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5화 "산서의 토황제 염석산"

구름위 2013. 12. 2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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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화는 "산서왕" 염석산(1883~1960)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배신과 남 뒷통수 까기를 밥먹듯 하던 군벌시대에서도 그야말로 궁극의 경지라 할 만한 인물이 바로 이 양반입니다. 앞화에서도 이미 다루었지만 그에게는 진정한 친구도, 적도 없으며 오로지 자기가 살아남는 것과 기반을 지키는 것만이 최우선이었고 어떤 치사하고 비열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허황된 망상보다 철저한 현상유지에 목표를 두고 승자의 편에 서는 것만이 살 길, 이라며 탁월한 생존본능을 보이며 별로 큰 욕심 안 부리고 적들과 타협하고 절충하여 1911년부터 1949년까지 38년간 산서성에서 장기집권합니다.

 

그는 주요 군벌들중에서 가장 세력이 약했습니다. 그럼에도 손잡았다 뒷통수 까기를 반복하며 어느 군벌보다도 가장 오래 살아남았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공산군에게 패하여 모든 것을 잃은채 장개석 따라 대만으로 가서 책이나 쓰며 조용한 여생을 보내게 되죠. 어쨌든 패망하고 비명횡사하는게 태반이었던 군벌들중에서 그래도 천수를 누린 몇 안되는 사람중에 한명입니다. 바퀴벌레에 맞먹는 끈덕진 생존력이 그의 특징. 그래서 별명이 "불도옹(오뚜기)"였습니다.

 

염석산은 산서성 출신으로 청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가서 보병과를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청군에 들어간후 고속승진을 거듭해 산서독군(성의 군사령관)이 되어 군 개혁과 신식육군 창설에 앞장섭니다. 또한, 당시 여타 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반청운동에 동참하였고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 무창에서 신군 봉기가 일어나자(신해혁명) 이에 동조하여 휘하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켜 산서성 독립과 청에 대한 불복종을 선포합니다.  

 

청나라가 망하고 원세개가 들어서자 다시 충성을 맹세하고 알아서 군대를 감축함으로서 원세개의 미움을 받지 않고 기반을 유지하죠. 그러나 원세개가 죽자 라이벌인 진북진수사 공경의 병력을 강제로 자기 휘하에 넣고 산서성장인 장발서를 쫓아내고 자기가 산서성장이 됩니다. 이때부터 사실상 자신만의 킹덤을 세우게 되죠. 산서성은 북경의 북양정부에 형식상 복종하면서 간섭은 받지 않는 반독립된 상태였습니다. 이런 염석산의 고립주의, 불간섭 주의를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과 빗대어 소위 "산서 먼로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는 장작림, 오패부같은 야심이 차고 넘치던 여타 대군벌들과 달리 영토 확장에 나서지 않고 산서성 하나 지배하는데에만 만족합니다. 사실 그의 밑천인 산서성은 지금도 그렇지만 농지가 척박하고 근대화된 공장도 거의 없어 중국내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중의 하나입니다. 자체 세수도 굉장히 적고 재정자립도가 20% 미만인지라 중앙정부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습니다. 북경을 좌지우지하는 대군벌들 바로 옆에 끼여 있는지라 영토 확장은 커녕 살아남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었죠.

 

따라서, 한창 옆동네에서 단기서, 오패부, 장작림 등 쟁쟁한 대군벌들이 북경을 놓고 치고 박고 싸울때 그는 중앙에 대해 적당히 처세술을 부리며 산서성의 근대화와 재정개혁, 군의 근대화를 위해 내치에만 집중합니다. 광공업 진흥을 위해 태원에 대규모 공장과 무기공장을 건설하고 조세제도에 대해서도 개혁을 시도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통치는 일반 백성들에게 굉장히 가혹했고 가렴주구와 높은 세금으로 원성이 자자합니다. 

 

