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2화 "천하를 얻을뻔한 사나이" 장작림

구름위 2013. 12. 2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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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은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북양군벌과 양자강이남의 운남, 귀주, 광서 등을 배경으로 한 지방의 남방군벌이죠. 북양군벌은 이홍장과 원세개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데 청말 청일전쟁 이후 만들어진 신식군대인 "신건육군"에서 비롯됩니다. 이 신건육군이 원세개 직속이었죠.(원세개가 이 신건육군을 북양군으로 부르면서 이쪽 출신들을 북양군벌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북양군벌은 원세개사후 풍국장의 직계와 단기서의 환계로 분열됩니다. 후의 대군벌이 되어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오패부, 풍옥상, 손전방은 이 직계 군벌들이죠.  

 

한편, 장작림의 봉계는 엄밀히 말하면 원세개 직속 군벌은 아닙니다. 장작림은 원세개에게 충성하여 후원을 받았지만 전적으로 제 힘으로 동북3성을 장악했죠.(온갖 비열한 책략과 협박으로) 

 

이번 편은 "산도적에서 대원수로, 천하를 얻을뻔한 사나이" 장작림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진을 보면 평범하고 순박한 인상입니다만, 그 카리스마가 그야말로 권왕 라오우에 맞먹는 사나이.(정말로!)

 

 

 

"내 인생에 후회는 없다" 권왕 라오우 어록. 이 양반의 엄청난 포스와 카리스마는 주인공 켄시로조차 능가하죠. 이웃열도에서는 이 양반 추모식까지 실제로 열었다는 황당한 소리가...--;;

※ 사진출처 : http://extmovie.com/zbxe/news/812270 

 

장개석이전 수많은 군웅들이 난립했던 혼란기. 최강의 패왕은 "토황제"라 불리며 동북3성을 지배했던 만주군벌 장작림입니다. 한때는 북경과 산동에다 남으로는 상해, 남경까지 세력을 뻗치며 거의 중국 전토의 절반을 지배합니다.

< 붉은색 빗금 위쪽이 죄다 장작림 제국의 최대판도. 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대명출판사 > 

 

장작림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에 칠전팔기입니다. 개뿔도 없는 집구석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한량에 노름꾼으로 노름판에서 "내돈 내놔라"하다가 칼부림당해서 비참한 최후를 당했습니다. 장작림은 어릴적부터 아빠따라 노름판에서 인생을 배웠고 제법 타짜로서의 실력도 있었다고 합니다. 소시적에는 당나귀를 고치며 수의사가 되려고 한 적도 있지만, 이웃마을 사람한테 비적이라고 허위신고 당하는 바람에 동네 쫄따구들 모아서 진짜 수라의 길로 가게 됩니다. 장작상, 장경혜, 이경림, 탕옥린, 오준승 등 대표적인 만주 군벌들 죄다 동네 양아치에서 이 시절에 장작림과 도원결의 맺고 총 한자루로 만주 벌판 누비며 남들 삥 뜯으러 다니죠.(자칭 "녹림대학 마적학과" 출신들이라며 꽤나 자부심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돈 몇푼에 영혼을 쉽게 팔았던 여타 군벌들에 비해 장작림의 봉천군은 서로간의 단결력과 유대감이 상당히 높았습니다.(조폭들의 의리?) 장작림의 리더쉽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청일전쟁 직후에는 청국군에 쫄병으로 들어가 부사관까지 올라갔다가 제대후 고향땅으로 돌아가 동네 치안대장이 되어(그렇게 쓰고 "조폭"이라 읽는다) 100여명의 조직원과 상당한 세를 누립니다. 이때의 무력을 배경으로 관에 편입될 수 있었고 자기 패거리들을 중심으로 구식군대 1개 대대의 대대장이 됩니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하며 승진과 함께 병력을 지속적으로 증강시킵니다. 대총통이 된 원세개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육군중장에 제27사단장이 되었고 그의 부대도 구식 비적단에서 신식육군이 되어 보병 2개여단과 기병 1개여단, 포병 1개 여단, 공병과 수송대대까지 갖추어 만주에서 최강의 무력을 갖춥니다. 병력도 3만에 달해 사단규모를 넘어서죠.

 

 

< 청말 신식화된 기병군인들의 모습  출처 : 오스프리 맨 앳 암즈 >

 

1916년에는 봉천성장 겸 독군(군사령관)이 되었고 라이벌인 풍덕린을 몰아내고 제28사단까지 장악합니다. 그리고 3년만에 권모술수로 길림성과 흑룡강성까지 장악하여 "동북왕"이 됩니다. 이정도까지 되자 그의 야망은 끝없이 커져서 중앙 정계 진출까지 노리게 됩니다. 당시 북경정부는 대총통 서세창은 허수아비였고 단기서의 환계와 풍국장, 조곤의 직계가 정권을 놓고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결국 1920년 7월 10일 "직환전쟁"이 발발합니다. 전투는 10일만에 끝났고 직계가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정권을 장악합니다. 환계는 몰락하죠. 

