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4화 "민주화를 꿈꿨던 좌파군벌" 풍옥상

구름위 2013. 12. 2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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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보수, 퇴폐, 반동을 지향했던 수많은 군벌들중에서 풍옥상은 아주 특이한 인물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다 손문의 혁명과 "삼민주의"를 지지했고 민주화를 꿈꿨죠. 처음에는 장개석과 손을 잡고 천하통일에 나섰다가 장개석도 다를 바 없는 봉건 군벌임을 알자 두번이나 대권을 두고 대결했고 중과부적으로 패합니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장개석을 비난하자 결국 강제 퇴역당하고 장개석의 특무기관에 의해 암살되죠. 사리사욕을 위해 온갖 치졸한 책략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던 군벌시대에 그는 우직한 군인으로서 중국의 새로운 미래를 꿈꿨습니다. 참고로 한때 등소평도 풍옥상밑에서 고문 겸 정치위원으로 있었고(국공합작깨지면서 쫓겨나지만), 우리 독립운동에도 많은 도움을 주어 우리나라 최초 여류 비행사인 권기옥이 풍옥상의 국민공군에서 조종간 잡기도 합니다.

 

 

뭔가 강호동을 닮은 이 푸짐한 인상의 뚱땡이가 풍옥상(1882~1948)

 

풍옥상은 원래 안휘성 출신이지만 어릴때 윗동네 직예성으로 이사갑니다. X구멍 찢어질만큼 가난해 입에 풀칠하려고 14살때(11살때라는 말도 있음) 청국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학도병도 아니고... 아프리카에 이런 일이 많죠) 졸병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고속 승진을 했고 29살인 1911년 신해혁명때는 이미 한부대의 영장(대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난주봉기에 참여했다가 진압되어 쫓겨났다가 3년뒤 다시 복직되어 제7사단 14여단장이 되어 하남, 산서성에서 민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웁니다. 그리고 제16혼성여단장이 되었다가 원세개 죽고나서 장훈의 복벽전쟁과 호법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합니다.

 

풍옥상은 원래 단기서의 안휘파에 속했지만 1920년 7월 직환전쟁때는 직군의 오패부밑에 들어가 싸웁니다. 말하자면 배신때리고 상대편 진영으로 들어간 셈인데 따라서 원래 있던 애들한테 심한 차별과 견제를 받게 되죠.

 

한편 당시 하남성은 하남군벌 조척의 세력권이었는데 직환전쟁후 꿈많은 사내 오패부가 하남성 낙양에 커맨드센터를 박고는 병력을 뽑아대며 자기땅에 세력을 뻗쳐오자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2년뒤 1차 직봉전쟁이 터지자 직군과 봉군이 피터지게 싸우는 틈을 타 잽싸게 영토 확장에 나섭니다. 정주(현재의 하남성 성도)를 공격하여 풍옥상군과 대판 싸우지만 결국 패하죠. 덕분에 풍옥상은 1922년 5월 14일 하남 독군으로 취임합니다.

그는 조척이 개판쳐놓았던 하남성 안정을 위한 개혁을 추진합니다. 적극적인 이재민 구휼과 불법적 징수 금지, 호구조사 실시, 치안 강화, 탐관오리 척결, 공장 건설, 수로와 도로 정비, 아편 금지 등의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풍옥상의 공약은 결코 空約이 아니었는데, 그는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여 주민들의 지지는 얻었지만 다른 기득권들의 반발을 삽니다. 특히 부패하고 썩어빠진 사찰을 강제로 학교로 개조하고 불상을 훼손하자 당연히 불교측에서 반발했고 상관인 오패부는 이런 행위는 "빨갱이 짓거리"라고 맹비난하죠.

 

풍옥상은 오패부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데다 군대를 대규모로 증강시키고 자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바로 옆동네인 낙양에 사는 오패부로서는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풍옥상은 조척의 재산을 몰수해 자신의 제16혼성여단을 제11사단으로 확장하고 3개 혼성여단(7, 8, 25)을 추가로 편성합니다. 병력은 총 2만명이 넘었으며 더욱이 철저한 훈련과 규율로 군벌군대로서는 중국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합니다.

