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18화 "장개석 북벌을 선언하다"

구름위 2013. 12. 2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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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가 국회를 해산하고 황제에 등극하자, 손문은 광주를 기반으로 원세개와 북양군벌 토벌을 외치며 수차례 북벌에 나서지만 실패로 끝납니다. 북양군벌의 군사력이 남방보다 훨씬 막강했던 것도 있지만, 위대한 혁명가였지만 군인은 아니었던 손문에게는 자기 직속의 병력이 없었기에 광서, 광동, 운남 등의 남방군벌들의 협조가 전적으로 필요했으나 남방군벌들은 결코 손문의 혁명정신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원세개, 단기서의 남벌군에 맞서고 자신들의 지반을 튼튼히 하는데 손문의 명성을 이용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북벌은 고사하고 자기들끼리 치열한 내분과 암살, 암투가 벌어집니다. 

 

손문은 청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삼민주의(민족,민권,민생)을 외쳤으나 민중의 광범위한 참여와 관심을 유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혁명은 어디까지나 일부 도시 지식인들, 즉 소위 "부르조와"(중국에서는 이들을 紳士라고 부름)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신해혁명이 일어났을때 대다수 중국인은 "청조가 무너졌다"라는 것만 알았을뿐 공화정이 무엇이고 삼민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즉, 민중의 참여를 끌어내지 못하다보니 혁명을 위해 기성 군벌들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손문의 한계였고 이것이 중국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촌 민중을 기반으로 혁명사상을 전파하고 이들의 참여를 끌어낸 모택동과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물론 그 모택동도 막상 정권 잡고나서는 민주주의따위 개뿔, 소수 엘리트들에 의한 통치를 하였지만)  

 

또한, 그는 국민당내에서도 "이상주의자"로 통했고 일국의 지도자로서 위기를 헤쳐나갈 결단력과 추진력, 리더쉽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손문은 신해혁명직후 원세개에게 대총통자리를 선뜻 양보한 것만 봐도 개인적 야심은 없었지만 지도자라기보다 정객이며 사상가, 이론가였습니다. 이것이 장개석과의 결정적인 차이였죠. 그는 위대한 혁명가이자 선구자로서 그 뒤를 잇는 지도자들에게 새시대를 열기위한 혁명사상과 이념을 정립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죠.

   

이른바 "토원전쟁(2차혁명)"에서 압도적인 북양군의 공격으로 손문의 혁명군은 전멸당해 손문, 황흥은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원세개 사후 북양군벌들이 환계, 직계, 봉계로 갈라져 치열한 내전을 벌이는 것을 이용해 1921년 광주에서 대총통이 된 손문은 직계에게 아작난 환계와 봉계와 손을 잡고 조곤, 오패부가 장악하고 있는 북경정부에 대해 토벌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한창 순조롭게 추진되던 북벌작전은 1922년 6월 북벌군의 주력멤버이자 광동성장 겸 광동군사령관인 진형명이 배신을 때리고 총통부를 포위하여 손문은 목숨까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군함(중산함)을 끌고와 반란군을 격퇴하고 손문과 그의 와이프(송경령)를 구출해 낸 것이 바로 장개석이었습니다. 장개석의 도움으로 손문은 목숨을 건지고 홍콩으로 탈출할 수 있었죠. 또 장개석은 다른 군벌들과 연합해 진형명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웠고 1923년 1월 반란군을 완전히 제압한후 그는 대본영 참모장으로 임명됩니다. 

 

 

 

후에 동서지간이 되는 손문과 장개석. 손문은 신해혁명전 동경의 망명생활중 진기미를 통해 당시 일본에 유학온 장개석을 소개받아 처음 만났고 그가 매우 뛰어난 인물임을 알았으나 한편으로 그의 조급증과 자제력 부족 등 인격적 결함에 대해서도 여러차례 지적하였습니다. 장개석의 장단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것이죠.(※ 사진출처 :  위키백과)

 

 

 

 

당시 36살의 장개석은 신해혁명이래 혁명군에 가담하여 2차혁명당시에는 손문의 오른팔이자 상해도독이었던 진기미 휘하에서 1개 대대를 지휘하여 청나라 최대 무기공장중 하나이자 북양군벌의 무기공급루트인 상해 강남제조국을 공격해 점령하는 등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손문구출작전의 성공덕에 손문의 절대적 신임과 함께 혁명군의 중요멤버로 급상승하게 됩니다. 

