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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월 21일 국공내전에서의 패전이 임박하자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蔣介石)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일단 '하야'를 합니다. 공석이 된 총통직을 부총통 이종인(李宗仁)이 '대리'하게 되었지만, 장개석이 계속 국민당 총재직을 유지함으로서 실권은 여전히 장개석이 쥐고 있는 상황이었지요(국민당의 정부체제는 소련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당권우위의 체제였음). 이미 1948년부터 장개석은 패전을 예감하고 대만을 최후보루로 삼으려는 구상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48년 말 수도 남경(南京)의 공장시설들을 대만으로 운반하려 시도한 것 외에 하야 직후엔 장남 장경국(蔣經國)을 상해(上海)로 파견해 공군으로 하여금 신속히 비행장을 수리, 건설토록 독려하였습니다. 이 비행장을 통해 대만으로 공수한 것은 군대는 물론이고 대량의 물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약 1500척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합니다. 그러나, 장개석 본인이 대만으로 건너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방해공작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중국 대륙이 공산화 될 경우, 대만을 서태평양 방어 체계의 주요 기지로 만든다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장개석이 대만으로 철수해 오면 대만도 대륙과 마찬가지로 공산화될 위험 가능성이 높았고, 그래서 대만을 일종의 非공산당이면서 장개석의 통제도 받지 않는 '지방정부'가 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도대로 대만에서의 정권수립을 진행시켜 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도록 확보하는 게 미국의 對中정책의 기본 목표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1948년 말 미국은 대만성 주석 위도명(魏道明)과 접촉을 가져 대만에 지방정권을 수립하는 것에 대해 협의했으나, 장개석은 이것을 눈치챘는지 자신의 심복인 진성(陳誠)을 신임 대만성 주석으로 임명해 대만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진성을 끌어들이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끝났고, 미국 유학파 장군인 손립인(孫立人)을 회유하려는 공작도 실패하고 맙니다.
이밖에 미국은 장개석이 대만으로 가는 걸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만의 지위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1948년 말 대만성 주석 위도명이 駐대만 미국 총영사 케네스 크렌츠(Kenneth Krentz)와의 회담에서 장개석의 대만 이주를 암시하자, 크렌츠는 '對日강화조약'이 아직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만은 법률적으로 아직 중국의 영토가 아니며, 따라서 장개석이 대만으로 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장개석이 총통직을 사임한 직후인 1949년 1월, 駐中 미국대사인 존 스튜어트(John Stuart)는 자신의 고문인 부경파(傅涇波)를 '대리총통' 이종인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통고합니다.
'駐中 미국 군사대표 단장 버터워스(Butterworth) 장군이 듣기에는 장 총통이 지금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을 경영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그는 이를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대만은 미군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며, 따라서 비록 카이로 회담 당시 중국으로 귀속한다는 합의가 있었다고 해도 對日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지금, 그 주권이 누구에게 속하는 것인지는 아직 아무런 법률적 근거가 없다. 따라서 장 총통이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욕심 때문에 해・공군 기지를 대만으로 철수시키려 한다면 이는 대단히 주제넘은 짓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으며, 버터워스 장군은 스튜어트 대사가 장 총통에게 구두 항의를 하도록 준비하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스튜어트 대사는 행동을 취하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한 이종인 대리총통의 의견을 알고 싶어 한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를 안 장개석은 1949년 3월, 前 외교부장 왕세걸(王世杰)로 하여금 대만에서 공개적인 담화를 발표케 합니다. 이 담화에 의하면 중국은 본래의 영토를 회복한 것이며, 대만은 군사 점령지역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1941년 중국이 정식으로 對日 선전포고를 한 이래, 대만을 일본에 할양토록 규정한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체결)은 효력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그 때부터 대만은 이미 법률적으로 중국에 귀속되었고, 그러므로 중국은 이 섬에 대해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4월 15일 공개발표를 통해 '대만의 최종적 지위는 장차 조약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장개석이 대만으로 건너가는 걸 막진 못했습니다.
1949년 5월 마침내 장개석은 대만 남부의 고웅(高雄)으로 건너갔고, 6월 24일엔 대북(臺北)으로 옮겨 대북시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초산(草山)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함으로서 대만에서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초산은 온천으로 유명한 명승지였는데, 장개석은 초산의 이름을 '양명산(陽明山)'이라 바꿔 자신이 일생 동안 숭배한 명대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을 기념케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만에 정착한 장개석이었지만, 한편으론 대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도 당연했습니다. 특히 국민당군이 곳곳에서 패전하고 있긴 했어도, 아직 화중(華中) 이남을 중심으로 국민당의 거점 지역이 남아있었던 것이 장개석이 1949년 말까지 대만과 대륙을 오간 이유가 되었지요. 대북에 거처를 마련하기 전인 1949년 6월 21일, 장개석은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 복건성 복주(福州)에서 국민당군 장군들을 접견하였고 7월 6일엔 필리핀을 방문했는데, 7월 14일엔 다시 광동으로 날아가 대륙의 잔여 지역들을 순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8월 4일 호남성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2주 후엔 복주도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10월 1일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고 그 와중에도 공산군은 거침없이 진격해 10월 14일, 광주마저 함락되자 장개석은 내륙에 위치한 사천성 중경(重慶)으로 도망을 갑니다(중일전쟁시기 임시수도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지요). 11월 30일 중경이 함락되자 다시 성도(成都)로 도망했고, 12월 9일엔 운남성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장개석은 더 이상 대륙에 머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949년 12월 10일 오후 2시, 장개석은 자신의 전용 비행기인 미령호를 타고 성도의 봉황산 비행장을 이륙하여 곧장 대만으로 건너갔습니다. 이후 1975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다시는 대륙 땅을 밟지 못합니다.