 

이 직환전쟁에서 장작림은 직계측의 편을 들었고 부하 장작상과 직속 최정예 제27사단을 선봉으로 약 7만의 병력을 파병하여 중앙에 진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직계 수령인 조곤과는 사돈을 맺습니다. 그러나 양측은 당연히 오월동주의 사이다 보니 금새 대립하게 되죠.

 

직계의 실세는 조곤이 아닌 오패부였는데, 일자무식에 난폭한 장작림과는 정반대로 청말 과거시험에 합격해 "수재군벌"이라 불린 이 만만찮은 사나이는 장작림을 제거하고 자신이 천하의 패왕이 되려고 합니다. 1922년 4월 3일 전국 11개성의 군벌 500명을 모아서 장작림 토벌을 선포하고 봉군에 대한 공격에 나섭니다. 봉군도 이에 맞서 대군을 남하시킵니다. 양측의 병력은 직군이 7개사단, 2개 혼성여단 등 약 10만이었고, 봉군은 3개사단, 10개 혼성여단 등 12만명이었습니다. 9일간의 1차 직봉전쟁에서 오패부는 뛰어난 용병술로 봉군을 대파하여 산해관까지 추격합니다. 산도적출신들이 지휘하는 봉군은 전술적으로 매우 무능했고 직군의 강력한 공격에 분쇄됩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쌍방 20만명이 참전했음에도 4~5천명에 불과) 봉군은 3만명이 투항했고 6만명이 싸우지도 않고 도주합니다. 이 시기 쪽수만 많을뿐인 중국 군대의 허약함을 여실하게 보여주죠.

오패부는 산해관까지 진격했으나 일본이 "산해관을 넘지말라"고 협박하자 추격을 단념합니다. 장작림은 한숨 돌릴 수 있었죠. "이기면 관군"이라고 직군이 장악한 북경정부는 장작림의 모든 직책을 파직시키고 봉군의 분열을 획책하지만 장작상, 오준승 등 봉군 지휘관들은 철저히 장작림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서 실패로 돌아가죠. 동3성에서 장작림의 위치는 이렇듯 절대적이었습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쓴맛을 본 장작림은 패전 직후 장학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철저하게 군을 재정비하고 현대화시킵니다. 또 이를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동3성의 경제와 산업을 부흥시킵니다. 

 

봉천시 외곽에 대규모 병기창을 건설했는데 이는 단일공장으로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대 규모였습니다. 연간 대포 150문, 포탄 20만발, 소총 6만자루, 중기관총 1천정에 달했습니다. 또한 해공군도 확충하여 항공기 300대에 2개 함대 군함 21척, 총톤수 3만톤이었습니다. 이는 여타 군벌들을 죄다 합한 것보다도 더 많았습니다.

< 1920년대 말 심양에서의 봉군의 행진 퍼레이드, 출처 : 오스프리 맨 앳 암즈 > 

와신상담하며 철저하게 복수의 칼을 간 장작림은 환계군벌 단기서와 손을 잡았고 또 오패부의 부하인 풍옥상과도 내통합니다. 마지막 황제 부의를 하야시킨 것으로 유명한 풍옥상은 오패부에게 찬밥 신세였는데 좋아라 하며 장작림과 손을 잡습니다.

 

반면, 오패부는 기고만장해진채 보스 조곤을 허수아비 총통에 세우고 남방에 대해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군대를 근대화시키고 내실을 기하는 대신 뇌물과 거듭된 전쟁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상태였습니다. 군대 월급도 주지 못해 사기도 최악이었습니다. 또 사면 팔방이 죄다 적이었죠.

 

1924년 9월 상해 외곽에서 환계 군벌 노영상의 절강성과 직계 군벌 제섭원의 강소성간의 "절강전쟁"이 발발합니다. 이는 제2차 직봉전쟁의 전초전이었죠. 손전방의 협공을 받아 절강전쟁은 노영상의 패배로 끝나고 절강성은 직군에게 점령당하지만, 장작림은 이 기회를 이용해 총공격에 나섭니다. 2년간 절치부심하여 모은 모든 것을 걸고 9월 13일 산해관으로 진격합니다. 병력은 4개 사단, 13개 여단 15만명에 달했습니다. 오패부 역시 토벌령을 선포하고 6개성 11개 사단, 1개 독립연대, 11개 여단, 항공기 70대 등 총 25만명을 동원합니다. 장학량, 곽송령의 제1군이 산해관으로, 이경림, 장종창의 제2군이 열하로 파죽지세로 진격합니다.

