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대사] 군벌시대 9화 "사천에서는 내가 대빵! 류상"

 

중국의 군웅시대에는 항상 중원에서 패권을 놓고 천하를 다투며 스케일 크게 노는 대군벌들과 이들에게 빌붙어 자기 동네에서 소박하게 싸우는 소군벌들이 있습니다. 즉 삼국지로 친다면 조조, 유비, 원소처럼 천하를 노리는 꿈큰 사나이들이 있는가 하면, 도겸이나 조범, 유요같은 듣보잡들도 있죠.

 

민국초기인 10~20년대 단기서, 장작림, 오패부 등 북양군벌들이 천하를 놓고 치고박고 싸우던 카오스의 시절, 변두리 산간오지인 사천성은 일명 중국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류상, 양삼, 류문휘, 등석후 등 고만고만한 세력들이 다수 난립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웃동네인 운남이나 귀주성같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는 약소국 신세였죠.(이들을 客軍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중에서 처음에는 가장 미미했지만 여러 경쟁자들을 제치고 사천의 노른자위를 차지하며 가장 큰 세력을 자랑했던 것이 바로 류상입니다.

 

 

풍옥상만큼 푸짐해 보이는 이 아저씨가 "사천왕" 류상(1890~1938). 중경을 비롯한 사천 동쪽을 기반으로 했던 그는 1932년 이른바 "이류지전(류상-류문희간의 사천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사천의 절반을 차지하고 패권을 확립합니다. 이후 중일전쟁기간 장개석이 중경을 임시수도로 할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이 양반이 중경을 근대화시키고 발전시켜둔 덕분이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류상은 사천성의 대읍현 출신으로 용운, 염석산 등과 마찬가지로 토착군벌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시기 원세개에게 붙어 출세한 북양군벌 출신이외의 지방군벌들은 대부분 이런 토착군벌들이죠.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대읍현은 바로 이 동네입니다... 참고로 조자룡의 묘가 여기에 있다는군요.(문혁때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함)

 

청나라말기 18세때 그는 당시 출세의 길인 신식 군인의 길을 걷기 위해 1년짜리인 사천육군속성학교에 들어갑니다. 다른 쟁쟁한 군벌들이 보정군관학교나 운남강무당같은 유명한 정규사관학교를 졸업하거나 해외 유학을 다녀온 것과 달리, 지금으로 치면 군에서 운용하는 단기초등학교 졸업학력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딥다 늦게 들어간 주제에 학교에서도 지지리도 공부 못했다고 합니다. 뭐, 장작림처럼 학교 근처도 안 가본 일자무식의 까막눈도 있습니다만. 참고로, 지금도 사천성의 아이들은 부모들이 "제발 공부 좀 해라"라고 잔소리하면 이 류상을 예로 들면서 "공부 못해도 커서 잘만 출세할 수 있다"고 변명한다네요.

 

그럼에도 꽤 관운은 있었던 모양으로 다음해 졸업하여 사천군에 입대하여 7년만인 1916년에 사천군 제1사단 2여단의 여단장이 됩니다. 2년뒤에는 사천군 제2사단장이 됩니다. 엄청난 고속 출세이죠. 게다가 다음해인 1919년에는 여러 지휘관들의 추대를 받아 사천군 총사령관이자 사천성장이 됩니다. 이는 정식으로 중앙의 임명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해혁명이래 각 성들이 중앙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자치를 행사했기 때문에 권위는 당연히 매우 약했습니다. 힘이 없어지면 언제라도 몰락할 수 있었죠. 일본 전국시대때 지방의 "관령"이나 "수호직"들이 토착세력들의 하극상으로 허수아비가 되거나 쫓겨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사천성장이 된 그는 당연히 사천성의 행정중심지인 성도로 부임해야 하지만 오히려 중경을 차지하고 이곳을 자신의 영지로 합니다. 왜냐하면 사천성에서 가장 풍요롭고 상업이 발달하여 한마디로 돈이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이곳을 기반으로 중경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며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나갑니다.

