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칭 "광서왕"이라 불리운 사나이. 이른바 新계계군벌(광서군벌)의 우두머리로서, 국민당에서 군사쪽에서는 No.2에 해당하는 파워를 가졌고 장개석과는 동맹자이자 의형제이면서 또 숙명의 라이벌이기도 했죠. 그러나 끝까지 장개석을 넘어서지는 못한 비운의 남자입니다.(이정환과 김수겸, 손오공과 피콜로의 관계?)
그는 평생 네번 장개석과 대결하였는데 29년의 장계전쟁, 30년의 중원대전, 31년과 36년 두번의 양광전쟁에서 끝까지 확실한 승부를 짓지 못한채 무승부로 끝나죠. 그는 일명 "제갈량의 환생"이라 불리었던 백숭희와 함께 콤비를 이루어, 근대전술에 어두웠던 여타 군벌들중에서 그나마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 이종인(1891~1969) : 군사쪽에서 장개석 최대의 숙적. 평생을 장개석과 때로는 손을 잡기도, 때로는 천하를 놓고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 승자는 장개석도, 이종인도 아닌 모택동에게 돌아갔다는...-.-
참고로, 1910년대에 광서성을 주름잡았던 육영정을 구계계군벌이라 하고 육영정 몰락후 혜성처럼 등장한 이종인, 백숭희, 황소횡 등을 신계계군벌이라고 구분합니다.(청나라때 광서성의 성도가 계림이기에 이들을 桂系라고 합니다)
이종인의 고향은 당시 광서성의 성도인 계림이며, 청말에 광서육군소학당(광서계림육군사관학교)을 졸업하였고 광서도독 육영정의 부대에 들어가 사단장까지 승진합니다. 염석산과 마찬가지로 자기 동네를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토착군벌이라 할 수 있죠.
원세개 사후, 중앙에는 북양군벌들이 권력을 놓고 싸우는데 양자강 이남은 중앙과는 별개로 남방군벌들끼리 서로 치고박고 싸웁니다. 1920년 7월 육영정이 광동을 침공하고 광동군벌 진형명과 이른바 "월계전쟁"이 발발하는데 육영정은 손문의 지지를 받은 진형명에게 패망하여 하야후 상해로 튑니다.
※ 육영정(1859~1928) : 이종인 이전에 "광서왕"이라 불리운 양반. 장작림처럼 산도적 출신에서 청말 혼란기를 거치며 출세했고 나름대로는 광서성 근대화에도 많은 노력을 했지만 지나친 야심으로 멸망하고 말았죠.
(사진출처 : 위키백과 일본판. 빈약한 한글판과 달리 왠만한 인간들은 죄다 나온다는..-.-)
육영정이 없어지자 이종인은 휘하 부대를 밑천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백숭희, 황소횡등과 연합하여 광서성을 장악합니다. 1923년 11월 아직 정신 못차린 옛대빵 육영정이 북경의 도움을 받아 다시 돌아와 재기를 노리지만 이 옛날 부하들한테 반년만에 아작나 군대는 포위 섬멸되었고 다시 하야를 선언후 상해로 튑니다. 그기서 더 뭔가를 하지못한채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마감하죠. 이후 이종인은 같은 광서군벌인 침홍영을 격파하고 광서성 전체를 통일하여 새로운 "광서왕"이 됩니다. 이어서 운남, 귀주, 사천을 지배하던 거대 군벌 당계요의 광서침공도 물리칩니다.
한편, 옆동네 광동성에는 손문이 살았습니다. 신해혁명당시 원세개에게 대총통자리를 양보했던 그는 원세개가 싸질러놓은 북양군벌들이 좌지우지하는 북경정권의 무능함과 독재에 반발해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남쪽동네로 내려와 광주에 자리를 잡죠. 그리고 혁명을 통해 타도 북경정권과 새로운 시대를 꿈꿉니다.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손문은 서남군벌들을 포섭하여 군사력을 갖추는데 광서의 "루키" 이종인 역시 1924년 광주에서 손문을 만나 국민당에 가입하고 북벌에 동참키로 약속하죠. 손문은 이종인을 "광서독판(광서성 총사령관)" 겸 광서육군 제1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그의 동기인 황소횡은 제2군 사령관이 됩니다.
