이들이 북경정부를 중앙정부로서 복종한다면 자치를 인정해주자, 라고 주장합니다.(이것을 중국에서는 "기치를 바꾼다"라고 합니다.) 이런 통일방식을 놓고 양자는 대립하게 되었고 단기서의 명령으로 남쪽에 내려갔던 직계군벌들에 대해 풍국장이 지시를 내려 명령을 불복토록 합니다.

 

 

풍국장(1859~1919) : 원래 하북성이 고향이나 원세개의 심복으로 직예총독을 지냅니다. 따라서 그의 세력을 "직예파"라고 하죠. 그러나 원세개의 칭제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원세개의 눈밖에 나 중앙에서 밀려납니다. 원세개가 죽은후 부총통이 되었으나 권력을 놓고 환계의 단기서와 대립하였고 하야한지 얼마되지 않아 중풍으로 60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풍국장에 의해 완전히 바보가 된 단기서는 자체 군사력을 갖출 필요성을 깨닫습니다. 단기서측은 대부분 중앙의 고관들인지라 계급만 높을뿐 직속 병력이 없는데 반해 풍국장의 직군들은 현지 사단장들인지라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죠. 이를 위해 명분으로 삼은 것이 바로 1차대전 참전이었습니다. 원래 원세개시절에도 연합군으로 참전을 고려했으나 일본의 강력한 반발로 중립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단기서정부는 "장훈의 복벽사건"에 대해 독일이 지원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1917년 8월 14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하게 되죠.

 

제정러시아가 혁명으로 무너지자 독일이 러시아를 통해 동진해 오는 것을 막자며 단기서는 새로운 군대, 이른바 "참전군"을 신설합니다. 그런데 정작 병력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 다 끝난뒤인 1918년 12월이고 편제를 완료한 것은 1919년 2월입니다. 따라서 1차대전 참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죠.

 

게다가 여기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장비, 군마와 군복까지도 모두 일본의 지원을 받았고 일본군 교관에 의해 훈련받아 사람만 중국인이지 남들이 보면 일본군과 다를바가 없는 괴뢰군대였죠. 총 병력은 3개 사단과 4개 혼성여단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북경을 중심으로 화북과 화중에 배치됨으로서 국방이 아니라 내전용임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더욱이 단기서는 일본의 차관을 얻기 위해 일본과 매국적 밀약을 맺습니다. 원래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동 청도의 조차지를 1차대전이 터지자 일본이 무단으로 장악했는데 1차대전 승전국이 된 중국이 당연히 돌려받아야 함에도 이를 인정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나중에 1919년 파리강화회담에서 중국측 대표가 산동반도 반환문제를 제기하자 일본이 단기서정부의 문서를 내보이면서 일본땅임을 주장하였고 결국 일본의 주장이 승인됨으로서 외부에 알려집니다. 이때문에 1919년 5월 4일 이른바 "5.4"운동이 일어난 것이죠.(중국에서는 이날을 중국청년절이라고 기념한답니다. 게다가 황금연휴라네요.) 이를 단기서가 폭력적으로 진압함으로서 국내 여론은 급격하게 악화됩니다. 결국 단기서는 1918년 10월 여론에 못이겨 풍국장과 함께 하야하고 서세창이 총통, 근운붕이 총리가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 실권도 없는 자들이었고 여전히 실권은 변방군과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단기서가 쥐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5.4 운동 당시 사진. ※ 출처 : http://www.sundaychina.net/main/bbs/board.php?bo_table=ca0

 

단기서는 참전군의 해체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대해 기왕 만든 것을 없앨 수는 없지 않느냐라며 당시 독립을 추진하던 외몽고를 진압하겠다는 명분으로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바꿉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병력은 국경으로 보내지 않고 자기 세력지에 그대로 두며 사병집단화합니다. 여기다 단기서는 자기 오른팔인 서수쟁을 서북주변사 겸 서북변방군총사령에 임명하여 내몽고부터 신강, 섬서, 감숙 일대의 거대한 지역의 행정권, 군권을 부여합니다. 이때문에 직군과 봉군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고 양자는 단기서에 맞서 연합하게 됩니다.

 

 

이 양반이 서수쟁(1880~1925). 청말 과거시험 초급과정에 합격하여 "수재"가 되었다가 단기서의 눈에 들어 말그대로 단기서가 키워준 인물입니다. 무력이 없던 단기서를 위해 봉천으로 가서 "만주왕" 장작림과 연합함으로서 풍국장의 직계파를 견제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야심과 독주가 결국 자신과 자신의 상전까지 망치고 말았죠.

 

1919년 12월 28일 하야했던 풍국장이 북경에서 중풍으로 죽자 No.2인 직예독군 조곤이 직군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그러나 실권은 그의 심복인 오패부가 쥐고 있었는데 당시 호남의 성도인 장사에 주둔하고 있던 오패부는 "내전반대"를 외치며 휘하 제3사단(직군 최강부대)을 거느리고 북상하였고 봉천독군 장작림을 비롯해 하남독군 조척, 강서독군 진광원, 호북독군 왕점원 등 8개성의 직계, 봉계측 군벌들이 모여 "반단기서"연합전선을 구축함으로서 양자는 완전히 일촉즉발 상황에 치닫습니다.

