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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 남송(南宋) 전쟁 - 1235년~1241년

구름위 2013. 12. 1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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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몽골 * 남송(南宋) 전쟁 - 1235년~1241년

 

 

 

1227년에 몽골제국의 창시자인 칭기즈 칸이 사망하자 1229년에 오고타이가 제 2대 대칸으로 선출되었다.

오고타이는 먼저 정권의 반석을 다지기 위해 남송과 동맹을 맺고 제 2차 몽골 - 금나라 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1234년에 금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전투의 대부분은 몽골군이 담당했지만 남송에선 책사인 맹공(孟珙)을 파견하여 승리를 돕도록 헌책해

금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몽골은 남송과 협정을 체결하고 북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돌연 남송의 조정은 요나라가 멸망당할때처럼 중원회복이라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내걸고는 몽골과의 협정을 파기했다.

 

낙양과 개봉 등 여러 도시를 차례로 탈환한 남송군의 행동에 오고타이는 크게 노하여 몽골군의 남하를 명령했다.

이 때 맹공은 남송편에서 맹활약을 펼쳤지만 몽골군의 공격을 모두 막아낼 순 없었다. 한편 오고타이도 동서로 대원정을

계획중이어서 바투의 서쪽정벌에 대항하는 형식으로 오고타이의 셋째아들인 구유케(크츄)를 총대장으로 삼아 남송정벌을 명했다.

 

구유케는 몽골군의 전통대로 군을 3개 군단으로 배치하고는 서로군(西路軍)을 코덴에게 주어 감숙(甘肅) 방면에서,

동로군(東路軍)을 알다이치에게 주어 산동(山東)방면으로, 그리고 자신이 이끄는 중앙군은 한수(漢水)유역에서 남하하여

세 방면에서 대군으로 남송을 향해 쳐들어갔다.

 

하지만 총대장이던 구유케가 전쟁을 일으킨지 얼마 되지않아 갑작스럽게 사망해버렸기에 중앙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이에 몽골군은 지휘계통이 어지러워져 각 군은 제각각 남송의 도시들을 공략하게 되어버렸다. 지휘계통을 상실한 몽골군은

공성전에 실패하고 맹공의 활약으로 인해 남송군에게 밀려 결국 양양(襄陽)까지 잃고 말았다.

 

그 후 전투는 지속적으로 일어났지만 강한 수군을 거느리고 장강(長江)이란 물의 진지를 구축하고 맞선 남송군에 대해

수전에 익숙치 않았던 몽골군은 번번히 물러나야만 했다. 이에 오고타이가 사망하는 1241년까지 전선은 교착화되어버렸다.

몽골의 첫 남송침공전은 몽골군이 일으킨 원정전에서는 처음으로 맛본 패배였다.

 

 

제 2차 몽골 * 남송(南宋) 전쟁 - 1253년~1259년

 

 

 

 

운남, 대리원정을 마친 쿠빌라이는 금련강의 본거지에서 대리국을 굴복시킨 이후, 새로운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는 남송을 포위하기 위해선 다시 고려를 굴복시키고 남송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군대를 움직이는데

신중책을 기했다. 그러나 단기결전을 원했던 몽케는 이러한 쿠빌라이의 늑장에 화가 나 그를 경질하고 타가차루를 새로 임명했다.

 

하지만 새로 사령관으로 임명된 타가차루는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의 공략에 나서기는 했지만 번번히 퇴각을 일삼아

결국 격노한 몽케는 타가차루를 경질하고 다시 쿠빌라이를 불러들인후 친히 남송의 정벌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각 부대와의 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몽케 군만이 돌출하여 남송군과 맞서는 형국에 역병까지 돌기 시작했다.

 

1259년에 진중에서 몽케가 역병으로 병사하자, 후임의 대 칸자리를 놓고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는 서로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급히 북쪽으로 돌아가면 배하의 군세인 한인(漢人)부대가 이탈할 것을 우려하여 역으로 남하를 시작해

군세를 진정시키고는 몽골군으로는 처음으로 장강을 넘어 악주(顎州)를 포위했다.

 

한편 몽케의 죽음으로 인해 몽골군이 혼란스러워졌다고 생각했던 남송은 돌연 몽골군이 장강을 넘어 오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장군이던 가사도(賈似道)가 악주로 파견되었는데, 쿠빌라이 진영에 포함된 몽골제국의 유력자로 손꼽히던 타가차루는

남송군에게 원군이 계속 모여들자 승산이 어려움을 알고는 쿠빌라이에게 북쪽으로 돌아가길 권했다.

 

이에 쿠빌라이도 찬동하여 몽골군은 장강을 건너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원군을 이끌고 나타난 가사도는 장강을 건너던

몽골군 일부를 습격하여 이를 격파했다. 이 승리로 인해 가사도는 승상의 자리까지 오르는 출세길이 열려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가사도는 비밀리에 쿠빌라이와 밀약을 맺었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이에 남송사람들은 가사도의

이중적인 행태에 승전을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

 

제 3차 몽골 * 남송(南宋) 전쟁 - 1268년~1273년

 

몽골제국 제위계승전쟁을 종식하고 제 5대 대 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는 오랫동안 끌어온 남송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하여 군사를 일으켜 1268년에 아쥬를 대장으로 삼아 남하하게 한 뒤 번성(樊城)을 포위했다. 이 거점을

중요시하던 남송도 장강 중류지역과 한수 유역의 군벌이던 여문덕(呂文德)에게 명해 그의 아우인 여문환(呂文煥)을

입각시켜 막대한 군량과 장비를 지원한 후 지구전에 나서도록 했다.