계림에 있는 이종인 관저랍니다. 소박하군요.(사진 출처 : 위키백과)
그러나 손문은 건강이 악화되어 얼마되지 않아 1925년 3월 12일 북경 방문중에 서거합니다. 그 바톤은 No.2인 왕정위, 호한민, 허숭지, 요중개 등이 물려받죠. 당시 황포군관학교장이었던 장개석은 손문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국민당내에서 지위는 한낱 애송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지위는 낮지만 자체 무력을 갖춘 장개석과 지위는 국민당 No.1이지만 실권은 없는 왕정위가 서로 손을 잡고 광동군을 장악하고 있던 허숭지와 호한민을 밀어내고 요중개를 암살하여 광동성을 둘이서 차지하죠. 뒤이어 장개석은 26년 3월 20일 이른바 "중산함"사건을 일으켜 국민당을 장악하고 있던 보로딘 등 소련고문들을 몰아내고 왕정위마저 프랑스로 쫓아보냄으로서 장개석은 단숨에 국민당내 최고 실력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장개석이 가진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는데(당시 휘하 병력은 겨우 2~3천 남짓이었습니다.) 이종인의 지원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이종인은 윗쪽에 있는 호남성에도 세력을 뻗쳐 당생지를 지원하여 호남성장이자 독판인 조항척을 쫓아냅니다. 조항척은 오패부의 지원을 받아 다시 당생지를 남쪽으로 밀어내었고 형양까지 밀린 당생지는 자기 세력 유지를 위해 국민정부에 복속을 선언합니다. 장개석은 당생지군을 국민혁명군 제8군으로 개편하고 북벌의 선봉에 세웁니다. 그리고 1926년 7월 1일 "북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광동계열의 이제심을 제4군으로, 이종인의 광서군을 제7군으로 개편(군장 이종인, 참모장 백숭희)하고 당생지군을 지원토록 명령하죠.
※ 북벌군 구성 : 총사령관 장개석, 총참모장 이제심, 참모차장 백숭희, 정치부주임 등연달
제1군 하응흠(중앙군), 제2군 담연개(호남군), 제3군 주배덕(광동군), 제4군 이제심(광동군), 제5군 이복림(복건군), 제6군 정잠(호남군), 제7군 이종인(광서군), 제8군 당생지(호남군).
주로 광동, 광서, 복건, 호남군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으로 총병력은 10만~15만인데, 후방 수비병력을 제외하고 실제 북벌군은 7~8만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남쪽의 올망졸망한 소군벌들이 합체한 북벌군은 각 부대간의 전투력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 주축이 된 하응흠의 제1군과 이종인의 제7군이 비교적 정예였습니다.
북벌이 개시되자, 이종인의 제7군 1만명은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을 맡아 이제심의 제4군, 당생지의 제8군과 연합하여 오패부, 손전방군을 도처에서 연파합니다. 1927년 3월에는 안휘성으로 진격합니다.
막 북벌을 시작한 직후인 26년 8월. 이종인이 오패부의 "남군"을 격파하고 장사를 함락시키자 장개석 주도로 북벌회의가 개최됩니다. 이 자리에서 장개석은 이종인에게 형제가 되자고 제안했고(내가 형, 니가 동생하는걸로) 이종인은 흔쾌히 받아들이죠. 기반이 취약했던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시절부터 이런 식으로 강한 놈들과 동맹을 맺어 자신의 세를 불리는 고도의 술수를 쓰죠. 나중에 풍옥상, 장학량과도 결의를 맺죠.
삶과 죽음을 함께 하고 친형제와 같은 정을 나누며 어쩌구하며 "장-이 브라더스"를 결성하지만 그 연은 장개석 필요할때만인지라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이종인은 몰랐겠지만 여기서부터 둘의 지긋지긋한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었죠.
※ 아시는 분은 아시는 Koei의 초고전게임 수호지에서 충성도 100인 놈과는 의형제를 맺을 수 있는데 한번 맺으면 영원불멸로 절대 충성도가 떨어지지 않는 특성이 있었죠. 물론 아무 관계없는 얘기 ㅋㅋ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북벌은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곧 국민당내에서 권력을 놓고 치졸한 다툼이 벌어집니다. 당과 군권을 장악했지만 장개석의 지위는 위태롭기 그지없는 것이었고 각 군장들도 봉건 군벌들로서 어디까지나 이해관계에 의한 동맹자이지 부하는 아니었죠. 따라서 새로 점령한 점령지를 놓고 서로 싸우고, 국공합작이래 국민당을 장악하고 있던 좌파측도 반장연합을 결성해 장개석의 독주를 공격합니다. 이것이 당시 장개석과 국민당이 주도한 북벌의 한계였습니다.
