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태평천국의 천경보위전

구름위 2013. 11. 1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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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이 남경을 점령한 것은 계호(癸好, 즉 癸丑. 태평천국은 '축'을 '호'로 고쳤다) 3년 이월 십오일(청나라 함풍 3텬 이월 십일일, 1863년 3월 20일)의 일이다. 남경은 천경으로 이름이 고쳐져서 태평천국의 수도가 되는 것은 9일후의 일이다. 비록 천경이 태평천국의 수도로 정해진 후 2일만에 광서에서 남경까지 추격해온 흠차대신 향영(向榮)의 부대가 성아래에 도착하고, 성의 동쪽 효령위에 강남대영(江南大營)을 세운다. 그후 1860녀까지, 천경성의 대부분시간은 청군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1853년 3월 31일부터 1856년 6월 20일까지, 1857년 7월 16일부터 1860년 5월 6일까지). 다만 청군은 시종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임술(壬戌) 십이년 사월초오일(청함풍 십이년 사월 이십일, 1852년 5월 18일) 상군의 부사령관, 청나라 강소포정사 증국전이 안휘 서량산에서 양자강을 건너 남진한다. 신속히 당도, 무호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사월 십삼일 강녕 판교, 말릉관, 삼차하를 취한다. 사월 십칠일, 상군 수군장령,시랑 팽옥린은 천경성 서강변두관, 강심주, 포포주를 점령한다. 전선이 천경성밖 진회하입구에 정박하고, 호성하의 입강처를 봉쇄한다. 증국전부대는 천경성내문외의 우화대에 군영을 설치한다. 천경성은 다시 청군에 포위되기 시작한다.

 

이번에 증국전부대의 진군은 처음에 청군측도 좋게 보지 않았다. 신중한 증국번은 처음에 여러번 증국전에게 명령을 내려 잠시 철군하라고 하였다. 여러 청군장수들이 보기에, 천경성의 방어는 견고했고, 홍수전은 군사에 능했고, 강소남부, 절강북부는 완전히 태평천국의 천하였다. 이수성, 이세현, 양포청등 100만대군이라고 칭하는 태평군이 있었다. 증국전은 고군(孤軍)으로 깊이 쳐들어갔으므로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불구하고 온전하게 빠져나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도박을 건 상군이 천경성 바깥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을 뿐아니라, 마침내 갑자 십사년 육월 초육일(청 동치3년 육월 십육일, 1864년 7월 19일) 마침내 천경을 함락시켰다.

 

그렇다면, "불파지성(不破之城)"이라고 불리던 천경이 어떻게 함락된 것일까?

 

"고주(孤注)"는 외롭지 않았다.

 

승리자인 상군은 태평전투이후 요란스럽게 비석을 세우고 책을 쓰는 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증국전의 사적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그가 고군으로 깊이 쳐들어간 힘들었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처음으로 천경성 아래까지 온 고군은 겉으로 보기에 확실히 '외로워' 보였다. 증국전부대는 원래 40개영을 지휘했고, 만여명의 육군이 있었다. 그러나 병력을 나누는 바람이 진정 천경성의 아래에 도착한 것은 단지 15개영 7500명이었다. 겨우 7500명으로 안으로는 수만이라고 얘기하는 천경의 수비군과 싸우면서, 동시에 밖으로는 백만이라는 강소절강의 태평군과 맞서야 했다. 확실히 단박(單薄)해 보였다.

 

다만 실제로 이 고군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

 

이 해 이월, 증국번은 천경성에 대한 전략적 대포위망을 배치하기 시작한다. 북에서 남으로 모두 8로의 대군을 배치한다. 강북 이속의 부대는 영주(부양)을 경략하고, 다륭아부대는 여주로 진군하여 강북을 제어하고, 강남 포초 부대는 강서에서 안휘남부로 들어간다, 좌종당 부대는 구주에서 절강남부로 들어갔다, 이홍장 부대인 회군은 배를 타고 상해로 간 후, 현지의 청군과 합쳐서 양인이 훈련, 지휘하는 서양총부대(나중의 상승군)과 합쳐서 강소남부로 반격해 들어갔다. 장운란 부대는 안휘남부 무원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전략총예비부대가 되었다. 이것은 단지 증국번이 직접 지휘하고 배치한 병력이다. 각성의 총독, 순무, 제진이 통수하는 청군은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이들 청군들중에도 전투력이 약하지 않은 부대가 있었다(예를 들어 강북의 원갑삼, 이세충, 도흥아 부대, 진강의 풍자재 부대등), 양강총독, 흠차대신으로서 증국번은 마찬가지로 이들 부대에 대한 지휘권이 있었다. 이 몇 로의 청군은 다륭아부대가 섬서에서 변란이 돌연 발생하여 조정에 의해 긴급하게 돌아간 외에, 나머지 각 부대는 모두 기한에 맞추어 도착했고, 전략적으로 천경에 대한 원거리 대포위망을 형성하고, 강소,절강,안휘 각지의 태평군을 견제했다.