 

 

영국 런던만큼이나 "안개의 도시"로 유명한 중경. 사천성은 토지가 비옥하여 중국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며 중경 역시 대도시중에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죠. 게다가 하도 미인이 많아서 "중경 가면 장가간 것을 후회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는군요. 정말인가...?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puy2/140063552163

 

1920년 5월 옆동네 운남왕 당계요가 사천으로 침공합니다. 그는 사천군 제2군 군장(참고로 당시 중국의 軍은 우리의 야전군이 아니라 군단에 해당됩니다)이 되어 운남군을 격파하여 자기들 동네로 쫓아보냅니다.

그러나 1922년 제1군을 지휘하는 군장인 웅극무가 류상을 공격해 "1, 2군 지전"이 발발합니다.(네이밍 센스가 참...--;) 이 전투에서 류상 밑에 있었던 양삼은 패퇴하여 무한으로 도망갔고 류상 역시 중경에서 쫓겨나 하야합니다. 이것은 사천성의 혼란의 시작이었습니다. 나름 구심점 역할을 하던 류상이 몰락하자 사천성에 주둔한 각 군벌들은 서로 죽으라 치고 박고 싸우게 됩니다. 그 와중에서 죽어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었죠.

 

이 시절에 어느 동네이건 가렴주구는 심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궁극의 경지에 다달은 것이 사천성으로, 그야말로 뼈속의 골수까지 뽑아먹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수십년후의 세금까지 미리 징수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은 언제 전쟁에 패하여 쫓겨날지 모르니 그동안 뜯어먹을 수 있을때까지 뜯어먹으려고 했죠. 쫓겨날때는 그때대로 도시에 불을 안지르는 댓가로 삥을 뜯어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대가 패전하여 쫓겨가면서 200만원을 내놓지 않으면 성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자 상인단에서 80만원에 쇼부를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한두번도 아니고 매번 반복되었죠.

 

여기다 고리대에 아편까지 심어서 팔아먹습니다. 그리고 차관상환을 제외한 수입의 90%이상이 군사비로 사용되었으니 북조선 김씨왕조 저리 가라였죠. 그러니 사천성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변경에는 유랑민과 산적들이 들끓었습니다.

 

1년간 와신상담한 그는 1923년 7월 중앙의 패왕인 오패부의 힘을 빌리고 옛부하 양삼과 손을 잡고 반격하여 원수인 웅극무를 격파합니다. 그러나 결코 만만찮은 인물이 오패부는 류상을 견제하고 이 기회에 사천으로 손을 뻗으려는 속셈으로 양삼을 사천독리에 임명합니다. 그러자 류상은 오패부와 손을 끊고 환계군벌의 우두머리인 단기서와 손을 잡습니다. 당시 단기서는 직환전쟁에서 패하여 몰락하지만 장작림과 손을 잡고 오패부와 맞서죠.

 

한때 사천을 주름잡았던 군벌들중 하나인 양삼(1884~1977). 사천성을 차지하기 위해 죽으라 치고박고 싸우지만 결국 승자는 중원을 재패한 장개석이었고 얘네들은 죄다 장개석의 빵셔틀신세가 됩니다.

 

1925년 7월 결국 사천의 패권을 놓고 류상은 양삼과 한판 겨루게 됩니다. 그는 귀주군벌 원조명과 손을 잡고 양삼을 격파했지만 원조명이 사천을 지배하려고 들자 이번에는 양삼과 손을 잡고 원조명을 격파합니다.(이건 뭐...--;) 이런 사천의 상황은 실상 중원의 축소판이기도 했죠.

 

뒤이어 장개석이 북벌을 개시하며 오패부를 비롯한 구 북양세력들을 격파하며 북진하자 사천군벌들은 대세를 읽고 생존을 위해서 장개석편에 서기로 합니다. 류상의 중경군은 국민혁명군 제21군으로 개편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싸움을 멈추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천성을 분할하고 있던 세력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천성의 중심인 성도를 근거지로 사천 서쪽을 차지한 류문휘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며 최강의 세력을 자랑했고 중경과 사천동쪽을 차지한 류상과 서로 패권을 놓고 대립합니다.

