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만주의 제왕 장작림(1)

구름위 2013. 12. 24.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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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가 원세개에 의해 무너져 국민정부가 들어선후 중국은 사실상 내전상태에 빠져듭니다. 원세개는 북경을 중심으로 민국시대를 열지만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려하자 각 성에서는 반발하고 독립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근 20여년간의 내전끝에 1928년 6월 11일 신강정부가 장개석의 남경정부에 복종을 선언함으로서 통일정부가 들어서게 되죠. 물론 그래도 풍옥산, 염석산, 이종인, 용운, 장학량등 반독립적인 군벌들은 남아서 땅 한쪽씩 먹고 있지만 그들도 일단은 장개석에게 복종은 선언했으므로(모땍똥씨의 홍군만 빼고) 90%이상 통일된 것은 진배없었습니다.

 

1910~20년대의 군벌시대는 일본의 전국시대만큼이나 분열과 할거의 시대였습니다. 전국에 대소 군벌 1800여명이 있었다고 하죠. 그들중에는 장작림, 오패부, 손전방, 염석산, 풍옥산같은 수십만의 병력과 한반도보다 더 큰 땅을 가진 대군벌도 있고 겨우 한개 현과 1개 여단을 가진 소군벌도 있었습니다. 대군벌의 군대는 우두머리의 직계군대가 있고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일시적으로 복종하는 소군벌의 군대의 연합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장학량의 동북군에는 약 30~40만의 병력이 있었지만 그중에 장학량 직계군은 15만명이었고 그 나머지는 소군벌군대였다는 거죠. 그러니 당시 몇백만에 달하는 중국군은 이러한 엄청나게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었고 이런 군대로 일본군에게 맞서야 했다는 것입니다.

 

군벌중에 가장 강력했던 것이 바로 장작림-장학량의 봉천군(나중에 동북군)이었습니다. 장작림은 중국전토의 1/3을 차지했고 거의 천하를 차지할뻔까지 했습니다.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북벌하지 않았다면 말이죠.

 

 

 

 

동북3성을 비롯한 빨간선 위의 영토가 장작림의 최대 영토(1920년대 중반)입니다. 이 시기 장개석의 광동정부가 차지한 영토는 겨우 최남단의 광동성에서도 절반도 안되는 영토였습니다. 그는 일본의 지원을 받았고 만주 심양에는 중국 최대의 병기공장이 있었으며 항공기도 자체적으로 라이센스생산을 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금도 풍부했고 장비면에서도 여러 군벌군대중에 가장 우수했고 초중급 장교들도 해외에서 근대군사교육을 이수하고 온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장개석의 북벌군에게 결국 패배한 것은 주변에 적이 너무 많았으며 그 적들이 장개석쪽으로 넘어갔고 무엇보다 장개석쪽이 더 자금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내전기에 상대에게 승리하는 것은 자금이 얼마나 더 풍부한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전쟁이 경제 원칙에 의해 좌우된다는 뻔한 이론만이 아니라, 그 돈으로 상대편의 장교들을 더 많이 매수하는 쪽이 이겼다는 것이죠. 1920년대말 내전 최대의 전쟁인 중원대전당시 장개석쪽과 풍옥산-염석산쪽은 서로 장학량을 자기편으로 끌여들이려고 했습니다. 장학량이 장개석쪽으로 넘어간 것은 장개석이 더 좋은 조건으로 자신과 자신의 참모들을 매수했기 때문입니다. 군벌들의 군사적 역량은 형편없었고(군벌이든 고급참모들이든 대다수가 마적질 할때 두목, 졸개하던 사이이니 뭘 바라겠습니까? 하급 지휘관들은 좀 나았습니다만..)  따라서 전투에서 이기는 능력보다 뒷공작하는게 더 능하였습니다.

 

장개석이 장학량을 매수할때도 부하를 보내 마작하면서 일부러 져주어 그의 환심을 삼으로서 친분을 쌓았습니다. 다른 근대국가에서는 절대 상상도 못할 일이죠. 이때의 중국은 근대국가라기보다 명나라나 청나라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튼 1928년 장학량이 이른바 "동북역치"(동북정부는 남경정부에게 복종한다)를 선언하여 평화적으로 귀순했고 장개석과 장학량은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이 둘의 사이는 아주 좋았으나 장학량이 북경에 직계군을 이끌고 주둔하는 동안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의 기반을 잃은후 서북으로 이동하면서부터 서로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홍군과의 전투에서 동북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지만(2개사단이 전멸) 장개석은 나몰라라 했고 보급부족으로 동북군의 생활마저 어려워지고 부하들이 홍군편으로 넘어가자 장학량은 서북군 사령관 양호성과 연합해 서안사변을 일으킵니다.

 

히총통만큼 의심병 있는 장개석이 장학량을 상당히 신뢰했던 것은 틀림없으며 그의 회고록에서는 장학량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라는 말도 나옵니다.(이때문에 아들인 장경국이 장학량을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이상으로 홍군을 미워했던 장개석의 마음을 몰랐던 장학량이 서안사변을 일으키자 엄청난 배신을 느꼈고 장개석표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아 끝까지 미워했습니다. 장학량이 연금되자 동북군은 구심점을 잃고 거의 해체되어 일부는 만주국에, 일부는 홍군편에, 일부는 국민당군에 서서 싸우게 됩니다만 20년대 최강의 세력을 자랑했던 동북군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