출처 : 대만현대정치사 張星久, 吳懷連 지음
중국 대륙이 공산화 될 경우, 대만을 서태평양 방어 체계의 주요 기지로 만든다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장개석이 대만으로 철수해 오면 대만도 대륙과 마찬가지로 공산화될 위험 가능성이 높았고, 그래서 대만을 일종의 非공산당이면서 장개석의 통제도 받지 않는 '지방정부'가 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도대로 대만에서의 정권수립을 진행시켜 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도록 확보하는 게 미국의 對中정책의 기본 목표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1948년 말 미국은 대만성 주석 위도명(魏道明)과 접촉을 가져 대만에 지방정권을 수립하는 것에 대해 협의했으나, 장개석은 이것을 눈치챘는지 자신의 심복인 진성(陳誠)을 신임 대만성 주석으로 임명해 대만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진성을 끌어들이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끝났고, 미국 유학파 장군인 손립인(孫立人)을 회유하려는 공작도 실패하고 맙니다.
이밖에 미국은 장개석이 대만으로 가는 걸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만의 지위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1948년 말 대만성 주석 위도명이 駐대만 미국 총영사 케네스 크렌츠(Kenneth Krentz)와의 회담에서 장개석의 대만 이주를 암시하자, 크렌츠는 '對日강화조약'이 아직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만은 법률적으로 아직 중국의 영토가 아니며, 따라서 장개석이 대만으로 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장개석이 총통직을 사임한 직후인 1949년 1월, 駐中 미국대사인 존 스튜어트(John Stuart)는 자신의 고문인 부경파(傅涇波)를 '대리총통' 이종인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통고합니다.
'駐中 미국 군사대표 단장 버터워스(Butterworth) 장군이 듣기에는 장 총통이 지금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을 경영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그는 이를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대만은 미군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며, 따라서 비록 카이로 회담 당시 중국으로 귀속한다는 합의가 있었다고 해도 對日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지금, 그 주권이 누구에게 속하는 것인지는 아직 아무런 법률적 근거가 없다. 따라서 장 총통이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욕심 때문에 해・공군 기지를 대만으로 철수시키려 한다면 이는 대단히 주제넘은 짓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으며, 버터워스 장군은 스튜어트 대사가 장 총통에게 구두 항의를 하도록 준비하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스튜어트 대사는 행동을 취하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한 이종인 대리총통의 의견을 알고 싶어 한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를 안 장개석은 1949년 3월, 前 외교부장 왕세걸(王世杰)로 하여금 대만에서 공개적인 담화를 발표케 합니다. 이 담화에 의하면 중국은 본래의 영토를 회복한 것이며, 대만은 군사 점령지역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1941년 중국이 정식으로 對日 선전포고를 한 이래, 대만을 일본에 할양토록 규정한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체결)은 효력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그 때부터 대만은 이미 법률적으로 중국에 귀속되었고, 그러므로 중국은 이 섬에 대해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4월 15일 공개발표를 통해 '대만의 최종적 지위는 장차 조약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장개석이 대만으로 건너가는 걸 막진 못했습니다.
1949년 5월 마침내 장개석은 대만 남부의 고웅(高雄)으로 건너갔고, 6월 24일엔 대북(臺北)으로 옮겨 대북시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초산(草山)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함으로서 대만에서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초산은 온천으로 유명한 명승지였는데, 장개석은 초산의 이름을 '양명산(陽明山)'이라 바꿔 자신이 일생 동안 숭배한 명대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을 기념케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만에 정착한 장개석이었지만, 한편으론 대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도 당연했습니다. 특히 국민당군이 곳곳에서 패전하고 있긴 했어도, 아직 화중(華中) 이남을 중심으로 국민당의 거점 지역이 남아있었던 것이 장개석이 1949년 말까지 대만과 대륙을 오간 이유가 되었지요. 대북에 거처를 마련하기 전인 1949년 6월 21일, 장개석은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 복건성 복주(福州)에서 국민당군 장군들을 접견하였고 7월 6일엔 필리핀을 방문했는데, 7월 14일엔 다시 광동으로 날아가 대륙의 잔여 지역들을 순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8월 4일 호남성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2주 후엔 복주도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10월 1일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고 그 와중에도 공산군은 거침없이 진격해 10월 14일, 광주마저 함락되자 장개석은 내륙에 위치한 사천성 중경(重慶)으로 도망을 갑니다(중일전쟁시기 임시수도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지요). 11월 30일 중경이 함락되자 다시 성도(成都)로 도망했고, 12월 9일엔 운남성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장개석은 더 이상 대륙에 머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949년 12월 10일 오후 2시, 장개석은 자신의 전용 비행기인 미령호를 타고 성도의 봉황산 비행장을 이륙하여 곧장 대만으로 건너갔습니다. 이후 1975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다시는 대륙 땅을 밟지 못합니다.
출처 : 대만현대정치사 張星久, 吳懷連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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