 

서세창은 비록 양자에게 구박이나 받는 허수아비 대통령 신세지만 일단 북양군벌의 원로로서 어떻게든 양자의 전쟁은 막기 위해 장작림에게 조정을 요청합니다. 장작림은 나쁜 것은 서수쟁 한놈이니까 서수쟁만 처벌하면 물러서겠다고 합니다만 단기서로서는 수족을 자르는 것이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조곤은 변방군에 대해 단기서는 손을 떼고 중앙의 육군부 직할로 옮길 것을 주장하지만 역시 단기서는 거부합니다. 게다가 서수쟁은 강경하게 일전을 주장하면서 1920년 7월 8일 장작림에게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화해를 요청하는 척하면서 암살하려다 발각됨으로 양자의 관계는 완전히 요단강을 건너게 되죠.

 

 

서세창(1855~1939) :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소시적에는 되는 일도 없고 매우 불우했지만 원세개를 만나 팔자를 고친 케이스입니다. 원세개가 북양군대를 창설할때 그의 막료가 되면서 관직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동북3성의 총독을 지내 장작림과도 관계가 있었고(그때는 장작림이 한참 쫄병이었지만) 원세개가 일시적으로 실각했을때도 서세창만은 자기를 보존합니다. 원세개가 황제에 오른후 서세창은 국무경(국무총리)가 되었고 이후 단기서정권에서 총통과 대통령에 오릅니다. 비록 생애의 대부분이 실권은 없었지만 어쨌든 최고위직을 두루 거치며 원로로서 대우를 받았죠.

 

완전히 뒷통수 맞은 격으로 한밤중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던 장작림은 치욕감으로 폭발하였고 천진에서 오패부와 만난 다음 자기 근거지인 봉천으로 돌아가 부하들 모아서 출병하여 직군과 연합해 단기서의 환군과 결전키로 결정합니다. 1920년 7월 13일 정식으로 관내출병을 선포하였고 직속의 최정예인 제27사단을 선봉으로 약 7만명이 산해관을 너머 남하합니다.

 

당시 단기서는 장작림이 조곤과 손을 잡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고 변방군과 서북군을 동원하면 직군보다 우세하기에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수쟁의 암살 음모로 장작림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림으로서 환군은 뒷통수를 맞게 되죠. 이를 몰랐던 단기서는 7월 8일 조곤, 오패부의 파직을 요구하고 환군을 "정국군"으로 칭하고 자신이 총사령, 서수쟁을 참모장으로 임명한후 7월 14일 오후 직군에 대해 총공격을 명령합니다. 전투는 북경과 경한철도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졌는데 초반에는 환군의 공격에 직군은 방어선이 무너지고 직군의 사령부가 있는 천진 코앞까지 진격합니다. 그런데 2일뒤인 봉군이 환군의 뒤를 범하자 단숨에 전세는 역전됩니다. 서로의 직군이 환군 제1사단을 격파하고 제15사단은 투항합니다. 동로 역시 봉군과 직군의 연합군의 맹공에 환군은 완전히 와해되어 동로군의 지휘를 맡고 있던 서수쟁은 북경으로 도주합니다. 

 

7월 18일 단기서는 사실상 백기를 들고 정국군 해체와 하야를 선포합니다.  패배원인은 열강들의 견제로 일본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 급조되어 경험도 훈련도 빈약했던 환군의 취약성, 환군 내부의 갈등과 대립, 무엇보다 장작림의 뒷치기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측의 동원병력은 20만에 달했지만 전투는 4일도 안되어 끝납니다. 사상자 역시 2~3천명에 불과했습니다. 머릿수만 많을 뿐 무장이 빈약하고 오합지졸에 불과한 이 시기의 중국군벌군대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나 직환전쟁을 시작으로 내전의 규모와 파괴력은 갈수록 더 커져 나가게 되어 30년 중원대전에서 절정을 이루게 되죠.(수개월간의 전투에서 쌍방 10만 가까운 사상자를 냄)

 

결론적으로, 중국의 1차대전 참전은 중국이 국외문제에 끼여들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내부갈등에 의한 해프닝에 가까웠습니다. 중국의 정치 상황상 현실적으로 유럽전선에 병력을 파견하지도, 할 수도 없었죠. 그러나 실제로 유럽의 전선으로 보내진 중국인들도 있었는데 이는 군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추계 약 14만명이 모집되어 돈을 벌려고 유럽으로 갔고 이들은 최전선에서 참호 공사와 지뢰 제거, 병참 등 지원부대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들의 희생과 노력 덕분에 어쨌든 형식상으로나마 "승전국"이 되었지만 단기서정권의 매국적인 행동으로 아무런 실익도 얻지 못합니다. 국익보다 권력자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 시대의 비운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