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 근대사] 군벌시대 6화 "신강소비에트공화국을 추진했던 성세재"

구름위 2013. 12. 2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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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산서왕"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신강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양반도 염석산만큼이나 제멋대로에 잔혹하고 배신의 달인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위인입니다. 또한 말로 역시 비슷하였죠. 어떤 의미에서는 한술 더 떴던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듯.

 

 

 

"신강왕" 성세재(1892 ~ 1970) ※ 출처 : 위키백과

 

지금도 티벳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화약고라고 불리우는 신강은 옛 돌궐족의 후예인 위구르족들의 나라입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는 무슬림이며 수천년간 중국과는 별개인 독립국가였으나 몽골족에게 정복당하고 청나라에 와서 1759년 건륭제에 의해 평정되어 복속됩니다. 그렇다해도 몽골이든 청이든 한족의 나라가 아니니 한족들에게 정복당한 일은 없었죠.

 

  

 

처음 정복당했을때는 지역 부족장들을 중심으로 자치권을 인정하는 간접통치을 했으나 위구르인들의 반란이 계속되자 1884년 11월 이지역의 반란을 토벌한 좌종당의 건의로 자치권을 빼앗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의 통치를 받는 중국의 일개성으로 완전히 복속됩니다.(성도는 우루무치)

 

신해혁명이후 청나라가 망하자 다른 성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신강성장 겸 독군이었던 양증신 역시 중앙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는 위구르족을 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족군벌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죠. 이후 원세개가 정권을 잡자 여기에 충성했다가 장개석이 북벌로 천하를 통일하자 1928년 6월 11일 다시 남경정부에 복속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양증신은 그 직후 부하이자 군무청장인 번요남에게 암살당하고 신강성은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집니다. 번요남은 다시 정무청장이었김수인에게 토벌당하죠. 김수인 역시 33년 4월 12일 러시아계 백군들의 반란으로 쫓겨나 소련으로 망명했고(적백내전에서 망명한 러시아인들이 먹고 살려고 중국에서 군벌들의 용병으로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걔네들이 뭐 딴거 할 게 있겠습니까.) 이 과정에서 정권을 잡은 것이 성세재였죠.

 

 

신강성에서 폭정을 하다 쫓겨난 김수인(1879 ~ 1941).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남경으로 가서 그기서 죽습니다. ※ 출처 : 위키백과

 

성세재는 원래 신강성출신이 아닌 만주 요녕성 출신입니다. 솔직히 중국땅에서 서로 끝과 끝인 관계이죠. 성세재는 소시적에 상해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후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유학하고 다시 중국 3대 군사학교였던 운남강무당에서 군사교육을 받은후 고향땅으로 돌아가 당시 한창 잘나가던 장작림의 봉군에 입대합니다. 장작림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곽송령의 추천으로 다시 일본으로 유학가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합니다.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아나간 것이죠. 그런데 1928년에 귀국했는데, 돌아오니 보스 장작림은 폭사해 저 세상갔고 봉군은 한물간 상태였죠. 그는 남경으로 가서 광동군벌이자 장개석의 측근인 주소량의 소개를 받아 국민혁명군 총사령부에서 상교(우리의 대령에 해당) 참모에 임명됩니다.

 

※ 국민혁명군 계급체계에 대한 글 : http://blog.naver.com/altopia/10045886772

 

그러나 야심가였던 그로서는 그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고 2년뒤인 1930년, 당시 신강독판인 김수인이 널리 인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머나먼 서역땅까지니다. 그리고 등용되어 신강군관학교의 교관 자리를 얻습니다. 

 

 

삼국지에서 종종 재야무장이 뜬금없이 나타나 등용해달라고 매달리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그 놈이 뒷통수를 치기도 한다는...-.- 

한편, 중원대전이 끝난후 장개석은 점차 변경으로 눈을 돌려 그동안 중원의 혼란으로 풀어져 있던 변경땅들을 중앙으로 다시 복속시키려고 합니다.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과거 청나라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것이었죠.

 

따라서 먼저 청해성, 감숙성 등을 복속시키고 뒤이어 마가군의 일원이자 감숙성장인 마중영을 국민혁명군 제36군 군장으로 임명한 후 1932년 이들을 앞세어 신강성을 침공합니다. 당시 신강성은 도처에서 위구르족의 반란에 직면해 있었는데 마중영군 6천명의 공격을 받아 성도인 우루무치까지 포위당합니다. 그러나 성세재가 신강군을 지휘하여 마가군을 연파합니다. 다음해 1월 마중영휘하의 마세명이 재차 공격하지만 결국 후퇴하죠.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보여준 성세재를 김수인은 자신의 참모장으로 삼고 군권을 맡기지만, 맡자말자 그는 1933년 4월 12일 진중과 손을 잡고 백러시아군을 동원해 쿠테타를 일으킵니다.(이른바 "4.12사건") 그리고 성세재는 진중을 비롯해 쿠테타 주도 세력들을 반란죄로 몰아 모조리 총살하고, 또한 자기를 지지했던 구 동북항일의용군 지휘관 정윤성 역시 반란죄로 총살하고 의용군을 해산시킵니다. 한마디로 이용만 하고 뒷통수를 친 것이죠. 이로서 성세재는 모든 잠재적 라이벌들을 제거하고 신강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11월에는 위구르 독립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켜 신강성 동쪽에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건국하고 또 마가군의 공격을 받아 참패를 당하자 성세재는 소련의 출병을 요청합니다. 당시 신강은 중국의 혼란을 이용해 소련이 경제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성세재의 요청으로 소련은 본격적으로 신강에 군사적 개입을 시작합니다. 소련은 홍군 제8단을 파병하여 마중영군을 격파하고 이어서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공격해 건국 3개월만인 34년 2월에 멸망시킵니다. 이 소련군은 이때부터 43년까지 우루무치에 주둔하여 상전 행세를 하며 온갖 간섭과 압력을 가하죠.