 

전술각도에서도, 증국전의 형세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엉망이지 않았다.

 

사실상 천경성 아래에 도착한 것은 증국번 8로진군중 3로였다. 증국전부대의 선봉 15개영은 단지 그중의 1로이다. 이외에 증정간(曾貞干)의 부대 5000명, 팽옥린의 수군 8영 4000명이 있어 총병력이 16500명에 달한다. 천경성의 수비군은 비록 수만이라고 하지만, 많은 수가 비전투요원이고, 전투할 수 있는 자는 일만명가량이었다. 상군의 병력과 실제로 비슷했다. 그러나 상군은 수군의 강점이 있었고, 강하수도를 장악했다. 식량운반선을 군영까지 운송하는 외에, 병력, 양식, 군수물자의 보급도 아주 편리했다. 실제로 이미 반객위주(反客爲主)의 유리한 형세를 점거한 것이다.

 

우화대(雨花臺) 전투

 

임술 십이년 사월말, 홍수전은 연속 3도(道)의 조서를 내린다. 상해교외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있던 이수성에게 돌아와서 지원하라고 명한다. 5,6월간, 이수성은 두번 소주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천경의 포위망을 풀기 위한 배치를 시작한다. 구월 초이틀(함풍 12년 윤팔월 이십사일, 1862년 10월 13일, 태평군은 증국번부대의 진영을 공격한다. 11월 25일, 상군을 44일간 포위공격했지만, 포위망을 푸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이 전투에서 태평군은 14명의 왕을 집중시킨다(충왕 이수성, 시왕 이세현, 호왕 진곤서, 납왕 곡영관, 모왕 담소광, 청왕 진병문, 효왕 호정문, 내왕 육순덕, 수왕 범여증, 양왕 유관방, 봉왕 고륭현, 도왕 황문금, 상왕 진반무, 보왕 막사규, 항왕 당정재). 병력은 증국번이 조정에 보고한 과장된 수치로는 60만이다. 다만 증씨형제가 사적으로 주고받은 서신에 따르면 "십여만"이다. 당시 태평군이 주장하는 수치이다. 태평군은 원래 "이천오백을 만이라 칭하는" 4배통계관례가 있다. 이런 관례에 따라 계산하면 실제 포위망을 풀기 위한 전투에 투이된 태평군은 최대한 6만여명이다. 그리고, 이세현, 진곤서, 황문금의 부대는 모두 포위망의 바깥에서 견제작전을 벌였으므로, 실제 우화대전투에 투입한 병력은 더욱 적었다. 당연히, 이번 전투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허수'가 관례처럼 그렇게 크지 않았을 수는 있다. 이뿐아니라, 이들 태평군은 여러 계통에 나뉘어 속해 있고, 이수성은 그저 큰 방향에서만 지휘를 했고, 마음대로 모든 참전부대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뿐아니라, 태평군의 군수물자조달시스템은 각자 따로 해결했다. 강소,절강,안휘 각지의 태평군은 왕왕 원래의 주둔지에서 원거리 보급을 했다. 내선작전처럼 보이지만, 내선작전의 편리는 전혀 누리지 못했다.

