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차 몽골 * 금나라 전쟁 - 1211년~1215년
몽골의 초원지대는 9세기에 위구르가 무너진 직후 강력한 통일정권이 들어서지 못하여 각 유목민족들이 부족연합을
형성하고 서로 항쟁을 벌이다가 12세기 말에서야 칭기즈 칸에 의해 통일되어 몽골제국으로 형성되었다. 이 때 금(金)나라는
세종(世宗)에 의해 여러 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한화(漢化)가 진행되어 국력이 약해져가고 있었다.
금나라는 예전부터 몽골의 유목민들을 서로 부추겨 싸움을 일으키게 하여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정책을 쓰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각 부족의 지휘관에게는 금나라의 벼슬을 주어 속민화를 꾀하였다. 하지만 몽골제국의 칭기즈 칸은 이러한 금나라에
대해 깊은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칭기즈 칸의 할아버지인 암바카이 칸이 예전에 타타르 족에게 붙잡혔을 때 금나라로 압송된 후 처형된 과거 및
적대부족의 지원으로 고전을 해야 했던 경험때문이었다. 그리고 칭기즈 칸은 통일된 몽골제국의 유목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주변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풍족한 땅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는데 그 일차적인 목표가 인접한 금나라 정벌이었다.
몽골제국은 먼저 서하를 침공하기로 개시하여 금나라와의 전쟁시 배후의 위험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서하의 공성전에
어려움을 겪던 몽골군은 고전 끝에 종주권을 인정받아냈다. 이후 몽골군은 위구르족도 종속시켜 배후의 후환을 없앴다.
1211년에 드디어 금나라 정벌에 나선 몽골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집결하여 후방엔 적은 수비대만 남긴 채 총력전에 들어갔다.
몽골군은 먼저 내몽고에 걸쳐 거란 및 이민족의 유목민들을 제압한 후 금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몽골군은
금나라 군사와의 공성전에는 서하정벌전처럼 주요 도시의 공략엔 실패했지만 야전에선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몽골군은
약탈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쾌속으로 이동과 후퇴를 반복하여 금나라를 상대로 여러 번 승리를 거두었다.
몽골군의 무차별 살육과 약탈이 반복되면서 금나라는 점점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졌는데 1213년에는 금나라 장수이던
호사호(湖沙虎)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죽이고 위소왕(衛紹王)의 조카인 선종(宣宗)을 즉위시켰다. 그러나 호사호 자신도
장군 고기(高琪)가 일으킨 반란에 의해 위소왕과 가족 모두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이러한 무정부 상황에 금나라는 수도인 중도(中都, 현재의 베이징)마저 몽골군에게 고립되고 말았다. 중도를 포위한 몽골군은
금나라에게 굴욕적인 복종의 맹세를 받아낸 후 드디어 철군하였다. 하지만 몽골을 피하기 위해 선종은 남쪽의 개봉으로 달아났는데,
이를 틈타 거란 등 여러 이민족의 혼성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선종은 몽골에게 지원을 구하여 몽골군은 다시 남하했는데, 이 때 중도는 몽골에게 함락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금나라는
황하 북쪽의 거의 모든 영지를 몽골에게 내 주고 개봉에 머무른 일개 지방정권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 동아시아에서는
몽골에게 투항하는 집단 및 국가들이 점점 늘어났다.
중도의 함락으로 금나라와의 전쟁은 종결되었는데, 몽골군은 공성전을 비롯한 여러 전투경험을 익혀 훗날 정복사업에서의
귀중한 경험을 체득했다.
제 2차 몽골 * 금나라 전쟁 - 1230년~1234년
1206년에 칭기즈 칸에 의해 성립된 몽골제국은 제 1차 몽골, 금나라 전쟁, 칭기즈 칸의 서쪽 정벌로 인하여 명실상부한
유라시아의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칭기즈 칸 시대의 몽골제국은 정복전쟁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 국가체제는
아직 탄탄하지 못하여 칭기즈 칸이 1227년에 사망한 후 이 문제는 대두화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제위에 오른 오고타이는 아직 황하 남쪽에서 명맥을 유지중이던 금(金)나라를 멸망시켜 정권의 기반을
세우기로 하여 정벌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금나라도 제 1차 몽골, 금나라 전쟁에서 국력이 하락했지만 그래도 30만의 병력을
확보하여 동관, 개봉 등을 중심으로 방어를 공고히 했기에 쉽게 넘볼 상대는 아니었다.
이에 몽골제국은 새 왕인 오고타이를 중심으로 툴루이, 테무게 옷치킨 등 몽골의 유력자들을 포함하여 일대 작전을 계획했다.
몽골군은 1230년에 군사를 일으켰는데 몽골본토에는 차카타이를 남겨두고 우익군에 툴루이, 중군엔 오고타이, 좌익군에
테무게 옷치킨이 각각 군대를 이끌며 금나라로 진공해 들어갔다.
오고타이가 이끄는 중군은 산서성을 지나 황하를 끼고 금나라 군대와 대치하며 시간을 끌었다. 한편 테무게가 이끄는
좌익군은 행군중에도 살인과 약탈, 방화를 일삼아 지역주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결과 금나라의 수도였던
개봉으로 피난민들이 급증하여 금나라 군대는 쉽게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편 툴루이가 이끄는 좌익군은 경조(현재의 서안)를 함락한 후 강행군을 실시해 개봉의 도달했다. 이로서 몽골군은
개봉을 북, 동, 남쪽에서 끼고 웨어싼 형국이 되었다. 그곳에서 금나라 군이 수도의 방위를 위해 황하남부의 군대를
남하시키자 금나라군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오고타이가 이끄는 본대는 대거 황하를 도하하여 이들을 쫓기 시작했다. 이에 남하하던 금나라 군 주력은
툴루이와 대치하게 되었다. 툴루이는 4만의 병력으로 15만이라는 금나라의 대군과 맞서게 되었다. 하지만 삼봉산(三峰山)의
전투에서 완안진화상(完顔陳和尙)이 이끄는 금나라군을 격파했다.
완안진화상은 후퇴한 후 재기를 노렸지만 결국 몽골군에 패배하여 1232년에 처형당했다. 그는 형장에서도 당당했기에
몽골군은 그의 모습에 감탄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장군을 잃은 대패로 인해 제대로 몽골군에 저항하지 못하여 결국
1234년에 금나라는 수도인 개봉이 점령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우익군을 이끌었던 툴루이였다. 그러나 툴루이는 삼봉산의 전투 후 약 8개월 만에
사망했다. 원조비사(元朝秘史)에 의하면 툴루이는 오고타이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기술이 나오는데, 혹은 그의 명성을 시기하여
오고타이의 신정권 인사들이 모살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후 몽골제국은 오고타이, 차카타이의 양 진영이 몽골제국의 중심이 되어 정치를 다스렸기에 툴루이의 죽음은
이 둘의 권력장악에 있어 방해물이라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전투 후 몽골제국은 금나라를 거의 완벽하게 멸망시켜 새 정권의
기반을 든든히 하는 초석이 되었다.
한편 툴루이의 죽음에 의해 몽골제국은 오고타이와 차카타이의 두 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후에 바투의 서방원정 당시
주치 집안의 바투, 툴루이 집안의 몽케는 오고타이 가의 구유크, 차카타이 가의 부리와 대립했다. 이는 결국 나중에 몽골제국이
분열되는 원인을 초래했다.
출처 : 스기야마 마사아키 <몽골제국의 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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