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모 택동은 어떻게 만주를 먹었나?

구름위 2013. 11. 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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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택동은 어떻게 만주를 먹었나?

       --한 국민당 장군 아들의 역사 증언.

 내 사무실에서 걸어서 5분쯤 거리에 화교가 하는

중국집이 있었다.


홀이 다섯 평도 안 되는 작은 집이지만 그 자리에서

벌써 사십년이나 장사를 하는 대단히 오래된 집이었다.

며칠전 그 분에게서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다.


벌써 돌아가셨지만 아버님이 만주에서 모 택동군과

치열했던 전투를 하던 국민당 군의 여단장이었다는 집안의

내력과 만주가 그렇게 허망하게 모 택동의 손에

점령당했던 이면에는 국민당 사령관 진 성 장군의

상황 판단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중국의 근대사에서 1947-1949년 까지 장개석과 모택동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 국공내전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비할바없이 크지만 국내에 별로 알려져 있지도 않고 설사
알려져
있다해도 양쪽의 시각과 편리함으로 크게 훼손된
기록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 비화는 앞으로 [만약에] 남한 주도로 생각보다

빨리 통일이 온다면 한국이 참고해야할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그래서 다소 지루하지만 만주에서 벌어졌던
국.공 전쟁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래에 그 역사적 배경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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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일본이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군벌들을

쫓아내고 차지했던 최대의 전과물이었다.


세계가 반발했지만 일본은 자원 많은 만주를 심혈을 기울여
개발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패배와 만주국 패망으로 이어지자

중국의 두 맹주 장 개석과 모 택동은 이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서
레이스를 벌였다.


모 택동은 특히 더 의욕을 보였다.

이미 일본이 잘 개발해놓은 산업시설도 욕심났지만

전략적으로 우방국 소련과 긴 국경을 대고 있어 후원을
받을 수 있고 그만큼 장 개석으로부터 공격의 위협을
안 당할 수가 있다.


이미 우군인 소련군이 만주 전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욕심을 내볼만했다.


사실 모 택동은 1947년 국공 내전이 발발해지자 근거지

연안을 장 개석 군에게 내주면서도 만주 공략에 전력을 기우렸다.


국공내전은 세 단계의 거대한 전역으로  나눈다.

만주를 점령한 요심전역(遼審戰役),두 번 째가
북경과 천진을 포함한
북부 중국의 핵심 지역을 먹어 삼킨
평진 전역(平津戰役),
세 번째가 승세를 몰아 양자강 이남을
부드럽게 평정해버린 회해
전역(淮海戰役) 이다.


사실 정강산에서 기세를 올리다가 장개석의 고사(枯死)작전에

못 버티고 포위망을 뚫고 3 만리를 탈출[대장정],연안에
겨우 자리잡았던
모택동의 앞날을 그닥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불모지 연안에서 깔닥거리며 숨을 쉬면서 연명하거나 결국은

장 개석에게 토벌 당하고 없어질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었다.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모 택동이 간절히 염원했던 것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조국이 어떻게 되건 일본과의 전쟁을 염원했던 그는 정강 산에서

탈출해서 대장정에 올랐을 때도 북방의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

이동하는 있는데 장 개석 군이 방해한다는 식으로 선전해댔다.


그의 바램대로 장 개석의 중국은 일본과 전쟁에 휘말렸다.

일본의 맹공에 장 개석은 다 팽개치고 중국 내륙으로
쫓겨 들어갔다.


장 개석이 물러간 광대한 지역은 일본군이
다 점령할 수가 없었다.

일본군은 철로를 따라 도시만 점령하는 점적인
정복을 해갈 수밖에 없었다.


모 택동의 절대 지지자인 농민들이 사는 농촌은 점령자
일본도 어떻게 못하고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이 행정과 치안 공백지대에 모 택동의 홍군이 하얀 백지에
붉은 잉크가
번져 나가듯 접수했다.


