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쯔원 (宋子文, 송자문)
1894년 12월 4일 생 - 1971년 4월 25일 사망
쑹가(宋家) 세 자매로 유명한 쑹씨집안에서 아버지 쑹자수의 장남이었던 쑹쯔원은 상하이에서 태어나 상하이의 세인트 조셉
대학을 수학한 후 1912년에 미국으로 건너 가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1915년에 경제학 석사를 취득했다. 그리고 다시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해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컬럼비아 대학시절에 뉴욕에서 은행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1917년에 귀국하여 화의(華義)은행 총경리로 일한 쑹쯔원은 아버지가 쑨원의 후원자였기에 쑨원과 결혼한 누이 쑹칭링의 추천으로
1923년에 쑨원에 의해 광둥으로 초빙되었다. 광둥 국민정부에서 세금업무와 광저우 중앙은행장으로 일한 쑹쯔원은 국민당의 재정을
담당했다.
쑨원의 사후 국민정부 재무부장으로 취임하고 광둥성 재무청장도 겸임한 쑹쯔원은 정부의 재정통일을 추진하여 1924년에
약 798만원의 국가수입을 1927년에는 약 1억 876만원으로 급증시켰다. 장제스의 북벌성공 후, 국민정부위원과 재무부장,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한 그는 난징 국민정부의 요직을 담당했었다.
쑹쯔원은 난징 국민정부에서 재정 및 경제개발부문에서 활동했는데 재정부장으로 재직시인 1930년과 1933년에 관세개혁을 단행했다.
당시 중국은 관세자주권이 없어서 중국은 수입품에 대해 낮은 관세율을 매길 수 밖에 없었는데 열강과의 개정협상결과, 일부의 관세
상승을 주도했다.
또 염세(塩税)를 통일하고 1931년에 지방채권을 폐지하여 국민정부의 재정강화에 힘썼다. 또 상하이의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스스로
총재가 되었다. 화폐개혁을 추진하던 중 재무부장을 사임하는 바람에 후임은 매형인 쿵샹시가 맡게 되었다. 쑹쯔원은 영국과 미국에
협력적이었지만 한편 일본과는 매우 비협조적이었다고 한다.
닌징정부 내에 왕자오밍 같은 친일주의자가 세력을 얻자 쑹쯔원은 자리를 잃었다고도 하는데 재정부장을 사임한 후 전국경제위원회의
실권자로서 중국 국내의 교통, 농업개발에 나선 그는 중국전체 산업에 관료주도의 자본배당으로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쑹쯔원은
중국건설은행공사와 중국은행을 설립하여 중국 경제계의 자립화를 꾀하였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쑹쯔원은 대중지원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 가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전에
몇 차례의 자금지원을 얻어내어 1941년에는 공군전력(이른바 플라잉 타이거즈)의 지원도 이끌어냈다. 1941년 12월에 일본의 진주만
공격 후 미국이 참전하자 쑹쯔원은 외교부장이 되어 미국과 연합국의 협상역을 맡았다. 종전직전엔 행정원장을 지냈다.
쑹쯔원은 1945년 7월에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중소우호동맹조약의 체결을 위한 협상을 담당했다. 얄타회담의 밀약에 근거해
동북지방의 일본(만주국)의 권익양도와 외몽고의 독립승인을 요구하는 스탈린에게 쑹쯔원(장제스의 대리인)은 반발하여 외몽고의
독립은 승인하는 대신에 소련에 의한 중국 공산당 지원과 뤼순, 다렌항, 만주지역의 철도공동이용 등을 내세우며 중국측의 관할을
주장했다.
포츠담 회담을 위해 협상은 중지되어 8월 상순에 다시 협상은 재개되었는데 스탈린은 다소 양보를 제시했지만 소련측은 만주로의
군사침공으로 우위에 서 있었고 장제스의 지시도 있어서 8월 14일에 조약을 체결하는 약정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중국은 전후
혼란과 국공내전으로 인하여 쑹쯔원은 쑹가 가문의 부패와 권력독식에 대한 비판으로 1947년에 행정원장을 사임했다.
