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만주의 제왕 장작림 3 - 태동기 -

구름위 2013. 12. 2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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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장작림의 일대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적어보겠습니다.

 

 

 

<지금의 만주땅.. 1500년전쯤 고구려가 지배했었던 그 동네>

 

봉천은 지금의 랴오닝성 선양시의 옛이름입니다. 장작림이 이 봉천을 수도로 만주를 지배했기 때문에 봉천군벌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봉천은 1911년부터 만주사변으로 동북에서 장학량이 쫓겨날때까지 만주의 중심지이자 최대의 공업도시로서 성장합니다.

 

장작림은 원세개가 키운 북양군벌과는 다른 계파입니다. 산서군벌인 염석산, 서남군벌 당계요, 광서군벌 육영정등도 북양군벌과는 별도의 독자적인 세력이라 할 수 있죠.

 

원래 장작림은 농민출신으로 젊었을때는 청일전쟁에도 졸병으로 참전했고 마적단을 조직해 남들 좀 뜯어먹고 살다가 러일전쟁때 일본군의 앞잡이가 됩니다. 따라서 부하들도 마적단에서 두목님 모시고 똘마니 했던 애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1차 봉-직전쟁에서 오패부한테 개박살나고 마적출신 부하들의 한계를 인식하자, 일거에 구조조정해 버리고 신식교육받은 사람들로 바꿉니다. 아들 장학량도 외국물 좀 먹이죠. 이 덕분에 봉천군이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바뀌게 되죠.

 

그러나 장작림 본인은 어릴때 동네 서당교육 잠깐 받은게 다로서 거의 일자무식이었다고 합니다. 대신 일대의 군웅 답게 베짱과 자존심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명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장작림의 밑천을 잘 아는 일본사람들이 그를 골려 줄 작정으로 그에게 붓글씨를 부탁했다. 장작림은 먹을 듬뿍 찍어 능란한 솜씨로 큼직하게 호랑이“호(虎)”자를 썼고, 사람들의 갈채 속에 낙관으로“친서”라는 뜻의 “手墨”을 쓰는데 그만 마지막에 흙“토(土)”자를 빠뜨리고 말았다. 

“‘土’자가 빠졌어요.”옆에 있던 비서가 장작림에게 귀띔했다. 

“이놈아, 내가 몰라서 안 썼겠느냐? 이 글은 일본사람에게 주는 것인데 어찌 내 땅까지 남에게 줄 수 있겠느냐?” 

장작림이 아는 글자가 몇 자 안된다는 말인지, 일본사람에게는 조그마한 이익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술자리에서 회자되고 있다. 장작림이 공자의 생일날이면 군복 대신 두루마기를 입고 학교마다 찾아가“선생님 수고 많으십니다! 우리 애들 잘 부탁합니다.”라며 선생님들에게 큰절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아들 장학량의 회고록에 나오는 일화인데, 친일파로만 알려졌던 장작림의 또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죠.(왠지 장군의 아들 김두한을 연상케 하는게 지 아버지라고 개뻥친 건지도...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것도 개뻥이라고 함..) 

 

러일전쟁이 끝난후 그의 마적단은 봉천독군 장석란에 의해 정부군으로 편입됩니다. 그리고 칼들고 화승총든 마적군대에서 당당한 북양군의 신식군대(중화민국 육군 제 27사단)로 개편되어 나중의 봉천군의 원형이 되죠. 

 

 

<북경정부의 오색공화기... 봉천정부도 사용했으나 장학량이 귀순하면서 남경정부의 청천백일기로 바꾸게 됨>

 

1915년, 우리도 잘 아는 원세개아저씨가 황제가 되겠답시고 설치자, 전국에서 반원운동, 이른바 호국전쟁이 발발합니다. 장작림은 처음에는 원세개보고 "황제가 되어야 하옵니다"라며 온갖 아첨을 다 떨고선 무기와 군수품을 받아 낼름 삼킨 뒤에는 봉천독군 단지귀를 북경으로 쫓아내고 반원운동에 참가합니다. 황제고 자시고 발등에 불떨어진 원세개 입장에서는 이런 쳐죽일 놈이 따로 없었겠지만 당장 대응할 방법도 없어 장작림을 봉천독군 서리로 임명해 회유시킵니다. 어차피 장작림도 산해관밖으로 나올 생각도 없고 단지 만주 지배를 위한 술책이었지만요.(꿩먹고 알먹고라는~)

