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제23화 "라이즈 오브 코뮤니스트, 중국공산당의 성립"

구름위 2013. 12. 2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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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말기 이른바 "3대전역"에서 200만에 달하는 국민당 정부군의 주력을 격멸한 모택동의 인민해방군은 49년 4월 20일 저녁, 양자강을 도하하여 최후의 총공세에 나섭니다. 이미 전투능력을 거의 상실한 국민당군은 국지적으로 치열한 저항을 하기도 했으나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공산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한채 도처에서 연패당하죠. 반년후 장개석은 직계 중앙군 50만명을 대만으로 철수시키는 "중국판 덩케르크"을 재현하게 됩니다. 

 

  

개국대전 선포식 직후 거행된 해방군의 퍼레이드. 일본의 90식 철모를 쓰고 있습니다. 소련군이 관동군으로부터 대량으로 노획하여 만주에서 공산군에게 양도한 것들이죠. 

※ 사진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60716 

 

그리고 10월 1일 오후 3시, 북경에서는 류소기, 주덕, 송경령, 이제심 등 주요 지도자와 지휘관을 비롯해 30만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개국대전"이 거행되었고 모택동은 "동포 여러분, 오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습니다"라고 연설합니다. 한때 중국 전체를 통치했던 장개석에게 이제 남은 것은 대만과 동남연안의 일부 도서지역뿐이었고 이조차도 패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죠. 1911년 신해혁명이래 혼돈의 시대의 끝자락에서 최후의 승자는 공산당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처음 공산주의 사상이 유입된 것은 1918년 제정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이 일어나 짜르 정권이 무너진후 러시아에서 공부중이던 이대교, 진독수 등 젊은 유학생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이들에 의해 중국에서도 도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점차 전파되기 시작하죠. 짜르 정권을 대신해 수립된 소련은 중국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공산당 조직의 결성을 지원합니다. 1920년 5월 상해에서 몇몇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공산조직이 결성되었고 북경, 천진, 한구, 장사, 광주 등 주요 대도시에서도 차례로 결성됩니다. 그리고 21년 7월 23일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제1회 전국대표 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됩니다. 이때 공산당원은 고작해야 57명에 불과했고 이들중 12명이 각 지역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자기들끼리의 조촐한 모임에 불과했죠. 그러나 이것이 바로 중국공산당의 첫탄생이었습니다.(참고로 2011년 12월 기준으로 중국공산당원은 9,260만2천명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앙위원장에 진독수가, 부위원장에 주불해, 조직부장에 장국도, 선전부장에 이달 등이 선출되었는데 이날 창당대회에 장사대표로 참석한 이가 바로 모택동이었습니다. 

 

당시 27살이었던 모택동은 2년전 북경대학의 도서관 사서보를 하면서 이대교, 진독수를 만나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호남성 장사에서 사회주의 청년동맹 지부를 결성하면서 점차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름도 없는 한낱 촌놈 무지랭이에 불과했던 그가 이후 진독수, 주불해, 장국도같은 쟁쟁한 인물들을 제치고(더욱이 주불해는 곧 탈당하여 국민당에 들어갔다가 중일전쟁중에 왕정위정권에 빌붙어 요직을 맡음으로서 매국노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미래 최고지도자의 보위에 오르리라고는 이날 참석한 사람들중에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시적의 모택동. 20대때라 확실히 샤프해 보입니다만, 저 특이한 헤어스타일은 어쨌든 이때부터 이미 이마가 벗겨질 조짐이 있었군요...-ㅅ- 

 

57명으로 시작한 공산당은 이후 25년 1월 상해에서 제4차 전국대회가 개최될때까지도 전국의 당원수는 고작해야 950명에 불과했을만큼 공산당의 세력은 극히 미미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해인 24년 1월 중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연합(후에 "1차 국공합작"이라고 불리우는)이었습니다. 

