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8화 "우리도 있다. 듣보잡들

구름위 2013. 12. 2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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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운(1884~1962, 일급상장) : 통칭 "운남왕"(죄다 무슨 왕인듯...--;) 이 양반은 원래 한족이 아니라 운남 토착 원주민인 "이족"출신입니다.(한마디로 오랑캐) 원래 운남독판 당계요의 부하였다가 1927년 2월 6월 쿠테타를 일으켜 당계요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내전을 통해 경쟁자들을 제거하여 운남성 전체를 차지하여 "운남왕"이 됩니다.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북벌을 시작하자 그 역시 장개석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국민혁명군 제38군 군장에 임명됩니다. 이어 28년 1월에는 운남성 주석 겸 국민혁명군 제13로군 사령관이 됩니다.

 

 

이 양반이 용운(사진출처 : 위키백과)

 

30년대 전기간동안 장개석과는 동맹자이자 협력자로서 그를 적극 지지하였고 중원대전때는 반장세력의 핵심인 이종인의 광서군을 뒷치기하여 성도인 남녕까지 침공하지만 결국 패퇴하여 쫓겨갑니다. 34년에는 대장정에 나선 모택동의 홍군에 대한 포위망에도 참여했다가 한때 모택동의 뒷치기로 곤명이 위협받기도 합니다.

 

그는 뛰어난 인재들을 영입해 중국내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던 운남성의 근대화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중일전쟁기간동안 운남성은 귀주성, 사천성과 함께 중국군 후방기지 역할을 했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성도의 곤명에는 미 제7공군의 최대기지가 건설되어 히말라야를 통과하는 항공보급작전인 이른바 "험프루트(Hump Loute)"를 통해 물자가 유입되죠. 이후 스틸웰장군의 주도로 버마가 탈환되자 45년 1월에는 "레도공도"가 건설되어 고립되었던 중국의 숨통을 열어주죠. 또한 휘하의 운남군은 머나먼 화북, 화중, 화남 등 중국 전토를 전전하며 다른 계파의 군대와 함께 최일선에서 싸웁니다.

 

 

 

※ "Flying the Hump"는 인도에서 출발하여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의 해발 8천미터의 꼬불꼬불한 산맥을 건너는 것으로 미공군에서도 가장 위험한 임무였고 이 과정에서 수백대의 수송기를 상실했습니다.

 

용운은 장개석과 중앙정부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나 40년대에 들어오면서 중앙군이 운남에 들어오고 장개석이 "운남의 중앙복속"을 추진하자 대립하게 됩니다. 용운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에 의해 뽑힌 사람이 아니라 낡은 봉건군벌이었고 그의 협조는 자신의 왕국이 간섭받지 않고 기득권이 유지된다는 전제하에서만 지속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지역 할거의 종식과 중앙집권화가 목표인 장개석과는 어차피 대치될 수 밖에 없었죠. 그는 장개석과 대항하기 위해 야당인 민주동맹에 가입하고 공산당과도 손을 잡습니다. 이런 행동이 반역이라고 판단한 장개석은 중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45년 10월 곤명에 주둔한 두율명의 중앙군(제5군)을 동원해 곤명 외곽의 오화산에 있는 용운의 운남군 사령부를 급습하여 만하루동안의 전투끝에 운남군을 격파하고 용운을 포로로 잡습니다.

 

용운은 그래도 오랜 동맹자였던 장개석이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지라 주력 병력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화북지역으로 보낸 상태에서 소수의 근위병만 휘하에 두고 있었고 따라서 거의 저항도 못해본채 백기들 수 밖에 없었죠. 그는 남경으로 보내져 군사위원회 참의원 원장에 임명되지만 명예직이었고 사실상 연금됩니다. 48년 12월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홍콩으로 도주합니다.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이 승리하고 장개석은 대만으로 도주합니다. 1950년 1월 용운은 북경으로 망명했고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석, 전국인민대표당무위원 등 거창한 감투를 여러개 맡게 됩니다.

 

그러나 50년대 말에 가면 모택동의 신중국도 과거 장개석의 국민당과 다를바없이 우경화되어 당내의 각 계파들끼리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지는데 이미 노망에다 수구꼴통이 되어버린 모택동은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해 대약진운동과 함께 소위 "반우파투쟁"을 벌입니다. 나중의 문화혁명의 초기버젼이라 할 수 있죠. 이때 용운도 반동분자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고 당내의 모든 직위에서 쫓겨납니다. 한때 날던 새도 떨어뜨리던 사람도 윗선에 줄 잘 못 대어 한번 밀려나면 몰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독재정권의 전형적인 특성이죠.

