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16화 "토비와 치안"

구름위 2013. 12. 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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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에서 "토비(土匪)"란 "무기로 무장하고 폭력 또는 협박, 납치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타인의 재산을 약탈하여 먹고 사면서 나라를 뒤엎겠다따위의 어떤 정치목적은 지니지 않은 인간들의 무리들로 적어도 10명이상으로 조직된 경우"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이 10명이라는 기준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통상 청나라시절부터 정해진 기준으로, 단순 강도나 도둑과는 다른 것입니다. 즉, 간단히 말해서 토비란 최소 10명이상으로 구성된 무장강도집단으로, 대표적인 것이 녹림, 산적, 마적, 해적 등이죠. 또한 양아치들이 시장통에서 폭력과 협박으로 남을 뜯어먹는 것은 토비와 비슷하지만 무장을 하지 않았다면 이는 토비는 아닌 것입니다. 또한 토비는 어디까지나 생계가 목적이지 정치적 목적은 없다는 점에서 비밀결사가 주축이 된 황건적이나 홍건적, 이자성의 농민반란, 또한 모택동의 홍군 역시 토비라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장개석의 국민당측은 홍군을 보고 "공비"라며 비적으로 취급했지만요. 

 

 

 

청말의 토비의 모습이랍니다. 검게 탄 얼굴에 누더기 옷을 입고 구식 소총을 든 모습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삶을 살아야 했는가를 알 수 있죠. 

※ 사진출처 : http://bbs.tiexue.net/post_5775423_1.html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근이 들고 가렴주구가 심해지며 정사가 혼란에 빠지고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면 양민들이 산에 들어가 산적이 되었듯, 중국 역사에도 언제나 토비들은 존재하였습니다. 그런데 청말 태평천국의 난을 거치면서 토비가 대폭 늘어났는데 이는 태평천국이 몰락하면서 잔여세력이나 진압군에서 해산된 군인들이 흩어지면서 일부는 고향땅에 농사나 지으러 귀향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무기를 지닌채 비적화됩니다. 주로 관의 치안이 닿지 않는 성과 성사이의 경계지역이나 산간오지에서 활동하죠. 여기다 청일전쟁의 패배, 의화단의 난, 신해혁명 등으로 중앙정부가 무력화되고 유랑민과 군에서 탈영한 군인들이 비적단에 가담하면서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나게 됩니다.  

 

신해혁명이후 민국시대(1911~1949)에 중국 전토의 토비의 수는 학자들마다 천차만별이지만 적어도 2천만명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전국에서 토비가 가장 많았던 하남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20%가 토비였다고 합니다. 이는 관의 군대보다 더 많은 숫자였고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카오스의 시대였던 것이죠. 

 

 

20년대 토비의 분포도인데, 사실 중국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는 것이 이들이었습니다.  

※ 사진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p155, 대명출판사 

 

또한, 이런 도적떼들의 대표적인 약탈대상이 농민이다보니 농민들 역시 이들에게 맞서 자위를 위한 무장조직을 만드는 것은 당연했는데 이것이 민단(民團), 상단(商團)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촌락과 도시에는 이런 민단, 상단같은 자체 무장조직을 구성하여 군벌들이나 토비들의 약탈에 자체적으로 대항하였습니다.  

 

여기에 "홍창회"라는 조직도 있었습니다. "창자루에 빨간색 술을 달았다"고 홍창회라 불리운 이 집단은 토비에 대항하기 위한 농민들의 자위조직이었으나 민단과는 좀 다른데, 민단이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이라면 홍창회는 일종의 종교적 색채를 지닌 비밀결사였습니다. 부적을 태워서 그 재를 마시고 "부창부입(총칼을 맞고도 죽지 않는다)"라는 주술을 외우는 등 어떻게 보더라도 사이비틱한 느낌을 주죠. 이들은 주로 화북지역의 농민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농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화북 전체에서 수백만명이 이 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학자들중에는 최대 7~8백만명에 달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아무튼 사이비교치고는 대단한 교세인 셈이죠.) 

 

 

 

홍창회의 모습. 의화단이나 백련교도의 한 분파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들은 토비와 군벌에게 맞서기 위해 종교로 뭉친 케이스이죠. ※ 사진출처 : http://big5.china.com.cn/chinese/zhuanti/kzsl/856424.htm 

 

군벌시대 말기인 20년대말 전체 중국군의 숫자가 100만~150만정도였는데 민단과 토비의 숫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총은 물론 창, 칼, 활 등 온갖 잡다한 무기로 무장했지만 청말기부터 혁명과 군벌전쟁시기에 대량의 무기가 민간에 유입되어 돈만 있으면 손쉽게 무기를 구하여 무장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치안이 악화되었던 하남성만 해도 혼란과정에서 관병들의 무기고에서 수백문의 대포와 수십만정이상의 소총이 외부로 유출된 것으로 되어 있

습니다. 여기다 군지휘관이 멋대로 토비들에게 돈을 받고 비축 무기를 팔아먹는 일도 당연히 비일비재했죠. 