 

또한 오패부가 추천한 참모장을 거절하고 자기 측근을 임명했고 또 매월 20만원의 군비를 바치라는 명령 역시 씹어버립니다. 이러니 오패부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죠. 따라서 5개월만에 짤립니다. 처음에는 그의 고향인 안휘성 독군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먼저 앉아 있는 안휘독군 장문생이 초강력 반발함으로서 흐지부지되어 완전히 백수신세가 되었죠. 원래 안휘독군 자리를 받는다는 전제하에서 하남독군 자리를 내놓은 것인데 완전 계산 착오가 된 것이죠. 따라서 직군 보스인 조곤을 찾아가 "구직"을 애걸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조곤은 그를 명예직에 가까운 북경의 육군검열사로 임명하자 풍옥상은 마지못해 받아들입니다.

 

이는 그로서는 오패부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키우면서 와신상담하는 계기가 됩니다. 북경에 와서도 그는 시내의 기생굴, 아편굴을 퇴치하고 전사한 부하들을 위한 사당을 지었으며 약탈을 엄격히 금합니다. 또 "매국노는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 "일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는 표어를 직접 써서 벽보에 붙여놓기도 합니다. 백성들 뜯어먹고 아편 팔아 군자금 마련하는게 당연하게 생각하던 당시 군벌들로서는 풍옥상의 이런 개혁조치는 그야말로 파격적이었죠.

 

앞화에서 설명했듯 1차직봉전쟁에서 패한 장작림은 복수의 칼날을 갈며 기회를 노립니다. 그는 군비를 강화하고 군대를 근대화하는 한편, 외교적으로는 남쪽으로 쫓겨내려가 있던 단기서의 환계와 손문의 광동정부와 함께 "삼자동맹"을 결성합니다. 여기다 직군 내부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는데 오패부군단 밑에서 가장 쌓인 것이 많을 인물로 풍옥상에게 마의 손길을 뻗칩니다. 풍옥상은 당장 장작림에게 내응하고 오패부의 뒷통수를 치기로 약속합니다.

 

이런 와중에 오패부는 막대한 군비를 조곤 총통 만드는데 낭비한데다, 병력을 남쪽으로 보내 남방과 사천을 공격합니다. 손전방이 복건을, 진형명이 광동을, 양삼은 사천을 공격하지만 전선은 지지부진한채 되려 격퇴당하죠. 따라서 병력과 군비가 피폐해지고 직군 내부에서는 마구 설치는 오패부의 독주에 대해 견제와 질시만 심화됩니다.

 

드디어 1924년 10월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남하해 오는 봉군에 대항해 오패부는 3로군을 편성하고 풍옥상에게는 봉군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명령합니다. 양자 모두 총력을 기울이는데 이 전쟁의 승자가 곧 천하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풍옥상은 휘하 제11사단을 거느리고 열하성으로 진군합니다. 그러나 10월 20일 전선으로 향하던 풍옥상은 만리장성의 고북구에서 병력을 돌려 북경으로 진격합니다. 그리고 자군을 "국민군"으로 선포합니다.

 

당시 북경방위를 맡고 있던 손악의 제15 혼성여단도 풍옥상의 반란군에게 호응해 쿠테타를 일으켜 무방비상태인 조곤의 총통부를 포위합니다. 말만 직군의 총대장이지 허수아비나 다름없던 조곤은 제대로 대응도 못한채 무장해제되었고 오패부 파면과 하야를 선언합니다. 이는 오패부에게는 완전히 뒷통수 맞은 격이었죠. 또 풍옥상은 "중화민국에 황제가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자금성을 차지하고 있던 "마지막 황제" 부의한테도 당장 집비우고 나가라고 합니다.(영화에도 나오죠.) 부의는 자금성에서 쫓겨나 천진의 일본조계로 갑니다.

