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제사와 행사로 날이 새고 해가 진다
조선의 국력이 소진된 이유
우리나라 보물 제1430호이기도 한 정조의 <화성행행도 팔첩병풍> 그림을 보노라면 실로 장업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참배를 자주 다닐 때 그린 이 병풍 그림은 1795년 정조 19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행차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보고 단지 화려하고 장엄하구나, 그렇게만 느꼈다면 가령 당신은 고위 공직자와 같은 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시장거리의 서민 물가에는 관심이 없고 화려한 한국은행 수출 지수만 꿰고 있는 그런 공직자 말이다.
윤 2월 중순이라면 아직도 날이 차가운 날씨였을 것이다. 이 행차에 동원된 군졸 숫자가 약 5천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온갖 무거운 깃발을 들고 묵묵히 따라가고 있는 저 하급 군졸들의 모습을 보면 열흘 동안 왕의 행차를 뛰따라 다니다가 수당 한 푼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의 관례대로 자신이 먹을 밥을 자신이 가지고 와서 먹어면서 동원된 것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대략 8도에 걸쳐 6, 7백만 남짓이었다. 서울, 경기 일원은 많아봐야 백만 남짓, 지금의 수원시 인구보다도 적었다.
왕궁의 행사에 동원되는 군사는 모조리 경기, 황해도 지역에서 징발했다. 수원, 강황, 해주 등지가 단골 징집 대상이었는데 당시는 상비군은 거의 없고 군역 대상자들은 연간 순번에 따라 동원되어 각종 경비나 성 쌓기 등을 했다. 동원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민들이었다.
광해군 당시 광해군의 생모에 대한 성묘를 위해 대궐 밖으로 나가려고 한 달 전 동원 군졸을 점검하는데 병조에서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징집하려면 순번에 따라 강화도와 수원에서 동원해야 하는데 숫자도 3,4백 명밖에 되지 않아서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해주 군사는 전번에 동원되었고 그렇다고 호남이나 경상도에서 불러 올 수도 없었다. 그러니 '행사를 자제하소서' 하고 건의했다. 당시 서울의 상비군은 훈련도감의 3,4백 명뿐이고 대궐 수직군사들 약간 명이 보태진다. 그러니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대궐을 장악하는 데 내응한 장수도 있었지만 이처럼 수도와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이 미약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라 인조는 쉽사리 반정에 성공이 가능하였다.
병자호란이 났을 때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총동원된 군사가 1만 3천 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몇백 군졸과 사대부가의 노비들, 대궐 안의 노비들 숫자였는데 그들은 남한산성으로 가서 10만 청나라 군대와 대적하다가 결국 식량이 떨어져 손을 들고 말았다. 호남과 경상도 지역에서 지원군이 올라왔지만 대부분 오합지졸 상태였고 훈련이나 무기도 변변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장수들 또한 문관들로 전쟁 경험이 일천한 무능한 지휘관들이 대부분이었고 서로 상하 지휘계통이 제대로 수립되지도 않아 우왕좌왕하다가 그만 기습한 청나라 기병 수백 명에 졸지에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각지에서 올라온 근왕군은 대부분 나중에 책임추궁을 면하기 위해서 올라온 흉내만 내었고 강건너 청군을 쳐자만 보다가 근왕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자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
당시 전국의 인구가 7백만이라는 숫자도 신빙성이 높지 않다. 당시 시책이 지방의 인구 늘리기, 농지 늘리기, 학교 늘리기였기 때문에 지방 수령에게 항상 당부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당연히 수령들은 인구를 부풀려서 보고했고 허위로 과장된 보고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의 인구도 고작 십여 만 명 정도였다.
서울에서 수원 화성까지는 백 리 길이 넘는다. 한강을 건너려면 큰 배 36척이 동원되어 어려운 배다리를 만들어야 했다. 배 가진 사람들의 원성과 고달픔이 하늘을 찔렀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다.