국민당내에서 좌파에 비해 열세였던 장개석은 이종인, 백숭희 등과 연합해 상해에서 이른바 "4.12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원들을 대거 살해합니다. 이때문에 국민정부는 장개석이 주도하는 남경정부와 반장개석파의 무한정부로 분열됩니다. 여기서도 당생지, 장발규, 정잠 등이 가세한 무한정부측에 비해 열세였던 장개석은 한때 하야하기도 하지만 이종인, 이제심과 손을 잡고 결국 주도권을 잡았고 모든 이들의 열렬한 추대를 받아 다음해인 28년 2월 2일 도로 복직됩니다. 사실 국민당내에서 수많은 정치가와 군벌지도자들이 있지만 장개석을 능가하는 리더가 없고 자신들을 아우르며 북벌에 나설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장개석은 복직후 2주만에 북쪽의 거대 군벌인 풍옥상, 염석산까지 우리편으로 끌어들입니다. 이로서 장작림, 오패부, 손전방에 대해 전략적인 우세를 차지하게 되죠. 북벌군은 70만명까지 늘어났고 장개석이 직접 지휘하는 중앙군이 제1집단군, 풍옥상의 서북군이 제2집단군, 염석산의 산서군이 제3집단군이 되었고, 이종인도 북벌과정에서 오패부, 손전방의 패잔병들을 흡수하고 당생지의 호남군까지 편입하여 제4집단군이 됩니다. 2년전 북벌 시작때만 해도 한낱 소군벌에 불과했던 그가 이제는 4대 군벌중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한편, 장작림을 중심으로 한 군벌연합군은 80만에 달했으나 장작림의 봉군을 제외하고는 장종창의 산동군과 오패부, 손전방의 직군은 이미 아작날때로 아작나 정예부대를 거의 상실해 오합지졸들로 억지로 머릿수만 채운 것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이것들이 졸병들 월급도 죄다 떼어먹은지라 사기도 최악이었고 군기도 엉망이었습니다. 그러니 산동성에서의 일대결전에서 북벌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받자 단숨에 괴멸되어 나머지 부대들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거나 도주합니다. 장작림 역시 사태가 불리해지자 한낱 애송이로 취급했던 장개석에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장작림이 북경을 내놓고 남경정부에 복속하는 댓가로 동북3성의 통치만은 인정해 주겠다고 타협안을 내놓았고 장작림은 참모들의 권유에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만주로 돌아가는 열차에 몸을 싣죠. 1년전만 해도 천하의 반을 통치하고 천하통일 코앞까지 갔던 장작림으로서는 14살이나 연하인 장개석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그야말로 치욕이었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북성에 진입한 북벌군. ※ 사진 출처 : 위키백과
장작림이 똘마니들 덱구 고향땅으로 철수하자 28년 6월 8일 염석산 휘하 제3집단군 제1군이 북경시내에 들어오고, 이종인 역시 천진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11일 신강성장 양증신을 비롯해 운남, 귀주, 청해 등 변경의 군벌들이 줄줄이 중앙 복속을 선언하고 마지막으로 연말인 12월 29일에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장학량이 "동북역치"를 선언함으로서 북벌시작 2년반만에 전 중국이 통일됩니다.
북벌과정에서 이종인의 세력은 엄청나게 늘어나 광서성, 광동성, 호남성, 호북성 등 4개성의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국민당내에서도 장개석의 중앙군과 함께 양대세력을 형성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들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았겠지만 이는 더 큰 내전의 시작일뿐이었습니다.
장개석은 남경정부에서 혁명군 총사령관과 군사위원회 주석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국민 투표로 선출되어 앉은 것도 아니고 세력도 가장 크다고는 하나 전체 병력에 비한다면 1/4도 되지 않아 절대적 파워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나머지 3대 세력인 풍옥상, 염석산, 이종인 역시 대등한 입장의 동맹자이지 장개석의 부하도 뭣도 아니었죠. 이들은 국민당에서 임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수성가해 자기 지역에서 할거하는 이들이고 단지 자기 이익을 위해 국민당에 가입해 북벌에 동참했을뿐 그 어떤 제약도 받을 이유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당권과 군권의 통합을 꿈꾸는 장개석으로서는 이들의 할거를 그냥 인정한채 연합정권을 구성하는 것은 잠재적 위험을 그대로 두는 것에 불과했죠. 따라서 4자 동맹은 편견회의로 사실상 깨지게 됩니다.