※ 자료출처 : "사천성내 류상 세력의 확대와 중경 지배"(상명대학교 김희신교수)

 

 

류상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류문휘(1895~1976) 사천성 주석 겸 국민혁명군 24군으로 사천에서 최강의 세력을 가졌으나 류상에게 패배하여 몰락합니다. 그러나 국공내전때 공산군에게 투항하여 대략 잘먹고 잘 살며 천수를 누렸으니 인생의 마지막 승자는 역시 끝까지 가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중경을 중심으로 비교적 안정되게 통치했던 류상과 달리, 류문휘의 세력은 땅은 넓었지만 기반이 매우 취약했고 재정적으로 열세였습니다. 또한 사천성의 특수성상 무기를 동쪽에서 수입해야 했는데 양자강 상류를 차지한 류상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모든 물자를 강제로 억류하고 자기가 차지합니다.

 

따라서 중원대전이 발발했을때 장개석의 지지를 받은 류상과 이종인의 지지를 받은 류문휘가 대판 싸우는데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이른바 "2류지전(류상-류문휘라서 2류... 중국인들 네이밍 센스가 이런가 봅니다) "에서 결국 무기와 병력, 자금에서 우세했던 류상이 승리합니다. 따라서 류상은 사천성의 절반을 차지하며 사천성 내에서는 최강의 자리에 올라 명실공히 "사천왕"이 됩니다.

 

이런 잘나가던 그에게 뜻밖의 시련이 닥쳐옵니다. 바로 이른바 "대장정"이라는 유랑을 하는 모택동 군단의 등장이었죠. 5차 초공에 패한 이들은 호남성에서 쫓겨나 귀주성을 거쳐 사천까지 밀려옵니다. 류상은 장개석에게 사천초비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아시다시피 이들은 잡동사니 군벌군대와는 전투력의 격이 다르죠. 류상은 홍군의 선봉대를 격파했으나 서로간의 협조부족으로 류상, 양삼 등 홍군의 앞을 가로막았던 사천군대는 완전히 아작이 납니다. 당연히 장개석은 격노했죠.

 

 

사천군의 모습 ※ 사진출처 : http://yeehope87.seesaa.net/article/147689092.html

 

산전수전 겪으며 어렵사리 차지한 자기 자리마저 위험해지자 류상은 남경으로 가서 장개석의 다리를 잡고 매달려 "충성할테니 살려주세요"라고 합니다. 장개석은 아직은 류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그를 사천성 주석으로 임명하여 잘 대접하여 보냅니다.(제거야 나중에 하면 되니까.. 장개석은 이런 면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에 비견될만큼 엄청난 고단수의 사나이입니다.) 

 

그러나 홍군 토벌을 핑계로 중앙군이 사천성에 들어오고 남경정부에서 임명한 간부들이 대거 류상의 중경정부에 들어오면서 장개석의 간섭이 점차 노골화됩니다. 이는 장개석 특유의 지방 소군벌 제거작전이었는데 한방에 무력으로 토벌하기보다 주변부터 차근차근 공략해가면서 군벌 우두머리를 허수아비로 만든후 명예직으로 돌리거나 아예 조용히 암살해 버리는 식이었습니다. 대군벌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조무래기급들은 이런식으로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며 중앙의 세력을 확장해 나갑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류상은 제7전구 사령관(절강성 북부와 안휘성 남부가 담당구역) 이자 제23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사천군을 거느리고 항일의 최전선에 나섭니다. 그러나 류상은 곧 병을 핑계로 병원에 입원한후 산동주석 한복구를 만나 간섭이 노골화되는 장개석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고 반장전선 구축을 몰래 밀담합니다. 그런데 그 한복구는 서주전역에서 싸우지 않고 도주했다는 이유로 회의석상에서 즉결처형당했고 류상은 병원에서 그 소식을 듣고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는지 1938년 1월 20일 48살의 나이로 급사합니다. 어이없는 최후였죠. 사후 일급상장(4성장군)으로 추서됩니다.

 

어쨌든 잘 죽어준 덕분에 장개석은 중경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손쉽게 차지하여 중일전쟁의 심장부로서 활용할 수 있었죠. 사천군은 중앙군과 함께 중국군의 주력중 하나로 상해, 서주전역 등 전쟁기간 약 300만명이 출전하여 263,991명이 전사, 356,267명이 부상하는 등 큰 희생을 치룹니다.(당시 "사천이 없으면 중국군도 없다"라는 말이 있을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