또 지름길은 노량진인데 강을 건너 과천을 거치는 것이지만 대신들의 건의가 있었다. 정조의 부친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인데 당시 그 죽음에 찬동했던 역적 김상로의 형 김야로의 무덤이 과천에 있으므로 그 길을 피하여 더 먼 금천과 안양을 잇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그 건의를 받아들였다.
행차는 단순히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팎에는 번잡한 일이 수없이 발생한다. 나무 다리였던 안양 만안교를 돌다리로 개축하는 일, 그리고 중간에 왕이 숙박해야 하니 시흥에 행궁을 새로 지었다. 길을 닦느라 인근 백성들이 총동원되었다. 왕의 행차라 행군도 하루 4, 5십 리가 고작이었으니 초봄 추위에 수행하고 호위하는 무리들의 고생이 오죽했을까.
조선에서 그래도 평판이 그리 나쁘지 읺은 개혁군주 정조가 그러할진데 다른 왕은 보나마나다. 동우너 군사가 적을 때는 1천여 명, 많으면 5천여 명이 동원되었다. 결국 수원에 전략,전술적으로 중요한 험난한 요새도 아니요 그냥 호화 성곽이라고 할 만한 화성까지 신축했다. 당시에 국방상 그런 성을 수원에 신축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모양만 화려했지 남공불락의 성도 아니요 화려하기만 했던 성이다. 수원에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여 그 성을 신축하였으니 국고가 탕진되었음은 분명하다. 영조가 지독하고 알뜰하게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비축해 놓았던 많은 국고를 그때 대부분 다 사용하였다. 효심이 우선이었고 백성들은 차선이었다. 조선은 이러한 허례와 허식으로 병들어 갔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얼굴 성형에 거액을 투자하고 명품 옷에, 가방에, 신발에, 외제차에, 큰 집에, 자기과시에 헛돈을 사용하는 것도 가정을 병들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정조는 수원에 행궁을 지어놓고 11년 사이에 12차례나 내왕했는데 매년 한 번 이상 다녀온 셈이다. 가서 제사를 모시면서 통곡하기 때문에 신하들이 놀라서 왕이 그러면 안 된다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고 한다.
축성공사가 한창이던 중 정조는 돌연 공사를 접을 뜻을 내비쳤다. 흉년에 백성들을 괴롭히고 국고를 소진한다는 뉘우침이 든 것이다. 그러나 웬 걸 대신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그 공사 때문에 먹고사는 백성이 많은 데 공사를 중단하고 그들을 돌려보내면 모두 굶어 죽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신들이 완강하게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공사는 그대로 계속되었다.
광해군도 생모의 묘에 참배하기 위하여 행차했을 때 양주까지 가기 위해 한 달여 전부터 논의가 벌어졌다. 가는 길이 좋지 못하여 그것을 보수하고 산 위에서 아래까지 참배로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추운 겨울이라 공사 중 얼어 죽는 사람도 생겼다. 그런 텃에 광해군은 생모의 묘에도 두 번밖에 가 볼 수가 없었다.
왕들은 대궐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정도의 거리인 종묘에 행차한는 데도 그런 식으로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왕이 개인적으로 시킨 것도 아니다. 모두가 왕실의 법도라는 것이 엄정하여 그에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궐을 나서기 바쁘게 그렇게 번잡을 떤 것은 결국 중국의 법도를 베껴온 때문이다. 그 광활한 땅에서 지역 간에 전쟁이 밥 먹듯 일어나고 있던 나라의 규정을 그대로 이 좁은 땅에 적용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귀환한 외규장각 의궤라는 것도 그런 대궐의 복잡한 행사 규범을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고서적 자체로는 중요하지만 번잡한 허례허식 내용까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의 이런 행사용 절차 못지않게 번잡한 기록물이 각 종교 단체의 제사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구양성경이다.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제사를 모실 때 갖춰야 할 각종 기물, 배치도, 크기, 차려놓을 음식 등이 상세히 적혀 있고 안치해 놓을 성소의 각종 설계도표가 꼼꼼히 나와 있고 손잡이는 몇 치 몇 푼이며 나무 재질은 무엇으로 해야 하고 제단에서 입구까지 거리는 몇 치로 하고 운반자들의 복장은 어떠해야 하고 몇 시에 출발하고 그런 식이다. 우리나라 제례 때 절차나 홍동백서로 표시되는 제례 음식상과 비슷하다. 누가 처음에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죽은 혼백이 시켰나? 이런 모든 것이 권위적인 종교 집단이나 사회일수록 규범이 엄정하고 복잡하며 번잡한 것이라는 점이다.