 

1년뒤 원세개가 열받아 죽고 장작림은 세력을 계속 넓혀 나갑니다. 그는 길림군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의 세력을 이용해 1919년 콴청즈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는 자기 부하들을 장춘으로 이동시키고 길림군도 1만명을 동원해 경계선을 펼칩니다. 일본군이 길림군 초소를 멋대로 통과하려 하자 길림군이 제지하고 그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해 일본군 20명, 길림군 12명이 사망합니다. 일본군은 이것을 빌미로 배상협박을 하고 길림군은 장춘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합니다. 북경정부는 일본과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 책임을 물어 길림성장을 해임시키고 장작림은 길림, 흑룡강성까지 몽땅 차지하여 동북3성의 왕이 됩니다. 

 

이렇듯 장작림은 일본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해 나가지만, 실상 이 둘의 관계는 반드시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옛속담에 "웃음속에 칼을 감추고 있다"라는 말이 있죠. 이 둘의 관계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장작림은 어디까지나 일본을 이용한다고 생각했고, 일본 역시 장작림을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은 장작림을 몇차례나 암살하려 했고 장작림 또한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이라 암살 위기를 매번 모면하였습니다. 

 

장작림의 "태동기"시절, 한편 중원에서는 군벌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북경에서는 원세개의 자리를 놓고 서세창, 풍국장, 단기서가 권력다툼을 하고 있었고 사천에서는 전계 군벌 당계요가, 광동에서는 계계 육영정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또, 광주에서는 손문이 광주 군정부를 수립하여 북경정부와 대치했습니다. 게다가 손문과 육영정이 대립하여 손문은 상해로 떠나 그곳에서 복건 군벌인 진형명과 연합해 계계와 전쟁을 벌여 광동을 차지하지만 이번에는 진형명이 반란을 일으켜 광주정부가 무너지는등 혼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북경정부에서는 직계의 풍국장과 환계의 단기서가 서로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팽팽하게 맞서던 양측은 승리의 관건이 장작림에게 있다고 보고, 서로 필사적으로 끌여들이려고 합니다. 단기서는 총리인 서수쟁을 장작림에게 보내 지원을 요청하자 장작림은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라고 보고 부하인 장경혜와 정초와 함께 53여단을 선발로 산해관을 넘어 남하시킵니다. 그리고 본인도 3개사단(27,28,29사단) 및 혼성여단 5만명을 이끌고 남하합니다. 

 

이렇게 봉-환 연합이 이루어지자 직계는 위축되고 단기서와 서수쟁이 정계를 주도합니다. 북경정부는 대륙통일을 외치고 호남과 사천정벌을 추진하여 직군과 봉군을 투입하는데, 봉군의 투입과정에서 서수쟁의 독주에 장작림의 불만이 점점 높아집니다. 특히 봉군에게 주기로 약속한 돈 500만원중 180만원만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꿀꺽해버리니 당연히 열받은 장작림은 환계와의 연합을 파기해 버립니다.

 

또한, 직계의 조곤도 무력통일을 반대하여 자금과 무기를 안 대주면 남정에 직군을 투입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이렇게 남정이 지지부진해지고 서수쟁이 깝치자 열받은 장작림은 봉군을 철수시켜 도로 만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앞에 말했던 일본과 손잡고 콴청즈사건따위를 일으키며 동3성 장악에 열을 올리죠.

 

이때 유럽에서는 1차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단기서는 중국의 연합군 참전을 주장합니다. 물론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함이었죠. 남정과정에서 환계는 직군과 봉군과 달리 직할군이 없어 정치투쟁에서 한계를 깨달았고 독일과의 전쟁을 주장하면서 환계 직속군 이른바 "참전군"을 창설합니다.