 

오패부는 장작림의 남하에 대비해 산해관 일대에 벙커와 요새를 곳곳에 배치하여 봉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공군의 지원을 가지고도 직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오패부는 전방에서 봉군을 붙잡아두는 동안 해군으로 우회해 봉군의 후방에 상륙하여 협공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곽송령이 구문구를 기습 점령하여 산해관의 직군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오패부는 병력 상당수가 남쪽에 붙잡혀 있는데다 돈이 없어 철도로 전방에 증원군을 보내지 못합니다. 게다가 10월 23일 증원부대로 가던 풍옥상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장악하고 오패부를 "역적"으로 선포합니다. 이는 결정타였죠. 오패부는 1만의 병력으로 북경으로 돌아가다가 풍옥상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하고 소수의 잔존부대만 가지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도주하죠. 이로서 제2차 직봉전쟁은 장작림의 완전한 승리가 됩니다.

 

승자가 된 그는 중원의 지배자가 되어 대군을 거느리고 북경으로 진군합니다. 북경은 풍옥상이 장악했지만 세력에서 도저히 장작림에 비할 바가 못 되었죠. 풍옥상은 북경을 버리고 서쪽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작림은 여세를 몰아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야심으로 남쪽으로 진격합니다. 노영상, 장종창이 선봉으로 10만의 병력으로 산동성을 장악하고 이어 상해와 남경, 안휘성까지 장악합니다. 그야말로 중국의 노란자위만을 골라서 차지합니다. 이 시기가 그의 인생에서 그야말로 최대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고만장해진 봉군 지휘관들끼리 서로 질투와 경쟁이 심화되고 특히 장종창의 안하무인적인 통치로 주민들의 반발과 저항이 점점 높아집니다. 장작림과 마찬가지로 비적 출신인 그는 거친 군벌들중에서도 그야말로 꼴통중의 상꼴통이었습니다. 첩이 몇명인지 모르고,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며, 병사들이 몇명인지 모른다하여 "삼불장군"이라 불린 그와 그의 부하들은 돈을 물쓰듯 쓰고 온갖 행패에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결국 봉군은 손전방의 5개성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싸움한번 제대로 못한채 3개 사단이 괴멸되어 쫓겨가죠. 

 

더욱이 25년 11월 23일 곽송령의 반란은 장작림에게 치명타였습니다. 마적 출신으로 장작림과 형님 동생하는 "녹림파"가 대다수였던 봉군에서 곽송령은 중국 육군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습니다. 장학량과 의형제를 맺었고 제2차 직봉전쟁전에는 봉군 근대화를 주도했죠. 곽송령은 민족주의가 굉장히 강한 인물이었는데 봉군내 심화된 암투에다 장작림이 일본의 원조를 받기 위해 온갖 매국적 밀약을 약속한 것을 알고 "장작림 하야와 장학량 옹호"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곽송령의 제3방면군(3개군단 7만명)은 봉군 최강 부대였기에 압도적으로 장작림군을 밀어붙입니다. 그러나 일본 관동군이 개입해 곽군을 공격하고 장작림군을 지원함으로서 곽송령은 한달만에 몰락하죠. 이 과정에서도 장작림은 일본의 협조를 얻으려고 온갖 이권을 약속합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관동군의 분개를 사 결국 폭사당하게 됩니다. 

 

아무튼 곽송령의 반란을 기회로 풍옥상이 북경, 천진을 공격해 장악하자 장작림은 곧장 풍옥상을 공격하는데 철천지 원수인 오패부와 손을 잡습니다. 당시 오패부는 한구에서 장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부하인 손전방의 추대를 받아 14개성 연합군 총사령관이 됩니다. 뭐 말이 그렇지 손전방은 오패부 몰락후 사실상 딴집 살림 차린 상태였고 오패부의 세력권은 하남, 호북, 직예성 정도였습니다.

 

풍옥상은 이들 장작림-오패부-염석산 3개 세력의 협공을 받아 3개월만에 패퇴하고 산간오지인 감숙성으로 철수합니다. 장작림은 다시 북경을 장악하죠. 오패부는 더이상 장작림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천하의 패왕은 장작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최대의 적이 나타납니다. 바로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었죠.

 

1926년 7월 장개석은 손문의 유지를 이어 10만의 병력으로 북벌을 시작합니다. 광서군벌인 이종인에다 호남군벌 당생지, 산서군벌 염석산, 서북군벌 풍옥상도 장개석에게 가세합니다. 장작림은 오패부, 손전방과 손을 잡고 여기에 맞서죠.