 

태평군의 장비는 서면으로 보기에는 비교적 좋다. 증국전은 일찌기 증국번에게 서신을 보내어 태평군이 강소,절강에서 얻은 모든 서양총은 "모조리 이 곳에 있다" 안경전투의 태평군보다 '열배, 백배'이다. 그리고 '서양개화대포'등 장비가 있었다. 다만 이들 무기의 출처는 복잡했다. 대량의 밀수한 서양총, 서양대포는 짝퉁제품 혹은 열악한 제품이 있었다. 서양장교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부인에 대한 위협이 적에 대한 것보다 더욱 컸다." 그리고 태평군은 군수에서 능력이 부족했다. 배치된 화약의 초석함량이 크고 유황함량이 적었다. 이는 심각하게 총포의 사거리, 위력과 정확도에 영향을 미쳤다.

 

상군은 요지를 점거하고, 물자보충에 편리했다. 개전때 이미 이만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개전후에는 계속하여 양주 도흥아 부대 5영 2500명, 무호 왕가승 부대 상군 8영 4000명, 그리고 증국번이 직접 안경에서 보낸 400명이 있어, 총병력이 3만명이상이었다. 그리고 모든 병력은 장강변에서 삼차하구 그리고 우화대까지 일렬로 늘어서 관건인 보급라인을 장악했다. 강대한 수군은 장강, 진회하를 점거하여 우세를 유지했고, 태평군이 상군의 보급선을 포위공격하거나 절단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무기장비방면에서 상군은 비교적 약했다. 화기는 많은 것이 구식이고 서양총은 비교적 적었다. 화포도 구식 국산동철포였다, 그리고 개화탄을 발사하는 서양식 야전포, 그리고 성벽을 훼손할 능력이 있는 서양의 대구경캐논포, 포탄은 없었다. 다만, 상군의 장비는 제식화되었고, 완벽한 물자조달체계를 갖추었다. 같은 총포라고 상군의 표준화된 화약으로 총탄, 포탄을 발사하여, 보다 멀리 쏘고, 보다 정확하게 쏘았다. 태평군은 비록 "서양총, 서양포가 나방처럼 모였지만" 실제 살상력은 보는 것처럼 무섭지 않았다.

 

44일에 걸친 전투과정에서 태평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동로를 공격하는 전법을 쓴다. 여러번 상군의 제1차 방어진지를 함락시켰다. 전술적으로 참호약진, 지도(地道)공격, 탄막전이엄호 저자세포복전진등 당시로서는 비교적 신선한 전법을 써서 이렁한 효과를 거둔다.

 

상군은 지리우세, 물자조달, 수군의 3대우세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후로 여러겹으로 배치된 공세를 구축한다. 그리고 수비를 위주로 하여, 기회를 보아 반격하는 온건한 전법을 채택한다. 점차 태평군의 전투력과 예기를 소모시켜 버린다.

 

이 전투에서 상군의 전사,전상자는 3,5천명에 달한다. 게다가 전염병이 돌아서, 가장 힘든 때는 '환자가 만여명에 이르렀다'. 원기를 크게 상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보급라인이 잘 유지되어, 군수물자가 적시에 도착하고, 새로운 병력이 계속 충원되었다. 전투력은 금방 회복된다. 태평군은 공격측이므로 사상자는 상군보다 훨씬 많았다. 다만 전투 자체로 말하자면 패전하지는 않았다. 지구전을 펼칠 수 없었던 주요원인은 지휘계통이 문란하고, 군대구성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전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부 참전군대의 후방은 각로 청군에 의해 포위하거나 잠력되었다. 나머지 각로는 물자조달압력에 힘들어 하고 있어, 장기간 원정을 지원하기는 어려웠다.

 

우화대를 점령하고, 성외 거점을 장악하다.

 

우화대전투후, 태평천국방면에서는 엄중한 전략적인 의견차이가 나타난다. 의견차이의 쌍방은 천왕 홍수전과 총사령관 이수성이다.

 

기실, 적의 상황이 심각하고 자신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하여는 쌍방의 분석이 일치했다. 홍수전과 이수성은 모두 인정했다. 태평군의 군수조달능력이 안되어 대병력을 천경선 밖에서 장기간 전투를 벌일 수가 없다고. 그리고 상군은 이미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하여 속전속결로 궤멸시킬 수 없다고, 다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에 대하여 쌍방의 의견차이는 아주 컸다.