군대감축과 중앙 복속 강요뿐 아니라, 장개석이 호남성에서 세력을 뻗치자 이종인은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광동군벌 이제심과 손을 잡았고 결국 장-계전쟁이 발발합니다. 그러나 장개석이 직접 지휘하는 중앙군의 세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풍옥상, 염석산의 소극적인 자세로 완전히 고립된 이종인의 광서군은 연패당하여 무한, 장사를 빼앗기고 광서성까지 침공당하여 대패하고 맙니다. 이종인은 일단 홍콩으로 도주하고 광서주석 황소횡과 백숭희는 하야합니다.
뒤이어 풍옥상, 장발규, 염석산 등이 줄줄이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다 29년에는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하는등 내우외환에 직면합니다. 이종인 역시 홍콩에서 다시 돌아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잔존부대를 규합한후 이들과 연합해 반장연합전선을 결성합니다. "노부나가포위망"에 걸린 오다 노부나가마냥 사면이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장개석은 한때 패망직전까지 몰리기도 하지만 반장연합군의 내분과 적장 매수, 자신의 군사적 능력에다 장학량의 막판 뒷치기 성공으로 장개석은 기사회생으로 승리하고 29년부터 30년까지 2년에 걸친 반장전쟁은 일단 장개석의 승리로 끝나지만 그렇다고 여타 군벌들이 소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장개석 니가 제일 세다"라고 인정해주고 파이를 조금씩 떼서 장개석에게 재분배해준 것에 불과했죠.
중원대전이 끝난뒤 장개석은 공산당 토벌과 함께 국민당내 군벌들의 힘을 조금씩 약화시켜려고 합니다.
광동군벌출신으로 국민당의 원로이자 입법원장인 호한민을 감금하는 탕산사건이 일어나자 31년 5월 27일 다시 한번 광동, 광서군벌들이 광동성의 수도인 광주에 모여 "反蔣"을 외치며 들고 일어납니다. 명분은 "호한민 감금 반대"와 "초공전에 지방군만 앞에 내세우고 중앙군은 뒤에서 구경만 한다"라는 것이었죠.
여기에는 왕정위, 손과, 고응분 등 국민당내 원로들과 광동군벌 진제당과 진명추, 광서군벌 이종인과 백숭희가 참여합니다. 여기에 장학량밑에서 산동성을 지배하고 있던 석우삼의 제13로군도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1차 양광사변이죠. 이종인 휘하 장발규, 이품선 부대가 호남으로 진격해 연승을 거두지만 무능한 석우삼은 북경으로 진군하다가 거사 2주도 안되어 한방에 아작나 멸망당합니다. 여기에 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는 "9.18사변"이 일어나자 내전 중지와 대동단결에 인식을 같이 합니다. 이렇게 1차 양광사변은 유야무야 되지만 36년 6월에 호한민이 사망하고 장개석이 광서, 광동을 중앙으로 복속시키려하자 또한번 진제당, 이종인, 백숭희 등을 중심으로 "항일반장"을 외치는 2차 양광사변이 일어납니다. 양측은 호남성에서 첨예하게 대립하지만 일본의 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양측은 다같이 망할 것이 뻔한 무력충돌보다 협상으로 타협하여 9월에 광서성은 중앙에 복속키로 선포합니다. 어쨌든 이 4번의 대결을 끝으로 장개석 최대의 적수였던 이종인은 장개석에게 완전히 굴복하게 됩니다.
이 직후 12월 12일에 "서안사변"이 일어나고 다음해 37년 7월 7일 노구교 사변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이종인은 백숭희, 독일 고문 팔켄하우젠장군과 함께 "유격전"과 "지구전"을 통한 승리를 주장합니다. 이는 모택동이 주장했던 내용과 유사했죠. 그러나 장개석은 진지전을 고집했고 초반에 상해-남경전역에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종인은 중국군 주력중 하나인 제5전구(화중일대, 병력 50개사단)사령관 겸 안휘성 주석으로 서주방면과 진포철도(남경과 천진을 연결하는 철도로 중국을 관통하는 3대 철도중 하나)의 방어를 맡았고, 부총모장인 백숭희와 함께 뛰어난 지휘력으로 침공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며 북중국에서의 진격을 지연시킵니다. 특히 1938년 2월 태아장전투에서는 일본군 2개사단(제5사단, 제10사단)을 상대로 휘하 광서군 외에 구 풍옥상휘하의 명장인 손연중, 장자충의 서북군과 노한의 운남군, 탕은백의 중앙군 등을 지휘하여 중일전쟁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둡니다.