염석산은 농민들의 토지를 대량으로 빼앗아 소작을 주고 여기다 소작 보증금을 뜯고 고리대까지 합니다. 아편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엄금했지만(그래도 필놈은 다 피었음) 살림이 쪼달리자 "진수재정정리처"라는 별도 부서까지 만들어 직접 판매하여 돈을 벌기도 합니다. 또한 성정부 지출의 80%이상이 군사비였습니다. 이건 뭐 강성대국을 꿈꾸는 김정일정권보다 더 하죠. 라서 변경에는 기아에 강도와 비적들이 창궐하죠. 물론 그시절에 염석산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산서성이 다른 동네보다 더 산간오지에 가난한 동네인지라 백성들의 어려움은 몇배나 가중되었습니다. 나중에 남쪽 동네에서 쫓기던 모택동의 홍군이 1만km의 장정끝에 이 동네로 들어온 것도 워낙 치안이 극악이고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 불만이 높아 공산당이 뿌리 박기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원에서 패권을 놓고 벌어지는 용호상박의 전쟁에 염석산은 산서성의 문을 꽉 잠군채 쇄국정책을 펼치지만 흥선대원군시절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군침흘리는 군웅들의 마수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1926년 장작림-오패부 연합군과 풍옥상간의 소위 "직풍봉전쟁"이 발발하자 풍옥상은 산서성을 비롯해 서북 전역을 장악하여 기반을 강화하려고 합니다. 장지강의 국민군 제1군이 장가구에 진을 치고 산서성을 포위하고 침공합니다. 소련군의 장비로 무장하고 풍옥상에 의해 엄격히 훈련받은 국민군에 비해 염석산의 晉軍(산서성이 춘추시대 진나라가 있던 곳이라 산서군을 진군이라 통칭)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라 도처에서 밀립니다. 이때 북경 서북쪽의 남구에서 장작림-오패부 연합군이 국민군을 포위 공격하여 송철원군을 괴멸시키고 찰합이성의 연경까지 진격합니다. 덕분에 염석산은 한숨 돌린후 추격해 수원성의 일부를 점령하죠. 염석산이 처음으로 산서성 밖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석우삼의 국민군 제6군을 비롯해 다수의 부대가 염석산에게 투항하여 세를 불립니다.

 

그러나 곧 장개석의 북벌군이 군벌군대를 격파하며 북상하자 염석산은 피아간의 전력을 저울질한후 당장 깃발을 바꿔달고 장개석에게 붙습니다. 그리고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 사령관이 됩니다. 같은 시기 풍옥상도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사령관이 되었죠. 어제까지 적이었다가 오늘은 같은 편이 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이 군벌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70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서쪽과 남쪽에서 파죽지세로 밀고들어오는 북벌군에 의해 장작림, 오패부, 손전방 3대 군벌이 연합한 "안국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채 붕괴됩니다. 염석산은 풍옥상, 하응흠과 연계해 직예성을 침공해 장가구와 보정을 점령하고 북경 남쪽으로 진격합니다. 장작림은 장학량, 양우정의 주력부대를 집결시켜 북경에서 결전을 각오하지만 중과부적을 깨닫고 만주로 돌아가다가 아시다시피 테러로 비명횡사합니다.

뒤이어 염석산의 제3집단군 제1군이 북경에 진주하죠. 6월 11일 신강성장인 양증신이 복종을 선언하고 반년뒤인 1928년 12월 29일 장학량의 "동북역치"선언으로 신해혁명 이래 분열되었던 중국은 장개석과 국민당정권을 중심으로 20년만에 통일을 이룩합니다.

 

북벌전쟁에 동참한 댓가로 염석산은 오패부와 장작림이 보유했던 방대한 영토를 획득하여 산서성외에 수원성과 직예성, 찰합이성등 그가 꿈에 그리던 북경, 천진 등 화북의 노른자리를 죄다 차지하죠. 산서성 촌놈이 그야말로 전국레벨의 대군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앞화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장개석의 북벌이 구식군벌들의 연합군대이었고 이들 모두 패업을 꿈꾸는 인간들인 이상 평화와 공존도 일시적인 것이고 새로운 대립과 전쟁은 피할 수가 없었죠.

 

장개석은 진정한 통일을 위해 난립된 군벌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이들을 중앙정부에 복속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군벌 군대 역시 "사병"이 아닌 "국군"이 되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민간 주도가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도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앞화에서도 언급했었지만, 장개석은 1928년 7월 11일 탕산회의에서 군축을 제기하고 다음해 1월 1일 정식으로 남경에서 편견회의를 개최합니다.  

 

전국을 군벌들이 점령한 구역별로 8개 편견구로 나누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제1편견구 : 장개석의 제1집단군(복건성, 절강성, 강소성, 안휘성, 강서성) 

제2편견구 : 풍옥상의 제2집단군(산동성, 하남성, 섬서성, 감숙성, 청해성, 영하성)

제3편견구 : 염석산의 제3집단군(찰합이성, 직예성, 산서성, 수원성)

제4편견구 : 이종인의 제4집단군(광동성, 광서성, 호남성, 호북성)

제5편견구 : 장학량의 동북변방군(길림성, 흑룡강성, 열하성, 봉천성)

제6편견구 : 사천, 운남, 귀주, 신강

제7편견구 : 해군

중앙편견구 : 중앙직할부대 

 

또한 전국에 산재한 220만에 달하는 병력을 80만명으로 60%이상을 감축하고 관리들의 봉급을 2할씩 삭감합니다. 모든 해공군은 재편되어 중앙군에 복속되며 일본을 "가상敵"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총세입 4억 5천만원의 78%에 달하는 군비를 40~45%(1억 9200만원)이내로 제한키로 합니다. 기존의 군벌중심의 집단군 체제를 없애고 중앙의 통제를 받는 일원화된 지휘체제로 통일시키고 지방 병기창의 임의 제조 금지, 모든 무기와 급료 등 군비는 중앙에서 지급, 군벌의 사사로운 세금 징수도 금지시킵니다. 