 

그리고 1962년 6월 27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모택동 죽고나서 정권을 잡은 등소평에 의해 1980년 7월 "사실은 얘는 우파가 아니었다"라며 명예가 복권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곤명이랍니다. 기후가 온난한데다 남방계통의 유적이 많아서 관광지와 골프 투어로 유명하다죠..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 사진출처 : http://www.cnto.co.kr/04/08/Default.asp?act=view&idx=426&keyword=%EC%9A%B4%EB%82%A8%EC%84%B1&field=title&page=2&oa=1&ob=1

 

 

 

 

2. 당생지(1889~1970, 일급상장) : 이 양반은 다른 것보다 중일전쟁당시 남경방위전에서 부하들 죄다 버리고 지혼자만 살자고 도망가 남경대학살을 방조한 무능한 인간으로 유명한 작자이죠.

 

 

이 인간이 예의 그 양반(사진출처 : 위키백과) 근데 공기 좋고 물맑은 시절에 왜 안경을 쓴 건지..  초딩때 컴퓨터 게임을 밤새도록 해서 눈 나빠진 것도 아니고...

 

당생지는 원래 호남성 출신으로 용운, 이종인, 염석산과 마찬가지로 자기 동네에서 왕 노릇하던 토착군벌입니다.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한후 호남성장 조항척 밑에서 제4사단장을 지냈는데 조항척은 독군인 담연개와 권력투쟁을 벌여 호남성은 극도로 혼란에 빠집니다. 오패부의 지원을 받은 조항척은 담연개와의 투쟁에는 근근히 이겼지만 이 과정에서 손문, 이종인 등의 지원을 받아 힘을 키운 당생지의 쿠테타에 뒷통수를 맞고 1926년 3월 강제 하야합니다. 그러나 조항척은 무한에서 다시 오패부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였고 당생지는 패하여 장사로 후퇴합니다.

 

몰락의 위기에 직면한 당생지는 호남 수복을 위해 1926년 6월 국민당에 가입하고 국민혁명군 제8군(병력 12개연대, 1개 여단 등 1만명정도)으로 참여합니다. 그리고 7월 1일 북벌이 개시되자 최선봉에 서서 이종인의 광서군과 함께 오패부군을 격파하고 호남 전역을 장악합니다. 26년 7월 25일 호남성 주석으로 임명됩니다. 북벌과정에서 쓸만하다 싶은 놈들과 줄줄이 도원결의를 했던 장개석이 당생지에게도 러브콜을 하지만 "나는 그런 취미가 없다"라며 완곡하게 거절합니다. 9월에는 호북 한양까지 점령하며 세력을 북쪽으로 확대하죠.  

 

그러나, 그의 북벌 참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의 세력 유지를 위한 것이었기에(사실 죄다 마찬가지지만) 호남북을 수복한 뒤 이 동네의 중앙복속을 꾀하고 지방군벌들을 억제하려던 장개석과 당연히 대립하게 됩니다. 따라서 장개석과 광서파가 주도한 "4.12 정변"으로 국민당정권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반장개석 세력들과 손을 잡고 남경정부에 대항하는 무한국민정부 측에 섰다가 장개석측에 선 이종인에게 깨지고 한때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남경과 무한이 도로 통합하면서 돌아옵니다.

 

이후 북벌이 끝난뒤 풍옥상, 이종인, 염석산 삼인방이 일으키는 중원대전에서도 당초 중앙군에 복속되어 있던 당생지는 이종인휘하의 장발규가 광서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광동성을 침공하자 이를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되려 같이 반란을 일으켜 "호당구국군 제4로 총사령관"을 칭합니다. 그러나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보급로가 끊겨 패망하고 이번에는 홍콩으로 튑니다.

 

한 1년 홍콩에 뒹굴거리다, 다음해인 31년 9월 16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장개석밑으로 다시 돌아왔고(그럼 애초에 뭐하러 반란을 일으켰는지) 군사참의원 원장자리에 앉습니다. 35년 7월에는 이급상장(별세개)이 되었고 훈련총감을 맡습니다. 장개석으로서는 호남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이 양반이 아직은 존재 자체가 필요했던 모양으로 주로 실권이 없는 명예직에 앉힙니다.