음식이란 먹기 좋게 배열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왜 그렇게 꼼꼼히 음식별로 놓는 위치까지 지정하여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쌍것인 양 멸시하고 비하하는 사회였다. 아마 앞으로는 제사가 없어지겠지만 죽은 혼백에게 지내는 제사도 허레허식이다. 죽은 뒤 번잡을 떨지 말고 평소 살아 계실때 잘 모시는 게 더 낳지 않을까? 유대인들처럼 조상들의 업적을 주변 나라 신화, 설화, 역사, 민속 등을 좀 차용해 와서 과장하고 부풀리더라도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의 역사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것이 차라리 낳을 것이다.
아마 정조도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그리며 효를 보여줄 심산으로 그런 행사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힘들어 하고 국고가 바닥나는 그런 행사를 삼가겠다거나 아니면 전시도 아니고 위험도 없는 시기라 수하 몇 사람만 데리고 조촐하게 다녀올 수도 있으련만 그런 변동은 일어나지 않앗다. 조선의 국력 대부분은 이런 허례허식에 소진되었던 것이다.
왕족의 탄생에서부터 생일, 왕세자의 학교 입학, 졸업, 혼례, 장례 등은 물론 심지어 조선의 상국인 중국의 황제 생일을 맞아 우리끼리 올리는 각종 행사, 때만되면 크고 작은 제사와 행사를 일일이 거론할 수가 없다.
제사와 행사로 날이 새고 해가 진다
인조의 장례 절차에 5개월 걸려
우리나라가 세계 제일인 것은 이런 허세적인 행사와 예절일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해괴제라는 좀 웃기는 제사가 있었다. 기이한 자연현상이 벌어지면 하늘에 제사를 올려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관습인데 예조에서 단골로 올리는 제사가 이 해괴제였다. 그 내용을 지금 보면 일종의 코미디다.
동북면 길주에서 돌이 울어서, 금성이 낮에 나타나서, 삼사동 구리정에서 맷돌 가는 소리가 들려서, 큰 비가 와서, 큰 돌이 움직여서, 부엉이가 울어서, 꿩이 나타나서, 수탉이 암탉으로 변해서, 머리 둘이 달린 송아지가 태어나서, 대개 이런 식이다.
왕에게 보고가 올라가고 지방에서는 예조가 행촉과 제물을 보내 수령이 제를 올리고 대궐 안의 제사는 예조가 주관이 되어 모셨다.
대궐 안에 부엉이가 들어오면 불길하다 하여 모셨고 밥상 위의 인기 품목인 꿩이 대궐 안에 날아들면 빼지 않고 제사를 모셨다. 꿩이 무수하게 날아들어 왔기 때문에 해괴제의 태반은 꿩이 원인이었다.
나중에 한 대신이 꿩은 대궐 뒷산에서 날아오는 게 당연한데 제사를 모실 필요가 있느냐고 건의하자 드디어 세종이 꿩을 제외시켰다.
병에 걸려도 모시고, 자식이 없어도 모시고, 흉년이 들어도 모시고, 장마가 들어도, 도적이 들어도 모셨으니 조선은 제사의 천국이었다. 무당과 점쟁이가 대궐 안에 상주하다시피 했고 일기예보를 하기 위해 오늘날의 천문대격인 관상감에는 소경 점쟁이를 정식 관헌으로 채용했다. 이들은 주역으로 일기예보를 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다.