 

웃기는 것은 명분은 1차대전 참전이라고 하고서 참전군의 편성은 1차대전이 끝난 뒤인 1919년 2월이었다는 거죠. 당장 국내외의 반대에 직면하자 7월에 "변방군"으로 이름만 살짝 바꾸고 환계의 사병집단화 합니다. 변방군은 3개사단, 4개 혼성여단으로 구성되었고 병력은 약 20만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철저히 일본의 지원으로 편성되어 일본식 편제에 일본교관이 훈련시키고 일제 무기로 무장했고 심지어 군마도 일본산이었습니다. 말그대로 사람만 중국사람이지 일본군이었죠.

섬서에서 내전이 발발하고 광동정부의 손문이 반란군을 지원하자 단기서는 서수쟁과 변방군을 보내고 직군과 봉군도 파견되지만, 이 과정에서 서수쟁과 환계의 독재로 인한 환계와 직계, 봉계와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되어 결국 1920년 7월 양진영은 총동원을 선포합니다. 

 

호남에 주둔하고 있던 직계의 오패부는 멋대로 남군과 정전을 선언해 버리고는 총부리를 돌려 북경으로 향합니다. 단기서는 오패부에게 북상중단을 요구하고 직계의 지휘관 교체를 주장하지만 총통 서세창(역시 직계)이 반대하고 그 사이 직계파과 봉천파간의 반환계 연합 전선 "8성동맹"이 결성되고 맙니다.

 

 

양측간의 수차례의 협상이 결렬되고 7월 7일 서수쟁의 장작림 암살음모가 있었지만 유비가 적로를 타고 도망가듯 운수 질긴 장작림이 잽싸게 튀어 실패로 끝납니다.

 

장작림은 봉천으로 돌아가 7월 13일 전군을 출병시켜 산해관 이남을 향해 남하합니다. 그 수는 약 7만에 달했습니다. 그 다음날 단기서도 직계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초반의 전황은 환군의 우세함으로, 도처에서 직군을 밟아줍니다. 그러나 이틀만에 전황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바로 산해관을 돌파한 봉군의 가세였죠.

 

봉군이 환계의 뒤를 범하고, 17일 직군의 공격에 환군 제 15사단이 항복하고 제 1사단은 포위당합니다. 서북군 사령관 서수쟁은 북경으로 도주하고 환군 3개 사단은 완전히 붕괴되어 버림으로서 7월 18일 완전히 GG를 친 단기서는 정전요청과 함께 다음날 하야를 선포합니다. 

 

승리는 직군과 봉군의 차지였지만 특히 많은 것을 얻은 승자는 장작림이었습니다. 잘나가던 시절 중원일대를 주름잡던 단기서의 세력이 절강, 복건일대로 쫓겨간 대신 장작림은 내몽고, 수원, 열하등 산해관 이남 황하이북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죠. 더구나 비행기 12대와 막대한 보급품과 무기를 장작림은 얻었고 북경정부에서 직계와 대등한 위치에 앉게 됩니다. 마적출신으로서 한낱 변방의 일개 사령관으로 중앙에서는 찬밥 대접받던 그가 말이죠. 마치 삼국지초반 하진과 십상시간의 내분사이에 동탁이 정권을 차지한 것과 같죠.

 

당연히 직계와는 동상이몽의 관계가 되어 결국 직환전쟁이 끝나자 말자 바로 양자간의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 1차 봉직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오패부의 맹공앞에 장작림의 참담한 패전으로 끝났지만 이 쓰라린 패전덕분에 장작림이 중원의 패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풍운아 장학량이 역사의 무대로 나오게 되죠.

 

일본의 유명작가인 아사다 지로(누군지는..)가 쓴 소설 "중원의 무지개"가 장작림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고 하는군요.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양반은 왠지 장작림의 입지전적인 일생이 멋져 보였는지 소설에서 이 마적단 두목을 민중의 지지를 받는 위대한 영웅, 손문은 용렬한 인물로 묘사했다고 합니다. 재해석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나라 역사를 멋대로 왜곡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비견했다고 하는데 하긴 둘다 개뿔도 없는 농꾼출신에 몸뚱이 하나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비슷하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