비록 중간에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장 개석 군과 모 택동 군은

같은 군복을 입고 같은 통제를 받는 국공합작의 연합군

형태를 취했지만 모 택동은 일본과의 큰 전투는 모두 장 개석에게

맡기고 자신은 붉은 농촌 점령지 만들기에 더 열을 올렸다.


일본이 패했을 무렵 모 택동은 무서운 거인이 되어 있었다.


겉으로는 장 개석과의 연합을 계속해서 합작정부를

추진한다고 생색을 했지만 강력한 실력을 갖춘 모 택동에게

그건 얼빠진 짓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 외신 기자에게 말했다.

“일 년 반이면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를 않았었다.

일본이 패배하고 소련군이 점령한 만주에 장 개석과
모 택동은
선점을 위한 군사력 파견 증강 경쟁을 벌였다.

물론 기차와 차량을 이용하고 여기에 미군의 항공수송 지원을

받은 장 개석 군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반면 모 택동은 이곳에 최우수 지휘관인 임 표를 파견했지만

수송의 열세로서 비교적 소규모의 군대만을 파견할 수가 있었다.


1947년 국공내전은 만주의 국민당 군이 먼저 공산군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 했다.

장 개석은 의욕을 가지고 이  공산당 섬멸의
내전에 임했었다.

그러나 모 택동은 연안의 손실보다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만주 확보에 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집중했다.


만주에서 동북 제 4야전군을 조직하고 있던

임 표는 전쟁에 돌입했다.

그는 첫 전투인 사평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장 개석군에게
대패를 당했다.

연이은 흑산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패배를 당였다.


그러나 패배를 당하던 임 표군이 어느 순간부터 엄청나게
강해지기
시작했다. 전세는 급전했다.

밀리던 국민당군의 60 군이 1948년 4월 부터 구 만주국
수도 장춘[신경]에서 공산군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6개월동안
고통스러운 방어전을 하다가 그해 10월 국민당군의
사령관
증 택생이 항복함으로서 함락되었다. 

구 만주국 수도 장춘의 함략은 만주, 아니 전 중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국공내전 발발 초기 단 10만 명의 작은 병력을 보유했던

임 표의 부대는 만주를 거의 장악한 시점,즉 일년 반 뒤인
장춘 함락 직후
 80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국공내전의 3대전역[三大戰役]에서 제일 중요했던

요심전역[遼瀋戰役]은 장춘 함락뒤인 다음 해 1월 북경과
천진 지역, 즉 중국의
심장부분을 공격했던
평진전역[平津戰役]으로 이어졌다.


만주 장악은 만리장성 남쪽 장 개석 군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

이 평진전역 때부터 국민당 군의 집단 투항이 속출했다.

장 개석 부대는 각 전선에서 부대 와해라는 볼쌍 사나운

대패배도 연달아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의 심장을 먹어치운 모 택동군은 이어 양자강 이남을

공격하는 회해전역[淮海戰役]을 개시했다.


양자강 남쪽 광활한 영토는 부드럽게 모 택동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장 개석 군은 이 년도 안 되어 대륙의 새 주인에서 문전
축출당하는 걸인과 같은 비참한 패잔병의 신세가 되어
대만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만주가 함락되고 단 일년도 안 되어 중국 전역은 공산화 되어
그 해
1949년 10월 모 택동은 중화인민 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장 개석 군에게 패배를 당하던 임 표의 부대가 갑자기
막강한 부대가
되어 장 개석 군을 구축해버려서
중국 적화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는데 중국은 이를 모두
동북 지방 인민들의 열렬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모양 좋은 말로 이 부분 역사를
 가리고  있다.


그러나 한 사실을 간과하지 말자.


일본의 대륙진출 삼 십 년 만에 손에 넣은 만주에
막대한 투자를
했었다.


만주 철도니 소화 제철[안산 제철]이 그런 대형 투자의 표본이다.