 

홍수전의 주장은 "진북공남(進北攻南)"이었다. 즉 이수성의 전군이 도강하여 북상하고, 양회(兩淮)의 사이에서 병력을 모집하고,양초를 수집하여 당시 한중과 하남,안휘변방일대에서 활동하던 태평군 진득재,마융화등의 부대와 회합하여 함께 남하하여 포위망을 뚤흔 것이었다. 이수성은 그러나 다르게 주장한다. 강소남부, 절강북부이 태평군을 원래의 주둔지로 돌여보내고, 먼저 침범한 이홍장, 좌종당등 각로 청군을 격패시키고. 다시 병력을 되돌려 천경성 아래오 오며, 천경방면에서는 계속 성벽과 성밖의 거점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전략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진북공남"은 청나라조정의 핵심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조정은 반드시 증국번에게 북방을 신경쓰도록 명령할 것이다. 효과적으로 천병성 아래의 병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 그리고 진, 마 두 부대의 병력은 웅후하고, 전투력도 약하지 않다. 일단 회합하면 실력이 크게 늘 것이다. 다만 이 전략의 최대 폐단은 당시 양회가 염란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일찌감치 적지천리(赤地千里)이고, 현지 지방관리는 견벽청야의 경험이 풍부하여, 태평군의 대병력은 작전시 식량위기에 부닥친다. "근본을 돌아본다"는 것은 강소,절강기지가 지나치게 일찍 침색되는 거을 말을 수 있고, 태평천국이 비교적 장기적인 생력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만 병력분산은 쉽지만, 다시 합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우화대전투이전에 천왕은 엄격히 조서를 내린 바 있다. 이수성이 열심히 노력하여, 각로인마를 모으는데 4개월을 시간을 들였다. 이때 강소,절강의 상황은 이미 심각하여 더욱 어려웠다. 두 가지를 비교형량해보면, '진북공남'의 리스크는 확실히 더욱 크다. 그리고 홍수전과 이수성이 싸운 결과 태평군은 이 리스크가 더욱 큰 방안을 선택하게 된다.

 

'진북공남'은 1862년초부터, 다음해 9월말에 끝나기까지 태평군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배고품과 추위로 외부에서 전투하는 과정에서 수만의 정예병사만 잃는다. 이로 인하여 천경성밖의 상군에 대규모 공격전투를 벌일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홍수전이든 이수성이든 모두 천경성 수비군의 방어능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계개(癸開, 즉, 癸亥, 태평천국은 '해'를 '개로 고쳤다) 13년 오월 초하루날 (청 동치2년 사월 이십칠일, 1863년 6월 13일), 증국전 부대의 한장(悍將) 소부사(蕭浮泗), 이신전(李臣典)등은 기병으로 우화대 요새를 기습한다. 요새를 수비하는 장수는 홍수전의 조카인 대왕(對王) 홍춘원(洪春元)이었다. 홍춘원은 홍씨친족중에서 전투를 잘하는 편에 속했고, 일찌기 전공을 세운 바 있다. 다만 그는 강북에서 막 전근해오고, 소홀히 하는 바람에 우화대는 손쉽게 격파된다. 상군은 이 전투에서 겨우 1명이 죽었을 뿐이다. 상군은 승리를 틈타 확장한다. 우화대 이북의 여러 군영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남문(취보문, 지금의 중화문) 바깥까지 밀고 들어간다. 천경성과는 장간교(長干橋)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우화대의 함락은 홍수전과 성내의 태평군을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그들은 아직 강북에 있는 이수성 부대에게 돌아와서 지원해달라고 명령한다. 그 결과 이수성 부대는 불어난 강물에 막혀서, 손실이 아주 컸다. 상군의 수군 양악빈 부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월 십팔일(청 동치2년 오월 십오일, 1863년 6월 30일) 천경성의 북쪽, 대강의 위에 있는 가장 중요한 장벽 구보주(九洑洲)를 점령한다. 그 이전에 하관(下關), 연자기(燕子磯)등도 차례로 함락된다. 이제 태평군의 장강방어선은 중관난강기의 몇 킬로키터밖에 남지 않았고, 천경성은 거의 완전하게 포위된다.