 

그런데 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장개석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은 상해전역은 3개월만에 말그대로 참담한 패전으로 끝납니다. 약 20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남경으로 거침없이 진격하고 상해-남경 사이에 구축된 방어선은 사실상 붕괴됩니다. 군사회의에서 참모차장인 백숭희는 병력의 보존과 방어의 어려움을 이유로 수도를 포기할 것을 건의했지만 당생지는 무조건 사수를 주장했고 장개석 역시 당생지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경 사수와 그를 남경위수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수도는 한구로 옮깁니다. 

 

졸지에 수도방위사령관이 된 당생지는 "죽어도 남경에서 죽겠다"라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집니다만, 다 같이 죽자는 것인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건지 남경뒷쪽의 양자강에 놓인 다리를 죄다 파괴하고 배도 모조리 침몰시키는 등 퇴로를 막아 스스로 고립무원의 길을 자초합니다.(한마디로 배수의 진?) 그러면서 수도 외곽에서 남경성 안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막으려고도, 소개시키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약 10만에 달하는 휘하 병력 역시 남경성 외곽의 방어에 유리한 지역에 배치하기보다 죄다 남경성안에 끌어모읍니다. 그리고 "무단 후퇴자는 참수하겠다"라며 남경성 후문에 기관총까지 배치합니다. 따라서 일본군은 남경성을 손쉽게 포위할 수 있었죠.(도대체 그가 왜 이렇게 했는지는 지금 중국 역사학자들에게도 연구 대상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신립이 떠오르는 이유가 뭔지..--;) 

 

마쓰이 대장휘하 중지나방면군 20만명이 남경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해군이 양자강 타고 올라와 퇴로까지 차단함으로서 남경성은 완전히 고립됩니다. 12월 9일 오전부터 맹공이 시작되었고 중국군은 여단장, 연대장들이 줄줄이 전사할만큼 매우 용맹하게 싸웠으나 공중폭격으로 통신선로가 죄다 끊겨 지휘계통이 마비되어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2일뒤인 11일 "남경과 함께 죽겠다"고 했던 당생지는 몇몇 참모들만 데리고 탈출해 버립니다.(이승만, 채병덕 레벨) 자신은 퇴각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지만 통신선이 끊긴 상태에서 그냥 입으로만 한마디 던진 것에 불과하니 누가 그 사실을 알겠습니까. 게다가 사령관이 도주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때까지 잘 싸우던 병사들은 금새 전의를 상실하고 순식간에 와해되어 시가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 남경전투 전황도, 사진출처 : 위키백과 >

 

총 10만~15만명 정도의 정규군, 비정규군 중 조직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역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퇴각했던(즉 일본군이 쳐들어오는 쪽으로) 2개 연대뿐이었고 일부는 뗏목을 만들어 탈출하거나 수영을 해서 건너가기도 하지만 이미 퇴로를 차단한 일본군에 의해 대부분 사살당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고작 2만명 미만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무기고 뭐고 죄다 버리고 몸만 살아 도망간 것이죠. 일본군 역시 최소 1만명이상의 사상자를 냅니다.

 

남경성에는 약 100만에 가까운 피난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것이죠. 아시다시피 일본군은 이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학살극을 벌였고 30만명이상의 군인 포로와 민간인들이 살해됩니다. 그나마 외국인 조계지역에서 학살을 막으려고 노력하여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습니다.(일본군과 타협하여 안전구역을 설정후 약 20만명이상을 수용)이는 근세시대이래 한 도시에서 벌어진 가장 큰 학살극이었습니다. 물론 일차적 책임은 일본군에게 있지만, 당생지의 무책임함과 무능함, 이런 인간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장개석에게도 있다하지 않을 수 없죠.

 

당생지는 제 목숨만 살아서 돌아왔지만 파직되어 고향땅 호남성으로 돌아가 칩거하며 한동안 불경을 공부하며 "반성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다 1939년 5월에 장개석에 의해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복직했으나 이렇다할 활약은 없이 그냥 조용히 지냅니다. 이후 국공내전 막판인 48년말 장개석의 뒷통수를 치고 공산당 지지와 호남의 무혈항복을 지원합니다. 덕분에 인민공화국 치세에서 호남성인민정부 부주석, 부성장, 국방위원회 위원 등 감투를 쓰며 즐거운 말로를 보내지만 문화혁명때 "인민의 적"으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이지메 당한 충격과 스트레스로 70년 4월 6일 호남 장사에서 병으로 죽습니다. 그의 나이 82살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