1947년 10월부터 광둥성의 정무주석이 되었지만 경제혼란은 여전하여 역으로 관료주의를 통한 폭리가 비판되면서 1949년에
장강을 넘어 인민해방군이 침공해오자 쑹쯔원은 홍콩으로 이동한 다음 6월에 미국의 뉴욕으로 건너갔다. 이후 대만에서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만으로의 복귀요청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이후 쑹쯔원은 1963년에 몇 번 대만을 방문한 다음 미국에서 생활했는데 1971년에 샌프란시스코를 방문 중 사망했다.
쑹메이링 (宋美齢, 송미령)
1897년 3월 5일 생 - 2003년 10월 23일 사망
1897년(출생년도에 관해서는 1898년, 1901년 등 각 설이 있다)에 청나라 상하이에서 쑨원의 후원자였던 아버지 쑹자수의
3녀(3남 3녀 중 4번째)로 태어난 쑹메이링은 위로 쿵샹시의 아내가 된 쑹아이링, 쑨원의 아내가 된 쑹칭링과 함께 쑹가(宋家)
세 자매로 유명하다.
9살 때 언니인 쑹칭링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하여 조지아 주 메이콘의 교급주택가에서 생활한 그녀는 이 때 익힌 유창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후에 정치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학내행사에서는
학생을 대표하여 기수를 맡거나 치어리더로 활동했다.
조지아 주의 고교를 졸업한 후 메이콘의 웨즐리안 여자대학에서 1년간 재학하면서 메사추세츠 주의 명문 여자대학인 웰즐리 대학에
입학해 1917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 때 미국계 프리메이슨회의 관계로 <이스턴 스타>의 플래티넘 회원이 되었다고 알려져있는데
중국으로 귀국한 후 포교활동에 열심이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중국 국내에서 기독교 포교활동에 종사했다.
1920년에 훗날 중화민국 국민당의 당수가 되는 지도자인 장제스(蒋介石)와 상하이 시내의 쑨원 자택에서 만난 후 약 7년간의 교제를 거쳐
1927년 12월 1일에 결혼식을 올린 쑹메이링은 당시 중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두 사람의 결혼소식은
뉴욕 타임즈의 1면을 장식했었는데 일부는 정략결혼으로 비유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일반적인 연애결혼이었다.
12월 1일에 거행된 결혼식은 쑹가의 저택에서 기독교 방식으로 열렸는데 장제스가 이혼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목사는 부르지 않고
중화크리스트교 청년회 전국협회 총회장을 대리인으로 세운 후 식을 거행했다. 한편 장제스는 망명지였던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린
쑨원을 모방하여 결혼식을 일본에서 거행하려고 생각했었지만 중일간 관계악화와 어머니의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피로연은 상하이의 공동조계에 있었는데 상하이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고급호텔이던 따후아 반점(大華飯店, 마제스틱 호텔)내의
가장 큰 연회장에서 열렸다. 여기엔 고인이 된 쑨원의 초상화와 중화민국의 국기, 당기가 장식되었으며 참례자는 일본과 독일, 미국 및
벨기에를 비롯한 각국의 총영사와 중화민국의 정재계 유력자 등 1,300명을 넘었다.
그 후 쑹메이링은 장제스와 함께 저장성(浙江省)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한편 장제스는 쑹메이링과의 결혼당시 양친에게 승낙을
받기 위하여 첫 아내와 많은 애인들과 헤어진 후 쑹메이링과 그 양친에게 같은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장제스는 결혼식 후인 1929년에 상하이의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었다.
장제스와 결혼식을 올린 쑹메이링의 모습.