<국조오례의>라는 서적은 이러한 조선의 각종 예법을 규정해놓은 책인데 모두 8권 8책으로 되어 있다. 그중 집안 제사인 가례만 해도 모두 50개조로 되어 있을 만큼 복잡하다. 예조라는 부서는 과거와 학교, 외국사신 영접을 담당하지만 진짜 주 업무는 이런 각종 제사였다.
<국조오례의>는 세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성종 때 신숙주 등이 완성했는데 여기에는 모든 시향 절차도 포함되어 있다. 국가에서 올리는 제사로는, 종국 황제에게 올리는 망궐례, 산천에 올리는 경우, 종묘사직에 올리는 경우, 선옹제, 기우제, 석전제 등이 대표적이다.
장례절차야 말로 조선 관료 행사의 클라리막스라 할 만하다. 흉례라고도 하는 장례의 복잡성은 <오례의>에서 모두 91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복, 삭망, 발인, 발우 등으로 이어지는데 세계를 통틀어 으뜸으로 번잡하다.
인조는 1649년 5월 8일 재위 27년 만에 승하했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철 내내 대궐 안에 석 달 열흘이 넘도록 시신이 부패한 채 안치되어 있다가 9월 11일에야 발인이 이뤄지고 모지인 장릉에 묻힌 것이 9월 20일이다.
우선 능을 선정해야 한다.
좌의정 심지원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능 터를 잡기 위해 사방을 뒤지고 그 결과 보고를 가지고 날마다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첨지 윤선도는 산행을 가는 데 성의가 없고 뒤에 앉아 건방지게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니다는 식의 타령만 한다는 보고가 올라가자 결국 파직을 당하고 귀양을 갔다. 거의 날마나 능에 대한 토론이 벌어져 그곳은 안 좋고 이 곳도 안좋고 해가면서 올라온 보고서가 반려되었다. 당시의 대신들은 풍수에 대한 식견이 대단하여 회의 내용을 보면 풍수지관 회의처럼 되어 있다. 왕까지 가세하여 의견을 내놓는데 두어 달간 논란 끝에 어렵사리 능 자리가 정해지면 이제는 다시 거창한 산역을 벌여야 한다.
그동안에도 궐내의 시신에 하루도 빠짐없이 조석전을 올리고 참배가 이뤄지며 제사가 거듭되는 가운데 효종이 병이 나고 말았다.
이 5개월의 장례 기간 동안 일반 국사가 제대로 집행되었을 리가 없다. 왕의 복색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발인 절차를 두고 벌이는 다툼, 즉 <오례의>대로 해야 한다는 측과 그건 너무 번잡하므로 다소 생략해야 한다는 측의 설전이 벌어진다. 대표적인 예가 효종이 죽고 난 뒤에 벌어진 '예송논쟁'이다.
<오례의>에는 발인 당일 궁문과 성문, 모든 교량에 제사를 모시라고 되어 있다. 종묘 등 50개 신위에도 각가가 제사를 모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너무 무리하므로 궁문과 큰 다리에만 올리게 하소서"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효종은 얼른 이를 허락했다.
산릉을 조성하는 일도 모두 민간인을 동원하는 것이 원칙인데 일꾼들이 도망치는 사례가 빈번하여 자수를 받고 용서해주자는 건의가 올라오기도 했으니 도망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이 간다. 또 동원될 기미가 보이면 백성들이 행방을 감춰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현종 조에는 승군 1천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강제 소집된 승군들 역시 불만이어서 막사를 불태우고 도망가 버리고 늙은 중들만 남아 있었다. 신하들이 왕에게 고하여 관련자 가족까지 잡아 처벌하였다.
