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 중원 대전(中原大戰) > 군벌시대 최대의 혈전 - 북벌 끝나다

구름위 2013. 12. 2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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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이래 중국은 사실상 무정부상태가 되어 전국에 할거한 군벌들간의 치열한 혈전이 반복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치열했으며 또한 군벌내전의 종지부를 찍은 전쟁이 장개석 진영과 반장개석 진영간에 벌어진 중원대전입니다. 1929년 4월부터 1930년 11월까지 벌어진 전쟁에서 쌍방 합해 최대 200만명이 참여했으며 30만명의 사상자를 냈고 전장터가 된 화중지방은 초토화되었습니다. 특히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 산동성과 하남성이었습니다.

 

1928년 12월 29일, 만주의 지배자인 장학량이 복종을 선언함으로서 신해혁명이래 군벌 할거의 시대였던 중국은 국민정부가 북벌을 선언한지 2년 6개월만에 청천백일기의 깃발 아래 하나로 통일됩니다. 그러나 통일은 겉보기일뿐 혼란은 그대로였습니다. 장개석의 북벌전쟁은 단지 원세개 이래 북경을 지배했던 북양군벌시대를 끝냈을 뿐, 그 빈자리는 신군벌들이 대신 차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북벌전쟁에서 장개석과 국민정부는 신속한 승리를 위해 진격로상에 있는 군벌들을 돈으로 매수하고 기득권을 묵인하는 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장개석을 위시한 북벌군의 주요 군벌들은 향후 주도권 확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군사력을 확충하고 패잔병들을 흡수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불렷습니다.

 

1926년 7월 북벌을 시작했을때 국민혁명군의 총병력은 8개군 15만명정도였으나 군벌군대를 대거 흡수하면서 12월에는 26만명으로, 1927년 초에는 40만명으로 급격히 늘어났으며 북벌이 끝났을때에는 무려 4개 집단군 84개군 220만명에 달했습니다. 이 중 장개석의 제1집단군이 55만명, 풍옥상의 제2집단군이 40만명, 염석산의 제3집단군과 이종인의 제4집단군이 각각 20만명이었으며 이외에 장학량의 동북변방군이 30만명, 사천성을 비롯해 서부지역에 할거한 군벌들 역시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명을 각각 보유하였습니다.

 

덕분에 싸움과 희생은 피할 수 있었지만 군벌들은 여전히 무력을 소유한채 국민정부로부터 반독립된 자신의 왕국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손문의 삼민주의나 혁명사상은 관심밖이었습니다. 더욱이 북벌은 중국 동부지역에서만 진행되었고 장학량이 지배한 만주와 몽골, 신강성, 청해성, 사천성 등 서부의 광대한 지역은 여전히 구군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국민정부에 형식상 복속하여 "국민혁명군"에 한자리씩 차지했지만 국민정부에 복종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남경국민정부는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정부가 되었으나 국민에 의해 만들어진 정부가 아니었기에 권위는 매우 제한되었으며 대외적으로만 중국을 대표하는 외교권을 가질 뿐 통치력은 상해, 남경을 중심으로 한 양자강 하류의 몇몇성에만 미칠 뿐이었습니다. 북벌 전쟁 직후의 중국은 17세기 신성로마제국처럼 수많은 봉건군벌들의 반 독립된 왕국들로 구성된 세계였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통일되지 못해 가령 광주의 화폐는 상해에서는 종이조각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1935년 장개석의 전격적인 화폐개혁으로 비로소 해결됩니다.

 

장개석은 국민정부의 주석이었으나, 동시에 이런 봉건군벌중의 한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단지 여러 군벌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일뿐 다른 군벌들을 압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전체 84개군중에서 장개석 직계부대는 고작 9개군에 불과했습니다. 국민정부안에서도 왕정위, 손과를 비롯해 권력을 노리는 수많은 파벌들이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스스로 손문의 후계자로서 중국의 유일무이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국민에 의한 선거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했으며 무력과 독재에 의한 지배를 원했습니다. 이는 다른 군벌들이나 정치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그러하듯, 승자에게 국가는 하나의 전리품일 뿐이었습니다.(이런 시각은 나중에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모택동과 중공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부터 오월동주의 관계에서 시작된 그들의 갈등은 북벌과정에서도 이미 표면화되고 있었지만 북벌이 끝나자말자 중국이라는 전리품을 앞에 두고 본격적으로 대립과 투쟁이 시작됩니다. 특히 군비와 무기 배분 문제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220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은 남경정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연간 유지비용은 5억 4600만원에 달했으나 남경정부의 수입은 5억원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장개석은 자신의 직계부대에 군비를 우선적으로 배분하면서 다른 군벌들의 불만은 점점 높아집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것이 1928년 7월 11일 북경 교외의 탕산에서 열린 "탕산 편견회의(編遣회의)"였습니다. 장개석은 다른 군벌 지도자들에게 군대의 대대적인 축소와 이들을 공장과 건설 노동자로 활용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는 원론적으로는 타당했으나 다른 군벌들에게는 이를 명분으로 군권을 장악하려는 음모가 아닌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내전으로 치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