 

한마디로 군벌들의 힘을 빼앗고 중앙정부가 통제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중국의 통일과 내전 종식, 중앙정부의 권위 강화라는 측면에서는 올바른 것이나, 자기 동네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이 사는 군벌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죠. 여기다 8개 편견구중 제1편견구와 중앙편견구, 제6편견구, 해공군은 모두 장개석이 차지하여 8개 편견구중 절반을 그가 독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장개석 자신이 군벌이면서 또한 중앙정권 역시 그가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군벌들은 장개석에게 반발하면서도 정작 자기들끼리도 서로 견제하고 질시합니다. 풍옥상은 일률적인 군대 감축을 반대하고 질에 의한 감축을 주장합니다. 즉 잘 훈련되고 무장된 부대는 재편하고 오합지졸 부대는 해산시켜 제1, 2집단군은 12개사단으로 개편,  제3, 제4집단군은 8개사단으로 감축하자고 주장합니다. 염석산은 여기에 반대하고 현재의 각 집단군 규모에 맞추어 일률적인 감축을 주장합니다.

 

어쨌든 힘없는 조무래기 군벌들이야 그렇다치고 풍옥상, 염석산, 이종인 등 대군벌들은 반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군대 감축이 자신들의 힘을 축소시키는 것도 있지만, 당시 생계형 용병들이 대부분인 병사들을 해고하려면 퇴직금이라도 몇푼 쥐어줘야 하는데 워낙 쪽수가 많다보니 그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쫓아내면 얘네들이 어캐 나올지는 불보듯 뻔하죠.(월급도 몇달씩 체불되기 일쑤였음) 그럼에도 장개석은 약속했던 군비도 제대로 주지 않고 "병력을 다이어트하라!"라는 엄명만 내립니다. 현실적으로 그걸 모를 리 없는 장개석이 자기 세는 오히려 불리면서 다른 군벌들만 죽으라는 얘기나 다름없었죠.

 

결국 군대 축소 자체는 분명 절실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군벌들간의 복잡한 이해관계때문에 제대로 실행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한계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80만명이라는 숫자도 당시 중국의 경제 규모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지만 무턱대고 줄일 수도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병사 대부분은 농토를 잃고 유랑하는 실업자, 비적들이 모병에 응모하여 병사가 되었는데 이들을 해산시키면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었죠. 무기도 있겠다, 조직력도 있겠다, 그대로 비적으로 돌아가 한탕하기 딱 좋은 시츄에이션이죠. 안그래도 이미 도처에 늘린 것이 비적인 시대에 말이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장개석은 편견에 성공하지 못했고 29년부터 30년까지 대군벌들끼리 대규모 내전을 거치면서 흐지부지되어 버립니다.(자세한 것은 앞화에서 설명했으니 생략)

 

내전은 결국 장개석의 승리로 끝났지만 풍옥상만 몰락했을뿐, 염석산을 비롯한 다른 군벌들은 장개석에게 패했음에도 세력은 그대로였고(다소 줄기는 했지만) 군대의 숫자는 줄어들기는 고사하고 되려 더 늘어났습니다.(200만에서 400만으로) 장개석은 다른 군벌에 비해 군사적 우위는 차지했지만, 이들을 완전히 제거하기에는 아직 자신의 세 부족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군벌들 역시 장개석을 보스로 인정하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이 내전은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한채, 양측 합해 30만 가까운 사상자에다(중앙군 10만, 반란군 20만) 중국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고 전쟁 재원 확보를 위해 통화를 남발하는 등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군벌들도 극도의 재정적자에 시달리게 됩니다. 염석산 역시 중원대전전까지 산서성의 재정을 매우 알뜰하게 사용하여 그런대로 재정 균형을 맞추었는데 중원대전이후 거의 파탄직전에 직면합니다. 이 내전은 이후 일본의 침략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는 중대한 이유중의 하나가 됩니다.