정제스는 결혼 이듬 해인 1928년에 국민당군 총사령관의 위치로 돌아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주석, 국민정부 주석이 되었는데
쑹메이링도 1930년과 1932년 사이에 장제스의 지원아래 중화민국 입법원의 위원이 되었으며 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회원이 되어
국민당 내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6년 12월에 일어난 시안사변에서 장쉐량의 군에게 체포되어 감금당한 장제스의 해방을 위해 스스로 시안으로 날아가 장쉐량과
담판하여 장제스의 해방을 촉구함과 함께 국공합작으로 항일통일전선을 장제스에게 체결하게 하는 등 평생동안 장제스의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군사원조 획득을 목표로 국민당 항공위원회 비서장의 직함으로, 장제스의 통역으로서
중국주재 미국대사관 무관이던 조셉 스틸웰과 미육군항공대의 셰넌트 대령과의 협상에 동석하여 미국으로부터 유무형의 군사지원을
이끌어 내 중일전쟁부터 제 2차 세게대전의 초기에 걸쳐 일본군과 대치했던 플라잉 타이거즈의 설립과 중국공군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자매가 웰즐리 대학의 졸업생이었기에 <타임>과 <라이프>지의 발행자였던 헨리 루스는 중일전쟁 기간동안 반일 캠페인과 함께
대중 지원활동을 벌여 타임지의 1937년도판에 장제스를 소개하면서 미국시민들의 중국지원을 호소하는 등 쑹메이링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3년에 미의회에서 연설중인 쑹메이링의 모습.
쑹메이링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그의 아내인 엘레노어와의 관계를 구축하여 중일전쟁으로부터 제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일정책에도 큰 영향을 행사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11월부터 1943년 5월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초빙으로 미국으로 건너 간 쑹메이링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스스로 영어로 연설하며 항일전의 원조를 설파했다.
특히 1943년 2월 18일에는 워싱턴의 미연방의회에서 보석으로 만든 중화민국 공군의 뱃지를 부착한 차이나드레스 모습으로
항일전의 협력을 요구하는 연설을 하여 연방의원들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항일전의 의연금 모금을 위해 캘리포니아 주
헐리우드에서 연설시엔 메리 픽포드,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잉그리트 버그만 등의 유명배우들의 지원도 받았다.
또 항일전의 상징적 존재로서 장제스와 함께 타임지의 표지 등에도 실리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중화민국의 퍼스트 레이디로,
그리고 영어를 하지 못하는 남편 장제스의 비서 겸 중화민국의 로비스트로 활동한 쑹메이링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서 일본에 대한
세간의 여론을 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43년 11월에 카이로에서 열린 장제스와 루즈벨트, 처칠과의 회담 시 전후 대일처리문제를 결정할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와
동석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루즈벨트 대통령과 친교를 유지했는데 1945년 4월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후임인 트루먼이 취임하자 관계는 소원해졌다.
8월에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중국 내의 일본군은 항복하여 순차적으로 철수했는데 얼마 후 소련의 지원을 받은 중국 공산당과
사이에서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장제스는 군사원조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의뢰했지만 소련의 스파이가 정권내부에 깊이 침투해있던
트루먼 정권은 장제스와 거리를 두기 시작해 역으로 군사원조를 삭감했다.
동북지역을 상실한 후 국민당군은 패주를 거듭하여 1949년에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국민당 간부들과 함께 타이완 섬으로 후퇴하여
타이페이(台北)를 임시수도로 정했다. 중국대륙에서는 베이징(北京)을 수도로 하는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때 언니인 쑹칭링은 중화인민공화국에 협력하여 부주석이 되었기에 두 자매의 관계도 끊어지고 말았다.
1949년, 장제스와 함께 대만에 도착한 쑹메이링의 모습.
1950년에 중화부녀반공항소연합회(中華婦女反共抗蘇聯合会)를 설립한 후 회장에 취임한 쑹메이링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연합
가입반대를 위해 국내외로 활동하는 등 냉전 하에서 반공활동을 이어나가 중국 공산당 정부와 대립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반공으로 국가 재통일을 꿈꾼 장제스를 미국과 서방국가가 지원하도록 활동했다.
이러한 정치활동과 병행하여 기독교도로서 국제 적십자 운동의 활동에 활발히 참가하여 지원을 얻어내는 한편으로 국내외의
각종 보수단체 지원 및 미국과 서방국가들에게 중화민국과 장제스를 어필하면서 로비하여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를 통해
중화민국의 동향을 세계에 크게 알렸다.
