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대사에서 군벌시대란, 청조가 원세개에 의해 무너진후 1928년 장개석이 북벌로서 전토를 통일할때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북벌성공후에도 여전히 전국에는 군벌이 산재해 있었고 1936년까지 몇차례의 반장전쟁이 있었으며, 이들이 완전히 멸종되는 것은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이기는 1949년이라고 할 수 있죠.
근 반세기간 천여명이 넘는 대소군벌들이 삼국지처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군벌이 바로 봉천파의 거두인 장작림입니다.
장작림을 얘기하기전에 우선 군벌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청말 이홍장은 자신의 사병으로 3개의 신식군대를 만듭니다. 그 중 2개는 의화단전쟁당시 8연군을 상대로 싸우다 괴멸되고 그때 유일하게 싸우지 않고 건재한 것이 바로 원세개의 신건육군이었습니다.
신해혁명과정에서 원세개의 세력은 엄청나게 커지며 남방까지 손을 뻗칩니다. 당시 전국의 도독(군사령관) 총 23명중 20명이 원세계파였습니다. 그는 대총통자리에 오른후 황제의 자리까지 넘보지만 엄청난 국내외의 반발을 받자 울화통이 터져 결국 죽고 맙니다.
원세개가 죽은후 전국에 퍼져 있던 그의 부하들은 무력을 기반으로 독립을 선포합니다. 북양군은 크게 직파와 환파로 분열되는데, 직파는 풍국장, 조곤이 대표적인 우두머리이며 그 밑에 나중에 그들을 대신해 대군벌이 되는 손전방, 오패부, 풍옥상등이 있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미, 영에 가까웠고 하남, 호북, 호남등 주로 남방지역을 차지했습니다.
환파는 단기서가 우두머리 였으며 휘하에는 녹종린, 한복구, 유여명, 송철원, 석우삼등이 있었습니다. 외교적으로 일본의 지원을 받았으며 산동, 몽고, 섬서, 북경등주로 화북지방을 차지했습니다.
그외에 염계인 염석산이 산서성을 차지하고, 전계 당계요(나중에 용운)가 사천, 운남, 귀주를 차지했으며, 계계의 육영정(나중에 이종인, 백숭희)이 광서, 광동을 차지했습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대군벌만을 말하는 것이지, 이들의 세력기반은 매우 취약했고 통치력은 성 곳곳에 미치지못해 소군벌들이 난무하고 성의 경계에는 비적, 마적들이 설치고 다녔습니다.
1925년 당시 중국 전토의 군벌군대는 토탈해 정규군만 150만명에 달했고 비정규군, 경찰, 마을 자경대, 상단의 자위대등까지 합하면 그 몇배에 달했습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지출하는 예산의 80%를 군비로 소요해야 했습니다. 이들 군인들은 원래 농토에서 유린된 농민출신의 실업자가 다수를 차지했는데 그만큼 생산성이 저하되고 식량만 축내는 메뚜기떼가 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장개석이 북벌후 이른바 편견회의를 하여 군대수를 80만명까지 축소하고 군비부담을 예산의 40%이내로 제한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이는 장개석의 독재강화에 대한 군벌들의 반발탓도 있지만, 애초에 군대의 축소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죠.
군벌들의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바로 군대이며, 동시에 군벌들은 이들을 먹여살려야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해산시키면서 퇴직금과 새로운 직업을 주어 불만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군대는 당장 주인을 물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중국군대는 징집병이 아닌 지원병이었는데 애국심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는 비적출신들이 상당수였고 오로지 밥과 돈을 주기에 군대에 지원했을 뿐입니다. 말이 자발이지,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이었죠. 근대적인 직업군대가 아닌, 돈 많이 주는 쪽이 장땡인 용병군대라는 거죠.(장개석의 국민혁명군도 마찬가지) 아무런 대책없이 이들을 무작정 해산시켰을때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고 그러니 끝까지 이 아무짝도 쓸모없는 비효율적인 비적군대를 축소하여 소수 정예화하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군벌군대들은 1920년대 군벌전쟁이 극에 달할때에 대군벌들 마다 수십만의 병력을 보유했습니다. 당시 무한의 오패부 20만, 동남의 손전방 20만, 장작림 35만, 당계요 6만, 원조명 5만등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무기와 병사들의 훈련 및 질적수준은 극히 형편없었습니다.