 

그동안 자체 무력없이 군벌들에게 의지했다가 여러번 쓴맛을 본 손문은 자기 휘하의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역할을 장개석에게 맡깁니다. 군벌들을 제외하고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측근들중에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이는 장개석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장개석은 1923년 8월 16일 손문의 지시에 따라 "손일선 박사 대표단"이라는 이름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합니다. 이때 장개석을 수행했던 이중 한명이 주은래였죠. 장개석은 소련혁명군사위원회를 비롯해 군대, 소비에트 회의, 기업 등을 두루 시찰하였고 혁명을 위한 소련의 원조를 요청하여 2700만달러를 지원받습니다. 또한 군사고문으로 블뤼허장군, 정치고문으로 보로딘이 파견됩니다.  

 

귀국후 장개석은 1924년 5월 광주 주강에 있는 황포섬에 새로운 군관학교를 수립합니다. 교장에 장개석이, 이제심이 군관학교 주임, 요중개가 당대표, 하응흠이 총교관, 대계도와 주은래가 정치부 주임, 섭검영이 부교수 등 국민당내 쟁쟁한 인물들이 교수진에 포진하였고 군사고문으로 온 블뤼허장군도 교관으로 참여합니다. 3,000명의 지원자중 약 500여명(예비합격자 120명 포함)이 제1기 생도로 선발됩니다. 또 장개석은 생도들 훈련을 위해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는 광주 석정군수공장에서 500정의 소총을 몰래 빼옵니다. 또 24년 8월에는 군관학교 생도들과 경비대를 동원해 광동상단을 공격하여 무기를 압수했고 10월에 소련군함으로부터 대량의 소총, 기관총, 야포 등을 전달받음으로서 생도들은 이 무기로 강력하게 무장합니다. 

 

북벌직전까지 총 4기까지 배출했으며 졸업생수는 자료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략 5,500명정도 된 것같습니다. 이들은 졸업과 함께 교도연대로 편성되어 전선으로 투입됩니다. 바로 이들이 손문, 이후 장개석정권과 국민당의 물리적 기반이 되는 국민혁명군의 근간이 되는 것이죠.

 

황포군관학교는 북벌로 장개석이 남경을 점령한뒤 1928년 "중앙군관학교"로 명칭이 바뀌어 남경으로 이전되었고 중일전쟁당시에는 임시수도가 있는 중경으로 옮겨갑니다. 국공내전으로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쫓겨간뒤에는 대만 까오슝현 봉산시에 "육군군관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됩니다.  

 

 

 

장개석이 직접 키워낸 "장개석의 아이들"중에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국민당과 공산당의 주요 지휘관이 되어 서로 싸웁니다. 두율명, 호종남, 임표, 팽덕회 등 양측의 쟁쟁한 지휘관들은 서로 동기거나 선후배사이였죠. 또한 많은 우리 독립운동가들과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이 여기에서 군사훈련을 받아 무장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초창기 황포군관학교 교관들과 생도들. 살아남은 이들은 장개석의 최측근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초기 멤버들중에 그런 호사를 누린 이는 극소수였죠.

※ 사진출처 : 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pn=0&num=11922

 

주요 과정은 전술학, 축성학, 마술학(馬術學), 병기학, 위생학, 사격, 제식훈련 등 이론과 실제훈련을 겸한 17개 과정의 군사교육과 국민당사, 삼민주의, 중국근세사, 정치학, 경제학 등 16개 과정의 정치교육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북벌중인 26년 11월에는 국민당 내부의 알력다툼에 따라 황포군관학교와 별도로 무한에 무한분교가 설립됩니다.  

 

초기의 황포군관학교는 상황이 급박하고 최대한 빨리 국민당 자체 무력을 갖춤으로서 군벌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초단기 속성과정으로 6개월도 채 되지 않고 졸업을 시켰습니다.(남경으로 이전한 후에야 비로소 체계가 어느정도 잡히고 정규과정도 3년으로 연장) 당연히 교육수준도 서구의 정규과정에 비한다면 훨씬 뒤떨어질 수 밖에 없었으며 실상 전통적인 유학교육과 근대 서구교육의 중간정도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생도들에게 군사적 지식보다 당에 대한 충성심과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무단 후퇴금지령을 내려 후퇴하는 부대에 대해서는 이유를 불문하고 지휘관을 총살시켰습니다. 이런 점이 북벌전쟁에서의 빠른 진격과 함께 졸업생의 반수 이상이 전사했을만큼 매우 용감하게 싸웠던 그들의 용맹함을 설명해 주는 것이지만, 막상 북벌이 끝나자 혁명에 대한 열의는 금새 시들해졌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혁명투사가 되기보다는 급격히 보수우경화되어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에게 여지없이 깨지게 됩니다. 