 

이때 천경성 밖에는 태평군이 여전히 동남으로 말릉관에서 영화진까지, 서남의 강동교 박망진등의 거점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로가 단절되어, 보급이 불편했고, 성내의 군수물자도 이미 고갈되었다. 상군은 수로를 장악한 후, 성의 남쪽 육로의 태평군거점을 소탕하기 시작한다. 오월 이십일일 장간교를 점령하고 남문밖에 군영을 설치한다. 칠월 삼십일일과 팔월 십이일, 전후로 천경 동남, 서남의 쇄월상방교, 강동교를 점령한다. 구월, 상군의 지원군 주홍장등이 도착한다. 여닝어 박망진, 상방문, 고교문, 쌍교문, 말릉관, 중화교를 점령한다. 십월 초나흘(청 동치2년 십월 초육일, 1863년 11월 16일) 순화, 해계, 융도, 호숙, 삼차진도 상군에 점령당한다. 9일후 상군은 효릉위에 진주한다. 이때부터 태평문 밖의 천보성, 지보성이 태평군의 수중에 있고, 성북의 신책, 금천 두 문이 중관과 현무호의 엄호로 청군이 완전히 봉쇄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상군은 이미 천경 11개 성문의 아래까지 밀고 들어왔다.

 

천경성의 고주(孤注)

 

이때 천경성은 하나의 고성(孤城)이 되어 버린다.

 

"상승군"의 도움하에 서양총과 서양대포를 장비한 이홍장 부대의 회군(淮軍)이 강소남부를 소탕하기 시작한다. 좌종당 부대의 상군(湘軍)이 절강에서 계속 승리한다. 소주, 무석, 단양, 항주, 상주, 가흥등의 성이 1863년말에서 1864년초에 차례로 함락된다. 천경성 바깥의 백리 범위내에 자금산 제3봉의 천보성(天保城)과 태평문밖 용박자의 지보성(地保城) 외에 태평군의 요새는 이미 없어졌다.

 

강소절강 기지가 차례로 함락된 후에도, 태평군의 이수성, 이세현, 양보청, 황문금등 부대는 강남에 여전히 수십만이 남아 있었다. 다만 호주(湖州), 광덕(廣德)의 두 거점을 제외하고, 이미 이정도 수량의 군대와 가족을 먹여살릴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이들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고, 사기가 저하된 장병들을 일찌감치 적의 천지로 변한 천경의 포위를 풀도록 가게 할 수는 없었다. 이수성은 그저 혼자서 천경성으로 들어가서 성의 방어를 지휘하고, 이세현은 강남 태평군 주력을 이끌고 강서로 가서 양식을 취하고, 황문금등의 부대를 남겨서 호주, 광덕을 지키게 하는 외에 천경을 호응할 힘은 없었다. 강북에는 태평군 진득재, 마융화등의 부대에 의탁해온 염군(捻軍)이 있어 말로는 이십만이라고 하였다. 한중에서 남하하여 천경을 구하러 온다. 그러나 몇 로의 청군이 호북, 하남, 안휘의 접경지역에서 저지하여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사실상, 당시의 전장형세로 보면, 이들 태평군이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회전의 결과는 우화대의 전투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을 터였다.

 

태평군 수성병력은 만여명이라고 하였지만, 이때 싸울 수 있는 자는 3,4천에 불과했다. 십일월 초팔일(청 동치2년 십일월 초십일, 1863년 12월 20일) 이수성이 천경으로 돌아온 후 성내의 총사령관이 된다.

 

이때, 증국전부대의 상군은 이미 50000명으로 증원되었다. 군수물자의 조달은 더욱 잘 이루어졌고, 장비도 대거 개선된다. 그리고 성벽아래까지 진격해 들어가서 성을 직접 공격할 수 있게 된다.

 

계개 십삼년 십일월 초삼일(청 동치2년 십일월 초오일, 1863년 12월 15일), 상군은 제1차로 천경 성벽을 공격한다. 혈지공성폭파법으로, 성북쪽 신책문 부근의 성벽 십여장을 무너뜨린다. 상군 선봉은 용감하게 성에 오르나, 태평군에 격퇴된다. 사상이 참중했다.

 

갑자14년 정월 십칠일(청 동치3년 정월 이십일일, 1864년 2월 28일), 이수성은 결사대를 이끌고 조양문을 돌파하여 효릉위의 상군대영을 기습하고자 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상군 주홍장, 무명랑 부대는 이 기회를 틈타 천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이십일, 상군은 신책문, 금천문의 두 문에 진주하는 외에, 이제 천경성 13개의 성문은 모조리 둘러싸인다. 천경성은 완전히 포위된 것이다.