 

원세개에 대항하는 이른바 "토원전쟁"을 일으켰다가 북양군벌에게 쫓겨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중국 최남단의 광주로 내려온 손문은 자기 수중에 가진 것이 거의 없었기에 남쪽동네 군벌들의 힘을 빌려 북벌을 추진했으나 군벌들의 배신으로 번번히 실패하고 심지어 한밤중에 야반도주를 해야하는 치욕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조직도 자금도 없이 남의 힘에만 기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손문은 자기 직속의 군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순수"한 뜻에서 후원할만한 외세열강을 찾습니다. 그게 바로 소련이었죠. 

 

당시 중국내 지식인들은 제정러시아가 중국내 가지고 있던 모든 이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카라한선언') 소련에 대해 당연히 높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련 역시 자신들의 혁명사상을 전세계에 전파하려고 노력중이었죠. 제국주의인 침략야욕을 숨기지 않고 중국을 멸시하던 영, 프, 일, 미 등과 소련은 확실히 달라보였습니다.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사상은 필수교양이나 다름없었고 교수들과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복음"에 나서죠.  

 

당시 영, 미 등 구미 열강들은 장작림, 오패부, 단기서 등 북양군벌들이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고 있던 북경정부를 중국 정통정권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세력도 미미하고 군소군벌의 연합체에 불과한 손문의 광주군정부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죠. 따라서 손문의 원조 요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소련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손문은 1923년 8월 16일 장개석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고 소련도 보로딘을 비롯한 정치, 군사고문과 막대한 재정, 군사원조를 시작합니다. 여기서 소련이 원조의 전제조건으로 내건 것이 바로 "국공합작"이었습니다.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연합은 소련 코민테른에서 파견온 마아링과 주중국 전권대표로 온 아돌프 요페, 정치고문 보로딘 등이 주도하여 양자와의 교섭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 어떤 유사성도 없었고 추구하는 목적과 방식도 전혀 달랐습니다. 사실 손문 본인부터가 공산주의와 생판 상관없는데다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 없었으며 "중국의 레닌"이 될 양반은 더더욱 아니었죠. 그는 "연소용공"을 내세우면서도 요페에게 "중국에서 공산혁명을 실시할 수 없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손문은 공산당을 국민당과 대등한 관계로서의 연합이 아니라 그들이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을 허용하였고 요페도 이를 받아들이죠. 

 

공산당 역시 처음에는 국민당과 손을 잡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데다 군벌들이 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한 손문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굴욕이라고 반대합니다. 또한 손문이 북양군벌 단기서와 손을 잡으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도 "말만 반제, 반군벌일뿐 실제로 하는 행동은 군벌과 다름없다"라고 여기죠.(사실 맞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이 주도하던 소련 코민테른의 재정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감히  소련의 지시를 씹어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죠. 대신 그들은 국민당내에서 공산당의 세력을 확대하여 종국에 국민당 전체를 장악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대교를 필두로 차례로 국민당에 입당합니다.  

 

그리고 1924년 1월 20일에 광주에서 제1차 중국국민당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고 정식으로 연공이 선언되어 국공합작이 이루어집니다. 24명의 중앙위원중 3명이,17명의 후보위원중 7명이 공산당원중에서 임명되었습니다. 모택동도 17명의 후보위원중 한명으로 임명되었죠.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던 광동고등사범학당 강당. 현재는 박물관이 되었다는군요.  

※ 사진출처 : http://kr.chinajilin.com.cn/cxz/content/2011-08/08/content_60461.htm 

 

제1차 국공합작은 이렇듯 이후의 2차 국공합작(1937년~46년까지의 합작)만큼이나 서로간의 첨예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손문은 첫째로 소련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 그리고 그가 주도하는 천하통일에 공산당을 활용하기 위해서 국공합작을 받아들인 것이고, 이대교와 진독수를 비롯한 공산당 역시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장개석 일기를 읽다"를 쓴 레이황은 손문이 공산당원들에게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도록 한 것이 실수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국공합작은 한마디로 "이슬람교도보고 이슬람교를 믿으면서 동시에 기독교도 믿으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하죠.  