 

출처 : 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pn=0&num=11922

 

 

  

한편, 광주에서 쫓겨난 진형명은 여전히 광동성 동부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반손문측 광서, 광동의 여러 군벌들을 규합하여 1924년 10월 다시 광주로 쳐들어 옵니다. 이때까지도 중국 통일은 고사하고 손문의 광동정부는 고작해야 광동성에서도 광주와 그 일대의 작은 영토만 근근히 지배하고 있는데다 그 광주조차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5,000명의 병력을 가진 광동군벌 허숭지를 비롯해 광동, 운남, 광서 군벌들이 손문과 동맹관계를 내세워 광주에 주둔하면서 세입의 절반이상을 차지하였으니 손문정권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알 수 있죠. 광주의 상단들은 그들대로 손문에 복종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위에서 언급한대로 장개석한테 아작납니다. 

 

 

저 빨간색 영역이 손문이 통치하는 영역입니다. 그것도 여러 군벌들과 나누어서 통치하고 손문의 광동정부는 사실 명목상일뿐이니 손문의 세력이 얼마나 미약했는지 알만하죠. 

※ 사진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p.253 

 

약 3만에 달하는 진형명의 군벌연합군이 광주를 침공하자 장개석은 허숭지의 광동군의 지원을 받아 황포군관학교 교관과 생도들로 편성한 교도연대 3천명을 출동하여 치열한 전투끝에 이들을 격파하였으며 또 이과정에서 손문을 배신한 운남군벌 양희민과 광서군벌 유진환의 반란군도 격파합니다. 또 진형명을 계속 추격해 해남도까지 진격하여 26년 2월에 이를 장악함으로서 광동성 전체를 평정합니다. 이 공으로 장개석은 광주위수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여기에다 그동안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던 광서성도 이종인을 중심으로 육영정, 심홍영 등 구계계군벌들을 제압하였고 새로운 "광서왕"이 된 이종인은 손문에게 복종을 선언하고 광동정부산하로 들어옵니다. 이로서 광동정부는 양광(광동성, 광서성의 통칭)을 북벌의 기반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1925년 3월 12일. 간염말기에도 불구하고 장작림의 요청을 받아 내전중지와 평화통일을 위해 북경을 방문했던 손문이 광주로 돌아오지 못한채 그곳에서 결국 서거합니다. 그의 유해는 북벌이 끝난후 남경교외에 묻히게 됩니다. 

 

 

 

손문이 죽자 국민정부는 일단 No.2였던 왕정위가 후계자가 되지만 서로간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더러운 권력 암투가 벌어집니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당연히 장개석이 됩니다. 손문과 동서간이라해도 국민당내에서는 서열이 한참 낮았던 그는 일단 실권을 잡고 있던 왕정위를 비롯한 좌파세력과 손을 잡은후 뛰어난 리더쉽과 판단력, 결단력, 책략으로 경쟁자들을 죄다 밀어냅니다. 또 광동정부 군사부장이자 최대의 군사적 라이벌인 허숭지를 잽싸게 제압하고 체포한후 그의 군대를 자기 휘하로 편입시킴으로서 국민정부내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가지게 되죠. 또 요중개를 암살하고 호한민을 소련으로 강제로 내보냅니다.  

 

손문이 죽은후 3개월뒤인 1925년 6월 15일 국민정부가 수립되었고 왕정위가 주석으로, 장개석은 7인의 군사위원회의 위원이자 광주위수사령관 겸 제1군 군단장이 됩니다. 1926년 3월 20일 이른바 "중산함사건"이 벌어지는데(장개석 납치기도사건) 장개석은 이것이 국민당내 좌파들의 음모라며 좌파들을 대거 숙청함과 동시에 왕정위를 프랑스로 추방합니다. 이로서 왕정위까지 밀어낸 장개석은 5월 제2차 국민당전당대회에서 당 중앙집행위원 상무위원으로 추대된데다 6월에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겸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됨으로서 당권, 정권, 군권 3가지를 몽땅 한손에 쥐게 됩니다. 드디어 장개석의 시대가 열린 것이죠. 

 

왕정위가 장개석에게 밀려난 것은 왕정위 역시 손문과 마찬가지로 자기 직속의 군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주석일뿐 국민당군은 당에는 충성하지만 그렇다고 왕정위 개인에게는 아무런 충성심도 없었습니다. 국민당군은 장개석군을 위시하여 여전히 여러 잡다한 군벌군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서로 통합된 지휘체계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왕정위는 군벌들을 조종하기 위해 장개석과 손을 잡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 무력이 없다보니 장개석에게 이용만 당했을뿐 실제 군사력을 갖춘 장개석을 이길 수가 없었죠. 