그런 투자와 일본의 행정경험이 접목된 통치가 만주국을
군벌들이 난립하고
다스릴 때보다 만주를 훨씬 살기 좋게 만들었다.

[한반도에서 고생하던 조선 농민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만주로 이주했던
이유도 만주의 경제에 이바지 했던 대대적인
농업 확대 정책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 만주의 GNP는 만리장성 이남의 전 중국의 GNP보다도
더 높았었다.

공산주의의 창궐은 항상 경제와 상관관계가 있었는데

만주는 경제 사정이 모 택동 사상을 창궐시킨 중국보다
비교적 나았었다.

여기에 더해서 치밀한 공산주의 탄압정책도 있어서 공산주의

활동이 힘을 쓰지를 못했었다.


즉 일본의 독한 감시망에 있었던 만주는 모 택동의 공산주의
활동이
활개 치는 환경이 마련되는 혼란과 부패의 중국이 아니었다.


물론 만주의 원야에 공산 게릴라들이 있었다.

그러나 1940년 일본군 노조에[野副]소장이 지휘하는

대대적인 공산 유격대 토벌은 이들 태반이 섬멸당하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소련으로 도주해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김 일성도 이 중의 하나이다.

이 토벌 뒤에 만주의 공산 무장 세력은 종식되었다고 보아야 했다.


그랬던 만주의 인민이 한꺼번에 장 개석 군을 내모는
무장 세력이
된 것은 믿기가 힘들 일이다


즉 종합적으로 보아서 만주의 사상 토양은 마치 임 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느닷없이 일제히 총을 들고
일어나는 그런 비옥한 곳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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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 택동의 만주 점령에 숨겨진 큰 비화가 있었다는

역사적 정보를 들은 것은 40년동안 종업원하나 없이
작은 중국집을 묵묵히 경영해온 화교 진 사장을 통해서였다.


책을 좀 읽는다는 나도 국공내전에 대한 자세하고 객관적인 책을

접해보지를 못했던 지라 어린시절부터 몸으로 중국의 비극을 경험한

진 사장의 증언은 참 귀중한 정보였다.


이 분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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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에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한 중국집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자주 갔었는데

부친이 들어서서 “짱궤!” 하고 부르면 주인이 반가이

달려 나와 접대를 했었다.


[ 그 때만 해도 짱궤는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뜻은 사장님이라는 장궤( 掌櫃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은 짱개로 변해서 중국인은 물론 중국 동포들을

 마구 비하하는 단어로 변한 것을 보면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


그 양반은 지역 유지였었고 연장자인 나의 부친에게는
공손했지만
항상 표정이 무뚝뚝했다.


그리고 한국어가 아주 서툴렀다.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가 아니었다.

취중의 손님들이 그 분의 어눌한 한국어를 흉내 내서 놀리면

날카롭게 노려보고 상대를 안했다.


타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고객의 수모를 그냥 참아내는

보통 화상(華商)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언제인가 부친이 후배들에게 하시던 말로
그 분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 그 양반에게 말조심하게나. 국부군 대위 출신일세!”


나는 성장해서도 고향에 가면 진짜 중국냉면을 제대로 만드는

그 집에 자주 방문했지만 그 분의 무뚝뚝한 것은 여전했다.

언제나 우울해 보였다.


자식도 없었는데 나이가 지긋이 들어서야 장가를 들어

아주 어린 아들을 두었다,


내가 어쩌다가 들리던 중국집의 진 사장이 그런 분이었다.

70대의 노인이었는데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부지런하게 일만했지

손님과의 대화도 웃음도 통 없었다.
어떻게 보면 거만하게도 보였다.


드문드문 들리던 이 집에서 손님 없는 시간에

늦은 점심을 먹다가 배갈까지 한잔하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취기에 내가 말을 꺼내서 자연히 대화가 되었다.

말을 트고 보니 대단히 유식한 분이었다.