 

국민당내에서도 "연소용공"을 반대하고 공산당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사람이 바로 장개석이었죠. 이렇게 동상이몽으로 뭉친 양자는 연합하는 순간부터 갈등할 수 밖에 없었고 다음해 3월 손문이 북경에서 장작림을 만나는 와중에 사망하면서 치열한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동시에 국공합작이 있었기에 북벌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국민당은 손문 한개인의 사조직에 불과할만큼 세력이 아주 미미했으며 손문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을뿐(삼국지의 헌제를 연상하면 될 정도로) 아무런 실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고문들에 의해 주먹구구식에 오합지졸에 불과한 국민당을 소련식으로 조직을 혁신시키고 엄격한 규율과 복종을 요구하였으며 소련식의 군대를 만듭니다. 소련의 원조로 자금과 무기를 확보하죠. 주은래를 비롯한 젊은 공산당 간부들은 일선에서 노동자과 농민들을 대상으로 "반제국주의", "반군벌"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여 이들의 호응을 얻어내었고 북벌과정에서 많은 노동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북벌군에 가담함으로서 전세가 결정적으로 기울게 되죠. 국공합작이 없었다면 손문과 장개석은 북벌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공산당 역시 국공합작을 이용해 자신들의 세력을 엄청나게 확장하게 되죠.  

 

또한 24년 5월에는 북벌군 양성을 위해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어 국민당 좌우파와 공산당원들이 골고루 요직을 맡게 됩니다. 장개석이 교장으로, 광서군벌 이제심이 부교장, 주은래가 정치부 주임에 임명됩니다. 또 소련에서 파견된 군사고문들이 교관을 맡습니다. 이들이 가르친 생도들이 북벌군의 핵심이 되었고 나중에는 국공양쪽으로 갈라져 서로 동기와 선후배관계로서 총부리를 겨누게 됩니다. 황포군관학교는 장개석에게 북벌의 성공과 함께 권력을 차지하는 무력배경이 되었지만 동시에 공산당에게도 군사역량을 가진 미래의 간부들을 키우는 양성소로 활용된 것이죠. 

 

손문이 죽자, 장개석은 왕정위와 손을 잡고 국민당 원로인 요중개를 암살한후 광동군벌 호한민, 허숭지같은 국민당내 우파들을 잽싸게 제압하여 군권을 장악합니다. 뒤이어 26년 3월 20일 이른바 "중산함사건"(중산함의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납치하려고 기도했다는 사건)을 조작해 국민당내 공산당원들이 반란을 꾀했다며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이 사건으로 소련과의 관계경색과 국공합작을 깨뜨리기 직전까지 악화되었으나 쌍방의 양보로 적당히 무마됩니다. 모스크바에서 국공합작을 주도했던 스탈린의 적극적인 화해 조성에다, 장개석 역시 아직은 자기 힘이 국민당내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공산당을 한방에 숙청하기에는 역부족인데다 소련의 원조와 공산당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어쨌든 이 사건으로 공산당의 권한과 세력이 대폭 위축되어 장개석에 대한 감정이 악화됩니다. 여기서 폭탄을 맞은 것은 왕정위였고 그는 프랑스로 쫓겨갑니다. 왕정위가 차지하고 있던 군사위원장 자리는 장개석이 차지함으로서 국민당내 그의 위상은 대폭 강화됩니다.  

 

 

문제의 중산함이 바로 이놈. 청일전쟁으로 청해군의 대부분이 전멸한후 청나라는 해군재건계획을 추진합니다. 그중 일본에 68만엔의 돈을 주고 건조한 것이 이 중산함이었는데 인도된 시기는 청나라 망한후인 1912년이었습니다. 배수량 780톤에 승무원은 140명, 주무장은 101cm 포 1문, 76.2cm 포 1문 등 한마디로 연안용 포함수준이었고 중일전쟁당시 38년 10월 무한보위전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격침당합니다. 

