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50.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포도를 많이 먹고 혼난 임금

구름위 2023. 4. 15.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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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포도를 많이 먹고 혼난 임금 

 

영조는 양반들을 멸시한 왕이다. 그의 생모는 슥종 시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제치고 후궁으로 최후의 승자가 된 천민 출신의 숙빈 최씨다. 숙빈 최씨는 7세에 주로 부억 설거지 등을 하는 무수리로 궁에 들어왔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된 여인이다.

 

 훗날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조졸하고 뒤이어 영조가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영조는 그의 생모를 위한 추모각을 세우고자 했으나 대신들이 신분이 되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천민을 위한 추모각이란 당치도 않는 일이라고 했다.

 

몇 번을 말해도 들어주지 않자 영조는 왕위에서 떠나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대신들이 만류하자 그는 내뱉었다.

"조선은 양반들의 나라가 아닌가. 당신들 양반들이 잘 알아서 해보시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왕이 그런 소리를 했겠는가.

 

조선은 사간원이라는 부서를 만들어 놓고 항상 왕의 약점을 파헤쳤다.

 

효종이 세자궁 앞의 작은 연못을 고치자 사간원에서 즉각 달려와서 궁안에서 이런 낭비를 해도 되느냐고 따졌다. 효종은 기분이 나빠 새로 연못을 판 것이 아니라 허물어진 석벽을 고친 것뿐이며 세자가 그런 연못을 보며 심성을 가다듬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반문하고 있다.

 

1546년 명종 1년 3월. 석강에서  임호신이 가로되,

"임금이 만약 자기 자신을 성인이라 자처하면서 간언을 듣지 않는다면 누가 직언을 하려 할 것입니까. 상께서도 잠시라도 간관의 직언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이에 따르셔야 합니다." (명종실록 1년 3월 10일)

 

마치 아랫사람 훈게하는 듯하다. 왕이 11세였으니 그 앞에서 쩔쩔맸을 정경이 떠 오른다.

 

1729년 영조 5년. 작년에 대궐에서 포도를 많이 들여갔는데 너무 과하다며 호조에서 상소하고 있다. 영조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성종은 가뭄이들자 음식상의 반찬 가지수를 줄이고 밥을 물에 말아 먹었다. 모두 시킨대로 한 것이다.

 

1517년 중종 12년에 올라온 대사간 이성동의 상소는 젊은 왕을 대하는 대신들의 언사를 짐작케 해준다. 그 당시는 겨울인데도 지진, 천둥, 무지개, 꽃이 피는 등 자잘한 사건이 이어졌다. 이성동은 상소를 통해 이 모든 것은 하늘의 분노이며 원인은 오로지 임금이 잘못한 데 있는 것이라 공박하고 있다.

 

"전하는 지난 잘못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오는 장래를 삼가시며, 도학에 힘써 몸을 닦고 오를 밝혀 국사를 정하시며, 큰 뜻을 세워 제왕의 정치를 회복하소서.

 

어진 이를 좋아하며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도량을 더 넓혀야 하며 신하들의 직언과 정론에 귀를 기울이소서.

 

더구나 깊은 궁궐에 들어 앉아만 있고 조정에 나와 정무를 보는 일을 게을리 하며, 정치상의 번다한 일을 오직 보고서 읽는 것으로만 그치며 오가는 모든 중임을 환관에게 맡겨서야 되겟습니까?

 

이래서는 당하의 거리가 천리나 멀게 될 뿐 아니라 현무하고 참구하는 변이 반드시 측근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고 나라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환을 끝내 구제할 수가 없게 될 터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중종실록 12년 12월 15일)

 

거의 협박에 가까운 내용이다.

 

조선의 왕을 상감이라 호칭했다. 대신들은 대감이고 왕은 상감이니 자신들보다 직책이 하나 더 높다는 의미다. 상감이라는 호칭을 줄여 상이라고도 불렀다. 모든 책임을 상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모두 상의 부덕함 때문이라는 것이 사대부들의 생각이었고 태도이며 자세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토색질을 하면서 뇌물을 수수하고 매관매직을 저지르며 재물로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렸다.

 

조선을 통틀어 왕이 기세를 펴고 왕권통치를 펼친 시대는 불과 몇 대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대부분은 왕보다도 신하들의 힘이 더 센 신권통치 시대였다.

 

태조는 아침 조회를 할 때 몇 달씩이나 서서 말을 하고 들엇다. 나이 어린이나 출생에 약점이 있는 왕들은 재위기간 동안 내내 기를 펴지 못했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국역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지 않지만 왕의 답변은 언제나 공손하고 신하들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 신하들의 지적에 오아은 걸핏하면 사과를 했다.

'조심하겠습니다.' '잘못한 거 같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 학자들은 왕권을 견제하기 이한 아주 좋은 관행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왕권이 거의 없는 나라였는 데도 말이다.

 

틈만 나면 신하들은 왕의 잘못이 크다고 호통을 쳤다. 가뭄이 들어도 가장 큰 잘못은 왕의 부덕이다. 그러니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검소와 겸양을 실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작 그들은 수시로 경치 좋은 강가나 호수 가 정자에 모여 기생과 더불어 산해진미에 호의호식을 즐겼다.

 

모든 것을 왕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가 도처에 시신이 깔려 있다는 보고를 들으면 왕은 눈물을 흘리지만 대신들이 눈물을 흘리는 대신들은 없었다는 기록이다. 열다섯 살, 일일곱 살 어린 왕에게 대신들이 고갯짓을 하며 호통을 쳐대지만 왕은 꼼짝도 못하고 대꾸 한마디 변변히 내놓지 못한다.

 

1517년 중종 12년 8월 8일.

 

아침 공부 시간인 조강에서 강사의 한 사람인 조광조의 언행을 보면 중종의 처지가 실로 딱하게 보인다. 당시 조광조는 왕에게 강연하는 경연청의 시독관으로 6품의 당하관 신분이었다. 6품이면 대궐에서는 말직에 속한다.

 

종종은 당시 24세. 연산군을 몰아낸 쿠테타로 18세 때 졸지에 왕으로 추대되었고 반정 공신들이 실권을 잡고 있는지라 당연히 기를 펴지 못했다. 그리고 경연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에도 세 차례씩 신하들의 강의를 들어야 했다. 한마디로 경연이란 왕을 길들이는 제도였다.

 

30세 말직의 조광조는 그날 마주 앉은 왕의 자세를 나무랐다.

 

"궁 안에서 한가할 때라도 잠시도 긴장을 놓치지 말고 단정히 앉아 있으라고 주의를 줬으며 전날 글을 읽을 때 더덤거렸는데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장황하게 왕에게 설교를 하고 있다. 여러 신하가 둘러 앉아 있는 곳에서 이렇게 왕에게 핏잔을 주니 중종의 마음 속이 편할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조광조를 버린 것이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날 정광필과 더불어 조광조의 장황한 설교는 <실록>에서도 드물게 길어서 마치 부모가 어린 아들을 훈계하는 듯하다. 대꾸도 변변히 못한 채 신하들에게 그런 공박을 듣고 앉아  있던 중종의 딱한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