 

이렇게 성세재는 소련의 힘을 등에 업고 신강을 반독립된 자신의 왕국으로 만듭니다. 남경정부에서 임명한 신강성장 유문룡을 강제로 연금시키고 주서지를 허수아비 성장으로 세웁니다.

 

성세재는 철저하게 친소적인 정책을 취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실상 반식민지나 괴뢰정권과 다름없었습니다.

신강 도처에는 스탈린의 초상화가 성세재의 초상화와 나란히 걸리죠 또한 각종 소련제 물품들이 대량 수입되었고 막대한 차관(35년~37년간 750만루블)이 제공되었습니다. 이 돈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한편, 소련군이 신강의 주요지역에 주둔하고 정부부처와 각 행정기관의 고문으로 들어옵니다. 성세재의 신강발전 3개년 계획을 적극 지원합니다.

 

 

이덕분에 신강의 유전과 은광 등 지하자원이 개발되고 근대화된 공장과 도로가 건설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신강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소련과 성세개 정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무역과 관세에서도 일방적으로 신강에게 불리했고 신강의 물품은 싸게, 소련의 물품은 고가에 수입해야 했습니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철저하게 예속된 관계였습니다. 이는 일본의 강압에 의했던 대한제국과 달리 권력자인 성세재가 오로지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해 매국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죠. 여기다 40년 11월 26일에는 50년 유효기간으로 "신강조차조약(또는 주석조약이라고도 함)"을 체결합니다. 소련이 신강의 영토내에 있는 모든 주석광산에 대한 조사, 채굴,  사용에 대한 각종 권리와 면세특권을 부여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소련군을 진주할 수 있는 권리도 얻습니다. 신강성정부는 아무런 간섭도 할 수 없으며 채굴된 자원의 5%만을 신강성정부에 납부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의 괴뢰나 다름없는 성세재는 중국에는 "3대 정치세력이 있다"라며 국민당, 공산당, 그리고 자기가 있다고 호언합니다. 또한, 자신은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 모택동과 함께 "세계 6대 반파시스트 지도자"라고 자처하죠. 이쯤되면 정신에 문제가 좀 있다고 해도 좋겠죠.

 

성세재는 소련에게 더욱 잘 보이려고 38년 8월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과 몰로토프를 만납니다. 여기서 자신이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신강성을 "모범적인 소비에트 정권"으로 만들겠으니 적극 도와달라고 온갖 아첨을 떨죠. 물론 스탈린은 "좋아~ 아주 좋아~"라며 찬성합니다. 그래서 당시 대장정을 끝내고 연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중공중앙은 맹일명, 임기로 등 간부들과 홍군부대를 파견합니다. 이들은 성세재정권과 공산당간의 통일전선 구축과 정부내 주요 요직을 맡습니다. 37년 7월에는 팔로군 대표소가 우루무치에 설립됩니다. 성세재가 공산당에게 더 많은 간부와 지원을 요청하자 38년초 모택동은 이 "충직한 공산주의자"동지를 위해 동생 모택민을 보내 신강성의 재정을 맡도록 하고 이후에도 여러차례 다수의 주요 간부들을 파견합니다. 모택민은 신강성 재정청장과 신강중앙은행을 맡아 신강성의 재정과 화폐를 개혁하죠.

여기에 더해서 더욱 충성경쟁을 하겠답시고, 41년 1월에는 몰로토프에게 편지를 보내 "신강을 중국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신강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스탈린과 모택동의 x꼬라도 빨아줄 것같이 하던 성세재는 또한번 남의 싸다구를 날립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신강에 더이상 신경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성세재는 나름 세상 돌아가는 것을 계산하고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립니다.

 

"더이상 소련은 내 뒷배가 될 수 없을 것이며 나를 돌봐줄 새로운 형님이 필요하다. 오늘부터는 삼민주의를 공부하고 장개석형님을 모시겠다"

 

그리고는 어느날 갑자기 소련과 공산찬양자에서 철저한 골수 반공분자로 돌변합니다. 성세재 넷째동생 성세기가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지자 성세재는 이를 빌미로 "범인은 너다!"라며 공산당에게 화살을 돌리고는 모택민을 비롯해 신강성내 소련과 중공측 인사 300명을 즉각 체포합니다. 그리고 모조리 처형하죠.

