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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푸군관학교 (黃浦軍官學校)

구름위 2013. 12. 20.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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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푸군관학교 (黃浦軍官學校)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건국자이며 초대 대총통(大總統)이던 쑨원(孫文)은 당시 난립한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해

북벌(北伐)을 계획하여 1923년 8월에 장제스(蔣介石)를 소련에 파견하여 3개월간 군제시찰을 지시했다. 이듬 해인

1924년 1월 20일에 광저우(廣州)의 광둥(廣東) 고등사범학교에서 국민당은 제 1회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했다.

 

이 때 친소용공정책(親蘇容共政策)이 구체화되어 정책실현을 위해 군벌과 다른 독립된 군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쑨원은 국민당에게 지시해 군관학교(사관학교)를 창설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군관학교의 장소는 이전에 광둥 육군학당과

광둥해군학교가 있던 광둥성 광저우 시의 창저우다오(長洲島)에 있는 황푸(黃浦)가 결정되었다.

 

5월에 장제스가 교장, 라오쭝카이(廖仲愷)가 군관학교 주재의 국민당 대표, 리지쉔(李濟深)이 군관학교 주임,

다이지타오(戴季陶)가 정치부 주임, 허잉친(何應欽)이 총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산당원 중에선 예젠잉(葉劍英)이 부교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치부 주임으로 취임했다.

 

5월 5일에 3,000명의 지원자들 가운데 350명이 뽑혀 입학 후 3개 대(隊)로 편성되었고, 예비합격자 120명은 5월 7일에

제 4대(第四隊)로 편성되었다. 6월 16일에 개교기념식을 거행했는데 쑨원이 이 때 연설한 구절 중 한 절은 후에 중화민국

국가가 되었다.

 

황푸군관학교에는 당시 혁명군의 재능있던 인재들이 모였는데 졸업생 가운데는 중국 10대 원수 중 한명인 쉬샹첸(徐向前)및

국민당 지도자가 된 두유밍(杜聿明), 후쭝난(胡宗南)이 있었다. 교사와 졸업생들로 구성된 혁명군 교도단(敎導團)은

1925년 1월에 첫 북벌시 당군(党軍)이 되었다.

 

이 학교를 졸업한 자들은 후에 국민혁명군의 중심인물들이 되었는데 그 외의 재학생 및 졸업생도 국민정부의 통치에

크게 공헌했다. 장제스는 이들의 지지로 영향력을 키웠는데 국민당 간부뿐만이 아니라 공산당의 지휘관이 된 린뱌오(林彪),

펑더하이(彭德懷)도 황푸군관학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인접국가들의 유학생도 받아들여 그 나라의 독립 및 재건에 크게 기여하게 했는데 후에 북한의 건국조력자인

조선인 독립운동가 김원봉(金元鳳), 오성륜(吳成崙),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된 최원봉(崔元鳳),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구엔 손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했다.

 

한편, 국민당은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함으로 이전처럼 지방군벌에게 힘을 의탁할 필요가 없게되어 국민혁명을 추진하게

되었다. 황푸군관학교의 최초 교사들은 소련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바실리 블류헤르같은 소련군 지휘관도 있었다.

그러나 북벌전개 도중 국공(國共)간에 분열이 일어나면서 소련 및 공산당 계열의 교사 및 학생은 모두 추방되었다.

 

광저우가 1928년에 군벌의 공격을 받자 학교는 난징(南京)으로 옮겨갔는데, 1938년에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자 다시

청두(成都)로 이전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국공내전에 의해 공산당이 승리하자 국민당은 타이완(臺灣)으로 후퇴했다.

이에 황푸군관학교는 1950년에 대만의 까오슝(高雄)현 펑샨시(鳳山市)에서 육군군관학교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옛 황푸군관학교의 유적지는 1988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중점문물 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황푸군관학교의 생도들을 점호중인 장제스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