 

내전에서 패하자 염석산은 일시 하야를 선언하고 만주땅 대련으로 잠깐 피신했다가 장개석과 타협하고 다시 돌아옵니다. 35년에는 대장정에 쫓긴 모택동 일당들이 산서성과 섬서성 북쪽의 변경땅 오지에 자리를 잡습니다. 염석산은 장개석의 "초공"에 적극 호응해 공산군이 황화를 넘어 산서성으로 들어오자 중앙군, 서북군, 동북군과 연계해 이들을 토벌하죠.

 

그러나 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이 일어난후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모택동-주덕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이자 제18집단군으로 재편되었고 이들은 염석산의 지휘를 받게 됩니다. 염석산은 항일을 위해 공산당과 적극 협력키로 하고 "희생구국동맹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자기가 회장이 됩니다. 또 주은래가 그의 정치고문을 맡습니다. 

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염석산은 중국군 일급상장(4성장군)이자 제2전구 사령관을 맡아 북중국에서 일본의 공세에 맞서게 됩니다. 산해관을 돌파한 일본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한달만에 북경, 천진을 장악하고 9월에는 수원성의 대동을 점령하고 산서성까지 위협합니다.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찰합이성과 수원성을 포기하고 산서성 북쪽의 흔구에 병력을 배치하고 결전을 준비합니다. 흔구는 산서성의 성도 태원을 방어하는 최후의 요충지였습니다. 여기에는 휘하 약 8만의 산서군외에 위립황 이급상장(3성장군)의 중앙군, 서북군과 8로군 등 11개군 20개사단 토탈 20만에 달합니다.

 

 

< 10월 13일 일본군 제 5사단을 비롯해 1개 사단, 2개 여단으로 흔구를 공격하여 21일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공산당이 자랑하는 임표의 평형관대첩은 이 전투의 단지 한부분에 불과하며 팔로군은 보조전력으로서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일본군은 제20사단과 제109사단을 추가로 투입하여 태원 동쪽의 낭자관을 공격해 돌파함으로서 그때까지 잘 싸우던 국민당군의 방어선은 결국 무너졌고 11월 9일 태원은 함락됩니다. 산서성 거의 대부분이 함락되고 염석산은 잔존병력을 이끌고 서쪽의 임분으로 후퇴합니다. 태원은 중국 파견군 북지나 방면군 제1군 사령부가 설치되죠. 

 

전쟁이 교착상태가 되자 염석산은 일본군과 밀약을 맺고 상호 불침범키로 합니다. 전쟁에 지친 지역 군벌들은 장개석의 명령을 어기고 일본군에게 몰래 뇌물을 먹인다음 "우리말고 옆동네를 공격하라"따위의 매국노 짓을 합니다. 서로 도와서 싸워도 부족할 판에 내만 살자는, 실로 한심한 짓이죠. 게다가 점차 국공의 관계가 악화되고 장개석의 방침이 반공으로 바뀌자 염석산은 적극적으로 공산당 토벌에 나섭니다. 대표적인 것이 39년 12월 자기가 회장으로 있는 진보성향의 "희생구국회"와 "산서청년항적결사대"를 공격해 말살시켜 버리는 "진서사변"을 일으킵니다. 그야말로 비열의 극치였죠. 이때문에 공산당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됩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서 중일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염석산은 태원으로 돌아오죠. 그러나 곧 국공내전이 발발합니다. 염석산은 산서성내의 공산당을 토벌하는 한편, 위립황, 호종남 등 중앙군과 연계해 섬북의 연안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49년에 오면서 국민당군이 이른바 3대 전역(요심, 회해, 평진)에서 대참패를 당하고 화북 전역을 상실하고 장개석은 하야합니다. 염석산의 산서성 역시 섭영진, 서향전의 화북병단의 공격을 받아 49년 3월 태원이 함락됩니다. 태원전투는 국공내전 말기 국민당군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였는데 수천명의 일본군 투항병들까지 염석산의 진군에서 싸웁니다. 

 

염석산은 광주로 튄 다음 장개석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가죠. 이종인, 풍옥상과 달리 너무 수구적이었던 그는 공산당에게 투항했다가는 바로 인민재판감이었죠. 그는 국민당 행정원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으나 대만으로 건나간후 장개석은 염석산이 더이상 필요가 없는지라 국민당 중앙평의회 위원이라는 명예직만 맡깁니다.

"대동의 길", "300년의 중국"같은 책이나 쓰며 조용히 살다가 1960년 7월 22일 77살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올라갑니다. 수많은 군벌들이 비명횡사하거나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는 점에서 나름 천수를 누린 것이죠.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20년대에 염석산 휘하 비행단에 있기도 했죠. 이리저리 우리 독립운동가와 연계된 사람들이 많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