 

또한 20년대의 극심한 기근에다 군벌들의 착취, 농토의 집중화로 많은 농민들이 농토에서 쫓겨나 유랑민으로 전락합니다. 특히 전통적으로 남아선호사상으로 결혼적령층인 10대~20대 상당수가 미혼자들로 딸린 식구에 대한 걱정이 없었습니다.(미혼율이 여자보다 남자가 2배이상 높았음) 이들에게 군인이나 민단소속의 향병은 꽤 매력적인 직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수가 왠만한 자영농보다 월등히 좋았기 때문이죠. 대신 군벌들이 전쟁에서 패하거나 또는 필요가 없어지면 해산해야 했는데 이들은 보수도 훨씬 적고 고된 일을 해야 하는 농촌으로 다시 돌아가기보다 대부분은 무기도 있겠다 전우들도 있겠다 끼리끼리 모여서 말그대로 무장강도단이 되어 약탈에 나섭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163.com/jinsiwang@126/blog/static/13902101120120108124203/

 

토비의 세력이 강해지고 쪽수가 꽤나 된다면 지휘관은 이것을 밑천삼아 군벌정부와 협상하여 사면된후 정규군에 편입되는 예도 많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기회만 잘잡으면 크게 출세할 수도 있었죠. 토비출신의 대표적인 군벌이 자칭 "녹림대학 마적학과"운운하던 장작림, 장종창 등이 있죠. 또 중공의 8원수중 한명이자 국공내전당시 서북야전군을 지휘했던 하룡도 원래는 토비출신입니다. 군벌군대는 병력 확보를 위해 토비들을 대거 흡수함으로서 나중에는 누가 토비이고 누가 관병인지도 구분이 안될 정도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남군벌 조척은 오패부가 자기 세력권을 위협하자 세를 불리기 위해 토비들을 상대로 1천명이상의 두목에게는 여장(여단장)직을, 3백명이상에게는 영장(대대장)직을 약속하여 이들을 대거 흡수하였고 이들이 활기치고 다닌 덕분에 하남의 치안은 극도로 악화됩니다. 군벌군대중에는 심지어 병력의 80~90%가 이런 토비들로 구성된 예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해피엔딩"으로만 끝났던 것은 아닙니다. 지방정부 입장에서는 이들은 어쨌든 비적떼인 것은 틀림없는 것이고 관병들이 우세하다면야 굳이 이 골치아픈 인간들을 휘하에 흡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흡수는 어디까지나 토비들의 세력이 워낙 막강하여 제압이 어려울때의 궁여지책인 경우일 뿐이죠.(쓰다 버리기 좋은) 게다가 토비들은 군율이 형편없다보니 관병으로 편입되어도 말도 안듣고 토비때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채 약탈을 일삼기 일쑤였습니다.  

 

따라서 여건만 된다면 지방정부는 군대와 경찰, 경비대 등을 동원해(또는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했으며 토비 우두머리들만 포섭한후 이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도록 만들기도 하고 관직을 주겠다고 미끼를 던진후 이들을 유인하여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습니다. 장작림도 초창기에 토비 우두머리였던 두립삼을 이런 식으로 제거한 공을 인정받아 출세의 길을 잡게 됩니다. 원칙으로는 토비를 잡았을때 재판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으나 압송하는데 번거로움 등으로 현지에서 즉결처분하는 예도 많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누명쓰는 일도 많이 있었겠죠.  

 

토비의 연령대는 10대중후반에서 20대초중반이 대부분이었고 대부분이 미혼자였습니다. 이들의 삶의 환경은 대단히 열악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성병이 만연한데다 아편에 중독되어 대부분이 20대 초반에 죽었고 30대를 넘기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고 합니다. 하남의 유명한 토비군단을 지휘하고 휘하에 수천명에 달하는 부하를 거느렸던 백랑 역시 현상금을 노린 부하에게 암살되어 26살이라는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편, 청말에 와서 기존의 치안조직인 녹영, 보갑, 단련등을 대신해 서구를 본따 근대적인 경찰제도가 성립합니다. 1901년 최초로 중국 근대 경찰조직이자 중앙경찰이라 할 수 있는 "공순총국"이 설립되었고, 다음해 5월 직예총독이었던 원세개의 주도로 천진에 "순경총국"과 순경학당이 설립하고 3천명의 군인을 경찰로 바꾸어 천진에 주둔토록 합니다.(이는 의화단의 난이후 천진이 연합국의 관리에 있어 중국군이 주둔할 수 없기에 원세개가 편법으로 한 것입니다.) 

