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의 고리, 양반 - 기생 - 아전
관헌들은 어떤 방법으로 돈을 긁어 모았는가.
수령 자신이 직접 돈을 챙길 수는 없는 것이니, 가장 흔한 것은 속칭 '합부인'을 시켜 돈을 받았다. 합부인이란 첩의 높임 말이다. 합은 양반집 대문에 들어서면 양쪽에 있는 문간방을 말한다. 그러므로 대문의 문간방에 둔 첩이 곧 합부인이다.
원래 대궐의 등급은 임금과 왕비가 사용하는 '전', 왕자들의 공간 '당', 대원군과 후궁들의 처소인 '합', 신하들의 업무공간인 '각'으로 나눠지는데 그것이 내려오면서 합부인이 고관들의 첩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관찰사나 수령들에게는 반드시 합부인이 있어 뇌물을 챙기는 일을 주로 맡았다. 한번 암행어사가 오는 날에는 일망타진되어 여러 고을 수령 합부인들이 감옥을 가득 메웠다. 그 당시의 풍경이다.
고종 때 안동 김씨 우두머리였던 김좌근에게도 합부인이 있었는데, 나주기생 출신이라 세상 사람들이 '나합'이라 불렀다. 김좌근이 지방 수령의 임명권을 혼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나합에게 가서 뇌물을 바쳐야 그 액수 여하에 따라 발령이 났다. 그래서 나합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그 집에는 '약채전'이라는 궤짝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지방 수령들이 세도가에게 상납했던 돈이 가득했다고 한다.
철종이 죽고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들어서자 사태는 역전되어 안동 김씨 일족은 관직에서 쫓겨나 낙도 등으로 유배를 가거나 사약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김병국은 대원군과의 전날의 인연도 있고 해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고 대원군이 사는 운현궁으로 찿아 갔다.
"살려주시오"라고 애걸하며 김병기가 매달리자,
대원군이 김병국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넌지시 물었다.
"당신 지금 백만 냥 있소?"라고 물었다.
대원구늬 이 말에 김병국은 지체없이
"네 물론입쇼"라며 얼른 대원군에게 백만 냥이나 되는 돈을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김병국은 살아 남게 되었고, 대원군이 이 돈을 받아다가 다시 조대비에게 바쳤다.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게 해준 데 대한 보답이랄까? 이처럼 대원군은 겉으로는 내정을 개혁하는 것으로 소문 났지만 뒤로는 뇌물을 챙겨 그의 사저 운현궁을 넓히고 지방에서 약채전을 갖고 올라오는 사람들로 운현궁은 온종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물론 대원군이 서원을 철페하는 등 전혀 개혁을 실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뒤로는 이런 뇌물을 챙겼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민비와 결혼한 고종이 민비와 같이 뇌물을 즐겼다고 하니 위로부터의 부패는 조선 천지를 진동하고 남았고 지방 수령들도 덩달아 부패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권력의 주인만 바뀐 것이지 백성들에게 수탈과 가난한 삶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결과 발발한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지금 남아 있는 운현궁은 처음 규모보다 3분지 1도 안된다. 대궐보다도 더 호화로웠다고 하니 정권을 잡자마자 우선 자신의 집부터 늘렸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물론 자신이 아니라 조대비의 지시로 그런 것이지만 본인이 고사했다면 이뤄질리가 없다. 대원군의 운현궁은 근처의 집들을 허물고 터를 끌여들여 대궐로 직접 이어지는 통로를 내기도 했으니 엄청난 규모와 호사를 짐작할 만하다. 안동 김씨들의 재물을 몽땅 빼앗아 결국은 자신의 재물을 늘리고 조대비에게 상납하는 모양새였다. 결국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 시대나 대원군 시대나 뇌물정치가 오십보 백보였던 셈이다. 이에 나중에는 민비를 포함하여 고종까지 뇌물에 재미를 붙여 매관매직은 물론 민씨 일족들이 조선 최고의 자리라는 평양감사 자리를 거의 독차지 했으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조선은 대원군, 민비의 권력 투쟁으로 멍들기도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러한 매관매직, 뇌물 챙기기로 백성들은 더욱 토탄에 빠졌고 망국의 길로 열심히 가고 있었던 셈이다.
역모 관련자들이나 당파 싸움 관련자들에게 비하면 탐관오리들의 처벌은 솜방망이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그것이 관례화 되어 있던 사회라 처벌을 강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재계 총수들이 불법과 탈법을 저질러도 솜방망이 처벌로 대부분 풀려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치인 치고 후원금이라는 명목으로 재벌에게 돈을 받지 않은 정치인이 없고 법조계가 온통 재벌들의 돈을 먹은 벙어리들이 법을 마음대로 적용하다보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매관매직과 뇌물정치는 청렴과 청렴을 강조하는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겉으로는 그런척 하면서도 안으로는 누구나 재물에 대한 탐욕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탐욕 본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원히 변치 않고 흘러내려오고 있다.