  

 

< 북벌직전의 상황. 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대명출판사 >

병력면에서는 오패부의 직군이 20만, 손전방군이 20만, 장작림이 40만으로 도합 80만에 달하여 북벌군에 비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합지졸에다 사기도 낮았고 바로 어제까지 치고박고 싸운 관계에서 공동의 적땜시 마지못해 손을 잡은 것뿐 제대로 협조가 될리가 없었습니다. 오패부가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는데 손전방은 나 몰라라 했고 오패부 자신도 장작림의 지원 의사를 거부합니다. 도와준다는 핑계로 장작림이 영토를 차지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죠. 되려 "우리는 도움 필요 없으니 해군으로 광동성을 직접 공략하라"고 합니다. 서로 순망치한의 관계임에도 이런 것이 이들의 사정이었죠. 10월 10일 오패부의 심장부인 무창을 함락시킴으로서 오패부는 패망합니다.

 

뒤이어 11월에는 구강, 남창으로 진격해 손전방군을 대파합니다. 이렇게 되자 장작림과 손전방은 손을 잡고 소위 "안국군"을 결성하고 장작림이 안국군 총사령관이 됩니다. 27년 2월에는 상해 외곽까지 북벌군이 진격했고 3월에 장종창-손전방 연합군을 격파하고 상해, 남경을 점령합니다. 또 풍옥상의 국민군도 낙양을 점령하고 당생지의 북벌군과 합류합니다. 염석산 역시 부작의를 선봉으로 북경 남쪽에 있는 탁주를 점령하고 북경을 위협합니다.

 

연패당하는 상황에서 동3성으로 철수할 것을 고민하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모두 포기하는 것을 차마 선택할 수 없었던 장작림은 6월 18일 북경에서 스스로 대원수직에 오른 다음 최후 결전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이전의 오패부와 마찬가지로 무리한 영토 확장과 거듭된 전쟁으로 재정이 파탄지경이 되었고(특히 군비를 마구잡이로 낭비한 장종창때문에) 부하들의 봉급조차 몇달채 체불된 상황이다보니 병사들은 싸우지도 않고 투항합니다. 반면 광주와 상해의 자본가들의 지지를 받는 장개석은 어느 군벌보다도 월등한 재정능력을 자랑했죠. 군벌시대의 전쟁은 철저하게 재원 능력에 달려 있었고 병사들은 무조건 돈 많은 쪽에 붙었습니다.

 

27년 4월 7일 장개석은 총공격명령을 내렸고 철도를 따라 북경을 향해 거침없이 북진합니다. 주력인 장개석의 제1집단군이 산동성을 공격하자 장작림은 최정예 부대를 파견해 장개석을 막으려 했으나 산동성을 장악하고 있던 장종창은 자기 세력이 줄어들까 싶어서 결사 반대했고 이때문에 봉군은 대패를 합니다. 북경에서 최후의 결전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지휘관들은 전투 중지와 퇴각을 건의했고 5월 30일 결국 장작림은 관내로 총퇴각키로 결정합니다.

 

일본 요시자와 공사가 장작림에게 매국적 협약을 승인한다면 북벌군을 격퇴해 주겠다고 제의하지만 장작림은 일언지하에 거부합니다. 더이상 일본의 요구를 듣는 것은 설령 북벌군을 격퇴해도 결국 일본의 허수아비가 되는 것에 불과했고 이미 장개석에게 굴복하는 댓가로 동3성의 통치만은 인정받기로 밀약했기 때문이었죠. 

 

격분한 일본 관동군은 열차타고 봉천으로 돌아오는 장작림을 황고둔역을 지나 삼동교에서 폭사시킵니다. 6월 4일 새벽 5시였죠. 장작림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지만 결국 사망합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어이없는 몰락이었죠.

 

 

폭파되어 아작난 장작림 전용 열차.(김정일 미래 모습?) ※ 출처 : http://blog.chosun.com/flatron2/4693925

 

장작림이 죽은 뒤 관동군은 장작림의 총참모장이자 자기들에게 보다 고분고분한 양우정으로 갈아치울 계획이었으나 재빨리 돌아온 장학량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서 그들의 음모는 만주사변때까지 늦춰집니다. 장학량은 동북역치를 선언함으로서 장개석에게 투항합니다. 그러나 이후 중원대전에서 장학량이 북경으로 진출한 사이에 일본 관동군은 결국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장학량은 모든 지반을 빼앗긴채 먼 남쪽 나라에서 모택동과의 전쟁에 투입됨으로서 장작림 제국은 완전히 몰락하게 됩니다.  

 

< 군벌시기 군인들의 모습, 1번이 봉천군인의 모습입니다. 4번 마크는 봉천군이 사용했던 오색기. >

※ 출처 : 오스프리 맨 앳 암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