8월에는 일급상장(4성장군)이자 군사위원회 총참모장이 되었고 39년 12월 중국군 최대의 동계공세때 광서성의 성도인 남녕을 탈환하는등(나중에 여기에 미 공군기지가 들어서는데 44년 대륙타통작전때 도로 빼앗깁니다.) 전쟁기간내내 최일선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항일전을 지휘합니다. 물론 희생도 가장 컸죠.
1941년 중국전선 전황도. 붉은선안이 이종인이 지휘했던 제5전구 구역입니다. 서주에서 밀려서 저렇게 되었다는... ※ 사진출처 : 도해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사
전쟁이 끝난후 46년 9월 국민정부 주석이자 북경 야전군 주임이 됩니다. 그러나 장개석과 이종인 양자는 다시 질시와 반목을 하게 되는데 48년 4월 총통, 부총통 선거에서 장개석은 부총통에 손과를 밀고 이종인에게는 부총통 선거에 나가지 말 것을 종용하지만 이종인은 쌩까고 부총통에 입후보하여 당선됩니다.(손과는 행정원장이 됨) 열받은 장개석은 이종인을 철저하게 바보로 만들기로 하고 5월 20일 남경총통부에서 열린 취임식날 "다들 군복 입고 올거니 당신도 군복을 입고 오라"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막상 군복에 각잡고 행사장에 나갔던 이종인은 자기만 군복입고 남들은 예복을 입고 온 것을 보고 장개석이 자신을 엿먹인 것을 깨닫죠.
그런 장개석도 국공내전에서 연패당하고 만주와 화북, 화중에서 이른바 "3대패전"을 당함으로서 양자강 이북 전역을 상실하자 나락으로 추락합니다. 빗발치는 비난 여론에 마지못해 취임 7개월만인 1949년 1월 총통직에서 물러나고 이종인이 대리총통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이름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장개석은 총통자리에서 물러나도 국민당 총재자리를 쥐고 있었는데 당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체제인 이상 총통이나 주석자리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죠.
이종인은 모택동에게 양자강 이북을 공산당이, 양자강 이남을 국민당이 양분하여 통치하자고 제의합니다. 이렇게 되었다면 중화민국은 남쪽동네라도 차지했을 것이고 이종인도 2대 총통으로서 떠오르는 태양이 되었겠지만, 모택동은 다 이긴 싸움에 그런 재뿌리는 짓을 할 이유가 없었죠. 협상은 결렬되었고 심혈을 기울인 양자강 방어선은 국민당측 배반자들때문에 제대로 저항도 못한채 돌파당합니다. 장개석은 광주로 가지만 이종인은 장개석과 결별키로 하고 자신의 근거지인 계림으로 갑니다. 백숭희가 지휘하는 광서군은 임표의 동북야전군에 맞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방어전을 펼치지만 결국 삼면에서 포위 섬멸당하고 해남도까지 밀립니다. 이종인은 마누라와 둘이서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대만으로 간 장개석은 돌아올 것을 종용하지만 이종인이 거부하자 탄핵안을 제출하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킵니다. 장개석이 다시 총통자리에 복직하고 진성이 2대 부총통이 됩니다.
그러나 트루먼 역시 이종인에게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국가원수로서 대우하지도 않는등 완전히 찬밥취급합니다. 그들로서는 이종인은 단지 패망하는 나라를 버리고 망명한 지도자에 불과했으니까요. 이종인은 "이종인 회고록"을 써서 책 팔아먹고 살다가 65년 7월 20일 대륙으로 망명합니다. 그가 북경에 도착하자 모택동과 주은래가 직접 나와 영접했다고 합니다.(이종인은 장개석과 함께 반공의 주축이었고 서로 꽤나 쌓인 것이 많았을텐데 역시 대륙인들이 꽤나 대인배인듯...-.- 승자의 아량인지)
한때 중화민국 총통이었던 그의 망명은 대만에게는 정치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는데 "배신자", "변절자"라고 맹비난을 하지만 이종인은 "그래. 그래"라며 고개만 끄덕이니 주변사람들은 영감이 망령이 들었나, 라고 비웃었다는군요.
그리고 69년 1월 30일 북경에서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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