나는 자연히 어린 시절 중국 냉면 잘 하던 중국집의
그 국부군
대위 사장님의 이야기도 꺼내게 되었다.


그 말에 진사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나의 부친도 국민당군의 소장이었어요.

  만주에서 모 택동 군과 싸웠던 여단의 여단장이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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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아버지는 군벌 북양대신 원세개가 1902년에 설립한
보정 군관 학교를
  졸업하고 오 패부 군[보정 1 기출신]에
근무하다가 나중에 국민당 군에
통합해서 소장까지 진급하신
국민당 장군 출신이었다.

보정육군 군관학교는 중국 최초 사관학교로서 장개석도
일본 유학이전 이 군관학교를  졸업했던 졸업생이다.

20여년간 군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 중 2,000명이 장군이 되었다.
해방 무렵에는 황포 군관학교와 국민당군의 양대 군학맥의
한 주류였다. 황포 군관학교 개설로 1923년 폐교했다.


나는 놀라서 집안 사를 물어보았다.


아버지가 지휘하던 여단은 장춘 인근에서 붕괴해버리고
부하들도
다 헤어져 자신 혼자만 남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북한과 남한으로 탈출해서 남한에서 배를 타고
장 개석 군대로 복귀하고자 시도했었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한국에서 살아가야 했다.

 

나는 파란만장한 시대에 부대에 복귀하기 위해서 노력하던

부자(父子)가 귀국하지 못하고 이국땅에 뿌리 붙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침을 삼키며 들었다.


그러나 진 사장은 말문 초기에 한 국부군의

유명한 장군을 지목했다.


“우리 집안이 이렇게 되고 국민당 정부가 이렇게 된 것은

 만주 국민당군 총 사령관이었던 진 성[陳 誠 1897-1965)장군의

 실수가 큰 몫을 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통한(痛恨)이 맺힌

 이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말씀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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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성 장군은 나도 아는 분이다.

장 총통의 총애가 대단히 깊었던 분으로서 자유 중국의
행전원장과
부 총통등의 여러 요직을 거쳤다.


진성은 보정 군관학교를 나왔음에도 2 년 뒤 새로 신설된

황포 군관학교에 새로 입교해서 황포 군관학교의 1기생으로

졸업했다.


장 개석과는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장과 생도로서 만났다.


그는 장 개석의 북벌 때 탁월한 지휘로 대대장 급에서

사단장 급으로 벼락 진급하기도 함으로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었다.


그는 대 공산군 토벌에서도 실력을 발휘해서 모 택동 군이

장정에 오르게 만든 정강 산 포위전을 최 일선에서

지휘했었다,


1947년 국민당 참모총장으로서 공산군 토벌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최고 중요 전장인 만주로 가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만주에서 패배했지만 그는 계속 장 개석 군의 지휘관으로서
국공 내전을 지휘했는데 150여 만 명의 대군을 상실하고
1949년 해임 당했다.


그러나 장 개석의 신임은 변함이 없어서 나중에 복권되어
행정원장과 부총통을 지냈다.


그는 내가 알기로 부패했던 국민당 군에서 드물게 몸가짐을
엄격히 했던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는 간암으로 죽었고 그 아들이 정치에 투신하여

총통 직에 도전할 만큼 성장했지만 총통이 되지는 못했다.


진 사장은 진 성의 실수를 지적했다.

“그 때 국민당 군이 갈 곳없던 만주국의 군경(軍警)조직을

 받아들여 임 표 군 섬멸에 동원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진성이 만주군의 편입을 거절했답니다.

 아버지는 늘 이 한 맺힌 말씀을 하시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당시 비록 괴뢰 국이지만 만주라는 큰 국가체계에 20여만의

만주 군이 있었고 그보다 더 큰 경찰 조직이 있었다.