형세가 이러할진데 왕의 죽음에 백성들이 곡하고 슬퍼 하였다는 것은 서울 사대부들의 임무였을 뿐이다.
전국 각지의 모든 수령들이 집무를 중단하고 천 리 길 서울로 올라와서 곡을 하는 것도 정해진 규정이다. 이 때문에 예조에서는 올라오지 못한 관헌들을 조사하여 처벌하는 등 번잡을 떨었다.
이런 소란을 벌인 끝에 능이 조성되고 간신히 발인을 해도 능에 도착하여 관을 내릴 때까지 또 열흘이나 걸린다. 가는 도중에 도처에서 노제를 올리고 현장에서도 각종 제사가 또 꼬리를 물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효종은 장례현장에 참석하려 했지만 건강을 염려한 대신들의 반대로 단념하고 가져 온 신주를 성 밖에서 맞이했다.
영사전에 별전이 모셔지고 칠우제까지 모셔지며 다시 졸곡제가 모셔진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 조문 사절이 와서 동향대제를 모시는 데 참석해야 하고 그 사신들을 접대해야 한다. 거의 한 해 내내 대궐의 주 업무는 장례에 관한 것이 되고 만다.
그동안 궁 사람들의 고초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거기 들어가는 엄청난 음식, 제기, 의복 등의 비용과 백성들의 피해는 말해 무엇할 것인가.
왕만 장례를 치르는 것이 아니다. 왕비, 왕세자, 왕자, 공주, 옹주, 왕비의 부모, 왕세자빈의 부모 등도 그와 똑 같지는 않아도 엇비슷한 절차를 거쳐 장례를 치른다. 3년상, 1년상, 9개월상, 6개월상 등 상복을 입는 것도 직위와 품계에 따라 달라진다. 장자냐 차자냐 삼자냐에 따라 달라진다. 효종이 죽자 효종이 소현세자 대신에 차자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장자로 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할 것인가를 두고 벌인 논쟁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인조의 장례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사신 대여가 나가는 도중 능을 얼마 앞둔 지점에서 상여대가 부러져 버렸다. 급히 임시변통을 하여 도착하였으나 보고가 올라가자 효종이 대노했다.
상여대의 나무에 흠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것을 사전에 찿아내지 못했다 해서 만든 사람, 감독관은 물론이고 국장도감의 총 책임자인 제조까지도 하옥되고 말았다.
이런 내용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왕의 복식 하나를 가지고 내내 다투고 사신 접대 형식을 가지고 벌이는 논쟁, 기우제를 올리는 문제로 벌어지는 격렬한 논쟁 등 행사와 예법 문제로 벌이는 갈등만 무수하게 남아 있고 절실한 민생을 가지고 다투는 논쟁은 거의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국화에서 여야가 벌이는 대부분의 논쟁과 갈등도 민생보다는 당을 위한, 집권을 위한, 명분을 위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조선 5백년 내내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고 전염병, 수해, 가뭄, 지진 등으로 언제나 곤궁하게 살아왔다. 그런 시절에 왕조는 이런 행사에 온 국력을 쏟아 붓고 있었으며 그것을 간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장레가 치루어졌지만 제사 또한 엄중하여 왕들에 대한 제사나 능 참배가 중대한 행사였다. 능 참배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파직되었다.
조선이 처음부터 이런 행사나 제사에 열중한 나라가 아니었다. 태조의 장남 이방우가 죽었을 때 대궐은 3일 동안 조회가 정지되었고 죽은 다음 날 신하들이 조문을 했지만 그다음 날 장례 행렬이 궁을 떠났다. 오늘날의 3일장을 치른 것이다. 태조가 죽었을 때는 100일 남짓 궁 안에 있다가 영구가 떠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왕을 제외하고는 왕자라 하더라도 3일장에 그친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점점 제사와 장례 절차가 까다롭게 변질되었고 그런 허례허식이 조정의 중요 업무로 자리메김 한 것이다. 명분과 가식에 멍든 나라가 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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