 

상군은 천경성을 여러번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한다. 방향을 바꾸어 봉쇄하면서 수로를 중점적으로 봉쇄한다: 상하의 민선(民船)은 삼일에 1번 통행하도록 허용한다. 그리고 상군수군이 포선으로 호송한다; 녹영(綠營) 계통의 홍단선(紅單船)은 양식을 밀수하여 천경성내에 공급하는 주요경로였다. 상군은 각종 수단을 써서, 홍단선을 천경의 강에서 몰아낸다. 이제 또 다른 밀수통로인 외국상선과 전함이 있지만, 상군이 저지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고가로 매수하는 방법을 서서 미리 상,하류의 외국선박의 양식을 모조리 사버린다. 이런 방법은 효과를 발휘한다. 원래 양식이 부족했던 천경성내는 곤경에 빠진다. 홍수전은 이수성의 '성을 버리고 떠나자'는 포위망돌파건의를 거절하고, 전체 성에 "첨로(甛露, 즉 들풀)"를 먹어서 배고품을 이기자고 명령하며, 그 스스로 시행한다. 그러나 들풀을 먹다보니 오공중독(蜈蚣中毒. 지네중독)으로 병이 위급해진다. 사월 이십일(청동치3년 사월 이십팔일, 1864년 6월 2일) 홍수전이 병사한다.

 

이십사일,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貴福)이 즉위한다. 그리고 성의 방어계통을 개조하여, 여섯 주수(主帥)가 전체 성의 방어를 책임진다(대주수 이수성, 부주수 기왕 황금애, 동방주수 사왕 오여효, 서방주수 대왕 황정충, 남방주수 유봉량, 북방주수 양왕 길경원).

 

오월 이십일일(청 동치3년 오월 삼십일, 1864년 7월 3일), 천경성 밖의 최후요새 지보성이 상군에 함락당한다. 이때부터 중관(中關)외에 천경성 밖에는 이미 태평군거점이 없어진다. 상군은 밤낮으로 동,북 양쪽에서 지도(地道)를 파고, 여러 곳에 폭약을 터트려 성벽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그중 금천문 일대의 유연첩 부대는 3개를 판다. 신책문이북의 장시일부대는 2개를 팠고, 신책문 정면의 주남규 부대는 6개나 팠다.

 

태평군의 수비장수들은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노장들이다. 경험이 아주 풍부했다. 그들은 옹청(甕聽), 월성(月城) 축성, 지도(地道)를 파는 방법등을 채용하여 대부분의 지도를 이런 방법으로 파괴했다. 오월 십칠일, 신책문의 지도 1개가 폭발하나 성벽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육월 초사일, 신책문 부근의 또 다른 지도가 성벽에 구멍을 하나 낸다, 다믄 구멍으로 쳐들어가던 청군결사대는 수비군의 화약을 맞아 모조리 타죽는다. 상군은 연일 맹공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사상자가 수도 없이 많이 나왔다. 명장 진만승, 왕소의, 곽붕정, 웅조ㅓㄱ, 웅조사, 장지무, 주역재, 주이승등이 모조리 전사한다.

 

그러나, 지보성의 함락은 국면을 더욱 악화시켰다. 지보상의 지세가 건너편의 남경성벽보다 높아서, 청군이 지보상 위에 대포를 걸어놓고 밤낮으로 성안을 포격했다. 그래서 수비군은 성벽 위에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성벽에 가까이 다가와서 지도를 파는 청군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육월 초오일 밤, 사태가 위급해졌다는 것을 안 이수성이 결사대 수백명을 뽑아서, 태펑문, 조양문의 두 문으로 치고 들어가서, 상군지도를 파괴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육월 초육일(청 동치3년 육월 십육일, 1864년 7월 19일), 태평문밖의 용발자지도에서 폭약이 폭발한다. 상군이 밀물듯이 몰려 들어간다. 태평군은 비록 용감하게 응전했지만, 이미 강노지말(强弩之末)이다. 전투가 저녁에 이르자, 각 성문은 모두 상군에 점령된다. 성밖의 중관도 함락된다. 이수성은 수천명을 이끌고 유천왕을 옹호하여, 상군이 무너뜨린 용발자 성벽 구명으로 변장하고 포위망을 돌파한다. 이수성은 포위망돌파후 좋은 말을 유천왕에게 넘겨주어 일행에서 떨어지게 된다. 방산에서 포로가 된 후 증국번에게 처형당한다. 유천왕은 광덕까지 도망쳤고, 나중에 홍인간, 황문금 부대등을 따라 강서로 들어간다. 강서의 석성에서 패배하여 죽는다.