이들의 지휘관들은 여러 민족으로 잡다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인,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조선인등이 있었지만

역시  중국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이 패배하고  만주국 황제 부의도 도망가다가 붙잡혀서

소련으로 끌려간 판에  직업을 잃은 만주 군과

만주 경찰 간부들의 입장은 무척 곤란했었다.


이들 대부분 부대는 곧 소련군에게 무장해제까지 당했다.


군인이자 생활인인 이들은 생계도  유지케 해주고
사회적으로도 신분을  보장 해주는 
어떤 직업을 원했었다,


대다수 중국인들이나 만주인 간부들은 조선인이나 일본인
처럼 귀국할 국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일부 말단 군부대는 무기를 들고 부대 이탈을 해서 지역에
뿌리를 밖고
주민들을 갈취해먹는 범죄 조직이 되었다.


만주에서 청말(淸末)부터 만주 사변 전까지 만주에 만연했던

마적(馬賊)들이 된 것이다.

토비[土匪]라고 불리던 이들은 나중에 공산군에게
모두 토벌을 당해 없어졌다.


일본으로부터 반공사상을 주입받았었고 공산 게릴라들과

싸웠던 이들은 당연히 진주해온 국민당 군에게
아쉬운 손을 벌렸다.


국민당 군에 편입해서 공산군과 싸우게 해달라는

교섭이 간 것이다.


그러나 이 제의는 진성에게 거절당했다.


이 결정을 내릴 때는 장 개석은 아직 상황이 다급하지도 않았었고

일본에 승리했던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자만심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에 옛 군벌 군을 받아들여서 안 좋은 경험을

했던 이유도 있을 수가 있다.


또는 이런 정치 감각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던 장 개석이

이 결정의 뒤에 있었을 가능성도 배체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장 개석의 숙적인 모 택동의 공산군이라는
변수를
깊이 계산하지 않은 실책이었다.


올데갈데가 없어진 만주 군과 만주 경찰은 할 수없이
임 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력이 국민당 군보다 훨씬 열세였던 임 표는 극히 실리적인

결단을 했다.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의 주구 노릇을 했던 만주 군과
만주 경찰들을
전력을 묻지 않고 몽땅 받아들인 결단을 내린 것이다.


[도대체 공산주의의 반제국주의 교리에 맞지 않는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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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간 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듣기로 중공군이나 북한군에서 특수한 배경이 없으면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 군에서 근무했던 자들은 부사관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들어 왔었고 중공군이나 북한군에

일본군 경력자가 극 소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백 선엽 장군이 군단장으로 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때

자기 군단과 대결하고 있던 중공군의 한 연대장이

부 련화라는 인물이었음을 알고 백 장군은 깜작 놀랐다.


부 련화는 백 장군이 만주 봉천 군관학교 시절
유달리 생도들에게 
엄격했던 구대장으로 백장군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던 인물이었다.


구대장을 할만큼 모범 장교였던 그가 만주 군에서
중공군으로 변신해서 한국전선에 나타났던 것이다.


북한 최강연대 18연대장으로 1950년 7월 대전의 후방을 차단해서

미 24사단을 붕괴시킨 작전을 지휘했던 공으로 북 4사단장이 되었던

송 덕만도 만주군 경찰 출신이었다.


북한군의 지휘관이 될 수가 없었던 성분 불량자였었다.


나는 그래서 이 자가 만주 경찰을 하면서도 공산군에 내통하던

지하 공산주의자였던 것으로 의심했었다.


그리고 홍 천파라는 일본 관동군 중위 출신 사단장도 있었다.

유명했던 홍 사익 중장의 친척이라는데 이자 역시 북한군의

사단장이 될 수가 없는 성분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때 다급했던 임 표의 군대가 만주 군경(軍警)을

도매금 매입을 할 때 같이 휩쓸려 들어 왔다가 북한군으로

넘겨진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공산군이 다급했던 고비를 넘기고 정권을 공고히 하자

중국이나 북한의 이들은 모두 숙청되었다.