통상 군벌들이 군대를 만드는 과정은 어떤 지역에서 모병전문 브로커들한테 돈을 뿌리고 실업자들을 대상으로 모병을 합니다. 그리고 개인 무기와 군복을 주고 한차례 짧은 훈련을 거친후 그 자체로 한 부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장교들의 수준은 실로 형편없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무기는 대부분 한세대전의 라이플이었고 창과 활, 칼로 무장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기관총과 슈류탄, 박격포, 자동소총을 보유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아주 적었고 산포, 야포같은 중화기는 더더욱 적었습니다. 통상 가장 잘 무장된 부대가 1000명당 800정의 소총, 5정의 경기관총을 보유했습니다.
나중에는 무장열차, 전차, 장갑차, 항공기같은 최신무기도 수입하지만 역시 그 수는 셀 수 있는 만큼밖에 안되었고 훈련도가 낮아 활용도도 매우 낮았습니다.
더구나 보병이 가진 탄약도 아주 적고 대포의 포탄도 적기 때문에 군벌전쟁시기 수십만이 동원되는 대규모전쟁에서도 실제 전투에 의한 사상자는 보통 1~2%이하였습니다. 또 병사들의 월급은 체불되기 일쑤였고 봉급을 받지 못한 병사들은 당연히 전쟁수행을 거부합니다.
군벌간의 전투의 승패는 지휘관의 지휘능력보다 얼마나 병사들에게 봉급을 잘 주고 잘 먹일 수 있는가, 또 적의 지휘관을 얼마나 매수할 수 자금을 가지고 있는가에 결정되었습니다. 봉-직전쟁, 직-환전쟁, 안-직전쟁, 북벌전쟁, 중원대전, 중일전쟁직전의 양광전쟁까지 최고 100만이상의 대군이 동원되었지만 실제 전투의 승패보다 매수 잘하는 쪽이 승자였습니다. 마치 코에이사의 삼국지의 계략을 연상케 하죠.
중국 군벌은 단지 무기만 창과 활에서 신식 소총으로 바뀌었다는 것뿐 전투의 양상은 2천년전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쇠퇴했는지도)
전투의 양상 또한 참호의 활용, 기동전같은 근대적인 전술은 없었고 적진으로의 무작정의 돌격이 전부였습니다. 중화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고대 성벽의 방어력은 여전히 유효해 삼국지시절처럼 사다리를 얹어 공격해야 했습니다.
체계적인 공병도 없었고 병참의 방법은 오로지 약탈이었습니다.(이건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권장되었습니다. 당장은 돈이 적게 드니까.) 의료는 더더욱 심각하여 부상병들은 그대로 버려져 대부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고급장교들의 질적수준은 실로 심각해 1911~1928년간 전국에서 연대장을 역임한 장교 1300명중 일본 유학파가 117명, 천진 무비학당 출신이 29명, 보정군관학교 출신이 61명, 청나라 무관출신이 20명이었고 70%는 농민, 비적출신의 문맹이었습니다. 중초급장교들도 다수가 사병에서 진급한 자들이었습니다.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은 다소 나았으나 군벌군대는 군벌부터 참모, 지휘관, 예하 중초급장교까지 질적수준은 마적들의 질적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910~20년대 군벌전쟁시기에는 서로 같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상관없었으나 곧 전혀 수준이 다른 적과 맞서자 그 형편없는 수준을 고스란히 보여주게 됩니다. 하나가 공산군이었고, 또 하나가 일본이었습니다.
공산군은 개인적 탐욕이 아닌, 일관된 사상과 목표로 무장해 있었고 따라서 대단한 결속력과 높은 사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교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 많았으나 능력본위로 진급했기 때문에 사고가 유연하고 매우 유능했습니다. 몇배나 우세한 군벌군대를 상대로 뛰어난 기동방어전을 펼쳐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일본은 더더욱 강력한 상대였습니다. 일본군 1명이 전사할때 중국군대는 통상 50~100배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의 차이, 병참의 부족, 지휘관의 무능, 낮은 사기탓이었습니다. 중국군대의 내부사정을 보면 장개석이 국내의 엄청난 압력에도 불구하고 왜 개전을 미룰 수 밖에 없었나 이해 못할 바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특별한 외부의 지원없이 1941년까지 무려 4년간 잘 이끌어갔다는 것이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결국 지친 일본이 태평양전쟁이라는 자살행동을 택하게 만들었죠. 정작 열강들은 일본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하고 일방적으로 극동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는데 말이죠.
군벌에 대한 설명은 간단히 이정도로만 하고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장작림에 대해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라고해도 적을 만한 것이 얼마나 될런지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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