 

한편, 북경에서는 중앙의 권력을 놓고 북양군벌들끼리의 내분이 갈수록 치열해 지고 있었습니다. 직환전쟁에서는 장작림과 봉군과 조곤, 오패부의 직군연합군이 단기서의 환계정권을 공격해 정권을 차지한후 다시 제1차 직봉전쟁,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여 장작림이 오패부를 격파하고 북경정권을 장악합니다. 그러나 제2차 직봉전쟁때 연합했던 풍옥상과 장작림이 서로 대립하고 여기에 오패부가 장작림과 손을 잡고 풍옥상을 공격하는등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황당무계한 혼전의 연속이었죠. 

 

장개석은 이런 상황에서 손문의 유지를 잇기 위해 풍옥상과 손을 잡아 북방 군벌들을 토벌하자며 북벌을 주장합니다. 이때 국민정부에 귀순해 온 것이 바로 호남군벌 당생지였습니다. 그는 상관이었던 조항척을 몰아내고 호남성을 장악했다가 반격을 받아 형양으로 후퇴합니다. 그는 삼민주의라던가 혁명사상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멸망당할 판이라 장개석에게 지원을 요청하죠.  

 

장개석은 이것을 호기로 생각하고 6월 23일 열린 군사위원회에서 먼저 호남성으로 출병해 오패부과 손전방을 공격하여 양자강 이남부터 제압할 것을 제안합니다. 장개석의 제안은 결의되었고 7월 1일 국민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에서 "북벌 동원령"을 정식으로 선포합니다. 당시 국민당군의 총병력은 15만정도로 추정되나 1차 북벌에서 실제 동원된 병력은 8개군에 약 6만5천에서 8만정도로서 10만미만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자료마다 다소 차이가 있음) 

 

 

또 1차 목표는 양자강 하류를 장악하고 있는 손전방에 대해서는 견제하면서, 우선 오패부를 격파하고 호남성의 제압과 무한을 점령한다는 것이었으며 중국 전토를 장악하여 "통일국가"를 수립하겠다는 것은 훨씬 훗날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상외로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작전범위도 점점 확대되어 갑니다. 

 

북벌군의 구성은 총사령관에 장개석, 총참모장에 이제침, 참모차장에 백숭희, 등연달이 정치부 주임, 곽말약이 부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제1군(하응흠), 제2군(담연개), 제3군(주배덕), 제4군(이제침), 제5군(이복림), 제6군(정잠), 제7군(이종인), 제8군(당생지)로 구성됩니다. 북벌군은 주로 복건성, 광동성, 광서성, 운남성, 귀주성, 호남성 등 여러 잡다한 남방군벌들로 구성되었으며 각 부대의 편제와 인원, 전투력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결코 국군이 아니라 黨軍일뿐이며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뭉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또 북벌과정에서 많은 군벌군대가 투항하여 국민혁명군에 편입되는데, 이들 모두가 삼민주의에 진심으로 동조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전후를 대비하여 경쟁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으며 따라서 지휘체계나 부대간의 합동작전에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신 상대방들 역시 국민혁명군이상으로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다 무능함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장개석의 북벌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북벌과정에서 이미 심각한 대립에다 북벌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새로운, 그리고 더 큰 전쟁이 발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죠. 

 

국민혁명군에 대항하는 북방 군벌들의 주요 세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오패부 : 직계의 우두머리로 장작림에 패해 북경에서 쫓겨났으나 하남, 호북, 호남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으며 섬서, 사천일부에까지 세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병력은 약 20만~30만 정도. 

○ 손전방 : 원래 오패부의 부하였으나 오패부가 패망한후 동남을 기반으로 자립합니다. 강소, 절강, 안휘, 강서, 복건 5개성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병력은 약 20만정도. 

○ 장작림 : 만주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그는 제2차직봉전쟁에서 승리하여 중국 최강자가 되어 중국 전토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매국적 협정을 맺어 일본의 막대한 원조를 받고 있었습니다. 총 병력은 약 35만~50만.

○ 당계요 : 일명 "운남왕"으로 운남 1개성을 차지하고 있었고 서남지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병력은 약 5~6만

○ 원조명 : 일명 "귀주왕"으로 귀주성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실제 세력은 5~6천정도로 미약했습니다. 