 

또한 지방경찰조직으로서 각 성에도 "통성순경총국" 또는 "통성경찰총국"이 설립되죠.(이 순경총국은 이후에 경무공소→경찰사무소→경찰소로 명칭이 변경됨) 1905년에는 북경에 우리의 "경찰청"에 해당된다 할 수 있는 "순경부"가 정부부처의 하나로서 설립됩니다. 또한 경찰 확보와 훈련을 위해 "순경학당"과 "교련소" 등이 설치됩니다. 이렇게 경찰조직은 북경정부 산하의 경무처에서 성과 현단위에까지 조직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현의 경우 보통 20~40명정도의 경찰이 배치되었습니다. 

 

 

 

청말의 순경들... ※ 사진출처 : http://baike.baidu.com/view/1092424.htm

 

초반에는 경찰업무는 단순히 치안만을 맡는 것이 아니라 각종 행정업무와 대민업무도 맡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조선시대에 고을 사또가 행정권과 사법권을 함께 쥐고 있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죠. 즉, 일반행정과 치안행정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아직은 과도기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1916년 북경정부에서 현지사와 경찰소장을 겸임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서 경찰조직이 독립하게 됩니다.  

 

또 문제점은 당시 치안이 나쁘고 경찰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서 위에서 언급했듯 촌락에서 자체적으로 무장하고 치안조직을 운용하는 예가 많았습니다. 당연히 이런 무허가 사설경비업체들과 경찰들간에 대립과 충돌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또 현지의 경찰조직과 민단이 서로 뒤섞이거나 아예 경찰이 민단에 편입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경찰의 보수와 대우가 나쁘다보니 대우 좋은 쪽을 택한 격이죠. 경찰 조직이나 정원, 예산도 체계가 없고 뒤죽박죽이었고 사건 처리 과정에서 뒷돈과 뇌물, 갈취 등 온갖 부정부패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심지어 참다 못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이 아무 쓸모없는 경찰소를 없애달라고 탄원하는 경우까지 있었죠.

 

대우와 예산이 형편없다보니 경찰의 질적 수준도 대단히 낮았으며 다수가 정식으로 경찰학교를 졸업한 자가 아니라 돈을 받고 멋대로 뽑았으며 경찰소장에 해당하는 "경좌" 역시 상당수가 현지사의 친인척이었습니다. 그러니 비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이런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개선되어 갑니다. 가장 중요한 예산을 자체 마련(이라 적고 삥뜯기라고 읽는다)이 아니라 정식으로 성 재정에서 충당토록 하죠. 그러나 구조적인 병폐가 너무 심각하고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당시 중국 군벌시대의 여건상 여전히 문제점은 계속되었죠.  

 

경찰의 업무는 일반적인 치안행정외에도 호구조사, 방역, 도로정비, 소방 등 주로 별도의 무장력이 필요없는 쪽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토비나 강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전문적인 무장경찰조직이 필요하게 되었죠. 그래서 각 현의 경비를 위해 "현경비대"가 설립됩니다. 조직과 인원은 천차만별이었으나 하남성 신양현의 경우 약 1백여명정도 되었습니다. 이들은 중앙정부의 중앙군이나 성의 방어를 맡고 있는 지방군같은 주둔부대와는 역할이 구분되었습니다. 이들 경비대는 토비의 공격에 대한 방어와 이들의 토벌이었으며 토비가 늘어나는 겨울이나 변경지역에는 수백명에서 1천명이 넘기도 하였습니다.  

 

경찰이나 경비대는 주로 현의 중심지인 현성이나 규모가 상당히 큰 중요향촌을 중심으로 운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미치지 못하는 작은 촌락들에 대해서는 1914년 북경정부에서 "지방보위단 조례"를 제정하여 자체적인 무장조직을 갖추도록 법적으로 보장합니다. 그런데 이 "보위단"은 민단과는 성격이 달랐는데 민단은 그전부터 농민들이 자기들이 알아서 사람들을 돈을 주고 고용했다면 보위단은 정부가 정한 규정에 의한 것이었고 청나라시절 농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용되었던 "보갑제"에 기초하였기에 실상 주목적은 당시 원세개정권이 지방촌락들에 대한 통제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근세 중국의 혼란기였던 민국시대에 토비와 치안조직간의 대립과 충돌은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토비들의 활동은 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고 장개석의 북벌과정에서도 이들 상당수가 편입됩니다. 이후 중앙정부가 점차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이들의 활동 역시 위축되었고 정규군에 편입되거나 토벌되기도 하였고 공산군에 편입된 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먹고 사는 것자체가 고통이었던 하층민들로서는 토비가 되는 것만이 생존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