 

공견지난(攻堅之難)

 

상군의 천경공격전투는 전후로 2년2개월이 걸렸다. 사상자는 수만명에 이르고, 최종적으로 성내의 수비군을 전멸시키지도 못했다. 유천왕이라는 이 '적의 괴수'가 포위망을 돌파하도록 했다. 견고한 성을 공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어려웠던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태평군 방면에서 성안의 병력은 많지 않았다. 주민, 가족들이 3만에 불과했다. 전투병은 최후에 겨우 3,4천에 불과했다. 다만 사람이 적다는 것은 소모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첨로'를 먹는 상황하에서도 어렵게 오랫동안 버텨낼 수 있었다. 태평군 자신은 성내의 영성에 보리를 심고, '청황십여리'에 달한다. 부분적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했다. 성안에 비록 병력이 많지 않았지만, 명장들이 많고, 총사령관 이수성은 명망이 있었다. 그래서 수군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휘하의 오여효, 길경원, 황금애등도 모두 한 방면의 재능이 있는 자들이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싸우니, 청군도 일시에 어쩔 수가 없었다.

 

둘째, 남경성벽은 '천하제일명성'이라 불리웠다. 성밖의 거점을 처음에는 태평군이 많이 장악하고 있었다. 상군은 성밖을 청소하는데 많은 시간, 병력을 소모하여 성을 함락시킬 시기를 놓친다.

 

상군측면에서는 병력이 가장 많을 때 오만에 불과했다. "사십리반"이라는 남경성을 포위공격하기에는 확실히 적은 숫자였다. 성벽을 파괴할 수 있는 중형공성포가 없었고, 대량 살상력을 지닌 서양 유탄포도 화력으로 직접 성을 격파할 수 없었다. 그저 시간을 들여서 혈지공성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태평군도 마찬가지로 이런 전통적인 공성기술에 능하기 때문에 혈지공성을 방어하는데 기술이 있었다. 그러므로 상군이 여러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다. 성밖의 거점을 모조리 점거하고, 성밖의 고지를 점령하고나서야 겨우 난관을 넘기게 된다.

 

그러나, 상군의 물자조달체계는 완비되었고, 총사령관 증국번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느긋하고 온건하게 싸웠다. 취한 방법은 먼저 전략적인 대포위를 완성하고, 다시 외곽을 소탕하고, 성안의 보급로를 절단한 후, 마지막으로 공성을 하는 전법이었다. 비록 시간은 많이 걸렸고, 댓가를 치렀지만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청군이 화력으로 성을 함락시킬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회군의 병력은 이미 150영 7만명으로 늘어났고 전부 서양총으로 무장했으며, 중국국적의 서양인장수 필립 피넬(Philip Pinel, 중국명 畢乃爾)이 사령관으로 배속되어 있고, 캐논포와 유탄포를 갖춘 '필내이포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상군이 오랫동안 공성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청나라조정은 이미 회군 14000명과 필내이포대를 지원하도록 명하였다. 증국전등 상군장수는 '이년동안 고생한 것을 남에게 넘길까" 우려해서, 댓가를 따지지 않고 강공을 해서, 회군, 포대가 도착하기 전에 천경을 함락시킨 것이다.

 

이것은 청하제일명성 남경이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전투방법에 의해 함락된 경우이다; 1911년 신해혁명때 강소절강연합군이 청군이 지키는 남경성을 포위공격한다. 먼저 천보성을 점령하고 그 후에 천보성에 신식 유탄포를 설치하여 성내의 부귀산, 북극각등 고지를 포격한다. 독전하던 청군대장 왕유굉이 포탄에 맞아 죽는다. 그리하여 수비군사들은 투지를 상실하고 성을 열고 도주한다. 신해전투때부터, 남경성의 공방전은 진정한 현대전쟁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