1975년 4월에 장제스가 사망하면서 장제스가 전처인 마오푸바이(毛福梅)와의 사이에서 둔 장남인 장징궈(蔣經國)를 국민당 주석 겸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취임시켜 당내 지지기반을 확립한 쑹메이링은 차기 총통취임으로의 준비를 진행했다. 하지만 야당의 공격으로
정치적 기반이 약해지자 쑹메이링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1950년에 형부였던 쿵샹시가 구입한 뉴욕 주 롱 아일랜드의 대저택에서 생활했다.
1978년에 장징궈는 제 5기 총통대행이던 옌자강(厳家淦)의 임기만료와 더불어 제 1회 국민대회에서 제 6기 총통으로 지명되어
장제스의 뒤를 이었다. 쑹메이링은 이후에도 정치적 야심을 가져 국민당내의 보수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1981년 5월에
언니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명예국가주석이 된 쑹칭링이 위독시 쑹메이링의 방문을 중화인민공화국 측이 타진했지만 대만과
적대관계가 이어지던 상황이어서 이는 거부되었다.
1986년에 장제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타이페이에서 열리면서 미국에서 귀국한 쑹메이링은 이후 대만에 거주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의 회복을 노렸지만 장징궈는 자유선거의 실시와 계엄령의 정지 등 중화민국의 민주화를 서서히 진행했다. 장징궈가 1988년에
사망하면서 부총통이며 대만출신이던 리덩후이(李登輝)가 후계자로 주석에 취임하는 것에 쑹메이링은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7월에 리덩후이가 총통에 취임했는데 쑹메이링은 리덩후이의 국민당 주석취임 문제에도 직권으로 전화하여 압력을 행했지만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민주화를 진행한 리덩후이는 이를 물리쳤다. 리덩후이는 쑹메이링이 반민주적인 인사와 압력을 행사한다면서
그녀를 공격했는데 결국 쑹메이링의 정치적 기반은 약해지고 말았다.
그 후에도 친일정책과 대만 섬의 독립화를 추진하던 리덩후이와 쑹메이링은 더욱 거리가 벌어져 쑹메이링은 1991년 9월에 다시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 때 고령으로 인해 정치활동은 감소했지만 1995년 7월에 제 2차 세계대전 종결 50주년 기념식 참가를 위해
미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워싱턴을 방문하여 연설한 후 그 해 생애 마지막으로 중화민국을 방문했다.
이후 고령으로 다시 정치활동에 등당하지 않았지만 2000년 3월의 중화민국 총통선거에서 국민당 후보인 렌잔(連戰)의 지지를 문서로
표명했던 쑹메이링은 정치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하지만 선거에서 렌잔은 리덩후이가 민 민진당의 천수이벤(陳水扁)에게 패하여
중화민국 사상 처음으로 여당후보가 총통직을 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
쑹메이링은 롱 아일랜드의 저택을 처분하고 쿵샹시의 유족이 건물 등으로 구입한 뉴욕 주 맨하탄의 1830년에 축조된 고급아파트로
이주하여 이전 중화민국 시절부터 수행한 경호원과 간호사, 요리사와 함께 생활했다. 이 아파트는 9층과 10층의 전체 1,000평 가운데
객실 18개, 침실 7개, 욕실 8개, 하인용 객실 4개, 항구가 보이는 전망대, 20명 이상 동시입장 가능한 식당,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다.
2003년 10월 23일에 맨하탄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105세를 일기로 타계한 쑹메이링의 사망소식은 <적국>이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이던 자친링(賈慶林)으로부터 조문이 보내졌다. 또 많은 시민들이 중정기념당에 모여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 쑹메이링과 관련한 에피소드
1. 미국유학시절, 쾌활했던 쑹메이링은 때때로 장난을 즐겨 이를 무마하기 위해 교모한 언변으로 자주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친구와 싸워 교사에게 혼날 때에도 <아녜요 선생님, 전 끝을 봐야 즐겁답니다>라며 애교있게 대답했다고 한다.
2. 장제스의 해방을 위해 장쉐량이 그를 구금한 시안으로 날아갔을 때 비행기가 착륙함과 동시에 핸드백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는
<만약 장쉐량이 나를 체포한다면 이 권총으로 그놈을 쏠테야>라고 말하면서 만약 장제스가 풀려나지 않고 자신도 구금될 경우
장제스와 자살할 각오였다고 밝혔었다.