고종 시대 당시 백낙신의 경우만 해도 엄청난 금액을 횡령했는데도 그는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1년 후에 귀향하였고, 3년 만에 다시 해군부대장격인 영종도 절제사로 부임했다. 완전 사면되어 다시 복귀한 셈이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경기도 중군으로 승진했고 그 뒤로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했다. 이런 승진이 모두 다 그가 가진 돈 덕분이었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고 있지만, 최근까지 우리나라 정치계나 군대도 조선 시대 당시와 비슷하다. 진급 심사시 엄격한 심사를 한다지만 어느정도 자격만 갖추고 있다면 중령 이상은 경력이 동기생끼리는 거의 도토리 키재기다. 그래서 인사담당자, 진급 담당자, 그리고 상급자에게 뇌물 공세로 장군까지 진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뇌물 진급은 육.해.공군을 가리지 않았고 출신과 병종을 초월하여 벌어진 일이다. 특히 보급, 정비, 공병, 경리, 통신 등의 병과, 즉 물자와 예산을 취급하는 병과에 문제가 항상 터졌다. 그들이 진급하기 위해서 상급자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면 청렴하던 보병, 포병, 기갑 장군들도 점차 뇌물에 물들게 된다. 특히 사단장은 사당편제상 제 병과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사단장의 성격이 강직하면 사단장 마누라를 공략하면 백발백중에 넘어오게 된다. 그동안 청렴한 남편 때문에 제대로 여유를 갖지 못하던 사단장 마누라는 처음에는 거절하는 척 하다가 한번 맛들이면 눈빛이 달라진다. 그래서 때가 되거나 주기적으로 뇌물을 갖다 바치고 서울 숙소까지 찿아가 식모처럼 일하는 것은 물론 집안에 필요한 비싼 전자제품, 가구를 주문하여 교체하거나, 같이 고급 백화점으로 가서 명품 옷, 가방, 신발, 패물 등을 선물하면 그 부인을 친동생 이상으로 챙기며 평생을 잊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사단장 마누라가 이불속 송사로 사단장에게 보고하면 사단장은 그 장교에 대해서 공과를 떠나 후한 평정을 주고 나중에는 다른 부대로 전출가면 그 장교도 요청하여 데리고 가고 그 장교의 보직이나 진급을 위해 육본이나 국방부을 다니며 동분서주 할 정도가 된다. 또 대령에서 장군, 장군에서 장군 진급시에는 정치적인 빽이 이용되는 데 청와대, 국회의원 등 정치권 실세들를 이용하여 진급을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여당 실세를 빽으로 둔 장군은 거의 받아논 밥상이나 마찬가지다. 과거 나중에 사건이 터져 물의를 빚었지만 해.공군의 경우 장군이 되려면 최소 1억을 상납해야 진급이 가능했다.
육.해.공군의 각군의 진급 문제는 각군 본부의 참모총장이 전권을 가지고 있다. 인사, 보직, 평정, 심사 등 장교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군은 북쪽 전방의 적을 바라보고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대전 계룡대 육군본부 참모총장을 바라보고 근무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각군 본부의 인사 담당자의 경우 병과별로 있는데 장교들이 자신의 인사, 보직을 위해 개별적으로 수많은 장교들이 각군 본부를 들락거리고 밤에는 몰래 담당자를 찿아가서 봉투를 내밀거나 뇌물을 건네고 보직을 부여 받아 유리한 부대로 전출을 가곤 하였다. 또 일부 돈을 가진 장교는 육군본부 인사.보직.진급과의 사병을 돈으로 매수하여 진금 심사 관련 동향을 매일 일일이 상황을 보고 받고 핵심 인사 담당자들에게 거액의 뇌물로 공세하고 병과별로 할당되던 공석을 결정하는데 자신에게 유리하게 공석 확보 전략은 물론 자신의 상급자인 장군은 물론 진급 관련 핵심 장군들에게 뇌물 공세로 진급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는 병과에서 장군까지 진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 후배들이 그 사람의 근무 태도와 성향을 잘 알고 있어 누가 진급 될 것인가를 점치지만 비전투병과로 갈수록 그 점치는 것이 대부분 틀리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비리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 진급한 사람들이 부대장으로 부임하면 부대관리비를 보통 횡령하는 것은 물론 사기 진작비, 차량 유지비, 시설 유지관리비, 각종 훈련 관련 예산, 매점 및 식당 운영비와 그 이익금, 소, 돼지, 채소 등 부대 영농 이익금 등을 횡령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군원이 중단되고 국방 예산 제한으로 상부에서 부대운영비를 지급하지 못하니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도록 지휘관들에게 음성적으로 허용하였고 그것이 관례화 되어 있었다. 그래서 건물은 허물어지고 장비와 차량은 수시로 고장이 나서 곳곳에서 대형 사고를 일으키고 병사들은 보리밥에 시라기국으로 겨우 허기를 매우며 군대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다시 조선 시대로 돌아가서,
당시 성균관의 유생들은 모두 초시나 진사시 등 즉 과거 1차 시험에 합격하고 대과를 준비하고 있는 사관생도나 마찬가지였다. 순수하고 강직하며 열정에 가득차 있는 조선의 엘리트들의 총 집합처인 것이다.