특히 무더기로 투항했던 국민당 군을 청소하기에 6.25전은

아주 최적의 호기였다.

해방 병이라는 차별을 받던 수많은 구 국민당 출신이

한국 전선에서 유엔군 화력의 밥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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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선에서 떼죽음한 중공군, 작전 실수로 떼죽음을 시키고도
'물러터진 해방병이라서 당했다'가  패전의 이유로 내세워졌다.

1951년 춘계 공세 때 집단군장 대리 왕 진산의 판단 착오와
사단장 정 기귀의 무능한 지휘로 사단 병력이 다 섬멸당하고 10%만
살아 돌아온 180 사의 한강변 참패 때도 죽은 전사나 살아 남은
전사는  꼭 같은 욕을 얻어 먹었다. 해방볌놈들이라 저렇게
대패를 당했다는 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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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구 만주군 병력은 현지 사정에 밝았고  지역과의 유대도

강했다.

작전이나 모병(募兵)면에서 외지에서 온 어느 부대보다도

우월한 강점이 있었다.


더구나 만주경찰의 편입은 엄청난 이점(利點)을

공산군에게 주었다.


말이 경찰이지 치안이 불안했던 만주에서 경찰은

행정조직이라기보다 군대와 비슷했던 무장 조직이었다.


사실 김 일성 부대를 8년 넘게 추격했었던

주역은 이 만주 경찰 부대가 맡았었다.


김 일성 최대의 전과라는 마록구 전투나 보천보

전투에서 출동했었던 부대가 만주 경찰이었었다.


만주 경찰은 괴뢰 만주국 실제 통치자 일본이

심혈을 기우려 조직했던 국가 운영 체계로서 공산군의

활동 무대였었던 산간 오지에까지

실핏줄같이 뻗어있는 조직체계를 가졌었다.


이 실핏줄에 되 살려서 여기에 붉은 피를 부어넣으면

실핏줄 지역은 붉은 색으로 염색되어 부활 할 것이었다.


특히 임 표에게 절실했던 모병분야[초모-招募- 사업이라고 했다]
에서
이 투항한 만주의 군경 조직들이 크게 기여했다.


만주 군과 경찰의 편입한 곧 임 표의 부대는 전력(戰力)을

급속히 증강시키며 전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진 사장은 이를 계기로 수세에 몰렸던 임표의 부대가

무섭게 변신했다고 말했다.


운이 닿느라 가난했던 공산군이 이들 구 만주 군과 만주 경찰을

무장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과 만주 군에게 몰수했던 풍부한 무기를

다시 임 표 부대에 몰래 넘겨주었다.


말로는 국공내전에 중립을 지킨다고 했지만 가재는 게 편이었다.


몰수했던 일본 전차 100량까지 기증했으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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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국 동포들에게 진 성의 실수를 확인해보았다.

대상은 대학교수, 전직 지방관리, 공산당 간부로서
교육 수준이
높은 분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만주가 점령 된 것은 동북 인민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임 표의 해방군을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꼭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만주군경의 투항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 본 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확인해본 중국군 대교[한국군 준장해당]를

지낸 분의 대답은 달랐다.

“ 그런 일이 사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입장에서 위만국의 군경의 
도움으로 동북이
  해방 되었다는 것은 인정 못하고 있습니다.“


-위만국은 중국에서 구 만주국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위는 증언은 과거의 군 정보에 해박하신 분의 답변이라서
진 사장이 들려준 말은 신빙성이 크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만주군경을 포섭해서 만주를 방어했더라도
중국 대륙은 이미 민심이 떠난 장개석이 계속
점령하고 있지는 못했으리라.

그러나 국공내전은 장개석의 그런 참패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전은 오래 갔을 것이지만  장 개석은 남부 해안 지방
일부는 지금도 단단히 확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

장개석이 만주를 장기간 확보하고 있었으면 한국 전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진 사장의 아버지 진 장군은 유명한 48년 장춘 포위 전 때

주변 전투에서 그가 지휘하던 여단은 강력한 모 택동 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산산이 흩어졌다.