 

 

모택동 동생 모택민. 모택동의 형제는 5남 2녀였는데 모택동외에 천수를 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모택민은 38년 2월에 신강으로 파견되어 재정과 화폐개혁, 건설, 위생 등 각종 사업을 추진했으나 성세재의 배신으로 42년 9월 17일 체포되어 10일뒤에 처형당합니다. 얼굴은 모택동과 닮은줄 모르겠는데 헤어스타일은 똑같네요. 집안내력인가?

 

※ 출처 : http://hljxinwen.dbw.cn/system/2011/06/09/000364119.shtml

 

당시 장개석은 중앙정부에 매우 반항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던 성세재가 갑자기 자기에게 귀속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매우 의심합니다. 이 여포보다 더 배신의 달인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고 당장은 일본과의 전쟁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갈아치울 생각만 하죠. 자기가 달려가면 당장 두팔 벌려 "내 품에 안겨"라고 할 줄 알았던 장개석이 어쩡한 태도로 나오자 성세재는 다시 소련에게 추파를 던집니다.

 

그러나 소련 역시 자신을 이용하려고만 든다고 판단한 그는 장개석에게 반성문을 보냅니다.

 

"신강의 독립은 결코 제가 원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강압에 의한 것이며 강제로 자신들이 사전에 준비한 조약에 사인을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저는 그 조약원본을 수정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소련은 허락하지 않았고 또한 외부에 알려져서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소련은 철저하게 제가 중앙과 접촉하는 것을 막았기에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뻔뻔한 소리를 애처롭게 적어서 "나쁜 것은 소련과 공산당이고 나는 어쩔 수 없었다"라고 변명을 하고 위에서 언급한대로 모택민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을 죄다 처형하자 장개석은 일단 용서해주기로 합니다.

 

당시 국민정부 참모총장인 하응흠은 장개석에게 "일단 성세재의 지위를 인정해주고 신강을 회복한 연후에 점차적으로 신강성을 중앙에 복속시키고 변경의 군비를 강화한 다음 필요한 모든 준비가 끝난 뒤에 이 자를 쫓아내자"라고 건의합니다. 하응흠의 건의에 따라 장개석은 신강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합니다.

 

1. 제42군을 신강으로 파견해 안서옥문에 진주시키면서 우루무치의 소련군 제8단을 견제한다.

2. 신강의 외교권을 중앙으로 회수하여 신강에 대한 외교를 정상화한다.

3. 신강내 공산당을 숙청한다

4. 소련군대를 신강에서 철수시킨다.

5. 그 다음에 성세재를 그대로 둘지 안둘지 생각한다.

 

한편, 스탈린 역시 성세재에 대한 신뢰를 버립니다. 성세재가 소련에게 추파를 던졌음에도 스탈린은 신강문제로 중-미간의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또한 성세재가 지금까지 한 행동을 보건대 더이상 신뢰할 수 없음을 철저히 깨닫습니다. 소련주중대사 파뉴쉬킨은 장개석에게 "우리는 더이상 성세재를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소련의 양해를 구했다고 판단한 장개석은 드디어 성세재를 제거하기로 합니다. 도치악휘하의 제42군 3개사단이 우루무치에 진입하고 신강성 정부요직에는 국민당에서 파견된 간부들이 차지합니다. 성세재는 마지막 발버둥을 치면서 스탈린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거부당하죠. 장개석은 성세재에게 국민정부내에 한자리 마련해줄테니 중경으로 오라, 라고 제안합니다. 모든 권력을 잃어버린 성세재로서는 더이상 저항할 여지가 없었죠. 44년 9월 반강제로 중경으로 가면서 그의 "신강왕"으로서의 인생은 막을 내립니다. 이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하자 대만으로 가서 염석산처럼 "신강 10년 회고록"같은 책이나 쓰며 말로를 보내죠.

 

한편, 44년 11일 일리, 타청, 알타이지구에서 위구르족의 반란이 일어나고 또다시 동투르키스탄공화국 독립이 선포됩니다. 장개석은 이들과 협상하여 서로 싸우지 않고 중앙에 복속하여 "신강성연합정권"으로서 자치권을 인정하죠.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우세해지고 신강으로 쳐들어오자 신강성장 부르한은 중공에 무혈 투항을 결정합니다. 부성장 이사 유스프 알프테킨을 비롯해 반대자들은 터키로 망명하죠. 이로서 신강성은 완전히 중공에 복속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죠.

 

 

봉신연의에서 나오는 신선들이 사는 산 곤륜산이 신강성에 실제로 있다는군요..--

※ 출처 : http://cafe.daum.net/pzpf-2/N8nw/35?docid=1KhHk|N8nw|35|20111122135009&q=%C0%A7%B1%B8%B8%A3

 

지금의 우루무치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