 

 

풍옥상의 북경정변을 알리는 당시 우리의 동아일보.(1924년 10월 25일자)

 

 

  

풍옥상의 배신으로 팽팽하던 전선은 완전히 붕괴됩니다. 원래 풍옥상을 신뢰하지 않았던 오패부는 그를 감시하기 위해 참모장인 왕승빈을 붙여 놓았는데 실상 왕승빈도 오패부한테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죠. 따라서 되려 풍옥상에게 붙어 버립니다. 오패부는 1만명의 직속 병력을 빼돌려 허둥지둥 북경으로 돌아오다가 천진 외곽에서 풍옥상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당합니다. 이로서 오패부는 몰락하게 되죠. 간신히 패잔병 2천명을 수습하고 배를 타고 강남으로 갔다가 다시 자신의 근거지인 호북으로 후퇴하죠.

 

이로서 북경의 대권을 장악하게 된 풍옥상이었지만, "타도! 오패부"를 달성하자말자 장작림과 풍옥상 동맹 역시 금새 깨집니다. 장작림은 대군을 거느리고 보무도 당당히 북경에 입성합니다. 이는 풍옥상에 대한 위압이었죠. 또한 양우정, 이경림등 봉군 지휘관들은 풍옥상군 2개여단을 기습해 무장해제시키고 멋대로 자기편에 편입시켜버립니다.

 

이런 날도적같은 행동에 격분한 풍옥상군 지휘관들이 장작림이 북경에 오자 암살할 계획을 수립하지만 풍옥상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만약 실패할 경우 봉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을 것인데 세력이 약한 자기들로서는 이길수 없고, 설령 성공해도 나머지 봉군 지휘관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기 때문이었죠. 한편, 장작림 쪽은 그쪽대로 풍옥상 암살을 추진하는데 마찬가지로 장작림 역시 거부합니다.

 

결국 장작림의 압박을 받은 풍옥상정권은 한달 천하로 끝나고 11월 24일 단기서가 총리가 됩니다. 풍옥상은 북경을 내놓고 서쪽으로 철수합니다. 북경, 천진 등 황하강의 알짜배기땅은 장작림이 차지하고 풍옥상은 섬서성, 수원성 등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만 차지하게 됩니다. 이러니 갈등이 점점 심화되죠.

 

더욱이 군벌들이 "빨갱이"하면 치를 뜨는 시절에 풍옥상은 공산 소련과 손을 잡아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다음해 11월 23일에 일어난 곽송령의 반란에도 지원하여 패잔병들을 자군에 편입시키자(국민군 제4군으로) 지가 한 짓은 까먹은채 격분한 장작림은 1926년 6월 28일 천진에서 오패부와 다시 만나 서로 화해하고 동맹을 체결합니다. 오패부로서는 장작림이 철천지 원수일터인데도 자기 뒷통수를 친 풍옥상이 더 미운 나머지 장작림과 손을 잡죠. 두 사내는 화해하는 댓가로 장강을 경계로 남북통치키로 합의하죠. 여기에 풍옥상이 산서성을 넘보자 염석산도 이들과 동맹을 맺습니다.

 

 

 

< 1926년 직봉풍전쟁때 형세도, ※ 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

 

5월 18일 풍옥상의 국민군이 산서군을 선제 공격하고 장작림의 봉군과 오패부의 직군이 산서군에 가세함으로서 직봉풍전쟁이 발발합니다. 여기에 남쪽에서는 풍옥상에 호응한 장개석의 국민정부군이 출동해 오패부를 뒷치기함으로서 그야말로 전쟁은 중국 전역으로 확대됩니다.

 

7월 19일 북경 서북부 만리장성의 요충지인 남구에서 오패부와 장종창이 지휘하는 봉군-직군 연합군이 국민군에 대해 맹공을 개시하여 8월 14일 봉군 제10군이 남구를 점령했고 다음날에는 연경을 점령합니다. 또 염석산의 산서군도 국민군을 격파하고 수원성을 침공해 포두를 장악합니다. 풍옥상군은 완전히 참패한채 감숙성으로 후퇴하죠.