 

1926년 7월 1일, 국민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에서 장개석은 북벌을 선언합니다. 8개군 총 10만명의 북벌군이 편성되어 북진에 나서죠. 오패부가 제일 먼저 아작이 났고 그 다음에는 손전방이 격파당합니다. 장작림과 대립하고 있던 풍옥산도 국민당에 가입하고 북벌군에 참여합니다. 풍옥상이 국민당에 가입하자 정치위원으로 파견된 사람이 바로 등소평이었습니다. 양다리 걸치며 관망하던 염석산도 장개석의 적극적인 회유에 의해 북벌군에 참여하여 북벌군과 북양군벌간의 균형은 북벌군에게 유리하게 기울게 됩니다. 

 

북벌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이 과정에서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인 고문들과 공산당과 장개석간의 대립과 갈등은 극도로 심화됩니다. 양자는 서로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을 펼치며 견제를 합니다. 수도 이전을 놓고 공산당과 좌파측은 무한으로, 장개석은 남경으로 갈라서게 되죠. 당시 장개석은 남들이 보기에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고 여겨져 이른바 "붉은 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러나 이 "붉은 장군"은 오히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1927년 4월 12일 상해에서 "반공쿠테타"를 일으켜 공산당에게 불의의 반격을 가합니다. 당시 상해는 주은래의 주도로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손전방의 군대를 몰아내고 장악했는데 장개석은 이들을 습격하여 상해를 장악하였고 광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도 다수의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합니다. 이당시 북경에서 몰래 활동하고 있던 이대교 역시 이 사건으로 신분이 노출되어 장작림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합니다.  

 

왕정위 등 좌파가 주도하는 무한정부는 장개석의 행위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를 모든 직책에서 해임합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남경에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쌍방이 일촉즉발상황까지 가게 되지만 무한정부는 실질적인 무력도 없어 군벌에 불과한 당생지에게 의존해야 했고 풍옥상에게 원조를 요청하지만 그 역시 이미 발빠른 장개석에게 포섭되어 있었죠. 왕정위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장개석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하야를 선언하지만 이는 그냥 눈속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무한정부에게 항복할 명분을 주기 위함일뿐이었죠. 왕정위는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장개석이 하야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무한정부는 남경정부에 복속합니다.

 

이로서 보로딘을 비롯한 군사고문들도 소련으로 돌아가고 공산당은 분열되어 제1차 국공합작은 완전히 결렬됩니다.  일부는 장개석밑으로 들어가지만 상해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주은래와 공산당 지도부는 장개석을 주적으로 삼아 투쟁할 것을 선언합니다.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에게 자중할 것을 명령하지만 격앙될대로 격앙된 주은래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국민혁명군내 공산당계열의 부대들에게 무장봉기를 명령합니다. 8월 1일 남창에서 장발규휘하의 주덕, 하룡, 엽정의 부대 2만명이 반란을 일으켰고 9월 9일에는 모택동이 장사에서 농민들을 선동해 "추수봉기"를 일으킵니다. 12월 11일에는 광주에서 엽정, 섭검영, 서향전 등의 주도로 제4 교도연대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들이 성급하게 일으킨 반란은 압도적인 정부군의 진압으로 며칠도 안되어 참담하게 실패로 돌아갑니다. 모택동은 민단(마을 자경단)에 체포되어 처형직전까지 갔다가 뇌물을 주고 간신히 탈출하여 소수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강서상 변두리의 정강산으로 도주합니다.  

 

 

 

 

이렇게 공산당에 대한 장개석의 반격은 완전한 승리로 끝나고 이것으로 장개석은 국민당내에서 그의 독재권력을 완전히 굳힐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특유의 뛰어난 권모술수와 추진력에 있었죠. 반면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이 이끄는 일단의 공산세력들은 비록 도시에서의 무장봉기에는 실패했지만 "우리 아직 죽지 않았다"라며 농촌에서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어 역량을 빠른 속도로 키워 나갑니다. 따라서 북벌이 끝난후 양자는 더 큰 스케일로 대결하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