3. 1938년 1월 5일에 미국의 지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엔 당시 난징에서 탈출한 쑹메이링에 의해 쓰여진 상하이 - 난징사이의
일본군 행태를 도살자라 묘사한 기술이 있다. 그리고 미국에 주문한 비행기가 오지 않는다면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4. 아시아의 맹령한 여성을 가르키는 <드래곤 레이디>는 1930년대에 영어로 정착했다. 이것은 마담 창카이섹(장제스의 광둥어 발음)
으로 알려진 쑹메이링이 미국 및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한 시기로 이전에 드래곤 레이디를 칭할땐 청나라의 서태후를 지칭했었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 유행한 만화 <테리와 해적들>에서 주인공의 위기를 구하는 마녀 <드래곤 레이디>는 쑹메이링을 모델로 했다.
5.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미국체재시 백악관이 수배한 경호원을 장사치로 이용하여 백악관의 면 시트를 하루에 4번 교환한 후
이를 타임지의 창업자 헨리 루스가 설립한 지원단체인 <유나이티드 차이나 릴리프>의 기부금으로 헌납했지만 모피와 보석 등을
구입하기도 하여 공사를 혼동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6.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시어도어 화이트는 쑹메이링을 가리켜 <냉담한 애인타입의 여성이었다>라고 밝혔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의
차남인 엘리엇 루즈벨트는 <장제스 부인은 남자의 관심을 얻는 것에만 열중이어서 지금은 그것이 제 2의 성격으로 굳어져 있다.
원래 성격은 매우 무서운 자로 보는데 솔직히 말해 두렵다>라고 증언했다.
7. 만년에 쑹메이링은 중국화의 그림과 산보로 일과를 보냈으며, 교회의 예배는 거르지 않고 꼭 참석했다고 한다.
8. 쑹메이링이 미국에서 다시 대만으로 왔을 때 중화민국 정부는 쑹메이링의 전용차로서 캐딜락 리무진을 타이페이에 대기시켰다.
이 차는 현재 타이페이 교외에 있는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사저인 사림관저(士林官邸)에서 관광객을 위해 공개되고 있다.
9. 현재 중국 난징시 교외에 있는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주거했던 국민정부 주석공저, 일명 메이링궁(美齡宮)은 관광객을 위한
명소로 공개되고 있다.
10. 쑹메이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원활동으로 인하여 1966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쑹칭링 (宋慶齢, 송경령)
1893년 1월 27일 생 - 1981년 5월 29일 사망
부호인 쑹자수(宋嘉樹)의 차녀로 상하이에서 태어난 쑹칭링은 상하이 중서여숙(中西女塾)을 졸업한 후 1907년에 14세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조지아 주의 웨즐리언 대학에서 문학학사를 취득한 후 1913년에 귀국했다. 1914년부터 부친이 지원했던
쑨원(孫文)의 영문비서로 일했다.
쑨원은 1915년 10월 25일에 도쿄에서 쑹칭링과 재혼했는데 결혼당시 쑨원은 쑹칭링보다 26세 연상이었고 전처인 루무전(盧慕貞)의
사이에서 자녀가 있는 것에 의해 반대를 받았지만 쑹메이링(宋美齢)의 찬성을 얻어 자택이 있던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향한 후
쑨원의 이혼이 성립한 다음에 결혼하였다.
쑨원과의 혼인 후 쑨원의 활동을 지원한 쑹칭링은 1922년에 첸종밍(陳炯明)이 쑨원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6.16 사변시 아이를
유산했다. 쑨원이 사망한 후 1926년 1월에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취임한 쑹칭링은 1927년에 장제스가 지도하는 난징정부가
상하이에서 4.12 사변을 일으켜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끊으려하자 쑨원의 연아용공(聯俄容共, 소련과 협력, 공산당의 용인)정책을
주장하면서 상하이 쿠데타를 비난해 장제스와 쑹메이링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쑹칭링은 왕자오밍의 우한정부에 몸을 의탁했는데 7월에 쑹칭링은 쑨원의 혁명원칙과 정책위반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후
장제스와 결별했는데 7월 15일에 왕자오밍도 공산당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자 8월에 소련으로 떠났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한
반대파 숙청과 중국혁명에 대한 냉담한 태도에 실망하여 중산릉(쑨원의 묘소)완성 기념식전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으로 귀국했다.