 

이외에도 사천에는 유상, 양삼, 유문휘등의 소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고 청해, 영하, 감숙에는 마씨 일족들이, 신장 위구르에는 양증신이 자신의 독립왕국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오패부, 장작림과 대립하고 있던 풍옥상이 섬서성을 기반으로 국민혁명군에 호응할 것을 선언했으나 세력에서 매우 열세에 놓여 있었고 "산서왕" 염석산은 장작림에게 줄을 대고 있으면서도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약 10만정도인 국민혁명군에 비해 북방군벌들은 대충잡아도 거의 100만에 달했습니다. 여기다 그들은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마구잡이로 이권을 팔고 매국행위를 일삼았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장개석측이 훨씬 열세했으나 질적으로 우세했으며 더욱이 북방군벌들의 무능함과 매국행위를 비판하는 민중들이 "반제국주의", "중국통일"를 기치로 내건 국민혁명군을 열광적으로 지지합니다. 

 

장개석은 북방군벌들이 서로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는 것을 이용해 장작림은 무시하고 오패부, 손전방을 이간질시켜 서로 연합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여기다 오패부 역시 주력을 북경 교외의 남구에 집중시킨후 장작림과 연합해 풍옥상의 국민군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중이었죠.

 

 

  

북벌군은 3개로로 진격하였는데 하응흠, 백숭희가 지휘하는 동로군이 강서, 절강성으로 진격하고, 장개석이 총지휘하고 이종인, 정잠, 담연개 등의 중로군이 동로군을 지원하여 상해, 남경으로 진격하고, 당생지, 이제침 등이 지휘하는 서로군이 호남성으로 진격합니다. 그리고 주배덕의 제3군이 전략예비대가 됩니다.

 

 

선봉에 선 당생지의 제8군을 비롯한 서로군은 일방적으로 오패부의 후방을 격파하고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를 제압합니다. 패전소식을 들은 오패부는 남구에서 돌아와 당생지군에게 맞서지만 호북성과 호남성 경계에 있는 정사교에서 대패하였고 무한에서도 쫓겨납니다. 또 9월 6일에는 한양이, 7일에는 한구, 10월 10일에는 40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무창이 점령되어 호남북 두개성이 모두 혁명군의 손에 떨어집니다. 오패부는 소수의 잔존병력만 거느리고 북쪽으로 후퇴합니다. 

 

 

제1차 북벌의 진행과정(1926년 7월 ~ 1927년 3월)  

※ 사진출처 : 장제스일기를 읽다, 레이황, p.63 

 

오패부군이 전멸되자 다음 목표는 손전방이 됩니다. 오패부의 멸망을 지켜만 보던 무능한 손전방은 그제서야 혁명군에게 맞서기로 결정하고 병력을 강서성에 집결시킵니다. 그러나 하응흠, 이종인, 백숭희 등이 지휘하는 동로군은 신속하게 손전방군 주력을 격파하였고 1927년 2월 18일 항주를, 3월 21일 상해가, 3월 25일에는 남경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손전방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남창공격에서는 장개석 직속인 제1군 제1사단(사단장 왕백령)이 전멸당했고 강서성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혁명군은 15,000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습니다. 또 남경에서는 영, 미 해군이 무력 간섭하여 남경성내를 포격합니다. 그러나 강서성에서 손전방군 주력 4만명을 괴멸시켰고 또 서로군도 동진하여 손전방군을 격파합니다. 멸망의 위기에 빠진 손전방은 장작림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장종창과 저옥박의 봉군 8만명이 가세하지만 이들도 백숭희의 동로군에게 완전히 아작나 손전방과 함께 양자강 북쪽의 산동성으로 도주합니다. 

 또한 풍옥상 역시 장작림-오패부 연합군을 격파하고 하남성으로 진격하였고 4월에 정주, 개봉에서 양측 군대가 만나게 됩니다. 영국정부는 국민정부를 중국 정통정권으로 승인하였고 한구와 구강의 조계를 반환합니다. 이는 중국으로서는 아편전쟁이래 지속적으로 빼앗겼던 주권을 처음으로 되찾은 일이었습니다. 이 점이 이전의 군벌전쟁에서 자기 이익만을 위해 나라의 주권을 마음대로 넘겼던 구군벌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겉보기에 순조롭게 진행되던 북벌은 새로운 시련을 맞게 됩니다. 장개석의 독주에 반발한 이들이 반장전선을 구축한 것이죠. 이는 군비 배분문제에서부터 쌓인 불만에다 광주의 국민정부의 천도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합니다. 당초 장개석은 무한으로 이전할 것을 주장했으나 무한의 수비를 맡고 있던 장개석파의 제11군 군단장인 진명추가 당생지의 압력으로 쫓겨나고 무한은 당생지가 장악합니다. 그리고 반장세력들을 규합해 무한정권을 수립하고 장개석에게 맞서게 됩니다. 이로서 북벌군은 좌중지란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