 

이때 풍옥상은 소련을 방문해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와 스탈린, 레닌 마누라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아군이 파멸지경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받고 부랴부랴 돌아와 패군을 수습합니다. 풍옥상은 공개적으로 삼민주의를 지지하고 국민당에 가입하고 장개석의 국민혁명군과 연합키로 하죠. 공산주의도 받아들입니다. 등소평이 풍옥상 밑에서 일할때도 바로 이때였죠.

 

장작림-오패부 연합군은 일단 풍옥상한테는 이겼지만  문제는 남쪽에서는 더 강력한 장개석의 북벌군이 밀고 올라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북벌군은 광동, 광서군벌과 황포군관학교를 중심으로 총 8개군 10만의 병력이었습니다. 장개석이 총사령관, 광서군벌 이제침이 총참모장, 백숭희가 참모차장이었죠. 하응흠, 백숭희가 지휘하는 동로군이 상해, 항주로 진격하고 장개석이 직접 지휘하는 중로군이 남경과 안휘성으로, 당생지가 지휘하는 서로군이 하남성으로 진격해 손전방과 오패부군을 공격합니다.

 

당생지의 서로군은 오패부의 후방을 공격해 장사를 함락시킵니다. 오패부는 남구를 장악하고 풍옥상군을 격파한후 병력을 돌려 근거지인 무한으로 돌아옵니다. 오패부군은 20만에 달해 숫적으로는 당생지군보다 월등히 우세했지만 대부분이 패잔병들을 규합한 오합지졸인지라 연전연패를 당하고 9월 6일 한양, 다음날 한구가, 10월 10일에는 무창까지 빼앗겨 거의 모든 병력을 잃은채 호북성에서 완전히 쫓겨나 하남성으로 도주합니다.

 

 

< 1926~8년 북벌전쟁, ※ 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

 

또 하응흠의 동로군 역시 손전방군을 격파하고 상해를 장악합니다. 그런데 이때 장개석과 광서군벌들이 손을 잡고 상해에서 4.12 사변을 일으키자 국민정부는 좌-우파간의 분열이 일어나고 장개석은 일시적으로 하야합니다.

장개석을 대신해 정권을 잡은 왕정위는 장개석 대신 풍옥상을 북벌군 총사령관에, 당생지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풍옥상군은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이 됩니다. 여기에 눈치를 살피던 산서성 염석산은 봉-직군의 불리함을 보고 잽싸게 깃발을 바꿔달고는 북벌군 편에 선다고 선언합니다. 산서군은 진수연합군이자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이 됩니다.

 

5월 5일 풍옥상은 서안에서 병력을 출동시키고 동쪽으로 진군합니다. 낙양을 점령한후 6월 1일 북벌군과 합류하죠. 그리고 오패부와 손전방 그리고 봉군의 장종창, 이경림을 여지없이 격파해 하남성을 거쳐 산동성까지 진격합니다. 장작림, 손전방, 오패부 삼자는 북벌군에 맞서 공동전선을 펼치기로 하고 소위 "안국군"을 구성하지만 이 잡동사니 오합지졸군대는 국민혁명군에게 연전연패당하죠. 봉군은 직군보다는 질적으로 나았지만 국민혁명군에게 맞서기에는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었습니다.

 

28년 2월 2일 장개석은 북벌군 총사령관에 다시 복직됩니다. 2월 16일 서주 개봉에서 장개석, 풍옥상, 염석산 삼자가 모여 북벌에 관한 논의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장개석은 풍옥상에게 브라더로 부르겠다며 의형제의 연을 제안하고 풍옥상도 기분 좋게 "OK"하여 둘은 도원결의를 맺습니다.(왠지 염석산은 안 끼워준것같음) 

 

"동생 중정(장개석의 호)은 환장(풍옥상의 호)을 친형님처럼 모시겠습니다. 편안하고 위태로운 것을 함께 하며 달콤하고 쓴 것도 같이 맛보며 바다가 마르고 돌이 삭더라도 살았건 죽었건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낯뜨거운 "러브레터"를 구구절절 적어 남자한테 잘도 전달한 장개석은 풍옥상, 염석산과 함께 총공격에 나섭니다. 하응흠의 제1집단군과 풍옥상의 제2집단군은 산동성에서 장종창을 격파한후 다시 하남성 창덕에서 장학량군을 격파하여 북경남쪽의 남원까지 진격합니다. 염석산의 제3집단군도 봉군을 격파하고 석가장을 거쳐 장가구와 보정을 점령한후 북경을 포위합니다. 이종인, 당생지의 제4집단군도 천진으로 진격하죠.