그는 소수의  병력를
  이끌고 여기저기 피신을 다니다가
결국 그 소수의 병력들도
다 잃고 혈혈단신이 되었다.


[한국전 초기 대전에서 패배하고 방황하다가 포로가 된

 24사단장 딘 소장의 처지와 비슷하게 되었다.]


그는 무서운 기세로 만리장성 넘어 중국 내부로 진격하고 있던

공산군에 의해서 후퇴하고 있던 국민당군과의 합류가 차단되었다.


궁리하던 끝에 진 장군은 남한을 통한 바닷길로

우회해서 귀국을 결심했다.


진 장군은 가족을 챙겼지만 아내는 중국 내륙 고향으로
다니러 가서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댓살 먹은 아들 한 명만 데리고 북한으로 들어갔다.

북한에서 며칠 머무르던 그는 다시 천신만고 끝에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남하했다.


이제 배편을 통해 귀국하여 부대로 복귀하면 되는 것이었다.

장 개석 군은 만주에서 대패 한 뒤에 계속 패주해서
중국 남부로
밀린 상태였다.

무더기 항복이 있던터에 자기같은 사람은
당연히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서울의 중국 대사관은 본국의 지시라며 귀국을

불허했다.


그는 몇 달 동안 대사관에 항의하고 국민당 군의 아는 요로에

귀국 애원의 탄원서를 수 십 번 보냈으나 기어이 귀국은 불허되었다.

장 개석의 특별 지시였다.


만주가 공산군에 빼앗기고 대세가 모 택동에게 기울자

국민당의 장군들은 앞 다투어 장 개석을 배신하고 공산군에

투항해갔다.


이들 장군들의 거개가 보정 군관학교나 중국 군벌들이 세운
군관학교 출신들이라고
공통점이 있었다.


혁명 뒤 장 개석이 교장으로 있으면서 인간적인 유대를 맺은

황포 군관학교 출신들은 이런 배신이 드물었다.


줄을 서서 모 택동 군에게 투항해간 부하들 때문에 패전한

장 개석은  큰 충격을 받고있었다.


진 사장은 아버지의 말을 빌려 장 개석은 줄을 이은 투항으로

군의 붕괴 뒤에 완전히 의심암귀(疑心暗鬼)가 되어 황포군관

출신이 아닌 다른 군관학교 장군들은 철저히 의심하고

주요 보직에서 배제했다고 했다.


여차하면 최후의 대륙 보루가 될 중국 해안의 주요 방어 거점들도

대부분 황포 군관 학교 출신 지휘관의 부대에만 맡겼다.

[일본군도 전쟁말기 힘에 부치는 중국 점령 전략을 바꾸어서

 방어선을 축소해서 중국 해안 지방만 확보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내륙의 전투는 대부분 군벌 사관학교 출신들에게  배당시켰다.


진사장의 말에 의하면 대륙에서 완전 패전하여 대만으로

철수할 때도 주로 황포군관학교 출신들 지휘관만

데리고 철수했다는 것이다.

[위의 황포 군관 학교출신 우대 정책은 100%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로서 내륙 작전을 도맡아 했던 호 종남 장군은
  황포 군관학교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성만큼 장 개석의 총애를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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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분들은 이 말을 믿기 힘들 겠지만 국공 내전 중에
각 일선 지휘관들을
불신했던 장 개석은 일선 지휘관인 장군들을
감시하는 장군들을 파견해서
배신을 감시했던 사실을 상기하면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할만하다.


이 짓은 국제적인 웃음꺼리가 되었지만 장 개석의 처지가
이렇게 절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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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정 군관 학교 출신에 공산군에게 패전해서 종적을
감추었다가
갑자기 한국에 나타나서 귀국을 간청하는
진 장군은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그 사이 이 녀석은 무엇을 했을까?
 모 택동 군에게 투항해서 세뇌를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뭐 이런 식으로 걸어 버린 것이라고 본다.