중국으로 귀국한 쑹칭링은 홍콩에 자리잡은 후 일본과의 전쟁상태에 돌입한 중국에서 공산당과의 대립을 회피하고 협력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려고 하는 장쉐량(張學良)에 의한 1936년의 시안사변이 발생하자 쑹칭링도 국공합작을 외치며 제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국공합작 성립 후 국민당에 가입은 더욱 멀어졌지만 쑹가의 세 자매는 항일통일전선의 상징으로서 전쟁터에서 위문 등 활동을
이러나가면서 정치적인 선전활동에 종사했다. 전후인 1948년 1월에 쑹칭링은 국민당 혁명위원회 제 1차 대표회의에서 명예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함께 한 쑹칭링.
1949년에 국공내전이 종결되자 대만으로 후퇴한 장제스, 쑹메이링과 달리 중국대륙에 잔류한 쑹칭링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후에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에 취임함과 동시에 중화전국 민주부녀연합회 명예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대에는 인도,
파키스탄, 버마, 인도네시아 등의 순방 등 외교정책에 관여했는데 이것은 중국혁명의 지도자인 국모 쑨원의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실권은 거의 없는 부녀, 문화활동에 치우쳐 진 것이었다.
1951년에 스탈린 평화상을 받은 쑹칭링은 그 상금을 기초로 상하이에 부녀보건센터를 건설했다. 1954년 9월에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전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 1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쑹칭링은 1959년 4월에 국가 부주석에 취임했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장칭(江靑)의 지도 하에 상하이의 부르조아와 자신의 집안인 쑹가에 대해서도 계급주의라 비판했다.
쑹칭링은 장제스의 아내인 쑹메이링의 언니로서 배신자취급을 받아 부친의 묘가 파괴되었지만 마오쩌둥은 그녀를 보호하여 직접
위해가 가해지지는 않았다. 1968년 10월 31일에 문화혁명에 의해 현직 국가주석이던 류사오치가 타도되자 쑹칭링은 국가부주석이
되어 1972년까지 국가주석의 임무를 대행했다.
1975년 1월의 헌법개정으로 국가 부주석의 자리가 폐지되자 다시 전국인민대회 상무위원 부위원장으로 이동한 쑹칭링은 1976년
7월 6일에 상무위원장이던 주더가 사망하자 그 임무를 대행했다. 1975년 1월부터 1983년 6월까지 전국인민대회 상무위원회가
국가원수의 기능을 하였기에 쑹칭링은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 격이었다.
1981년 5월에 만성 림프성 백혈병에 의해 쓰러진 쑹칭링은 5월 15일에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 의해 공산당의 정식당원으로
승인되어 다음날 제 5기 전국인민대회 상무위원회에서 그녀에게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의 칭호를 수여했다. 쓰러진 쑹칭링은
5월 29일에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정부요직에 있었지만 베이징보다는 고향인 상하이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던 쑹칭링은 상하이에 이장되어 묘소는 쑹칭링
능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쑹칭링은 자신의 집안으로부터는 정치활동이 달라 절연관계였지만 공산당의 지지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위해 노력한 점 때문에 중국에서는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로 여겨지고 있다.
북한의 주석이던 김일성과 만나 환담중인 쑹칭링의 모습.
한편 중국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시 정둥신(鄭東新)구에는 24.15m 높이의 거대한 쑹칭링(宋慶齡) 석상이 들어서있는데
이것은 자선단체인 쑹칭링 기금회의 투자로 축조했다. 하지만 쑹칭링 기금회는 30억 위안에 이르는 거액 자산 일부를 부동산,
보험, 금융 등 업종으로 불법유통자산을 불려 왔다는 의혹때문에 석상건설당시 여론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완공 후에 3D, 4D극장과 식당,호텔 등 편의시설을 유치하여 관광명소로 단장하려고 준비중이라고 한다.
출처 : 무라타 마키지로<송가의 세 자매>, 사진은 라이센스가 필요없는 무료공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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