 

오패부, 손전방은 완전히 몰락하여 오패부는 사천성으로, 손전방은 장작림에게 의지하여 요동반도의 대련으로 도주합니다. 장작림은 북경에서 대원수가 된 다음 최후의 결전을 각오했지만 참모들의 만류로 만주로 후퇴하는중 폭사당하죠. 그리고 다음 대권을 장악한 장학량이 남경정부에 복종을 선언함으로서(동북역치) 신해혁명 이래 분열과 혼란의 연속이었던 중국은 마침내 통일되었고 군벌시대는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굳은 얼굴에 각잡고 있는 것이 꼭 학창시절 졸업앨범 찍는 포즈인 세명(풍옥상, 장개석, 염석산). 카메라 들이대면 긴장하는 것이 저와 비슷합니다. ※ 출처 : 엔하위키  

 

삼민주의의 슬로건을 내세운 장개석의 북벌은 국내 인민들과 서구 열강들의 지지속에(일본을 제외한) 그야말로 3년도 안되어 순조롭게 끝납니다. 구식 봉건 군벌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몰락하죠. 그러나 북벌군 역시 여러 군벌들이 이해관계에 의해 이합집산으로 뭉친 잡동사니 연합군인 것은 똑같았고 장개석과 남경정부는 여러 군벌중에서 가장 강하기는 했지만 중국 전체를 지배하기에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다시피 남경정부의 세력은 남경과 상해를 중심으로 단지 양자강 하류 일대에 불과했죠. 이종인, 장학량, 염석산, 풍옥상 이 4인방 역시 장개석을 무찌르고 내가 천하를 쥐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서로간의 갈등은 결국 1928년 7월 11일 탕산의 "편견회의"에서 폭발합니다.

 

  

 

< 1930년 반장전쟁 당시 형세도. 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  

 

북벌에 승리한 국민혁명군은 그 과정에서 패잔병들을 마구잡이로 편입시켜 1928년말에는 총 4개집단군 84개군 220만명에 달합니다. 장개석의 제1집단군이 55만명, 풍옥상의 제2집단군이 40만명, 염석산의 제3집단군은 20만명, 이종인의 제4집단군 20만명이었고 그외 장학량의 동북군도 30만에 달했고 사천, 귀주, 운남등 변경에도 수십만에 산재해 있었습니다. 이 쓸데없는 인력들을 먹여 살리는데 들어가는 국방비가 전체 예산의 80%에 달했습니다.  

 

장개석은 65개 사단, 기병 8개여단, 포병 16개 연대, 공병 8개 연대 합계 80만명으로 감축하고 별도의 국가 헌병대 20만명을 창설해 치안용으로 쓰자고 주장합니다. 또한 전국을 6개 편견구로 나누고 모든 군대는 "국군"이 되어 중앙에서 통솔을 받기로 합니다. 취지는 좋은데 문제는 어떻게 공평하게 배분할 것인가였죠. 서로 더 많은 파이를 원했고 무턱대고 군대를 축소했다가 권력 자체를 잃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눈앞의 권력에는 "브라더"고 자시고도 없었다는 것이죠.

 

결국 바로 다음해인 1929년 2월에 호남 무한에서 이종인의 광서군이 반란을 일으키고 풍옥상 역시 염석산, 마가군과 손을 잡고 하남에 병력을 집결시킵니다. 그리고 장개석 하야를 주장하죠. 당근 장개석은 이들을 죄다 제명시키고 주력부대를 하남 서쪽에 배치하는 한편, 풍옥상 휘하 장수들인 한복구, 석우삼에게 미끼를 던져 배신케 합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단 하야를 선언하지만 염석산과 연합해 재차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중앙군의 반격에 패하자 염석산은 또 배신을 때리고 고립된 서북군은 섬서성으로 후퇴하죠. 여기다 광동군벌 장발규와 호남군벌 당생지가 반장전쟁을 일으켰다가 역시 장개석-염석산 연합군에게 아작납니다.