그들은 평상시에도 양반 자제들인지라 짚신까지는 안 신었고 모시나 삼으로 만든 미투리를 신었다. 말은 당연히 안 타고 평범한 옷을 입었다. 관직도 없는 처지에 말을 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쫑 때 기록을 보면 그들 거의 모두가 살찐 말을 탈 수가 있었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으며 대관들이 신는 목화나 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고 다녔으며 책을 끼고 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이런 자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갔을 때 어떻게 되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방 수령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전최'라는 지방 수령 평가제도가 있었다. '전'은 하, '최'는 상을 의미한다. 즉 지방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들에게 1년에 두 번 관내 각 수령들의 근무실적을 조사하여 성적을 중앙에 보고한 것인데 이 제도가 무용지물이 되어 모두가 '최'로 올렸다. 이유는 뻔하다. 수령들이 관찰사에게 잘 봐달라고 뇌물을 바쳤고 관찰사는 뇌물을 챙기고 또 일가친척이라는 이유로 그 성적을 '전'으로 메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최제도가 잘운영되지 않아서 암행어사가 나왔다. 이것도 처음에는 제법 실효를 거두었으나 나중에는 이것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사간원에서 상소가 하나 올라왔다. 사간 이단석이 아뢰기를,
"작년 가을에 전라감사 김징이 그의 모친을 이해 회갑연 잔치를 베풀었는데, 온 도의 재력을 고갈시켜 풍성하게 준비했고 두루 영남의 수령들에게까지 구걸했으니, 지위를 빙자하여 탐욕을 부린 짓이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잔치하는 날의 행사가 지극히 사치스러웠는데, 또한 도내 수십 명의 수령들로 하여금 모친을 향해 뜰에서 엎드려 절을 하게 했으니, 관리들에게 치욕을 심어 준 것입니다. 흉년으로 재정이 고갈된 때를 만나 진상하는 짓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실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소서."
또 영광군수 홍석기를 탄핵하기를,
"김징이 잔치를 열었을 때 도내의 병사, 수사 및 각 고을의 수령들을 모두 불렀는데 감영에 모인 수령이 무려 30여 명에 이르렀고, 비단과 선물 상자를 실은 말이 혼잡스러웠습니다. 그중에서도 영광군수 홍석기는 가져온 것이 너무 많았고 그 밖에 아첨을 부린 자취도 매우 놀라웠습니다. 파직하소서."
또 금산군수 정재후를 탄핵하기를,
"대청에 올라가 헌수하는 것이 물론 잔치라는 자리에서 일반적인 절차이지만, 뜰에서 절하고 끓어앉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곧 하인들이나 하는 예로서 이를 행한 자도 수치스런 일이고 이 예를 받은 자도 분수에 어두운 것입니다. 이번 호남의 수령들은 그 잔치 자리에서 염치를 아는 약간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주렴을 향하여 술잔을 올렸으며 뜰에 엎드려 몸을 굽히고 굽실거렸으며, 아첨을 부린 실상이 실로 놀랐습니다. 많은 수령들을 일시에 논죄하여 다스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남쪽에서 올라온 인사들이 전하는 말로는 , 정재후가 가장 앞장섰다 하니 피직시키소서."
또 전라 우수사 이간을 탄핵하기를,
" 이간은 부안의 전투선을 살피러 왔다는 핑계로 감영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였고, 돈을 바치고 와서는 뜰에서 절하였습니다. 군 지휘관의 몸으로 하인들과 같은 짓을 하였으니, 아무리 무식하다고 하여 덮어둘 수는 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
이에 왕이 모두 윤허하였다. (<현종실록> 11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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