 

그러나 자신도 제 4대 칸이던 몽케 시절에 남송군과 싸운 적이 있던 쿠빌라이는 개봉(開封)을 병참기지로 삼아

보급선을 충실히 한 뒤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여 처음부터 싸움을 단기간에 끝낼 작정이었다.

여문환 아래 사기충천한 남송군에 비해 몽골군은 직접적인 전투는 피하면서 토목공사를 벌여 장대한 토담을 쌓았다.

 

남송군을 무시하면서 토목공사를 행하는 몽골군을 의아하게 생각한 여문환은 역으로 몽골군에게 공세를 걸었지만

오히려 강력한 화기와 화살로 무장한 몽골군의 반격에 막혀 성만 비우고 말았다. 이에 양양(襄陽)과 번성은 바깥으로

완전히 차단되어 성안 사람들이 고립되어버렸다.

 

이에 남송군은 두 번에 걸쳐 구원부대를 보냈지만 번번히 몽골군에게 격퇴당했기에 드디어 호랑이 장군이라 불리던

범문호(范文虎)의 군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한편 완전히 양양과 번성을 포위한 몽골군은 수군(水軍)을 조력하여

양양 교외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범문호가 이끄는 수륙 약 10만의 남송군이 양양 교외까지 도달하자 몽골군은 정비된 수군부대를 이용해 공격을 걸어

결국 범문호는 완패하고 말아 남송군의 세력은 크게 추락하고 말았다. 남송의 조정이 보낸 최대의 원군인 범문호의 군대가

패배하자 양양과 번성은 함락일보의 풍전등화같은 상황이었지만 여문환은 항복하지 않고 농성을 계속했다.

 

몽골군도 양양과 번성을 무리하게 공격하기란 피해가 컸기에 여문환은 항전을 하면서 성 내의 군량부족을 우려하여

자신의 처자식을 성 밖으로 내 보낸 뒤 항전을 계속하여 전선은 약 2년간 공방이 이어졌다. 이에 쿠빌라이는 훌라구에게서

얻은 신병기인 회회포(回回砲 - 페르시아어로 만쟈니크)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273년에 양양 근처에서 사용된 회회포는 먼저 번성의 성벽을 부수고 장한영(張漢英)의 수비군을 항복시켰다.

그리고 이번엔 번성 안으로 포탄이 날아들자 결국 여문환도 1273년 2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생각과 달리 쿠빌라이는

여문환의 수비전술과 용맹을 우수히 여겼는데 이에 감복한 여문환은 쿠빌라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양양과 번성의 함락과 여문환의 투항소식은 남송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몽골군은 그다지 고전받지 않고

남송공략에 나섰는데 당시 몽골군에게 항복했지만 여문환은 승상이던 가사도처럼 달아나거나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그를 매국노라 비난하는 사람이 적었다고 한다.

 

사실 처음부터 충분한 원군과 물자를 주지 않았던 남송의 승상 가사도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여문환은 자신의 인맥과

군력을 동원해 쿠빌라이에게 협조하자 상황이 유리하다고 본 쿠빌라이는 남송을 타도하기로 결정하고 <백개의 눈>이란

별명을 가진 용장 바얀을 총대장으로 삼아 다시 남하를 명령했다.

 

바얀은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양양에서 한수를 건너 한구(漢口)에서 남송의 함대를 저지한다는 여문환의 계책을 받아들여

군사 일부를 징발해 남송함대를 매복습격하는 형태로 패주시켜 1274년에 악주(鄂州)를 손에 넣었다. 바얀은 쿠빌라이로부터

쓸모없는 살상은 하지말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악주를 점령하고도 주민들을 손대지 않아 남송측의 투항자가 늘어났다.

 

이후 몽골군은 사기가 죽은 채 출진한 승상 가사도의 군대도 격파하여 수도인 임안(臨安 - 현재의 항주)에 이르렀다.

1276년에 임안은 몽골군에게 무혈개성되어 남송의 황제인 공제(恭帝)가 항복하면서 남송은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장세걸(張世傑), 육수부(陸秀夫)같은 일부 남송의 장군들과 관료는 투항을 거부하고 남부인 광주(廣州)로 이동했다.

 

육수부, 문천상(文天祥), 장세걸, 진선중(陳宣中)은 새로이 황태자를 황제로 등극시키고 몽골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몽골군의 압박에 몰린 남송의 유신들은 선단을 꾸려 해상을 표류하면서 저항을 계속해 현재의 홍콩 주변인 애산(涯山)이란

섬에 요새와 궁을 짓고 철저항전 태세에 들어갔다.

 

몽골군은 투항한 남송군으로부터 징발한 수군과 군선을 이용하여 이들을 추격했는데 장세걸과 육수부는 몽골군에게

기름을 부어 화공을 실시하면서 격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1279년 2월에 장기간에 걸친 소모전으로 피폐해진 남송군은

결국 패배하여 상심한 가신들과 귀족들은 차례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육수부는 패배가 다가오자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를 계기로 남송군의 저항은 끝나버려

몽골군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애산에서 탈출한 장세걸은 재기를 노려 월남지방으로 향하던 도중에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익사하고 말았다.

 

육상에서 저항을 계속하던 문천상은 애산 전투 이전에 사로잡혀 대도(大都 - 북경)로 압송되었다. 쿠빌라이는

우수한 문관이던 문천상을 아깝게 여겨 등용을 권유했지만 문천상은 한결같이 이를 거부했기에 결국 1282년에

처형되고 말았다.

 

 

 

 

출처 : 스기야마 마사아키 <몽골제국의 흥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