 

1930년 3월 드디어 중국 근대사상 최대의 전쟁인 중원대전이 발발합니다. 염석산은 중화민국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어 그를 중심으로 풍옥상, 이종인, 장발규, 석우삼에다 오패부, 손전방 같은 한물간 애들까지 가세해 총 80만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되어 70만명인 장개석의 중앙군을 밀어붙입니다. 여기에는 왕정위, 손과같은 국민당내 반장세력들도 가세합니다. 장개석은 완전히 사면초가에 빠지죠.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교착상태에 빠지지만 반장연합군은 오합지졸인데다 서로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은 반면 중앙군은 장비, 훈련도, 사기에서 월등히 우세했고 장개석의 일사분란한 지휘를 받아 8월 15일 산동성 제남에서 반란군을 격파하고 승리함으로서 곧 전세는 역전됩니다. 중앙군이 우세해지자 그때까지 대세를 저울질하던 장학량은 장개석의 편을 들어 풍옥상, 염석산을 뒷치기 합니다. 장학량의 동북군은 단숨에 산해관을 돌파해 북경, 천진을 장악했고 중앙군도 서안을 함락시킵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풍옥상을 비롯한 반란을 일으킨 군벌 보스들은 하야를 선언하죠.

 

※ 반장전쟁의 전개 : http://m.enha.kr/wiki/%EB%B0%98%EC%9E%A5%EC%A0%84%EC%9F%81#s-7

 

염석산, 이종인은 그래도 그런대로 자기 지반을 유지하지만, 풍옥상은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야말로 빈털털이가 된 그는 쓰린 마음을 추스리며 산동성 태산의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의 바로 그산...

※ 출처 : http://blog.naver.com/ss95zzang/90040359943

 

이후 그는 대권 도전은 고사하고 사실상 아무런 실권도 없습니다.(따라서 별로 쓸 것도 없음) 송철원, 한복구 등 서북군의 옛 부하들은 풍옥상에서 벗어나 자립의 길을 걷죠. 풍옥상은 은거하다가 명예직인 1935년 남경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육군 1급상장(4성장군)에 오릅니다. 중일전쟁 직전에는 제3전구와 제6전구 사령관을 맡았으나 장개석과 부딪치는 바람에 곧 해임당하죠. 중일전쟁중에도 이렇다할 요직을 받지 못해 직접 전장에서 뛰지는 못합니다.

 

이후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장개석의 독재체제가 더욱 강화되자 풍옥상은 장개석을 노골적으로 비난합니다. 그는 강제 퇴역당하고 미국으로 가서 "내가 아는 장개석"이라는 책을 써서(물론 안 좋은 쪽으로) 장개석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듭니다. 결국 미국에서 배 타고 돌아오다가 장개석이 보낸 암살팀에 의해 배가 폭발하여 죽습니다. 1948년 9월 1일이었습니다.

 

 

 

< 영화 "건국대업"에서의 풍옥상. 강제로 미국으로 보내지자 장개석한테 따지러 오지만 장개석은 숨어서 없는 척함 >

 

그가 죽자 공산당은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뤄주었고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한후 1953년에 그의 시신은 태산에 안장됩니다. 최후는 비참했지만 그래도 여타 쓰레기 군벌들과 달리 대륙 사람들 마음속에 포지티브한 이미지로 남았으니..

 

 

 

이 양반도 타임지 모델로 출연했었군요 

1번이 1924년 2차직봉전쟁당시 풍옥상군의 헌병. "풍(馮)"자가 적힌 완장을 팔에 차고 있죠. 3번은 북벌전쟁당시 풍옥상 국민군 병사의 모습. 출처 : 오스프리 맨 앳 암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