장 개석의 이런 속 좁은 짓은 국공내전에서 모 택동 군에게

끝까지 저항하다가  포로가 되었던 국민당 장군[고급장교]들이
형을 살고 1950년대 중반쯤 석방되어서 귀국길에서 참 치사하게

발휘되었다.

그들은 모 택동의 세뇌를 뿌리치고 변심없는 귀국을
강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포로 장군들은 큰 오산을 했다.

그들 장군들은 홍콩까지 왔었는데 장 개석은 이들이 공산 측에

세뇌 되어서 사상적으로 오염된 사고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어 대만 입국을 거부했었다.


포로 출신 국민당 장군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홍콩에 주저앉아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귀국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진 장군은 낯선 땅
한국에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살길을 찾아야했다.


진 장군은 장군이 할 일을 아니지만 명동에 있던 어느

화교의 중소기업에 직장을 잡아 힘겹게 살아가다가

20여년의 타향살이 끝에 대만에 가보지 못하고 한국에서 눈을 감았다.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고된 이국의 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죽으면서도 편히 눈을 감지를 못했을 것이다

진 사장은 아버지 진 장군의 한국 생활이 고달펐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버지 운명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오."


그가 한국에 데리고 온 아들은 장군의 아들로서 중국에서

누릴 수 있었던 여늬 상류 사회 편입의 덕을 보지 못하고
눈앞에
닥쳐온 생활고와 싸워야했다.


그 때 한국 사회에서 화교들에게 열린 직장문은 바늘구멍 같았다.

진 사장은 유일하게 가능했던 식당일에 체면 불구하고 뛰어 들어서

중국 요리를 배웠다.


결혼도 하고 어느 정도 기술을 마스터했다고 생각된 그는

작은 중국집을 개설해서 생활을 하며 아들들을 키웠다.


그는 비록 중국집을 하고 있었지만 장군의 아들로서 긍지만은

평생 지녀 왔던 것 같다.

그가 평소 보여준 차가운 태도는 그런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항상 굳은 표정이었던 내 고향의 그 대위 출신 사장도

비슷했던 사연으로 귀국을 거절당했던 만주 주둔의 국민당 군
부대 출신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진 사장은 자신조차도 천직으로 생각할 수없었던
중국집을
하면서도  자식들만은 훌륭하게 가르쳤다.


그 작은 가게 터에서 생긴 수입은  아끼고 쪼개 큰 아들은

대만의 의대로 유학을 보내 지금은 까오슝에서  대학병원의
정형외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고 아들 둘도 서울의 일류대학을
졸업시켜
한국화약 그룹과 엘지 그룹에서 엘리트 사원으로
잘 근무하고 있다.


진 사장의 아버지 진 장군은 만주를 그렇게 쉽게 군에 내주고

자신도 불행한 패전의 장군이 되게 만든 진 성과

귀국을 막은 장 개석에 대한 섭섭함이 평생 한 맺혔던 듯하다.


그 한을 자식에게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던 것이 진사장이

나에게 대화를 나누면서 이 비화가 첫 주제로서 

튀어 나오게 만든 것 같다.


그는 힘주어 말했다.


“앞으로 한국이 어떻게 북한과 통일이 될지 모릅니다만 ,

 절대 북한군을 학대하거나 굶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다 껴안고 직장과 생활대책을 세워주어야 통일 작업이

 순조롭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뼈에 새겨야 할 명언이다.


이 교훈은 이라크 전에서 미국이 이미 배웠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자 돈 몇푼 주고 이라크 군을
 
모두 해산시켰다.

직업을 잃은 이들 중 상당수가 테러리스트가

되어 지금도 미군을 괴롭히고 있다.
현재 미 당국자들이 크게 후회하는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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